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title_text

에세이

나의 인도네시아 생활기

신영덕

I. 들어가며

   나는 조종사가 되기 위해 1976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 후의 비행훈련은 만만치 않았다. 결국 나는 조종사의 꿈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공군사관학교에서 한국어 교수 요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 이후 교수 요원으로 선발된 나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했다. 졸업 후에는 공군 사관생도들을 가르치면서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008년 6월 30일에는 공군 대령으로 명예 전역을 했다.
   전역 이후 나는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에서 한국어 혹은 한국학을 가르칠 객원교수를 선발하여 해외 대학에 파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인도네시아대학교(UI) 객원교수로 선발되었다. 이후 14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인도네시아대학교와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UPI)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 한자, 한국문학, 한국사, 번역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나는 강연, 기고, 한국어 교육 및 한국학 관련 프로젝트의 기획과 수행, 저서 출판, 논문 작성, 한국학연구소 설립, <인도네시아 한국어 교육자 협회(AJARI)> 창립 등의 활동을 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활동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II. 인도네시아대학교 교수로서의 생활

   2009년 2월 19일 아내와 내가 탄 항공기는 7시간 만에 자카르타 근처에 있는 수카르노 하타 공항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지냈던 분들의 이름을 이 공항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공항에는 초콜릿 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과 질밥(인도네시아 이슬람 여성이 머리와 몸에 두르는 의복)을 한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인도네시아에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설레었다. 짐 검사를 마치고 개찰구로 나오자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여사무원과 남자 대학원생이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그들을 대하자 마치 낯선 곳에서 아주 잘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덥고 습습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겨울옷을 입고 가서 그런지 더욱 그랬다. 우리는 ‘끼장’이라는 학교 승용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랐다. 에어컨 바람이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좋았다. ‘끼장’이란 인도네시아어로 ‘사슴’이라는 뜻이다. 이름의 뜻을 알고서는 사슴이 아주 잘 뛰는 동물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차는 인도네시아 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본산 차라고 했다. 토요타에서 만든 밴 같은 차인데, 뒤쪽은 좌우 두 개의 문으로 나뉘어 있어 모양이 특이했다. ‘끼장’이 인기 있는 이유는 여러모로 장점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선 이 차는 중고로 팔 때 좋은 가격으로 팔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이외에도 바퀴가 커서 도로가 물에 잠겨도 지나갈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선호한다고 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 살다 보면 우기에는 비가 많이 와서 도로가 물에 잠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반지르’라고 한다. 사전에서는 홍수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홍수와는 차이가 있다. 어쨌든 인도네시아에서는 도로가 수시로 물에 잠기기 때문에 ‘벤츠’ 같은 승용차보다 ‘끼장’이 훨씬 실용적이라고 했다. 2,000씨씨 이상의 차인데, 당시 가격은 220,000,000루피아 정도였다. 이를 당시의 환율로 계산해 보면 2,800만 원 정도여서 꽤 비싼 편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동차를 자체 생산하지 않아서 지금도 모두 외제 차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일본산 차다. 2020년에 현대자동차가 인도네시아에 들어와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는데, 앞으로 자동차 판매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차가 인도네시아대학교를 향해 가는 동안 우리는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화는 즐겁고 유쾌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참 많이 웃었다.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때마다 되물어 보기가 민망해서 웃으며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야경이 근사한 공항을 벗어나자 곧 자카르타 시내가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고속도로를 ‘똘(Tol)’이라고 하는데, ‘똘’이 자카르타 시내 중심을 통과하고 있어서 자카르타 시내의 모습이 잘 보였다. 도로 양쪽에 세워진 건물들은 밝은 네온사인 때문인지 서울의 건물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했던 인도네시아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인도네시아대학교는 ‘데뽁’이라는 곳에 있어서 공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가야 했다. 물론 길이 막힐 때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도로가 많지 않아 종종 길이 막혔다. 이것을 인도네시아어로 ‘마쯧’이라고 한다. 자카르타는 정체가 심해서 홀짝제를 시행하기도 하는데, ‘코로나19’ 때에는 교통이 조금 원활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인도네시아대학교가 한국의 서울대학교와 같은 곳이라고 한다. 물론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한국의 서울대학교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마다 이루어지는 대학 평가를 보면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대학교는 족자카르타에 있는 가자마다대학교(UGM)와 함께 매번 1, 2위를 차지하고 있어 인도네시아의 명문 대학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탄 차는 드디어 인도네시아대학교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입구에는 열거나 닫는 문이 없고, 조그만 검문소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안에 있는 직원들은 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주차 카드를 준다. 학교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단히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인문대학 근처에 있는 일본연구소로 안내되었다. 일본연구소는 일본이 투자하여 지은 시설물이라고 했다. 손님들이 이곳에서 묵으면서 세미나를 할 수 있게 만든 건물이었다. 지정해 준 숙소 문을 여니 테이블 위에는 예쁘게 생긴 용과일과 몇 가지 다른 과일이 담겨 있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바구니에는 우리를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힌 테이프가 달려 있었다. 감사하다는 생각과 함께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시작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인도네시아의 대학들은 한국과 달리 9월에 1학기를 시작해서 12월에 종강한다. 그리고 2학기는 2월에 시작해서 6월에 끝난다. 물론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다. 게다가 매년 조금씩 변하는 ‘르바란’ 축제일에 의해 교육 일정에 변동이 생기기도 한다. 교육 일정 외에 한국과 다른 점은 학생 성적 평가 방식이다. 