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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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만주, 민족의 기억과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토포스

김형규

1. ‘만주’와 근대문학의 동행

잘 살려고 故鄕 떠나
못사는게 他鄕사리
간 곧마다 펴친 心荷
뜰때마다 허실됏다

흐무할 품을 찾어
들뜬 마음 잡으려고
두러서 東海를 漁船에 실려
대인 곧은 漠漠한 벌판이엿다

싸늘한 北風바지 헤넒은 곧
떼장막을 치고 누어
떠들든 몸 쉬이려든 心思
불쌍한 流浪民의 꿈이엿다

서글펴 가엾든 부모형제
헐벗고 주림을 참든 일
지금도 뼈 아픈 눈물의 紀錄
잊지 못한 拓史의 血痕이엿다
―심연수, 「만주」(1941) 전문

  인용한 시는 심연수의 유고작 중 하나인 「만주」란 제목의 시이다. 이 시를 찬찬히 읽다 보면 간절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난 이주민의 심경이, 그리고 유랑과 정착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고난과 시련의 모습이 그려진다. “막막한 벌판”과 “싸늘한 북풍”을 떠돌던 유랑민의 꿈, 그리고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어 온 “눈물의 기록”과 “拓史(척사)의 혈흔”이라는 표현에서 그들이 이국땅에서 보낸 수난사를 떠올릴 수 있다.
  1918년 강릉에서 출생한 시인은 6살 때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났고 연해주와 중국 동북 지방을 떠돌 듯 지내다가 1935년 간도의 용정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이 시에서 드러나는 ‘만주’에 대한 인식은 곧 시인이 살아온 이주와 유랑의 체험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시 「만주」가 보여주는 이주민의 고난과 시련은 시인 개인의 체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식민지 시기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식민 지배의 여파로 생계가 막막해진 농민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생존과 생계를 위해 쫓기듯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국땅 만주에서 어떻게든 삶을 이어 가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토착 세력과의 갈등, 마적의 횡포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와 통제 속에 그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위 시의 표현 그대로 “잘 살려고”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못 사는 게 타향살이”였다.
  18세기 후반 경작지를 찾아 사이섬(간도)을 넘나들던 조선 농민들의 이동이 국경을 넘는 집단적인 흐름으로 확대된 것은 1900년대 초반이다. 이 시기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 수는 7만 7천여 명 정도라고 한다, 이러던 것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토지조사사업 등 한반도 내 식민 수탈이 본격화된 후인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50만여 명으로 증가하고, 일제의 중국 침략 야욕이 더해진 일제 말기에는 200만여 명을 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출신이 다양해지고 막연한 기대 속에 만주로 향하는 ‘만주광’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이 모두가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야 할 비극적 동력이 그만큼 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면 심연수가 표현하고 있는 ‘만주’ 표상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식민지 시기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모습, 그들이 처절하게 감수하고 겪은 당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뼈아픈 눈물의 기록”은 식민지 시기 만주로 밀려난 수많은 조선인의 모습이 역사적인 차원에서 각인된 ‘민족의 기억’인 셈이다.
  근대 초기 본격화된 조선인들의 한반도 이탈과 만주로 향함은 우리 근대사와 이민사에 있어 거대하고도 중요한 한 흐름이다. 그런 만큼 우리 근대 문학에서도 중요한 소재와 장면을 차지한다. 일찍이 「소금강」(1910), 「소학령」(1912) 등의 신소설을 비롯해 1920, 1930년대 주요 작가들의 많은 작품에서 만주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다. 이광수는 물론 김동인, 염상섭, 최서해, 강경애, 주요섭, 이태준, 이기영, 이효석, 백석, 박팔영, 유치환, 서정주 등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근대문학의 이름 있는 작가들 대부분이 식민지 시기 내내 이어진 만주행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했다. 우리 근대문학의 여정은 ‘만주’와 함께 시작되어 동행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식민지 시기 만주는 그 자체로 중요한 문학 장(場)이었다. 안수길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에도 검열 제도가 있었으나 국내처럼 가혹하지 않았으므로 필자들이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일제의 관리와 통제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적으로 본국보다 감시와 통제로 인한 제약이 덜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일제 말기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주요 문예지도 발행이 어려워지는 등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이 강도를 더해갈 때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문인들은 한글 문학의 창작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북향(北鄕)’이라는 동인을 구성해 동인지를 발간했으며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창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싹트는 대지』, 『만주 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그리고 안수길의 작품집 『북원(北原)』 등의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만주국의 테두리 안이라는 제한을 가지기는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 문단’은 우리 민족의 삶과 현실을 우리글로 표현하는 한글 문단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으며 민족 문학의 상상력을 지속하는 우리 문학의 또 다른 현장이었다.

