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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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장소성과 문제적 장소

고인환

   인간 영혼의 욕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간과된 것이 아마도 뿌리내림일 것이다. 그것은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욕구의 하나로 꼽힌다. 사람은 과거의 유산과 미래에 대한 어떤 예감을 생생하게 간직한 집단의 삶에 자연스럽게 실제로 가담함으로써 뿌리가 생긴다. 이러한 참여는 장소, 출생, 직업, 주변 환경이 자동적으로 이끄는 참여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양한 뿌리들을 필요로 한다.1)

1. 디아스포라적 장소

   삶이 공간에 스며들 때, 즉 인간의 삶이 어느 한 공간에 뿌리를 내릴 때 그 공간은 각별한 장소가 된다. 하나의 공간은 여러 사람 혹은 공동체들에게 서로 다른 복수의 장소로 공존하기도 한다. 디아스포라적 삶의 조건은 자기가 속해 있는 고유의 장소에서 이산을 강요당한 자들이 새로운 장소를 찾아 다시 뿌리 내리려는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타자의 장소, 즉 ‘과거의 유산과 미래에 대한 예감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다른 공동체의 영역에 이주하여 그 공간을 자신의 장소로 일구려는 고단한 삶의 여정이 음각되어 있다. 이에 따라 디아스포라적 장소는 서로 다른 공동체의 삶의 방식, 즉 가치관, 문화, 풍속 등이 교차하고 뒤엉키는, 차별과 관용, 폭력과 환대가 공존하는 문제적 장소가 된다.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토지·언어·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에 반해 디아스포라들은 자신의 장소에서 뿌리 뽑힌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이자, 이방인, 소수자인 경우가 많다. 이들의 삶은 전자들에 비해 고달프고 힘들기 일쑤지만, 다수자들이 고정되고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물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2)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디아스포라적 삶의 조건을 탐색하는 작업은 견고해 보이는 근대적 일상의 시스템을 발본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통해 근대 이후의 삶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수자의 시선으로 디아스포라의 삶과 작품을 흡수하기보다는 그들의 문제적 삶의 조건을 직시하며 ‘지금 여기’의 현실을 성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1863-1864년 사이에 두만강을 도강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유민들의 후손이다. 이들의 생활 터전은 한일합방 이후 의병 활동 및 항일운동의 근거지였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는 재러 한인 소비에트 건설을 위한 민족공동체의 요람이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에는 불모지와 같은 이국의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삶은 구한말에서 오늘에 이르는 험준한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 한반도와 러시아 연해주나 사할린 지역을 포함해서 중앙아시아 전역에 걸친 시공간에 입체적으로 걸쳐 있다.3)
   ‘고국인 조선을 등지고 낯선 땅에 정착하고 이주하기를 반복’하며 떠돌았던 고려인 디아스포라들은 ‘항상 새로운 장소와 대면하기를 반복해 왔으며 그때마다 새롭게 안착한 특정한 장소’를 ‘내면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창조적으로 일구어 왔다.4)

2. 연해주, ‘신한촌’

▲ 연해주 ‘신한촌’, 항일독립운동의 집결지 [ⓒ 경향신문]

   연해주는 중앙아시아 고려인5) 문학의 요람이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즉 고려인의 역사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주로 경제적 궁핍 때문에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했다. 러시아는 변방을 개척하기 위해 외부인이 연해주에 이주해 오는 것을 허용하고 토지도 제공했다.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급증한 것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부터였다. 초기에는 구한말의 사회적 혼란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주가 주를 이루었다면, 점차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이 성격이 더해지면서 연해주의 한인 사회는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신한촌’을 건설했다. 이후 신한촌은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가 되어 국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렇듯, 연해주는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 독립운동가 등이 모여 조선인 공동체를 형성한 디아스포라적 장소였다.
   한편 혁명(1917)과 내전 이후 러시아 사회는 급격하게 재편되었다. 이에 따라 한인 사회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연해주에서 간행된 한글 신문 《선봉》(1923-1937)은 고려인 문인의 등용문 역할을 하며 연해주 문단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조명희, 조기천, 한 아나톨리, 전동혁, 김시종, 김유경, 조규화, 최호림, 조동규, 연성용 등이 있다.6)
   이렇듯 연해주에 이주한 한인들은 제정러시아와 소비에트 체제의 정책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신한촌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에서 연해주가 지니는 장소적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연해주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과 동행하며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저항의 장소였다. 연해주 고려인 문단을 이끈 조명희의 「짓밟힌 고려」(1928)를 필두로 전동혁의 「삼월 일일」(1936) 등의 시편들과, 김준의 『십오만 원 사건』(1964), 김세일의 『홍범도』(1967) 등의 장편소설은 일제에 맞선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조선의 무리, 서울의 무리가-
밥과 자유찾는 무리가
만세를 부르며 닐어나던 장엄한 날.

