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title_text

디아스포라 깊이읽기

『소리』 송상옥

서승희

고국의 바깥에서 고국을 묻다:
송상옥의 『소리』(1987)

서승희(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가 어느 하늘 아래서 살건,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마음씨까지를 감출 수는 없다. 우리가 여기서 무슨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걸치고 있건, 그것들은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하지는 않는다.(송상옥, 《미주문학》 창간호 권두언)1)

1980년대 재미 한인의 서사들

  고국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자의 마음은 어떤 소리로 가득 차 있을까? 『소리』(1987)는 1980년대 재미 한인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고 있는 송상옥의 소설집이다. 1938년생인 송상옥은 1959년 등단한 후 조선일보사에 재직하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81년 불혹이 넘은 나이에 미국 이민을 감행한 작가이다. 그는 도미(渡美) 이후 《한국일보》 로스앤젤레스 지사에 근무하는 한편, 1982년 미주한국문인협회 창립과 《미주문학》 발간을 주도하는 등 재미 한인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으로서 평가된다.
  그가 이민 이후 간행한 첫 소설집이기도 한 『소리』는 대부분 1986년 한 해 동안2)《한국일보》 로스앤젤레스판 지면에 수록한3) 소설 2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인 독자들과의 소통에 목표를 두었을 이 소설들은 마치 작가 자신과 주변 친구의 이야기를 실제로 전해 듣는 느낌을 자아낸다. 호스트 국가 미국의 다인종 다민족 체제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전두환 정권하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심도 있게 개입하기보다는, 이민자의 소소한 일상과 감정적 메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집의 표제인 ‘소리’는 바로 이민자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과 이에 대한 반향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카 드림’의 세대론

  『소리』의 주인공들은 짧게는 5년, 길게는 20여 년 동안 미국 대도시에서의 이민 생활을 지속한 중장년층으로서,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이주한 세대에 속한다. 재외한인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참조해 보건대, 이 세대는 대부분 진학이나 직장 문제로 지방에서 서울 및 대도시로의 이동을 경험했으며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 직종에 종사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하여 이민 이후에도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경제 체제에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적응할 수 있었으며 핵가족 단위로 이민을 갔다는 점도 빠른 적응의 한 요인이었다고 분석된다.4) 말하자면 이들 중 상당수가 성공한 이민자에 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인이 된 이후에 이민을 떠난 화이트칼라들의 감정 지도는, 식민 지배나 전쟁 때문에 고국을 떠나야 했던 전 세대 이민자의 그것과 매우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해방되자마자 일본에서 무조건 귀환한 아버지(「두 번째 고국 방문」)가 강제된 이주를 경험했다면, 아들 세대에게 이주는 자발적 선택의 문제였으며 이른바 ‘아메리카 드림’으로 대변되는 희망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 본 백인들은 총과 대포와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었다. 어린 시절 6·25 때의 일이었다.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철이 들어서는 잔뜩 뽐내고 으스대는 외교관의 모습과, 뻔질뻔질한 장사꾼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을 때는 친절하고 관대한 주인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바람 소리」, 63쪽5)

  「바람 소리」에서 서술되듯이 냉전 체제하 남한에서 성장하며 아들들이 맞닥뜨린 외지 혹은 외국은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구의 군사적, 경제적 우위와 문화적 세련성을 경험하며 “그 때문에 든 바람”이야말로 미국 이민을 감행하게 한 최대 동력이었다. 이러한 성공은 주로 소설의 초점 화자가 아닌 주변인 혹은 친구의 성취로서 묘사된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유학길에 올랐다가 미국 회사에 취업해 성공한 K, 대학 졸업 후 잡화 상점을 하다가 베트남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 H, 사범대학 졸업 후 미국의 세일즈맨으로 일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성직자의 길을 밟게 된 J 등(「우리들의 날」) 재미 한인들이 역경 속에서 성취한 부와 안정, 그리고 평온한 가정생활은 당시 남한의 정치경제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색다른 것이 아닐 수 없다.
  『소리』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경우 사정이 다소 복잡하다. 이민자 여성은 누구도 진상을 알 수 없는 죽음을 홀로 맞이하는 타자이기도 하지만(「비 오는 날」, 「여름이 간 뒤」) 남편의 곁이 아닌 자기만의 길을 찾아 제3의 장소로 이동하는 단독성을 보이기도 한다(「회색의 풍경」, 「회색의 풍경 그 후」). 드물긴 해도 이와 같은 여성은 공간을 둘러싼 젠더 규범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살림과 노동을 모두 감당하는 슈퍼우먼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작가의 페르소나인 중장년 남성 인물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그들의 동반자로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당시 이민자의 젠더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해 준다.