▲ 룽징 명동학교
민족학교는 민족 공동체의 거주와 영속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주 지역에 근대적인 민족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은 1906년 서전서숙에서부터이다. 사진은 서전서숙에 이어 1908년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시에 설립된 명동학교의 옛모습이다.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외에도 만주 지역에는 창동학교, 신흥학교, 동창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등 수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 연합뉴스]

2. 개척과 정착, 수난의 시공간에서 디아스포라의 영토로

  간도는 천부금탕이다. 기름진 땅이 흔하여 어디를 가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농사를 잘 지으면 쌀도 흔한 것이다. 삼림이 많으니 나무걱정도 될 것이 없다.
농사를 지어서 배불리 먹고 뜨뜻이 지내자. 그리고 깨끗한 초가나 지어놓고 글도 읽고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쳐서 이상촌을 건설하리라. 이렇게 하면 간도의 황무지를 개척할 수도 있다…
―최서해, 「탈출기」(1925) 중

  최서해는 만주 체험을 통해 식민지시기 조선 이주민들의 삶에 집중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인용문은 그의 작품 「탈출기」의 한 장면으로 주인공이 간도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감을 표현한 부분이다. 보다시피 작중 인물에게 간도는 기름진 땅이 흔해서 농사 걱정, 나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새 희망’의 ‘새 세계’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만주행에는 봉건적 모순 구조와 식민지라는 모국의 역사적 환경이 배경으로 자리하는데 이는 결국 경제적인 몰락과 이로 인한 생계 위협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에서 고국산천을 떠나는 조선 이주민들에게 만주 지역은 인용문에서처럼 생계 문제를 극복하고 식민지적 굴레에서 벗어나길 희망하는 욕망의 공간으로 호명된다.
  하지만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삶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탈출기」의 인물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비참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난과 추위는 계속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주변인이자 소수자에 불과한 그들의 처지 또한 그대로였다.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꿈꾸던 만주라는 공간은 그러한 기대와 욕망이 좌절되고 그러한 좌절을 확인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이주한 농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그들이 겪는 수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당대 현실을 생각할 때 당연한 양상이다. 「고국」(1924), 「해돋이」(1926) 등 최서해의 다른 작품은 물론이고 만주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삶에 집중한 또 다른 작가 강경애나 박계주의 작품에서도 수난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주에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창걸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만주 지역이 조선 이주민들의 기대와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닌 좌절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마도강이라 돈바람만 분다더니 ᄶᅩᆨ지ᄭᅦ 바람에 어ᄭᅢ만 붓”(「暗夜」, 1939)고 여전히 “가난의 설흠이 북밧처 목노아 울고”(「거울」, 1940) 싶은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조선에서 이주한 농민들에게 만주는 결코 기회의 땅일 수 없는 셈인데 이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일제가 만주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상황을 고려하면 그리 새로운 결론은 아니다. 다만 만주 지역의 이주 조선인들이 겪는 수난은 만주 지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정착하고자 하는 ‘정주 의식’을 강조하면서, 조선 내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리고 좀 더 복잡하고 중층적인 차원에서 계급, 인종, 민족 등이 얽힌 모순 구조를 드러낸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토착 농민들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 소위 ‘완바오산 사건(萬寶山事件: 만보산 사건)’을 제재로 한 작품들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완바오산 사건은 1931년 길림성 완바오산 주변에서 집단 거주하던 조선 이주 농민들이 중국 현지 농민들과 충돌한 사건이다. 조선 농민들은 논농사를 위해 수로 공사를 진행했는데 이를 현지 토착 농민들이 반발하고 가로막았다. 이들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안대와 일본 영사관 경찰이 충돌하고 서로 총격 대응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사망자 없이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제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왜곡 확대함으로써 한중 갈등을 부추기고 이를 빌미로 ‘류타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류조호 사건)’, ‘만주사변’ 등을 연속해 일으킨다. 김동인의 「붉은산」(1932), 이태준의 「농군」(1939), 안수길의 「벼」(1941) 등이 이때의 상황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모두 현지 토착 세력과의 갈등에 초점을 두어 조선 이주 농민의 수난을 강조한다.