밥대신에 탄환을 받고
자유대신에 철창을 받던
죽음과 공포의 날.

만세소리 변하여 울음소리 되고
피묻은 희ㄴ옷에 붉은피로 물들이던
슬ㅎ븜과 피의날.

이날은 언제던지 닞어지지 않으리라
이날에 아들죽언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도
이날에 어머니 잃은 아들의 머릿속에서도
이날에 남편 잃은 안해의 머릿속에서도.7)

   인용시는 식민지 조선의 ‘3·1운동(1919)’을 기리며, ‘조선의 무리, 서울의 무리’와 동행하며 ‘밥과 자유’를 찾아 ‘만세’를 부르는 장소, 연해주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다. 연해주와 조선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둘째, 연해주는 사회주의 체제와 공존하며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염원하는 장소로 그려진다. 1920년대 연해주 한인촌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지주-소작 관계는 여전히 농민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고, 러시아혁명과 내전은 생존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일본은 러시아 극동 지역에 군대를 파병하고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지원했다. 반면, 볼셰비키의 ‘무산계급 해방’ 이념은 고려인들의 궁핍한 삶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혁명군과 연합해 일제와 ‘백군’을 타도하고 소비에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김기철의 「복별」(1969)은 조선을 떠난 다섯 가정이 이국땅에서 새롭게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연해주에서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땅의 지주들과 ‘백파’의 착취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이주한 고려인들을 국적과 토지를 부여한 ‘원호인’과 그렇지 않은 ‘여호인’으로 구분하여 관리했다. 이로 인해 부유한 원호인들은 여호인들을 차별하고 착취하기 일쑤였으며, 일부 원호인들은 ‘백파’ 나아가 일본군과 결탁하기도 했다. 작품 속 마을 사람들의 삶은 “해마다 땅부치는 값이 오르고 세납들이 늘고 또한 이런저런 부렴들이 잦아서 살림살이”가 “쪼그라들기만” 한다.

   어머니는 한달에 한두어번씩 끌려가서 진저리나게 질문을 당하군하였다. 때문에 나도 어머니도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신 우리는 다른것을 기다렸다. 그것은 붉은파들이 속히 쳐나왔으면 하는것이였다. 그래야 일본놈들이 쫓겨나고 백파들이 망하고 민회장 김주사, 땅지기 이와노브 따위가 없어지고 놈들에게 거덜이 난 동리가 춰설것이 아닌가? (중략) 하긴 양력 2월중순에 안쪽에서 새소식이 들려오기도 하였다. 나바롭쓰크 저쪽 그 어디에서 붉은파들이 백파들을 쳐서 크게 이기였는데 붉은파들에는 조선사람들도 많이 들어 싸웠으며 그 붉은파는 계속 쳐나온다는것이였다. (중략) -왜 복별이 없다구들하오. 하늘엔 없지만 땅우엔 있소. 저 붉은기에 새긴 저 별이 복별이 아니고 무엇이오?8)

   화자의 아버지는 농사를 망치는 ‘백파’ 기병들에게 총을 쏜 후 마을을 떠난다. 어머니는 당국에 끌려가 ‘진저리나게’ 취조를 당한다. 화자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것’, 즉 ‘붉은파’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행운을 의미하는 ‘복별’은 ‘붉은파’의 ‘붉은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연해주에 뿌리내리려는 ‘신한촌’ 민초들의 염원이 러시아혁명의 이념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해방과 접속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이러한 연해주 고려인들의 열망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셋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에게 연해주(신한촌)는 ‘귀향’과 ‘희망의 상징’으로 표상된다.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고향은 이제 한반도(조선)가 아니라 신한촌, 즉 연해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신한촌 제비들이 여기로 날아오는 것은 아닐까?” (중략) 그렇다 봄이 오면 제비는 돌아올 것이다. 봄이 오면 우리도 집으로 돌아갈수 있을지 모른다. 하여튼 리선생은 제비둥지로 하여 그 어떤 희망을 얻었다. 그날부터 리선생은 밖으로 드나들 때마다 제비둥지를 쳐다봤다. 마치 귀향의 희망의 상징 같았다.9)