고국과 이민자의 관계

  『소리』가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아메리카드림의 실현 유무와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중산층 이민 당사자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형상화했다는 점에 있다.

  돌이켜 보면 이것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걸까 할 정도로, 어처구니없게 보내온 나날, 진짜 자신과는 동떨어진 허깨비 같은 생활을 해온 것이다.
  5년이면 짧은 세월도 아닌데, 그는 아직도 이곳에 온 게 과연 잘한 일인지 어쩐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졌던 건 분명했다. 이 나라 전체가 온통 무지개 빛깔로 채색돼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지극히 짧은 한때에 지나지 않았다.―「정초(正初)에 온 손님」, 13쪽

  인용문에서 미국 이민 생활은 ‘허깨비’와 같은 것으로 풀이된다. 주인공은 언제나 석연치 않은 상태에 놓인 채, 한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귀국을 종용하는 친구의 믿음직한 목소리―“모든 일이 여의치 않거든 돌아와.”―는 그의 방황을 부추겼지만, 한편으로는 고국과 자신의 든든한 끈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반전은 그 친구가 “나도 미국에 와서 살고 싶은데 말이야, 방법이 없겠나?”라고, “얼마간 지쳐 있는” 얼굴로 질문하는 순간 생성된다. 친구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등의 실제적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제 나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는, 거의 절망에 가까운 기분”(「정초(正初)에 온 손님」, 17쪽)에 침잠해 가는 마음이야말로 소설의 중심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이분법적인 구도에 따른 마음의 문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모습을 바꾸어 곳곳에서 나타난다. 아이가 “우리말보다도 영어를 더 잘하게” 되면 “그때는 모든 것이 내게서 떠나가 버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서관에 가는 아이」, 20쪽)을 지우지 못하고, 불과 열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임에도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워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비 오는 날」) 등 소설 속 인간 군상들은 철저히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가지 항을 기준으로 삶의 면면을 해석하고 때로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이들 세대는 이민을 통해 삶의 형식을 바꾸었지만, 아니 바꾸었기 때문에 고국과의 관계를 개인적 아이덴티티를 결정짓는 절대적 조건으로 간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무언가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음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편이 한국말과 글을 쓰기보다 더욱 편하고 자유스러웠다는 것, 단지 그런 것처럼 여겨졌을 뿐, 그것은 그림자 또는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돋아나는 말」, 98쪽

  미국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아무런 모자람이 없다 할지라도 “헐벗은 나무/ 앙상한 가지마다/ 파란 새싹 돋아나듯/ 찾아드는 모국어(母國語)…….”와 같은 말들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이들은 고민에 잠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결국 나의 기원에 대한 탐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트랜스내셔널한 정체성과 실천은 적어도 이들 세대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뿌리 찾기-이민문학의 출발점

