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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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작가들

김사량, 일본 제국과 식민지 그리고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곽형덕

▲ 사가고등학교 시절 김사량 (출처: 필자 제공)

  김사량(金史良, 본명 김시창(金時昌), 1914-1950)은 평양에서 태어나 조선 문단과 일본 문단 양쪽에서 활동했던 작가다. 이와 같은 이력으로 재일조선인 문학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그였지만 피식민자의 후예라는 울분은 삶 자체를 뒤흔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 재학 시절이었던 1931년 학내 배속 장교 및 교사에 대한 배척 운동을 하다 퇴학을 당한다. 다음 해인 1932년 말,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학생이었던 친형 김시명(金時明)의 도움으로 일본 사가고등학교(佐賀高等學校)에 입학(1933)했다. 김사량의 초기 창작에 커다란 전기가 찾아오는 것은 1934년이다. 이 무렵부터 그는 비참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조선어와 일본어로 쓰기 시작했다. 조선어로 쓴 르포인 「(학생통신) 산사음(山寺吟)」(《조선일보》, 1934)과 「산곡의 수첩―강원도(江原道)에서」(《동아일보》, 1935)나 1934년에 초고를 완성한 후 책상 서랍에 넣어버렸다고 하는 일본어 소설 「토성랑(土城廊)」이 대표적이다.
  사가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사량은 1936년에 도쿄제국대학 독문과에 진학해 독일문학 전반에 대한 소양을 깊이 쌓았을 뿐만 아니라, 밀려들어오는 파시즘을 저지한다는 의미를 담은 동인지 《제방(堤防)》(1936.6-1937.6, 제5호로 폐간)을 학우들과 함께 발간하며 작가의 길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1939년, 김사량은 창씨개명과 조선인 차별 문제를 쓴 「빛 속으로(光の中に)」(《문예수도》, 1939.10)가 제10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에 선정되면서 화려하게 일본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그는 일본 문단에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과 차별받는 재일조선인의 삶과 관련된 소설을 차례차례 발표했다. 일본 문단 데뷔로부터 약 3년간 발표한 「빛 속으로」, 「천마(天馬)」(1940.6), 「풀숲 깊숙이(草深し)」(1940.7), 「무궁일가(無窮一家)」(1940.9), 「광명(光冥)」(1941.2), 「벌레(蟲)」(1941.7), 「십장꼽새(親方コブセ)」(1942.1)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김사량은 ‘태평양전쟁’ 개전 다음날인 1941년 12월 9일에 사상범예방구금법(思想犯予防拘禁法)을 명목으로 가마쿠라경찰서(鎌倉警察署)에 구금됐다. 이때 가마쿠라에 살고 있던 전향 작가 시마키 겐사쿠(島木健作) 등의 도움을 받아 다음 해 1월 말 석방된 후 강제 송환 형식으로 고향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1932년 말 일본으로 갔던 김사량의 10년에 걸친 일본 생활은 끝이 났다.
  1942년 이후 김사량은 고향 평양에 살면서 식민지 조선 문단에서 활동했다. 김사량은 1943년에서 1944년 말까지 조선어 장편소설 『태백산맥(太白山脈)』(《국민문학》, 1943.2-10)과 조선어 장편소설 『바다의 노래』(《매일신보》, 1943.12.14-1944.10.4)를 썼다. 두 작품 중 『바다의 노래』는 조선에서 해군특별지원병제도(海軍特別志願兵制度)가 실시된 후 김사량이 국민총력조선연맹(国民総力朝鮮連盟)에서 꾸린 해군견학단의 일원으로 조선 및 일본의 해군 기지를 견학(1943년 8월 28일 출발, 보름간의 일정)한 후에 창작된 소설이다. 『바다의 노래』에는 김사량의 고향인 평양의 풍속, 지리, 구전 시가, 방언 등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 『바다의 노래』의 화자는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을 교묘하게 그려서, 일본 제국이 내세운 대동아(大東亞)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중국 혁명을 지지한다. 재일조선인작가로 김사량을 자신의 문학적 전범으로 삼은 김석범(金石範)은 『바다의 노래』가 보이는 이러한 특징을 누구보다 일찍 간파해 이 작품을 김사량의 중국 망명으로의 도약대로 위치시켰다. 김사량은 『바다의 노래』를 연재하던 1944년 평양에 있는 대동공업전문학교(大東工業專門學校)에서 독일어 강사를 하면서 같은 해 6월부터 8월에 걸쳐서 중국에 갔으며, 7월 한 달 동안에는 상해에 있었다.
  김사량은 자신의 신변에 점차 압박을 가해오는 전시기(戰時其) 시국 협력에 막중한 부담을 느끼고 1945년 5월 8일 국민총력조선연맹병사후원부(国民総力朝鮮連盟兵士後援部)가 주도한 재지반도출신학병위문단(在支半島出身學兵慰問団)의 일원으로 약 한 달 반의 일정으로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위문을 마치고 5월 말 김사량은 ‘북경반점(北京飯店) 236호실’에 투숙하고 있다가 공작원과 접선한 후 태항산(太行山)에 있는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본진으로 탈출했다. 김사량은 태항산에서 종이 부족에 시달리면서 해방된 ‘조선’의 새로운 독자를 꿈꾸며 망명기인 『노마만리(駑馬萬里)』와 희곡 「호접(胡蝶)」을 집필했다. 이로써 김사량은 일제하 식민지 출신 작가로서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 해방 이전부터 조선어 창작의 길로 나아갔다. 하지만 해방 이후 남과 북이 대치되는 상황에서 ‘재북(在北)’ 작가 김사량은 출신 계급과 ‘연안파(延安派)’라는 제약(압박) 요소를 안고 분단돼 가는 조선의 현실에 맞서는 글쓰기를 해나갔다. ‘해방’ 후 고향 평양으로 돌아간 김사량은 그 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 노선에 입각한 문학 형식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그는 북한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인물상(장애를 가진 사람 등)을 입체적으로 드러내서 북한 문단의 비판에 직면했다. 이 약 5년에 걸쳐 북한에서 펼쳐진 김사량의 해방 후 창작 활동은 6·25 전쟁에 종군작가로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이후 북으로 후퇴하다 1950년 겨울 원주 부근에서 낙오한 후 행방불명(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설)되며 끝을 맞이했다.
  김사량의 삶과 문학은 일본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서 ‘빛’을 추구하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 했던 뚜렷한 지향점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빛’은 일제강점기에는 제국주의라는 어둠 속에서, 그리고 해방 후에는 북한 사회의 이데올로기 투쟁 속에서 위태롭게 빛났다. 김사량이 제국과 고향(식민지), 그리고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했던 고뇌와 좌절이 담긴 반식민주의적이며 반제국주의적인 지향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과 완전히 절연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김사량이 했던 것과 같은 고뇌와 좌절, 흥분과 우울 등을 겪으며 당대의 세계와 국가(사회)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을 꾸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사량 문학은 현재진행형이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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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문학 연구자 및 번역자로 명지대 일어일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김사량과 일제 말 식민지 문학』(2017)이 있고, 편역서로는 『대동아문학자대회 회의록』(2019), 『오키나와문학 선집』(2020)이 있다. 번역서로는 『일본풍토기』(김시종, 2022), 『무지개 새』(메도루마 슌, 2019), 『돼지의 보복』(마타요시 에이키, 2019),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아쿠타가와 류노스케, 2016), 『김사량, 작품과 연구』(전5권, 2008-2016)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