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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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깊이읽기

『색, 계』 장아이링

박금산

이래서 사랑이 무수하다: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의 처음 중간 끝

박금산(소설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는 처음 중간 끝이 분명한 편에 속한다. 처음은 처음이고, 중간은 중간이고, 끝은 끝인데 이것이 어떻게 소설에 적용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따르면 처음은 어떤 것 이전에 아무것도 있지 않았던 상태, 끝은 이 이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이다. 중간은 처음의 상태와 끝 사이에 있는 무엇, 처음이 끝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마작판이 있다. 오후의 마작이 서두이고 저녁의 마작이 결말이다. 1940년대 상하이. 4인이 플레이어로 참여한다. 3인은 고위 공직자의 부인이다. 1인은 이질적인 외부인이다. 이름 지아즈. 홍콩에서 상하이로 출장을 왔다.
  바깥은 전쟁 중이고 실내는 화려하다. 마작판은 정보부대 고위직 이 선생의 집에서 벌어진다. 지아즈는 이 선생의 아내가 자기를 초대하도록 유도하여 집을 숙소로 삼고 있다. 본문에 나타나지 않은 정보를 추가하여 역사적 상황을 보완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0년을 기준으로, 3년 전 1937년에는 난징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위키피디아에 ‘난징 대학살’로 등록된 사건이다. 당시 일본군은 상하이에 이어 난징을 함락하고 국공합작으로 연합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연합군 잔병을 절멸하기 위해 대학살을 벌였다. 이후 국민당 출신 왕징웨이가 반란 같은 것을 일으켜 난징에 공산당, 국민당과 다른 친일 정부를 세웠다. 이는 하나의 국가였다. 잠시 잠깐 국가로 존재했기 때문에 현대사에서는 이 국가를 괴뢰 정부로 기록하고 있다. 괴뢰는 조종받는 인형을 뜻하는 영어 ‘puppet’을 한자어로 번역한 말이다. 번역의 기원은 찾기 어렵다. 실제로는 국가 속의 국가이다. 왕징웨이 정권은 일본국에 속하는 국가였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자. 마작판은 왕징웨이 정권의 정보부대 중요 인물인 이 선생의 집에서 벌어진다. 작중에서 줄곧 이 선생으로 호명된다. 지아즈는 중국 애국단체 소속으로 이 선생 암살 작전을 수행한다.
  스파이로 잠입한 인물이 타깃을 사랑하게 되어 암살 작전이 실패로 끝나는, 스파이가 적을 사랑하여 동침하는 스토리는 『색, 계』 이전에도 많고 이후에도 많다. 대중 서사의 클리셰라 할 수 있다. 이런 서사에서는 아이러니한 사랑, 목적 달성에 방해가 되는 사랑이 등장해서 반전을 일으킨다. 『색, 계』 또한 그러하다. 지아즈가 이 선생을 놓아주는, 살아서 도망가도록 도와주는 지점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사실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알려졌다. 실제 사건에서는 작전이 발각되어 총살형에 처해지지만 소설에서는 지아즈가 의도적으로 이 선생을 놓아준다. 발각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를 드러낸다. 이런 지아즈의 변심 과정을 작가가 어떻게 허구적으로 서술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색, 계』를 읽는 포인트이다.
  처음 중간 끝으로 설정해 보자.
  처음에는 당연히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리 없다. 지아즈가 이 선생을 몰랐으니 너무나 당연하다. 지아즈는 애국단체 대학생 연극 단원이었고 정치의식이 없었다. 작전에 투입된 처음에는 이 선생은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처음에 없던 사랑이 중간에 나타난다. 중간이 이렇게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설마 이 선생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하게 그게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다. 연애하거나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열대여섯 살이 되면서부터 그녀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구애공세를 막아내기 바빴다. 이런 여자아이는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나 강한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 (……) 이 선생과 함께 있는 동안 그녀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과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장한 그녀에게 자신의 느낌을 물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1)

  사랑에 처음이 없고 중간과 끝이 있다. 우리 일상의 사랑도 그런 것 같다. 처음은 모르고 중간부터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사랑의 한 속성이다. 위에서 보듯이 작가 장아이링은 사랑이라는 언표를 직접적으로 사용한다. 지아즈의 입장에서. 사랑을 생각하는 계기는 모호하다. 불안과 초조 앞에서 지아즈는 위와 같이 생각한다. 독자가 보기에 이 마음은 의심할 필요 없이 사랑이다. 사랑인지 아닌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라는 영역 안에 들어와 있음을 뜻한다. 사랑해서는 안 되고, 결코 사랑이 개입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암살의 실패와 사랑의 성공은 클리셰적인 반전이다. 사랑이 성공하면 암살이 실패하고, 암살이 성공하면 사랑이 실패한다. 암살과 사랑은 함께 성공하거나 함께 실패할 수 없다.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던 사랑에 끝이 나타난다. 다음은 지아즈의 마지막 마음이다.

