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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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을

안나 김

   우리가 출발한 것은 7시이다. 1) 아침의 빛은 창백하고 하늘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연한 회색 구름 뒤에 숨어 있었고 가볍게 가랑비가 내린다. 열린 창문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어 음표들이 공중에 떠다니며 풍경 속으로 끼어든다. 우리는 불이 하나도 켜지지 않은 램프 가게를 지나간다. 때로 우리는 비틀거린다. 보도의 돌들이 고르지 않고 얼마 전까지도 그 애는 유모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 갑자기 멈추는 데 내 다리가 적응이 되어 있지 않아 우리는 천천히 앞으로 간다.
   옆 골목에서 불어오는 돌풍에 머리카락이 얼굴에 날리자 야콥은 다시 걸음을 멈춘다. 그 애는 검지를 허공에 뻗어 바람이야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계속 달린다. 몇 미터 지나간 후 다시 걸음을 멈추는데 나뭇잎 더미를 발견해서이다. 대여섯 개의 나뭇잎이 보도 끝에 균형을 잡으며 약간 떨고 있다. 짙은 노란색인데 갈색과 녹색 반점이 있다. 그 애는 살펴보려고 몸을 구부리더니 검지를 뻗어 나뭇잎을 가리키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그를 돌아본다. 나뭇잎이 몇 장 있구나라고 내가 말한다. 가을이야라고 그 애가 말한다.
   야콥은 나이는 두 살하고 여덟 달이다. 내가 나이를 물어보면 그 애는 다섯 살이라고 대답한다. 때때로 그 애는 자기가 여섯 살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드물지만 네 살이라고도 생각한다. 그 애는 두 살이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 숫자는 자기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애는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물건과 사람을 무시하는 걸 아주 잘한다. 그의 인기 있다와 인기 없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기가 나로서는 어렵고 이 경쟁에서 몰래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데 나는 이기고 싶다. 나는 때때로 그게 내 나이와 상관이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그 애가 태어났을 때 나는 마흔 살이었다. 젊었을 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 부모로 받아들여질 마지막 나이라 생각했고, 나이가 더 많은 부모는 좀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부모는 서른다섯이었다. 나이가 든 엄마로서 나는 가끔 할머니들이나 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즉 나는 아이에게 단것을 너무 많이 준다. 그 애가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면 장난감을 죄다 사주는데, 그러면 그 애는 그것을 완벽하게 만든다, 사랑스러운 표정 말이다. 그럴 때 그 애의 크고 짙은 갈색 눈은 반짝이고 작은 코끝은 하늘을 향하는데 그러면 턱에는 작은 보조개가 생겨난다.
   그 애는 아빠인 제임스와 나의 반반처럼 생겼는데, 그에게서는 기다란 얼굴 모양과 높은 이마를, 나에게서는 짙은 색의 눈과 앞으로 나온 턱을 물려받았다. 나는 아들을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하고 또 오래 바라본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안에서 나 자신이 아니라 삼십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1988년, 여름이었고 아버지는 마흔다섯의 나이로 죽어가고 있었다.
   야콥은 삼십 대 말의 건강했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내 어머니에게 가는 중인데, 여기서 우리란 어머니가 모자(母子)라고 부르는 사이이다. 한국어에는 모자라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 모녀(母女)라는 어머니와 딸 관계를 부르는 단어가 따로 있다. 모자라는 말은 어머니가 특히 자신과 남동생에게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 이제는 나와 야콥 사이에도 쓴다. 반면 모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특히 어머니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야콥은 팔꿈치와 어깨에 힘을 주며 앞으로 돌진해 안으로 들어간다. 만족한 그 애는 창가 좌석에 올라앉는다. 새가 둥지에 파고드는 것처럼 아이가 자기 자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동안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이해한다는 시선과 미워하는 시선을 답으로 얻는다. 이런 것은 나를 편치 않게 만든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항상 길을 비켜주고,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늘 “감사합니다”, “부탁합니다”라고 말하고,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가족으로서 우리는 늘 예의 바름을 실천하고자 했는데 지금 내가 돌이켜보면 그건 굴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냥 손님일 뿐이야라고 부모님이 말했고 로마에 왔으면 로마인들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이 말을 한국어로 하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나는 이 말이 한국 속담인 줄 알았다. 아마도 이 속담은 부모님의 어린 시절 야구장이나 군부대와 같이 한국에 수입되었을 것이다.
   임신 중에 이미 나는 야콥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커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죄책감은 개인적인 문제이며 언제, 무엇에 대해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지를 그 애에게 지시하지 않겠다고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어머니의 아파트를 설명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잘 관리된 아파트 단지의 1층에 산다고 말할 수 있는데, 녹음이 푸르른 안뜰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1층의 모든 아파트에는 작은 정원이 있고 나머지 층의 아파트들에는 야콥이 정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큰 발코니들이 있다. 네 개의 방 중 세 개는 안뜰을 향하고 있고, 가장 큰 네 번째 방에서는 바움가르텐 양로원을 바라볼 수 있다. 거인 건물이자 혼수상태에 빠진 거인이다.