  이들 작품 속 조선 농민들은 토착 세력과 갈등을 겪으면서 죽임을 당하는 등의 큰 피해를 겪지만 결코 수로 공사를 멈추지 않는다. “죽어도 여기밖에 없고 살아도 여기밖에 없”(「농군」)고, “죽어도 예서 죽고 살아도 예서 살 밖에 없는 그들”(「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논농사를 위해 공사를 멈추지 않고 기어코 수전 개발에 성공한다. 이런 모습은 어떠한 수난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조선의 방식으로 농토를 개척하면서 안정적인 거주와 영속적인 생활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국땅 만주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 이국땅을 떠돌 듯 지내는 유랑 의식이 만주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는 정주 의식으로 조정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개발과 정착이라는 이야기는 만주 장악을 위해 일제가 적극적으로 펼치던 이민 정책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만주국의 국책을 수행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일제는 1936년에 조선인의 집단 이주를 관리하기 위해 ‘선만척식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만주 지역 20여 곳을 조선인 이주 지역으로 지정하여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 조선총독부는 1942년부터 제2차 개척민 5개년 계획을 통해 해마다 조선인 1만 명을 이주시켜 만주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전을 활용한 벼농사가 조선인들에게 익숙한 고유의 농사 기술이라 하더라도 개발과 정착의 이야기는 당시 일제가 추진하던 국책과 연관될 여지가 다분하다.
  특히 수전 개발을 통해 만주 지역을 미개척 공간으로 간주하고 토착 세력의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을 상대적으로 야만의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 구도를 강조하는 일제의 식민주의 논리와 매우 닮아 있다. 또 세부적인 차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작품들이 ‘완바오산 사건’과 관련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차원에서 왜곡하거나 선택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일제가 이 사건을 악의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안수길의 「벼」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의 개입을 기대하고 일본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는 조선인의 보호를 명목으로 내세워 조선인을 만주 점령의 첨병으로 활용했던 일제의 의도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에 있었고 만주 지역 또한 일제의 통제하에 있었던 점, 그리고 이러한 사정 때문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귀향의 전망을 쉽게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난 속에서도 정착에 힘쓴 농민들의 이야기를 국책과 관련하여 비판적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이후 총동원 체제를 실시하여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고 한글 문학의 창작과 발표에도 엄격한 감시 체제가 적용되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국책 수행이라는 반민족적인 위치에서 조선 이주 농민의 수난과 정착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당시 조선 이주민들이 처한 중층적인 모순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 집단 간의 갈등은 만주국이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민족협화’의 논리에 균열을 가할 뿐 아니라 이주민과 토착민,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과 피식민으로서의 조선인 등 다양한 층위에서 갈등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조선인의 처지를 보여줌으로써 민족과 국가(국책)의 관계를 단순하게 보기 어렵게 만든다. 최서해가 「해돋이」에서 “그네들은 일본과 중국과의 이중 법률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런 힘없는 그네들은 두 나라 틈에서 참혹한 유린을 받고 있다. 그래도 어디 가서 호소할 곳이 없다”라고 한 표현은 이런 차원의 현실 인식이자 통찰이라 할 것이다.
  식민지 시기 ‘만주’와 관련된 작품들은 조선에서 이주해 온 농민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보여준다. 이들은 이주민으로서 겪는 수난과 시련의 양상을 비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만주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장소화하는 정착 지향을 드러낸다. 완바오산 사건을 제재로 한 이야기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주민으로서 그들이 겪는 수난과 그에 대한 대응은 조선인 공동체라는 소수민족 집단(ethnic community)의 차원에서 토착민과의 갈등과 대립을 표현하기도 한다. 동시에 일본 국민도 아니고 중국 국민도 아니면서 두 국가의 관리와 통제 사이에서 식민과 반식민, 원주민과 이주민의 경계에 놓인 유동적인 상황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생존과 정착 과정에서 겪는 수난의 양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처한 복잡하고 혼종적인 삶의 한 양상을 그대로 전한다.