한국 대학에서는 대부분 상대평가를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절대평가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절충적 방식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다만, 몇몇 학생들이 성적을 올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잘못하지 않았으면 정중히 거절하여 평가의 엄정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이후로는 점수를 구걸하는 학생들이 없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명랑하고 똑똑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나의 강의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학생들의 호기심에 찬 눈을 보자 공군사관학교 때의 수업 장면이 생각났다. 내가 생도일 때도 그랬지만 수업 시간에 조는 생도가 많았다. 항상 심신이 피곤하니 수업 시간은 안식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웬만한 명강의가 아니면 생도들의 관심을 끌기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교수님이 생도들에게 강의를 해보고 싶다고 해서 나는 특강 시간을 마련해 드렸다. 그런데 강의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되어 생도들이 졸기 시작했다. 그 교수님이 당황하시는 것 같아서 나는 돌아다니며 조는 생도를 깨워야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대학교 학생들은 달랐다. 특히 여학생들은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재미있다고 웃었다. 수업 시간에 웃음소리가 많으니 강의하는 것이 즐거웠다. 학생들은 내가 인도네시아에 처음 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나에게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해 여러 가지 알려 주었다. 식사 때나 인사할 때 모두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며 왼손은 화장실 이용 시에만 사용한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또 어떤 학생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서 친절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 학생이 나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가 몰라 주저했더니 그 학생이 내 오른손을 잡고서는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순간 당황했으나 상대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인사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감사했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특징은 시간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업 시간에 지각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학생이 먼저 면담 요청을 하고서도 나보다 늦게 온 적이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반지르’ 때문에 길이 막혀서 혹은 기차가 연착되어서 늦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약속 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이런 강박증은 1분만 늦어도 처벌을 받았던 공군사관학교 생도 생활 경험 때문에 생겼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약속이 있는 경우 약속 장소에 미리 간다. 늦을까 초조해하는 것보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전자책을 보면서 기다릴 수 있기 때문에 일찍 가도 지루하지 않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시간 개념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낙천적인 성격과 환경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지각하는 것에 대해 꽤 관대하다. 따라서 모임이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 것을 보면서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코리안 타임’이 있다며 놀렸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는 2004년부터 본격적인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학생들이 한국을 좋아하니 가르치는 일도 즐거웠다. 그런데 내가 맡은 <한국문학사> 강의는 학생들이 어려워했다. 강의 내용이 쉽지 않은 데다가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가 없으니 더 그렇다고 했다. 어떤 학생은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울면서 시험공부를 했다는 말도 했다.
   이러한 말을 듣게 되자 나는 인도네시아어를 빨리 배워서 인도네시아어로 된 <한국문학사> 교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학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아내와 함께 학교 어학원(BIPA)에 등록하여 인도네시아어 공부를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어 공부는 쉽지 않았으나 배운 내용을 실생활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어서 유익했다. 게다가 강의 시간에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해서 설명하면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인도네시아대학교에 근무할 당시에는 여러 기관으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는 물론이고 한국문화원, 한국대사관, 자카르타 한국인학교, 가자마다대학교, 나시오날대학교, 세종학당, 인도네시아의 고등학교 등에서 한국문학, 한국어 교육, 한국 문화, 한류, 청소년 진로 문제 등에 대해 강연했다. 그리고 여러 기관이나 단체가 주관하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심사를 맡기도 했다. 또한 나는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문학잡지 《호리손(HORISON)》(2010.4)에 문학평론을 게재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대학교 로스티뉴 교수가 한국전쟁소설에 대한 나의 글을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해 주어서 잡지사에 보냈던 글이었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문학잡지에 실린 최초의 한국문학 평론이 아닐까 싶다.
   이외에도 나는 국내외 학술대회에 참여하여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한인 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게재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문화를 한국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 이야기』를 기획 편집하여 한국 출판사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20여 대표 종족과 그들의 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네시아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나는 중국의 푸단대학 및 전남대 교수들과 공동으로 연구하여 두 권의 교재 『한국명작의 이해와 감상』, 『한국문학사』를 제작했다. 이 책들은 3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만들었으며 이후 한국 출판사 민속원에서 출판했다. 외국 대학생들이 한국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활동하다 보니 6년이라는 세월이 금방 지나갔다. 인도네시아대학교에서의 임기는 2015년 1월 말까지여서 인도네시아대학교를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이후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한국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외국 대학에 지원할 것인가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아내는 다른 외국으로 가는 것은 힘들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84세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니 한국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이때 마침 반둥에 있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어교육학과를 개설하려고 하는데 와서 도와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불감청 고소원’이라고 나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III.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교수로서의 생활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는 인도네시아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이다.