그러나 이 순간의 미소에는 어떤 비웃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서글퍼 보이는 미소였다. 스탠드에 비친 그의 옆모습에서 그녀는 부드러움과 왠지 모를 연민의 기운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는데 그의 눈썹은 나방의 미색 날개처럼 여윈 그의 두 뺨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갑자기 몰려든 생각에 뭔가를 잃어버린 듯 심란해진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미친 듯이 뛰었다.
(……)
“어서 가요!”2)

  이 선생은 평온하게 반지를 품평하다가 어서 가라는 지아즈의 말을 듣고 급히 현장을 빠져나간다. 지아즈는 사랑의 원인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논리이다. 자기가 알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갈구가 실현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 같다. 이 선생을 놓아주기로 결정을 내리는 갑작스러운 계기이기도 하다.
  지아즈는 이 선생이 보석 가게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가 총에 맞아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시야에서 사라지자 안도감을 느낀다. 작전에서 완전히 빠지기 위해 친척 집으로 향한다. 친척 집의 위치는 조직원 누구도 알지 못한다. 도로가 봉쇄되어 인력거가 멈춘다. 지아즈는 군인에게 검거되고 조직원들과 함께 처형당한다. 이것이 끝이다.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에서는 이 부분이 장면화되어 길게 나타나고 장아이링의 소설에서는 이 선생의 회상으로 건조하고 간략하게 서술된다. 봉쇄와 처형의 명령권자는 이 선생이다. 이 선생은 지아즈를 살릴 수 있었으나 죽이는 게 맞다고 회상한다.
  사랑의 속성은 무수하다. 그래서 독자와 관객은 클리셰임을 알면서도 새로움을 기대하며 로맨스 소설을 읽고 로맨스 영화를 본다. 『색, 계』에서 장아이링이 사용한 사랑이라는 어휘는 무수한, 안개의 알갱이 개수만큼 많은 속성의 일부분을 담고 있다. 장아이링은 사랑이라 했을 뿐, 어떤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개념화하지 않았다. 정치보다 사랑이라거나, 사적 탐닉에 빠진 자기애라거나, 자기 연민을 치유하기 위한 학대와 최면의 결과라는 식의 해석을 가능하도록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사랑했는지에 대하여 인용문에서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장아이링은 사랑의 이유를 고민하는 지아즈를 그리지 않는다. 사랑으로 번민하지 않는다. 왜?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묘하게도 장아이링은 지아즈의 시선에서 사랑을 이야기했고, 이 선생의 시각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했다. 마작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 개념에서 처음 중간 끝을 사용할 때는 소설 본문의 시작과 끝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소설 본문의 시작을 서두, 마지막을 결말이라 할 때 처음은 소설의 서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끝은 결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서두와 결말 사이에 들어 있는 긴 시간 동안의 이야기, 이야기를 시간적 순서로 재배치해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후를 가리키는 것이 처음과 끝이다. 『색, 계』는 서두와 결말이 마작판이다. 똑같은 판인 것 같지만 서두에서는 지아즈가 마작판을 바라보고 결말에서는 지아즈 없는 자리를 이 선생이 바라본다. 지아즈는 마작판에서 나와 암살 작전 현장에 갔다가 다시 들어오지 못했다. 지아즈의 자리에 뉴 멤버가 들어와 게임이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이 상황을 이 선생이 바라본다.
  첫 판이 지아즈의 시선으로 시작되었다가 마지막 판이 이 선생의 시선으로 끝난다는 것은 『색, 계』의 전개 과정이 지아즈의 세계에서 이 선생의 세계로의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첫 판은 오후 어느 시각이고 마지막 판은 저녁 어느 시각이다. 첫 판과 마지막 판 사이에서 지아즈는 죽고 이 선생은 지아즈를 죽였다. 이 선생은 자기를 살려준 지아즈를 살해한 사람이다. 『색, 계』는 이 선생이 자기 집에 스파이로 들어온 지아즈를 죽인 이야기이다. 이 선생은 지아즈를 죽여 놓고, 마작이 진행되는 장면을 관망한다.
  이 선생은 지아즈를 향한 마음을 아래와 같이 ‘영원’이라는 언어를 동원하여 인생 전체로 확대한다. ‘지기(知己)’라는 단어에 주목하면 더 흥미롭다. 지아즈의 시선에서 서술될 때 등장한 사랑이라는 언어는 소설이 이 선생의 세계로 전환되자 지기라는 언어로 바뀌었다.