▲ 만보산 사건 이후 파괴된 평양의 화교 거리(1931년 7월)
일제는 수로 공사 과정에서 벌어진 충돌로 조선인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오보를 의도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한중 갈등을 폭발시켰다. 이런 여파로 당시 조선 각지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폭력적인 배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특히 평양에서는 중국인 상점과 상인을 향한 폭동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출처: 히노데신문 편찬 『만주 건국과 만주·상하이 대사변사』 쇼와 7년 5월 (1932년 5월))

▲ 만보산 사건의 배경이 된 이퉁 강 관개수로
조선인이 주도하여 건설한 이퉁강(伊通河)의 수로 모습. 이 수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완바오산 사건이 발생했다. (출처: 오츠키 서점 『사진 도설 일본의 침략』)

3. 근대 도시의 화려함과 디아스포라의 비애

  “(……) 남신경(南新京) 근처부터 벌써 이곳저곳에 맘모스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우뚝 보이더니 이내 웅대한 근대 도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건설 도중이라는 느낌은 있었으나 갓 나온 연녹색 버들 사이로 깨끗한 콘크리트의 주택들이 깔리고, 멀리 보이는 큰 건축물들의 동양적인 지붕도 눈에 새로웠다. (……)” ―유진오, 「신경」(1942) 중