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운영하면서 교원을 양성하고 있는 이 대학은 종합대학으로서 우리나라 교원대학교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 대학은 2020년도 평가에서 국립대학 전체 중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나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를 찾아가서 당시 어문대학 학장이었던 디디 수키야디 교수를 만났다. 현재 대학 부총장인 그는 한국어교육학과를 개설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그리하겠다고 하면서 재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한국국제교류재단(KF), 그리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는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곳이라 한국에서도 적극 지원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디 수키야디 학장과 함께 나는 재인도네시아 한국 대사와 한국국제협력단장을 직접 만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재단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도 모두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객원교수 1명, 한국국제협력단에서 한국어 전공 단원 1명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런데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는 나에게 객원교수로 재파견되고 싶으면 선발 시험에 다시 응시하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2015년 6월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재단 객원교수로 선발된 후에는 반둥으로 이사했다. 휴양 도시인 반둥은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항상 시원하여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곳이어서 어머니도 좋아하셨다.
   당시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에서는 한국인 강사 3명을 현지 채용했다. 이때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지니고 있던 아내도 정식 강사로 채용되었다. 이후 우리 부부는 활동을 거의 함께했다. 커리큘럼을 만들고 수업 계획서도 작성했다. 그리고 8월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한국학교육학회(AKSEIN)>를 결성하여 교수 간 학술 정보 교환 및 친목을 도모했다. 여러 차례의 한국어, 한국학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여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 교육, 한국학의 발전을 꾀했다.
   2017년에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의 발전을 위해 특별한 재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고 있는 <해외 대학 한국학 씨앗형 사업>에 지원했다. 감사하게도 선정이 되어 매년 4,7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3년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업 책임자였던 나는 2017년 7월 1일부터 2020년 6월 30일까지 다양한 사업을 수행했다.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내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소에서 일하는 학생들에게 3년 동안 근로장학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한국어와 한국학 교육 관련 워크숍, 콘퍼런스 등을 매년 개최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논문집도 발간했다. 또한 나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교수인 넨덴 릴리스 교수와 함께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인도네시아어로 공동 번역하여 2017년에 인도네시아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2018년 3월에는 인도네시아에서의 한국어 교육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어 교수, 교사, 학원 강사 등과 함께 <인도네시아 한국어교육자 협회(AJAR>)>를 창립했다. 이 조직은 <인도네시아 한국학교육학회(AKSEIN)>를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이때 회장으로 선출된 나는 한국어 교육의 발전을 위해 매년 세미나와 워크숍 등을 개최하면서 논문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나는 인도네시아 교수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 『한국사 이해』(2019), 『한국문학 이해』(2020)를 공동 집필하여 인도네시아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인도네시아어로 된 교재를 발간하고자 했던 숙원의 사업이 11년 만에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가자마다대학교의 요청으로 학생들에게 한국문학 특강을 한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에게 한국문학을 강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생소하거나 어려운 용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해서 강의를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가자마다대학교 한국학과 과장으로부터 한국문학에 대해 한 학기 동안 더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2주 동안 매일 6시간씩 강의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기분은 좋았다. 인도네시아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감동한 적도 있었다. 수라바야에 있는 세종학당에서 <윤동주의 생애와 시>라는 제목으로 강연할 때의 일이다. 강의하다가 나는 한 여학생에게 시 낭송을 부탁했다. 그런데 시 낭송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나려고 하여 당황했던 일이 있었다.
   또한 나는 한국 문학작품 번역 동아리를 만들어서 학생들과 함께 한국 소설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번역가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1명의 3학년 학생들과 함께 한국 현대소설 이태준의 「복덕방」을 번역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너무 어렵다고 해서 두 번째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번역했다. 번역 동아리 활동 소감을 들어보니 모두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으며, 한국 문화를 많이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장소나 시간 문제 때문에 주로 온라인으로 동아리 활동을 해서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인도네시아 교육부 주최 한국어 말하기 대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가 인도네시아의 유명 소설 『무지개 군단』의 무대인 블리뚱에 갔던 일, 아세안 문학자 대회에 한국 문인 대표로 참석하게 된 일, 인도네시아 설화와 한국 설화를 비교한 논문을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제자와 함께 공동 작성하여 이를 국제학술지에 게재했던 일 등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2020년 12월 나와 아내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 상을 마련했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많은 협력을 기대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국제교류재단과의 파견 계약 기간은 2023년 8월 31일까지이기 때문에 나는 또다시 거취 문제로 고심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이후에도 계속 강의할 수 있다고 했다. 나와 아내는 인도네시아에서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논의했다. 그리고 아쉽지만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가족들과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서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아내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VI. 나가며