   어머니의 아파트를 아파트라고 설명하는 것은 꺼려진다. 내 눈에는 시간에서 떨어져나온 동굴들 중의 하나이다. 때로는 그것은 시초, 즉 시간의 기원인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벽은 그림들이 여러 겹으로, 엄청 많은 그림으로 덮여 있다: 그림은 모두 아버지가 그린 것이고, 심지어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한 그림들도 어머니는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다. 아버지가 팔았던 그림들, 아버지가 판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림들, 어린 나까지도 그 자부심을 느꼈던 그림들도 다시 사왔다.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어머니가 편지의 내용을 한국어로 한 문장 한 문장 설명해 주면 내가 한 문장 한 문장 독일어로 옮기던 오후들을 기억한다. 나는 반기를 들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아버지가 그 당시에 그림 판 걸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그걸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부당하다고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야콥은 이 그림들과 실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처음 그림들을 보았을 때는 그냥 그림들을 무시했다. 두 번째에는 독재자라는 그림에 집중했고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신발 그리고 불이라고 말했다. 그 애는 묻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촛불인가? 질문하는 동안 그의 목소리는 마치 변성기 때처럼 갈라진다.
   아들은 나에게 그림들을 보라고 강요한다. 나는 그림들을 대충 보는 것에, 마치 본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 그림들이 내 기억에 각인되어 쌍둥이 그림을 남기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들을 이해하는 것이 두렵지만 또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두렵다.
   어떤 공허함에 내던져지는 것이고 거부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일흔아홉 살이며 음식물들의 사분의 삼은 몸에 해롭기 때문에 먹어선 안 된다고 굳게 믿는다. 최근에는 그게 망고였다. 그게 혀에는 날카로운 뒷맛을 남기고 배에는 쥐어짜는 느낌을 남긴단다. 나는 캐묻는다. 혀? 정확히 어디에? 어머니는 입은 벌렸지만 혀를 내밀지는 않았고 목구멍 뒤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만족한다. 야콥은 킥킥 웃으며 따라 하지만 자기 혀의 흠 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우리가 공유하게 해준다. 그다음 그 애는 “머릿니(Plattläuse), 엄마 그걸 양치질 좀 해줄 수 있어(gurgeln)?”라고 묻는다. 나는 당황한다. 너. 진딧물(Blattläuse)을 말하는 거니? 그리고 구글 검색을 해달라고(googlen)? 우리 대화를 한 마디도 듣지 못했던 어머니는 망고 조각 접시를 내 쪽으로 밀며 먹어, 먹어라라고 한국말로 말하고 나는 역시 한국말로 저 먹었어요, 먹었어요, 먹었어요, 먹었다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사실 놀라울 정도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 즉 문장들은 정해져 있다: 어머니는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나는 먹고 나서 어머니에게 내가 먹었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적게 먹는지 아니면 한 입도 먹지 않고 먹는 척을 하는지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집에서 무엇을 해 먹는지를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지난 7일 동안 내가 요리한 요리를 죄다 나열해야 하는데, 보통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 뇌가 파업을 시작하여 어머니에게 이번 주 메뉴의 비밀을 털어놓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래서 조금은 짜증을 내며 우리는 국수를 먹었어요, 감자를 먹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슨 감자 요리라고 마치 총알처럼 다음 질문이 나온다. 삶은 감자라고 머리에 떠오른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을 하고, 으깬 감자요라고 거의 자랑스럽게 덧붙인다. 흠, 흠이라고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어머니가 대답한다. 그리고 또 뭘 먹었니라고 심문을 계속한다. 밥, 나는 어머니가 밥은 꽤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에 안도하며 말한다. 밥이라고 어머니가 반복을 하면 어머니의 얼굴에 빛이 퍼져나간다. 어머니 얼굴이 얼마나 작고 좁은지 생각이 난다.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 얼굴은 더 작아지는데, 지금은 야콥의 얼굴보다 별로 크지 않다.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가 나이를 먹지 않고 또 나이를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같은 나이로 보였다. 나는 해외에서 십 년, 즉 프리슈티나에서 몇 년, 니코시아에서 몇 년, 베를린에서 몇 년을 보냈고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는데 어머니는 너무 바스라질 것같이 보였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크고 둥근 갈색 눈을 가지고 있는데 정말 아름답고 정말 슬퍼 보였다. 나는 왜 어머니가 그런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지, 그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지, 왜 마르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 눈동자를 볼 때마다 어머니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걸 멈추게 한 것은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먹었어요라고 야콥이 깍깍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첫 번째보다 더 승리에 찬 어투로 먹었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혼란스러워, 한국어로): 뭐라는 거야?
나: 먹었어요.
어머니(더 혼란스러워하며): 그래, 그건 알아. 그런데 저 애가 뭐라는 거냐고?
나: 그 애가 먹었어요라고 말해요.
어머니: 걔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애는 근데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아……. (야콥을 향해 포크에 망고 큐브를 찍어 독일어로 말한다.) 자, 한 조각 더 먹어…….