  ‘웅대한 근대 도시’, 만주국의 수도 신경에 대한 인상을 묘사한 부분이다. 만주국 건립 후 일제는 장춘(창춘, 长春)을 수도로 정하고 그 이름을 ‘신경(신징, 新京)’이라 했다. 그리고 신경을 동북아 대도시로 건설하고자 거대한 광장과 거리를 조성하고 웅장한 새 건물들을 연달아 건설한다. 일제가 야심 차게 기획한 계획도시 신경의 모습을 유진오는 동양식 지붕을 얹은 거대한 건축물들을 통해 위와 같이 묘사한다.
  이러한 근대 도시의 화려한 면모는 이전 장춘 시대와 대비된다. “잡초가 우거져 있던 초라한 시골 도시”의 풍경은 “사방으로 뻗어 나간 큰 길가에 보기 좋게 늘어선 큰 집”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겉모습은 장춘 시대에 비해 훨씬 거대하고 화려해졌지만 이와 달리 작중 인물 ‘철’의 심경은 이전과 달리 허무함을 느끼며 더 초라해진다. 학생들의 취직 알선을 위해 신경에 왔으나 성과는 없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 사람의 ‘복잡미묘한’ 지위만 새삼 느꼈다. 여기에 절친한 벗이었던 ‘욱’의 죽음까지 겹치다 보니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에 대한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만주국의 수도 신경이 보여주는 화려함에 대비되는 이러한 상실감이 결국 “일본과 러시아와 장학량의 세 세력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장학량의 헌병도 중동철도의 사원도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위세가 커진 일제 식민 권력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식민지 조선인의 비애와 연관되는 것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만주국 시기 또 다른 대도시인 봉천(현 선양(沈阳), 심양)을 배경으로 한 주요섭의 「봉천역 식당」(1937)도 이전 시기와 달라진 분위기를 전한다. 서울역과 비슷한 분위기의 봉천역이지만 만주국 건립 후 ‘으리으리하게’ 변했다. 이러한 도시의 화려함에 대비되는 상실감과 비애는 「신경」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이 작품은 정거장 식당에서 우연히 보게 된 여인의 인상을 통해 당시 조선인의 처지를 좀 더 직접적으로 얘기한다. 첫 만남 때 그녀는 “행복이 넘치고 흘러서 그 순진스런 즐거움이 온 방 안 공기를 진동시키고 남”은 모습이었으나 두 번째 만남 때는 양장을 하고, 화복을 입은 여성과 함께 대여섯 남자 틈에 끼어 앉아 있었다. 만주사변 직후 세 번째 만남 때는 “두 뺨이 핏기 하나 없이 노래져 버린 데다가 입가에는 벌써 가는 주름이 잡”힌 “웃음은 어디로 가고 아주 우울한 얼굴의 한 권형”이 되었다. 그리고 화려한 도시로 변모한 만주국 시기에 그녀의 모습은 “눈물 날 만치 구슬픈” 인상을 띤다.
  작가 스스로가 그 여인을 “해외로 떠도는 조선 여성의 한 타입의 표본”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그녀의 변모된 인상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인생사를 압축한 듯하다. 식민지적 굴레에서 벗어날 기대감에 만주 지역으로 이주했고 다국적 분위기 속에서 주변인이자 소수자로서 안간힘을 쓰며 생활해 왔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비극적 상황은 여전함을 그대로 전한다. 이렇게 “조선인으로서의 비극, 여자로서의 비극, 인류로서의 비극”이 부단히 이어질 듯한 “쇠사슬 같은 연쇄의 영원”에서 오는 통탄과 우울감은 봉천역의 거대함과 화려한 변모만큼 크고 깊다.
  만주국의 또 다른 특별시 하얼빈(할빈(哈尔滨))을 표제로 한 이효석의 「하얼빈」(1940)도 도시의 화려함을 변화의 차원에서 그려낸다. “새것이 요란스럽게 밀려드는 꼴”이라거나 “이 위대한 교대의 인상으로 말미암아 하얼빈의 애수는 겹겹으로 서러워가는 것”이란 식으로 말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하얼빈의 키타야스카야 거리는 ‘신경’이나 ‘봉천역’에 비해 다국적 분위기와 이국적인 화려함을 더한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외면의 화려함 속에 ‘나’가 느끼는 허무주의와 비애는 크게 부각된다. 이러한 허무감은 조선인인 ‘나’뿐 아니라 폴란드 출신의 혼혈 ‘유우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키타이스카야는 이제는 벌써 식민지에요”라고 그녀는 말하며 죽음을 얘기하기도 한다. 화려함에 감춰진 제국주의의 폭력과 왜곡된 근대주의 아래 이민자들의 비애는 조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만주국 시기 인구 30만을 넘었던 대도시 신경, 봉천 그리고 하얼빈을 표제로 한 작품들 모두가 대도시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상실감과 비애를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화려함과 거대함으로 포장된 왜곡된 근대주의, 그리고 만주국의 체재와 존재 자체가 보여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조선인의 지위는 황국신민이고 일본인이지만 어떤 때는 만주인으로, 어떤 때는 일본인으로, 또 어떤 때는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조선인이라는 이등 국민으로 간주 되는, 복잡하고 애매한 처지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니 “우정과 신분은 다른 것”으로 “신분만은 서로 확실히 해두는 것이 옳”다는 「하얼빈」 속 작중 인물의 발언은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이중적인 속마음을 대신 전하는 것으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만주국이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민족협화와 세계주의가 지닌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주국 건립 이후 대도시 개발이 속도를 내는 만큼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도 늘었다. 조선인의 경우도 이 시기에 만주로 유입되는 인구의 반수 이상이 도시로 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중 적지 않은 인원이 도시 내 실업자나 부랑자 등 하층민으로 전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중에서는 당시 만주국의 사회 문제 중 하나였던 아편 밀매에 빠져드는 인원도 많았다고 한다. 이효석의 「하얼빈」에서 “조선 사람만 보면 그걸 연상한다구”라는 표현은 바로 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김창걸의 「청공」(1940)과 안수길의 「토성」(1944)은 도시로 진출한 조선인의 이야기를 아편 문제와 연관하여 전하고 있다. 「청공」은 아편의 위험성을 고발하면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는 인물들을, 「토성」은 아편 밀매 사업을 벌이려고 가족 관계나 윤리 의식마저 버리고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편 중독자인 남편 때문에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맡게 되는 강경애의 「마약」(1937)도 아편 중독의 위해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 모두 조선인 이민 사회의 한 단면을 당시 심각했던 아편 문제를 통해 드러낸다.
  그런데 이 중 「청공」과 「토성」은 국책 수행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청공」의 경우 만주국의 아편금단 정책에 부응하는 이야기이며, 「토성」의 경우 ‘안전 농촌’을 명목으로 조선 이주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토성을 쌓았던 만주국의 조선인 정책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에 대한 국책 수행의 관점 역시 단순하지 않다. 이들 이야기를 통해 아편을 표면적으로는 금지하면서도 일부 방관하기도 하고, 또 재배지를 확대하여 생산을 허용하기도 하면서 이권과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일제의 이중적 행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 작품 모두 아편 문제를 극복하는 데 조선인 공동체 집단의 힘과 내면화된 연대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기 어렵다. 오히려 만주국의 표면적인 이념과 논리에 감춰진 이중성과 허구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민족 집단의 차원에서 모순적 상황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신경시 대동대가(1939년)
1939년 신경시 대동대가의 모습이다. 왼편의 큰 건물은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그 옆에 동양식 지붕이 탑처럼 솟은 건물은 강덕회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로는 길이 13km에 이르고 폭은 최대 100미터에 달했다. (출처: 마이니치신문 『쇼와사 별권 1-일본 식민지사』)