   인도네시아를 떠나면서 나는 인도네시아의 한국학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소장하고 있던 1,500권의 책과 8개의 책장을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기증했다. 아끼던 책을 떠나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후학들에 의해 앞으로 많이 활용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귀국하기 전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에서는 우리 부부를 위한 송별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우리는 많은 선물을 받았다. 송별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서 더 이상 원고를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아내에게 원고를 대신 읽어줄 것을 부탁했다. 아마도 이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와 아내는 2023년 8월 20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지금 청주에서 살고 있다. 14년 6개월 만에 돌아오니 많은 것이 변해 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돌아오면 흔히 문화적 역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교수로 적을 둔 채 강의를 계속하고 있어서 그런지 큰 충격은 면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인도네시아에 가끔 가려고 한다. 인도네시아를 좀 더 알고 싶고 그리운 사람들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모든 일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이 글을 통해 감사 인사를 드린다.

필자 약력
신영덕_프로필.jpg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UPI) 한국어교육학과 교수(2015-현재). 공군사관학교 명예교수. 2009년 인도네시아대학교(UI)에 객원교수로 파견된 후, 14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인 언론 매체에 많은 글을 기고하면서 인도네시아 한국어 교육자 협회(AJARI) 설립, 인도네시아교육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 설립 등의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과 종군작가』, 『전쟁과 소설』 등 다수의 저서를 출판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