그는 현재 전쟁 국면이 일본에게 점점 불리해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지기(知己)를 한 명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평생 영원토록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위로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얼마만큼 강렬했었는지도 상관없었다. 그냥 감정이 있었다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원시시대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였고, 매국노와 매국노를 위해 결국 앞잡이가 된 관계였으며 가장 마지막에 서로를 점유한 관계였다.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사람이었고 죽어서는 그의 귀신이 되었다.3)

  인용문에서 그는 이 선생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지기는 굉장히 긍정적인 언어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알아줌의 대상은 감추거나 다른 식으로 표현해도 이심전심 전달되는 속마음이다. 알아줌이 사랑의 한 속성일지, 사랑의 경계를 넘는 감정일지 해석하기 나름이다. 지기와 나누는 감정이 사랑에 포함된다고 해도 맞고 사랑을 초월한다고 해도 맞다. 자기의 전 존재를 알아주는 타자가 지기이다. 어떤 면에서 지기는 타자에게서 발견하는 자기 자아이기도 하다.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한 뒤 자신의 감정을 사랑으로 확신하는 지아즈의 마음과 비슷하다. 이 선생과 지아즈의 공통점은 스스로 사랑하지 않고 자기에게 와서 부딪친 후 반사되어 가는 알아줌의 영역을 사랑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 사랑의 모습은 그래서 측은지심을 유발한다4)이것으로 인해 소설은 지아즈의 서사에서 이 선생의 서사로 전환되었고 소설 전체가 살인자 이 선생의 안위에 대한 염려로 끝난다는 해석으로 이어질 처지에 놓인다. 전환은 작가가 이 선생의 삶을 용인한다는 해석으로 흘러갈 여지를 남긴다.
  소설은 지아즈의 이야기에서 이 선생의 이야기로 전환되었고 위의 서술은 이 선생이 자신에게 닥칠 파국을 지아즈에 대한 사랑으로 보상받겠다고 스스로 각오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장아이링은 이 대목에서 사랑이라는 언어를 안 쓰는 대신 지금까지는 사용하지 않은 영원이라는 언어를 추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이라는 개념어를 사용하여 플롯에서 끝은 사건이 해결된 후 이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라 했다. 『색, 계』는 이 선생을 알지 못하던 지아즈가 연극에 작전에 동원되기 이전이 처음이고 이 선생 암살 작전에 투입되어 부인으로 위장하여 접근한 것이 중간이며 작전 실패 후 죽임을 당하는 것이 끝이다. 이후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야 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완결이다. 완결에는 영원이라는 것이 없다. 영원은 끝을 알 수 없음, 끝이 없음이 속성이다.
  장아이링의 산문 「글쓰기에 대해 논한다(論寫作)」(1944)를 읽으면서 재미있는 언어를 체험했다. 장아이링은 산문에서 ‘지기’를 친구, 동료, 편한 사람 정도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했다. 재미있는 언어 체험은 ‘무수하다’라는 말에 들어 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나는 무수하다가 영어 ‘numerous’에 대응하는 한자 무수(無數: 셀 수 없음)에서 나왔을 것임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읽고 난 후 안개의 수효를 생각하며 언어의 묘미에 감탄했다.

“빨지 않은 옷을 입은 듯”이란 비유를 난 아주 좋아한다. 대야 옆에 쌓인 더러운 옷의 느낌을 남자들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잡다하고 불결한, 꽉 막힌 상심을 강남 사람들은 한 구절로 묘사했다. 마음속이 “무수(霧數)”하다. “무수”라는 두 글자는 현재의 국어 안에서 대응되는 명사가 거의 없다.
―장아이링, 「글쓰기에 대해 논한다」 일부5)