   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기나긴 이주의 역사를 시사한다. 그들이 한반도를 벗어나 연해주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살아온 역사는 거의 150여 년에 이른다. 연해주에서 태어나거나 유년을 보내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2세대들에게 조선은 더 이상 직접적 조국이 아니다. 연해주가 고향이자 뿌리인 셈이다. 이러한 세대 간 고향에 대한 인식 차이10)는 한진의 또 다른 소설 「그 고장 이름은?」(《고려일보》, 1991.7.30-8.1)에서는 연해주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세대(이주 2세대)와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세대(이주 3세대) 사이의 차이로 변주된다. 작품에서 임종을 앞둔 어머니는 고향 연해주를 떠올리며 딸이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말로 ‘그 고장 이름은?’이란 말을 되풀이한다. 러시아말을 사용하는 딸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상에서 고려인 문학에 나타난 연해주는 식민지 조선의 한 연장 혹은 일부분, 이념이 다른 체제와 공존하며 새롭게 뿌리내려야 하는 장소, 강제 이주로 뿌리뽑힌 자들의 또 다른 고향 등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탑 [ⓒ 서울신문]

3. 우슈토베, 크즐오르다, 그리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는 연해주에서의 꿈과 삶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강제 이주 후 정착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려인 문학에서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표상된다.

▲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경로 [ⓒ 조선일보]11)

   첫째, 무력함과 절망, 죽음의 장소이다. 그야말로 ‘피로 물든 강제이주’의 공간이다.

   신한촌 천여호에 사는 고려사람들 수천명은 누구나 없이 죄다 사흘동안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뇌성같은 지령을 받았다. 우리는 집에 있던 모든 가구들을 포기하고 며칠동안 먹을 식료품과 극히 긴요한 생활필수품과 당장 입을 의복들을 트랑크부대에 넣어가지고 강제로 화물자동차에 실려 정거장으로 나갔다. 우리들은 짐승들을 싣는 화물열차에 실려 떠났다. 무슨죄로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떠났다. 소변볼데도 없고 대변볼데도 없고 세수할데조차 없는 그 더러운 차속에서 맨 장판에 딩굴며 한달 두달 가는동안에 얼마나 많은 노인들과 어린애들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부모들을 어느곳인지 알지 못할 정거장 철도둑에 파묻었고 부모들은 죽은 자식들을 껴안고 통곡하며 그 어느 정거장인지 알지 못할 철로변에 파묻었다.
   지금와서 그 장례지낸 곳들이 어디인지 아무리 알려고 애써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그 이주는 피로 물든 강제이주였으며 고려인사람들은 짐승처럼 값없이 죽어갔다. 목숨이 붙어 당도한 사람들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쓰딴 산지 지방에 흩어졌는데 모두들 무인절도 황무지에서 잠땅, 모래벌, 갈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겨우 생명을 이어갔다.12)

   신한촌의 고려사람들은 “무슨죄로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뇌성같은 지령”을 받고 “짐승들을 싣는 화물열차에 실려 떠났다.” 노인들과 어린애들을 포함한 고려인들은 “짐승처럼 값없이 죽어갔다.” “목숨이 붙어 당도한 사람들”은 “무인절도 황무지에서 잠땅, 모래벌, 갈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겨우 생명을 이어갔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이러한 고려인들이 최초로 하차하여 정착한 장소의 하나였다.
   둘째, 무인절도 황무지를 콜호스로 일구는 경이로운 노동의 현장이다. 이는 연대의 공동체를 표상하는 생명의 대지이기도 하다.