▲ 만주국 시기의 펑텐역
봉천(선양)은 만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만주국 시기에 신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 제일의 대도시로, 철도 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38년의 봉천역사의 모습이다. 돔을 얹은 거대한 역사로 당시 만주 지역 철도역 중 가장 규모가 컸다. [© 중국 선양시 기록 보관소]

▲ 하얼빈을 대표하는 번화가인 키타이스카야 거리 모습이다. 이효석의 『하얼빈』에서 나오는 것처럼 카바레와 호텔이 많았고, 일부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철도 건설로 도시가 형성되었으므로 유럽풍·러시아풍의 건물이 즐비한 것을 사진에서 볼 수 있다. 하얼빈의 겉모습은 이렇듯 국제적이고 화려하지만 안중근 의거, 731부대 등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출처: 『하얼빈 인상』 상편)

4. 재만 문학의 유산과 유동하는 디아스포라

  식민지 시기 재만 조선인들은 중층적인 타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봉건지주와 제국주의가 억압하는 타자의 삶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이주지에서 토착민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질서에 배척되는 타자적 삶 또한 경험했다. 게다가 만주는 친일의 공간이면서 항일의 공간이기도 했다.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독립 투쟁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만주국에 순응하는 2등 국민으로의 삶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만주에서 조선인의 삶은 이렇게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민의 수난 그리고 도시의 비애를 다룬 작품들의 예처럼 이 시기 소위 재만 조선인 문학은 디아스포라로서의 삶과 처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에서 이주해 왔고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조상들의 경험과 지식을 내면화해 온 존재라는 뿌리 확인에 치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노동과 육체가 일상적으로 운용되는 곳이며, 이를 통해 자신들만의 문화적 습관이 가시적으로 축적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를 통해 만주가 삶의 기원을 확인하거나 강조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삶을 지속해야 할 정주 공간임을, 동시에 제국과 민족의 관계에서 이방인이자 소수자로 환기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공간임을 확인시켜 준다. 생존의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친밀한 생활 공간’으로서 ‘만주’라는 특수한 장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주는 독립운동의 경험과 유산이, 그리고 그 역사와 함께 한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적극적으로 행동한 민족의 장소였기에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게 현재화되는 기억이다. 또한 동아시아의 주변인들이 모여들었던 이산과 마이너리티의 공간을 장소화하면서 민족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이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공간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귀속 의식이 바탕이 되어 침탈된 고국의 대안공간으로 역할을 했지만 이 때의 귀속 의식은 이미 기존의 귀속 의식으로 회귀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국가와 민족의 복잡한 경계에 존재했다. 재만 문학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민족과 국가의 경계 안에서 때로는 순응과 지지를, 때로는 갈등과 저항을 하며 삶의 경계를 재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민족 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재구성하는, 복잡하게 얽힌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서 유동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재구성하고자 끊임없는 시도와 행위를 이어온 것이다. 해방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으로 이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연속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 온 조선인 집거지와 그를 토대로 이루어진 한글 문학의 유산에 바탕을 둔 조선족 디아스포라 문학이 지닌 유동성은 이런 차원에서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현재적이다.

▲ 동북조선인민보
일제 패망 이후 만주에서 꾸준히 발행된 한글 신문들은 민족 문학의 역정(歷程)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9월 창간된 《한민일보》를 시작으로 《길동일보》, 《인민일보》, 《길림일보》 등 여러 신문이 발간되었다. 사진은 1949년 5월 8일, 8월 6일에 발간된 《동북조선인민보》 문예면의 일부이다. 이 신문은 연길의 《연변일보》, 하얼빈의 《민주일보》, 통화의 《단결일보》를 통합하여 1949년 4월 1일부터 발행하기 시작했다. 1955년 《연변일보》로 제호를 바꾼 후 지금까지 발행을 이어오고 있다. [©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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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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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 다산학부대학 특임교수. 중국조선족문학, 재일동포문학 등 디아스포라 문학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대표 저서로 『민족의 기억과 재외동포소설』(박문사, 2009)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