  인용한 위의 문장을 읽으며 “무수(霧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용된 한자가 없을 무(無)가 아니었다. 안개 무(霧)였다. 안개의 알갱이를 셀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음을 가리키는 결과는 같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안개 속에 들어서서 깜깜해진 마음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에는 이 언어가 훨씬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무수는 헤아림의 가능 불가능을 따지는 셀 수 없음, ‘numerous’가 아니라 대상이 이미지로 존재하는 안개 숫자, 안개 알갱이의 숫자이다.
  여기에 디아스포라 당사자로서의 장아이링을 결부시킬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장아이링은 강남 사람들이 꽉 막힌 상심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사전을 검색해 보니 “무수(霧數)”는 ‘지저분하고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장쑤성과 저장성 주변의 방언’이었다. 장쑤성, 저장성은 장아이링이 살았고, 『색, 계』의 무대가 된 상하이와 함께 강남으로 불린다. 언어를 애착하고 존경한다는 것은 이 지역을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195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민해서 줄곧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작가의 생애를 결부시킬 때에 두 글자에 대응되는 국어가 없다는 인용문 마지막 표현이 더 크게 와 닿는다.
  소설 『색, 계』는 2007년에 개봉한 영화 「색, 계」로 더 유명해졌다. 소설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79년이다. 소설의 작가가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미국인이고 영화감독 국적이 대만이며 영화 제작 국적이 대만, 홍콩, 미국이라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 모두 중국인의 관심을 끌었다. 영화는 세계적으로 흥행했고 중국 민족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비난하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지아즈의 배역을 맡은 배우 탕웨이가 중국 내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는 것이 상징적이다. 영화는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하고 격렬한 정사 장면, 수위 높은 노출로 중간을 채운다. 여성과 남성의 몸이 중간을 채우고 ‘가요’, ‘도망가요’가 지아즈의 마지막 대사이다. 지아즈의 서사에서 이 선생의 서사로 바뀐 것은 소설과 영화가 똑같다. 이 선생이 탈출하고 지아즈의 친구들이 모두 총살당하는 장면, 이 선생이 지아즈가 자신의 집에서 머물던 방 침대보를 쓰다듬는, 그림자로 보여주며 끝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색, 계」가 선정성을 앞세워 항일민족영웅을 희화화하고 중화민족을 욕보인 ‘한간문화(漢奸文化)’라고 성토했다” 6)라고 할 때에 항일민족영웅을 희화화했다는 것은 지아즈의 모티프가 된 정핑루는 작전이 발각되어 총살당했지만 소설과 영화에서는 사랑이 애국심을 위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판이다. 1940년 정핑루는 왕징웨이 정권의 국민당 첩보기관 책임자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색, 계』에는 장소성과 당사자성이 개입한다. 장아이링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홍콩으로 가서 유학하고 다시 상하이에서 살다가 1955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색, 계』는 이 시기에 쓰기 시작해서 1979년에 완성되었고7)대만에서 간행하는 일간지 《중국시보》의 부속 인간문화 전문지 《인간부간》에 처음 실렸다. 태어난 중국 본토도 아니고 이민 간 미국에서 영어로 먼저 발표된 것도 아니다. 대만에서 중국어로 처음 발표되었음은 장아이링은 대만에서 산 적이 없지만 중국 본토의 공산당 정권으로부터 망명한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색, 계』가 대만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체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장아이링의 이력이 첨부된다. 청 말기 정치 거물 리홍장의 증손녀라는 점, 친일파 후란청과 결혼하고 이혼했다는 점, 후란청을 통해 정핑루 사건 전말을 알게 되었고 나중에 이것이 소설의 모티프로 작용했다는 점 등이 소설 『색, 계』에 당사자성으로 개입한다. 장아이링은 디아스포라로서 중국 본토와 대만이 아닌 제3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처음과 끝을 태어남과 죽음으로 생각하면 세계는 완결성을 가진다. 태어나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과연 그런가? 태어남 이전에 아무것도 없고,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는가? 개인을 확대하면 완결된 전체가 된다고 믿을 때에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전체는 개인을 확대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인이 모인 사회를 우리는 편의상 전체라고 부른다. 어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죽음에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면서 스펙터클하게 전개된다. 시작 또한 그렇다.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연과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개인은 스스로 완결될 수 없다. 개인은 전체와 분리되었을 경우에만 완결될 수 있다.
  처음과 끝은 어마어마한 언어이다. 개인에게 처음과 끝이 없다면 전체에게도 처음과 끝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중간 끝을 말할 때에는 우주가 지상계와 천상계로 나누어져 있다고 여겨졌다. 우주의 형태가 부정형, 무정형임을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가 완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주가 무변하다고 할 때 무변은 변(邊: 끝)이 없다는 말이다. 우주는 하나가 아니고, 정해진 형태가 없으며 처음과 끝도 알 수 없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으므로 전체가 어떤 모습인지 상상을 초월한다. 완결된 세계에 대한 동경이 이상에 불과한 것이 될 때 태어남과 죽음, 개인의 탄생과 소멸은 결코 처음과 끝이 될 수 없다.
  국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은 전체를 국가와 민족으로 생각한다. 전체주의자들은 개인은 완결성을 가질 수 없더라도 전체는 완결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아즈의 삶의 완결성에 집착하여 구획 짓자면 『색, 계』는 처음, 중간, 끝이 매우 분명하다. 처음은 중국인으로서 태어남 자체이다. 태어났으니 시작된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처음이 아니다. 이미 타자가 존재하는 자연과 국가와 민족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살아 견디다 죽임을 당했다. 세계는 죽임 이후에도 사건이 벌어지고 새롭게 시간이 흐른다.
  완결성에 집착하면 세계의 끝은 국경이다. 디아스포라는 국경의 바깥에 있고, 국가와 민족이 처음 중간 끝으로 완결될 때 디아스포라는 처음도 중간도 끝도 아니다.
  국가와 민족은 완결되기 위해 배타를 필요로 한다. 『색, 계』 논쟁에서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사랑을 제거하고 국가와 민족을 남긴다. 디아스포라에게는 제거된 것이 국가와 민족이다. 디아스포라는 국가와 민족을 완결된 전체로 설정해야 생명력 있는 단어이다. 디아스포라에게 없는 것은 국가와 민족이다. 탄생 소멸을 완결의 구조라 한다면 탄생하는 것은 언젠가 소멸한다. 국가와 민족 역시 그렇다.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배제당한 디아스포라는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그것에 대해 향수하기를 강요당한다. 장아이링은 국가와 민족 대신 사랑을 배치했다. 수사적으로 영원에 가까운 것은, 국가와 민족이 아니라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다. 『색, 계』에서는 사랑에 집중하면 이 선생이 살인 명령권자라는 사실이 감춰진다. 이 선생이 살인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것이 감춰진다. 개인의 사랑을 제거하면 『색, 계』에 남는 것은 국가와 민족이다. 국가와 민족을 제거하는 것이 쉬운지, 개인을 제거하는 것이 쉬운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장아이링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제거하는 것이 사랑을 제거하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 완결성에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이래서 사랑이 무수하고 암암하다.
  