   그다음 그는 카사흐인들이 정주생활을 시작할 때 걷던 그 수난의 길을 회상하면서 조선사람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효시하는것이였다.
   “부모된 마음이야 다 한가지이지요. 그 숱한 아이들을 잃고 속들을 얼마나 태웠으며 눈물인들 얼마나 흘렸겠어요. 우리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지않은 괴변을 겪었다오. 바로 4년전 1932년이였어요. 이때까지 우리는 유목생활을 했지요. 이 넓은 평원에서 동과 서, 서와 동으로 풀과 물을 따라다니며 양도 치고싶은대로 치고 고기도 먹고싶은대로 배불리 먹으며 살았지요. 손님이 한분만 와도 양을 두세마리 잡는 것을 례상사였지요. 그러다가 불시에 정주생활로 넘어가 양무리들을 공유화하고 고기배급제가 생겼는데 그것조차 제때에 주지 않아 고기기근이 들어 죽는데……”13)

   김기철의 「이주초해」는 새롭게 이주한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는 고려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은 원주민 카자흐인들의 도움을 받아 ‘씨르다리야 강’을 중심으로 콜호스를 형성하기 시작하여, 그 강변에 위치한 도시 ‘크즐오르다’에 이른바 ‘고려인들의 서울’을 건설하기에 이른다.14)
   셋째,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존의 가치관을 꿈꾸는 곳, 즉 현재의 삶을 성찰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진행형의 장소이기도 하다.

   “너에게 아버지가 없고 네가 조선말을 모르는것은 네잘못이 아니다. 크면 너는 자기 민족의 력사를 알게 될거야. 지금 책에 쓴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속에 살아있는 력사를 말이다. 너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리라는것을 알게 될거다. 그것을 알게되면 넌 더 자유로울수 있겠지. 그리고 너보고 그런 말을 물어보는 사람들은 미련해서 그러는거야. 그것들은 앞으로도 그냥 그런 질문을 할거다. 그것들은 조국을 배불리 먹여주고 편안히 근심없이 살수 있게 해주는것으로만 여기기때문이야. 그래 그들은 자기들과 조곰이라도 다른 점이 있는 사람을 보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의심을 품고 근심을 하고 호기심을 내는거야.”15)

   이는 언어와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 “기억속에 살아있는 력사”가 숨 쉬는, 차별과 배제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소이다. 조선말을 모르는 손자가 “자기 민족의 력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더 자유로울수 있”게 되는 세상을, 어린 화자의 할머니와 재혼한 러시아인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현주소, 즉 조선말과 할머니로 표상되는 세계(과거), 러시아어와 할아버지로 대변되는 세계(현재), “기억속에 살아 있는” 조선으로 상징되는 손자의 세계(미래)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슈토베, 크즐오르다 등으로 대변되는 중앙아시아는 연해주에서의 삶을 기반으로 황무지나 다름없는 죽음의 땅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생명과 연대의 공동체를 건설한 곳이자, 이를 바탕으로 후손들의 보다 자유로운 미래를 꿈꾸는 장소의 이미지로 표상되고 있다.

▲ 고려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우슈토베에 남겨진 비석 [ⓒ 필자 제공]

4. ‘주인’과 ‘종’이 아닌 ‘친구’로

   “새로 정착할 땅에 조상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아온 이들이 있으면 그들과 친구가 되어라…… (중략) ……그들의 주인이 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16)

   김숨의 『떠도는 땅』은 1937년의 강제 이주, 특히 중앙아시아 고려인 이주 150여 년의 역사를 응축한 ‘지옥 열차’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땅은 먼저 들어와 정착해 살고 있는 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다. 하여, 이주자들은 원주민들의 ‘주인’이나 ‘종’이 되지 말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단순명료하다. 하지만 우리는 ‘신대륙의 발견’이나 ‘대항해시대의 모험’ 혹은 ‘문명화의 사명’ 등으로 미화된 서구 제국주의 담론이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디아스포라적 삶을 양산했는지 잘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음에도 짐짓 모른 척하거나 지나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 뿌리내리기 위해 원주민들의 친구가 되었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에는 카자흐스탄 혹은 우즈베키스탄 주민들과 함께 살아야 했기에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은 한국, 연해주, 중앙아시아 사이에서 굴절·변형된 양상을 보인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또한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하여, 이들에게 한글 혹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그들의 문학을 ‘지금 여기’ ‘우리’의 기준으로 평가하기보다는 당시 그들의 상황을 참조하여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따라서 고려인 문학은 한국문학의 한 연장일 수 없다. 이들의 문학이 주목하고 있는 문제는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한국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기 어려운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고려인은 고려인 그 자체이고, 고려인 문학은 그냥 고려인 문학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고려인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고려인들이 한국 사람같이 말하면 그건 고려인이 아니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양원식)

▲ 크즐오르다시 상징탑. 꼭대기에는 고려인들의 노동을 상징하는 벼 이삭 조형물이 올려져 있다. [ⓒ 연합뉴스]

참고자료

1) 시몬 베유, 이세진 옮김, 『뿌리내림』, 이제이북스, 2013, 52쪽.