   나는 야콥이 방금 한국말을 했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 내가 말하기를 유치원에서 네 제일 친한 친구는 불가리아어를 말하고 할머니는 한국어를 말한다. 햔-굴말이라고 반복하고 그 애가 나를 물어보듯 바라본다. -국-말이라고 나는 반복한다. 내가 세상에는 많은 말들이 있고, 예를 들어 낸시 할머니나 빌 할아버지는 영어를 말하지라고 말한다. 아빠도라고 야콥이 말한다. 맞았어라고 내가 말한다. 독일어도라고 그가 말한다. 그래라고 내가 말하고 아빠는 독일어도 하지. 그리고 우리는이라고 그가 묻는다. 너는 독일어와 영어를 말해라고 내가 말한다. 그리고 엄마도라고 그가 말하고 내가 그래 나도라고 대답한다. 야콥은 식당 의자에서 뛰어 내려 작은 서랍장으로 달려가 30여 년 전 테르셸링 해변에서 가져온 조개를 가져온다. 작은 조개들이 그 애의 마음에 든다. 아주 작은 것들은 손바닥에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건 그 애의 둥지이다.
   제3의 언어인 한국어에 대해 왜 내가 야콥과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이 없는가라고 자문을 해본다. 내가 한국어를 잘못해서일까? 내가 한국어를 말한다고 하면 과장이라 그럴까? 그건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절뚝거리는 수준이고 한때 단어가 있었지만 그 다음 사라져버린 곳들을 지나가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그 단어의 자리에는 공허함이 지배하고 마비시키는 공허함이 지배한다. 어머니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상실감을 느낀다. 나는 상실감은 기록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발견하지만 상실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일어났는지, 말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상실에 대해 아파하고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대체물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된다.
   야콥은 자기의 새로운 단어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 애는 새로운 단어들 모두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의 관점에서 특별한 울림을 가진 단어들을 가장 사랑한다. 그 애는 계속 다시금 소리를 내보는데 먹었어요라는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어머니의 집에서, 어떤 때에는 이 구석에서, 어떤 때에는 저 구석에서 울린다. 그리고 그의 작은 두 발을 구르면 덮어진다. 엄마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에게로 킥킥거리며 달려온다. 먹었어요! 다시 그 애는 킥킥거리고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날카롭게 말한다. 오케이, 이제 그만. 그 애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우리 이제 새로운 단어로 말을 해보자고 말한다. 그 애는 웃는다, 이번에는 좀 바보처럼 그리고 이 단어를 변형시켜서 내 얼굴에 들이붓는다. 무-굳-수주, 미-기-시지, 매-갰-새재, 나는 내 안에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 나는 내게 상처가 되는 이 언어를 그 애가 무시하지 않기를 원한다. 사실 그 애가 이 언어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고, 그 애는 이 소리를 변주한 것뿐이지만. 그걸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이런 장면을 체험한 적이 이미 한 번 있으며, 적어도 나의 감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리고 이 감정은 장난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모욕을 받는데, 어쩌면 그 감정도 보통은 이미 여러 번 같이 웃었을 것이다, 그럴 기분이 아닐 때도 말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그리고 나의 목소리는 부서진다. 어머니는 손자하고 이제 놀아줄 생각이 없으신 거예요?