  「미스터 미우라」는 재미 한인이 아닌 재미 일본인을 통해 정체성 찾기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구제국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온 한국인이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재미 일본인 3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광경은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이물감 없이 재현된다. 과거의 식민지-제국 관계보다 아시아계 이민자로서의 공감대가 이 경우에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몰라서 엘에이의 리틀 도쿄에조차 가지 못하는 미스터 미우라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주위의 백인도, 흑인도 아닌 오직 ‘나’뿐이다. “잘 사는 내 나라”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귀환해서야 미우라는 “더할 나위 없는 마음 편함과 자유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답은 귀환뿐인가? 미국에서 태어난 미우라는 자기 분열을 일본 이민이라는 결단을 통해 해결했다. 그러나 『소리』에 등장하는 한국인들은 아메리카드림을 성취한 당사자로서 그 누구도 쉽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고국에서 잊히고 싶지 않고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일시 귀국을 실행할 뿐이다. 「첫 번째 고국 방문」과 「두 번째 고국 방문」은 각각 이민 5년 차와 10년 차에 감행한 고국 방문기를 담고 있는 연작소설로서, 전자가 상실감에 차 있다면 후자는 상실감에 대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드러낸다. 이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한데, 실제로 작가는 소설집의 Ⅰ부에 배치된 소설들을 “순서대로 읽어가노라면 그동안의 내 의식의 변화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6)
  우선 「첫 번째 고국 방문」에서 주인공은 모처럼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외국 나간 사람들을 배신자 취급”하는 풍토에 큰 충격을 받고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고국에서 귀한 손님이라도 오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아이들에겐 색동저고리를 입히고 연도에 늘어서서 환호성을 올리면, 그 귀한 손님은, 우리의 국력은……어쩌고저쩌고 한마디 한다. 또 운동 선수들이라도 오면, 여기저기 불러다 먹이고 위해 주고, 하던 일 잠시 접어두고 운동장에 나가 목이 터져라 애국가 부르고 응원하고, 그것이 배신인가.
  ……고국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성금을 모아 보내고, 동창회마다 장학금을 만들어 모교에 보내고, 자식들이 우리말 잊을까 학교를 만들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이런 게 어째서 배신인가. ―「첫 번째 고국 방문」, 71-72쪽.

  이렇듯 상처받은 주인공은 결국 로스앤젤레스에 자기 삶의 터전이 있음을 새삼스레 되새기며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두 번째 고국 방문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지난번엔 홀로 서울에 머물렀지만 이번엔 아들과 더불어 고향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빈곤 때문에 일본으로 가야 했던 아버지,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가 전사한 형, 미국에서의 이민 생활을 성공적으로 꾸려가고 있는 나, 그리고 미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나의 아들은 저마다 다른 존재이지만 면면히 연결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주인공은 미국의 묘지에 묻히게 될 자신의 미래를 승인하는 동시에 결코 미국에 머무를 수 없는 자신의 마음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별로 큰 의미도 없는 추억거리를 담은 낡은 자루에 지나지 않았던 고국, 꼭 그래야 한다면 강물에라도 집어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던 고국이 아주 절실하게 부딪쳐 왔다.
  산에 가는 꿈도 자주 꾸었다. 서울에 있을 때 가곤 했던 산이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두 손을 입 주위에 모으고는 큰 소리를 내질렀다. 먼 산, 먼 하늘을 향한 그의 그 소리는 곧 메아리쳐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가 그 자신을 부르는 소리였다. ―「소리」, 154쪽.

  표제작인 「소리」에서도 나의 기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이와 더불어 고향을 방문하는 행위로 표출된다. 그러나 이 경우 고향의 고등학교에 장학 기금을 전달하는 선행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가족에서 사회로의 확장된 실천을 그려내고 있다. “단순한 미담(美談)의 수준을 넘어 한 인간의 완성으로 향한 의지”로 풀이되는 이와 같은 전개는 작가 송상옥이 미국 생활을 통해 새롭게 정립한 문학적 과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고향-고국의 분리 불가함을 확인하고 이를 모국어로 형상화해 보자는 것이다.
  『소리』 이후에 송상옥은 『세 도시 이야기』(1995),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1996) 등 이민 체험을 담은 창작을 지속해 나갔으며, 이민문학으로서의 본령은 후일 창작한 이 작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그러나 『소리』는 이민 초창기의 송상옥 자신은 물론 1980년대 미국 이민자들의 다양한 표정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송상옥 이민문학의 주제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1)송상옥, 「권두언: 세계文學에의 디딤돌로」, 미주한국문인협회 편, 《미주문학》 창간호, 1982.12, 10쪽.

2)송상옥, 「책 머리에」, 『소리』, 범우사, 1987, 9쪽.

3)송상옥, 『광화문과 햄버거와 파피꽃』, 창작과비평사, 1996, 329쪽.

4)윤인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재외한인의 이주, 적응, 정체성』,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210-211쪽.

5)『소리』에 수록된 단편소설 인용 시 단편소설 제목과 쪽수만 밝히기로 하겠다.

6)송상옥, 「책 머리에」, 『소리』, 범우사, 1987, 9쪽.

필자 약력
서승희_프로필.jpg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부교수이며 『식민지 근대의 크리틱』(2023)을 썼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