참고문헌

1)장아이링, 김은신 옮김, 『색, 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57쪽.

2)『색, 계』, 58-59쪽.

3)같은 책, 67쪽.

4)‘지기’를 영어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해서 영어본 해당 부분을 찾아보았다. 대조한 결과 영역자는 ‘지기’가 들어가는 문장을 생략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영역자는 해당 부분을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을 즐겼으니 어떤 후회도 없다”라고 줄여서 번역했다. 지기가 생략된 부분에 밑줄을 그어 인용한다. 장아이링은 『색, 계』를 중국어로 창작했고 한국어본은 중국어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He was not optimistic about the way the war was going, and he had no idea how it would turn out for him. But now that he had enjoyed the love of a beautiful woman, he could die happy – without regret. He could feel her shadow forever near him, comforting him. Even though she had hated him at the end, she had at least felt something. And now he possessed her utterly, primitively – as a hunter does his quarry, a tiger his kill. Alive, her body belonged to him; dead, she was his ghost.(펭귄판 영어본 『색, 계(LUST, CAUTION)』, 32쪽. Translated by Julia Lovell)

5)장애령, 이종철 옮김, 『올드 상해의 추억―장애령 산문선』, 학고방, 2011, 24쪽.

6)임우경, 「무대 위의 위험한 여/성: 張愛玲 『色, 戒』의 성 정치」, 《중국어문학지》, 중국어문학회, 2015, 53호, 251면.

7)유민희, 「‘여성’의 키워드로 읽는 장아이링(張愛玲)의 『색, 계(色, 戒)』, 《중국어문논총》, 중국어문연구회, 2017, 82호, 238면. 논문에 따르면 장아이링은 『색, 계』를 1950년에 창작하기 시작해서 1979년에 발표했다.

필자 약력
박금산_프로필.jpg

1972년 여수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영준이다.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범』으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 『AI가 쓴 소설』, 연작소설 『바디페인팅』, 소설집 『생일선물』,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소설의 순간들』 등이 있다. 오영수문학상(2016)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소설 창작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