   어머니는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 소파는 정사각형이며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는 한국인 지인이 만들어준 헐렁한 바지와 치마바지를 입고 있다. 그 친구는 당시 바닷가에 있는 동해시에 살고 있는데 어머니를 위해 바지 네 벌을 바느질해 주었고 바지마다 꽃무늬와 색이 더 화려해졌다. 나는 동해에는 한 번 가보았는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햇살에 반짝이며 하늘색과 청록색 사이를 오가던 물빛이 기억나고, 바다 냄새도 기억나고, 색다르고 더 밝고 더 가벼웠던 바다 냄새도 기억나는 것 같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네 개의 치마바지 중 하나를 입었을 때 근데 너무나 편하잖니라고 변명하는 말을 했지만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때 내 것이었던 검은 줄무늬가 있는 분홍색 블라우스를 상의로 입는다. 열두 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블라우스였고 우아하다고 느꼈고 오로지 검은색 래커칠을 한 신발하고만 입었다. 어머니는 녹색 양말과 같이 입어 꽃줄기처럼 보였다. 압권은 회색 조끼였는데 그것도 내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내가 십 대 때에는 어머니가 버릴 수 없던 낡은 옷을 빌려 입었는데 이제는 어머니가 내가 오래전에 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옷을 가져간다.
   어머니는 일 년 동안 염색을 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거의 백발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백발의 머리카락 아래에 회색 가닥이 몇 개가 섞여 있고 파마의 마지막 흔적도 아직 보인다. 피부도 더 창백하고 하얗고 눈과 윗입술 중앙의 모반만 짙은 색깔이다.
   어머니는 눈에 띄게 불편해 보인다. 거의 팔십 대인 어머니에게 써도 되는 말인지 모르지만 흔들어 댄다. 몸통을 위아래로 흔들어 대며 언제든 도망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 애가 뭐라고 말하니? 그날 오전 가장 많이 들은 말이지만 어머니는 보청기 착용을 거부한다. 보청기가 주변 잡음은 증폭시키지만 정작 중요한 소리는 증폭시키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는 어머니에게 보청기에 익숙해져야 하고, 듣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여러 번 설명한다.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청기보다는 내게 부탁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게 이제는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식당에 있을 때, 어머니는 주문을 내게 해 우리 둘의 사이에 서서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웨이터를 무시하는데 나는 그 주문을 전달해야 한다. 마치 어머니는 다른 행성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타지에서 40년 넘게 살아오신 어머니는 한국말만 하시고 나는 좋든 싫든 통역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지금쯤이면 통역에 익숙해져서 통역이 나의 제2의 천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 안의 무언가가 언어 점프에 저항하고 있고, 나이가 들수록 그 저항을 깨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그러면 내 뇌는 기억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관련 단어를 모두 잊어버렸다고 한다. 나는 말을 더듬기 시작하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갑자기 한국어도 독일어도 할 수 없게 되고, 내 어휘력이 빈약한 몇 단어들로 줄어드는데, 그러면 나는 실존적 위기, 혹은 위기의 존재에 처해 있는 게 아닐까? 존재 자체가 위태롭고, 존재는 존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채로 남기까지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걸 거부함으로써 위기를 거부한다.
   말 없는 벙어리 존재가 될 때까지.

참고자료

1) 이 글은 미발표 장편 소설 『가을』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번역정보

번역 : 최윤영 (독 → 한)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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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대한민국 대전 출생. 비엔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연극학 전공. 대표작 『어느 밤의 해부(Anatomie einer Nacht)』, 『위대한 귀향(Die Grosse Heimkehr)』, 『어느 아이 이야기(Geschichte eines Kindes)』 출간.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가장 최근작인 『어느 아이 이야기』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2023년에는 베자-카네티 문학상(Veza-Canetti-Preis)을 수상했다.
*사진 출처: ©E. van Lanen/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