2) 서경식, 김혜신 옮김, 『디아스포라 기행』, 돌베개, 2006, 14-15쪽 참조.

3) 이명재, 「고려인 문단의 현황과 자료의 체계화」,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 2』, 국학자료원, 2006, 527쪽 참조.

4) 임형모, 「고려인문학에 나타난 낯선 장소와 공간 연구」, 『한국문학과 예술』 25집, 한국문학과 예술연구소, 2018.3, 192쪽 참조.

5) 중앙아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출생지와 생활 터전을 중심으로 개괄해 보면, 첫째 조선에서 태어나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중앙아시아로 간 경우, 둘째 연해주에서 태어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경우, 셋째 중앙아시아에서 출생한 경우, 넷째 북한에서 러시아로 유학 갔다가 망명한 경우, 다섯째 사할린으로 이주한 경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6) 연해주 고려인 한글문학은 소수민족의 문화적 자치를 허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정책을 기본 배경으로 하여 1923년 3월 1일 《선봉》 신문의 창간, 1928년 8월 포석 조명희의 소련 망명과 문학 활동, 1928년 3월 토박이 고려인 연성용의 희곡 창작, 《선봉》 신문 초대 주필 리백초의 새 문예 운동, 1928년 9월 막심 고리키의 격려 편지 등과 같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과 흐름에서 기원했고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성장했다. 1937년에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후에는 정치·사회적 여건이 일거에 고려인들에게 불리하게 변했고 한글문학을 지탱해 줄 물적 기반도 크게 손상되었다. 고려인 한글문학 자체는 연해주에서 형성된 형식과 내용 그대로 중앙아시아에 이식되어 전개되었다(김병학, 「중앙아시아 초원에 피어난 고려인 한글문학」, 《다양성+Asia》,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2023년 겨울 참조).

7) 전동혁, 「삼월 일일」, 《선봉》, 1936.3.1.

8) 김기철, 「복별」, 《레닌기치》, 1969.11.26.

9) 한진, 「공포」, 《레닌기치》, 1989.5.27.

10) 이러한 고향에 대한 인식 차이는 사할린 한인(고려인) 문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에서 태어나 사할린으로 징용된 이주 1세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고향(조국)은 한국(조선)으로 표상된다(장윤기, 「환향길 오십년」 등). 이에 반해 해방 후 사할린에서 출생한 이주 2세대 작가들에게 고향은 사할린으로 인식된다(리정희, 「살구꽃 필 때」 등). 사할린 한인(고려인) 문학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정선, 「사할린 고려인 한글 소설의 주제 양상 고찰」, 『국제한인문학연구』 제15호, 2015.; ‘박산향, 「사할린 한인문학의 현황과 의의」, 『인문논총』 48집, 2018. 등을 참조할 것.

11) 조선일보 2019년 7월 29일자 “영하 40도서 토굴 팠던 그 땅에… '同族如天' 첫 추모비”

12) 연성용, 「피로 물든 강제이주」, 《레닌기치》, 1995.2.4.

13) 김기철, 「이주초해」, 《레닌기치》, 1990.5.15.

14) 연해주의 주요 문화기관이었던 《선봉》(이후 《레닌기치》), 고려극장, 고려사범대학(이후 크즐오르다사범대학) 등은 이곳 크즐오르다로 이주하여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15) 강알렉싼드르, 「놀음의 법」, 《고려일보》, 1991.8.30.

16) 김숨, 『떠도는 땅』, 은행나무, 2020, 215쪽.

필자 약력
고인환_프로필.jpg

문학평론가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로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 『공감과 곤혹 사이』, 『정공법의 문학』, 『문학, 경계를 넘다』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프랑쎄파의 향기』, 『정령의 노래』 등이 있다. 2017년 남아공 케이프타운 대학 방문 교수.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