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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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깊이읽기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고명철

파울 첼란의 디아스포라:
‘유리병 편지’와 ‘시적 자오선’

고명철

1. ‘유리병 편지’로서 시의 운명

   제2차 세계대전 후 홀로코스트의 보통명사로 각인된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대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고 하여 홀로코스트의 반문명적 충격을 경험한 인간의 언어 예술이 갖는 무기력함에 환멸을 토로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의 시작(詩作)을 접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발언을 철회한다. 그만큼 첼란의 시 쓰기는 홀로코스트를 비껴가지 않고 응시하면서 시의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시 쓰기의 임계점까지, 그리고 그것 너머 이를 수 있는 시적 실천을 수행한다.
   첼란의 시문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산문 몇 대목을 읽어보자.

   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습니다,——분명 희망이 늘 크지는 않은——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한 편 한 편의, 시들도 이런 식으로 도중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주해 있는 겁니다.
   무얼 마주해 있느냐고요? 열려 있는 것,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서요.
   시에서 문제 되는 건, 그런 현실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1)


  그러니까, 시를 생각하면, 시와 더불어 그런 길들을 가는 걸까요? 이 길은 다만 돌아가는 길——자신에게서부터 자신에게로 가는 우회로일까요? 그러나 그건 동시에 또한, 다른 많은 길들 가운데서, 그 위에서는 언어가 목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는 길들입니다, 인지하는 ‘너’에게로 가는 한 목소리의 길들이고, 생명체의 길들이며, 어쩌면 현존의 기획이고, 자기 자신을 찾아서…… 자기 자신에게로 자신을 앞서 보내는, 일종의 귀향입니다.2)

   위 두 대목은 문학상 수상 연설로서 첼란의 시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시를 ‘유리병 편지’의 속성과 동일시하듯, 첼란에게 시는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다. 그 희망의 간절한 대상은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이고, 이 현실은 “언어의 목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는 길들”, 즉 “생명체의 길들”인바, 이 노정은 “자기 자신을 찾아서……” 가는 길, 즉 ‘귀향’이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좀 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첼란은 자신을 찾는 방법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자신을 앞서 보”낸다고 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 ‘유리병 편지’를 한 번 띄우는 데 만족하는 게 아니라 부단히 지속적으로 띄운다는 것이며, 자기를 이루는 숱한 또 다른 자기-자기‘들’을 향한 대화의 길을 내는 셈이다. 왜냐하면 사회문화적 존재인 자기가 조우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미처 숨죽이고 있던 또 다른 자기가 출현할 것이고, 예의 자기들이 생성하는 관계 속에서, 그렇게 현실의 길들은 열리며, 이 길들은 자기를 찾는 것으로서 ‘귀향’의 시 쓰기의 운명을 기꺼이 감내해 주기 때문이다.

2. 죽음을 응시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우선, 그의 시 「죽음의 푸가」를 음미해 보자.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죽음의 푸가」 부분3)

   「죽음의 푸가」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첼란의 대표시다. 동유럽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수도 체르노비츠에서 정통 유대인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난 첼란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디아스포라의 운명적 삶을 살게 된다. 그가 태어난 곳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하여 루마니아 지배를 받았고 제2차 대전 와중 소련과 독일이 번갈아 점령하면서 유대인 박해가 있었던 곳으로, 그와 그의 가족은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수감된다. 부모와 다른 수용소 생활을 한 첼란은 부모의 총살형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에 휩싸인다. 첼란이 강제 노동수용소의 지옥도를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시 쓰기인바, 그는 노동수용소에서 죽음을 기적적으로 모면하고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체르노비츠로 돌아온다. 「죽음의 푸가」가 이 무렵 쓰였듯, 첼란이 경험한 유대인 강제 노동수용소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공포가 섬뜩한 재현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4)
   유대인들이 ‘검은 우유’를 새벽과 아침과 저녁과 밤에 마시는 것은 살기 위한 게 아니다. ‘검은 우유’를 마시는 행위는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죽음의 향연에 취하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무도곡’인 ‘푸가’를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죽음의 주술에 걸린 관성적 행위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첼란의 시의 언어는 유대인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유린‧파괴‧부정된 자기 존재의 근원과 현존을 향한 되찾기이자 발견이며 갱신을 향한 사투다. 물론, 이러한 그의 시적 분투는 앞서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살펴봤듯이, ‘귀향’으로서 ‘유리병 편지’를 부단히 띄움으로써 전대미문의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멸살하고 망각하는 데 대한 저항의 시적 실천이다.

3. 가해자의 언어를 전복한 창조적 저항의 언어

   그런데 첼란의 이러한 시적 실천에서 각별히 주목할 게 있다. 그의 언어 사용이다. 정통 유대인 태생으로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히브리어를, 어머니로부터 독일어를, 그리고 유소년 시절의 국어로서 루마니아어를 익히고 사용했는데, 그의 문학적 글쓰기는 독일어로 일관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경험한 첼란은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표현하는 문학적 상상력을 펼쳤다. 가해자의 언어가 피해자의 현실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을? —「무덤 근처」 부분5)

   첼란은 어머니로부터 그토록 열심히 배운 가해자의 언어-독일어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이 거느리고 있는 피해자-유대인 박해의 고통을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으로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곤혹스러운 질문과 마주해 있다. 기실, 이 질문은 첼란의 시문학뿐만 아니라 그처럼 가해자의 언어를 갖고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을 응시‧성찰‧치유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글쓰기에 두루 해당한다. 이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부터 야기된 현실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심화 확대할 수 있는, 탈식민주의 글쓰기의 첨예한 과제로서 그 파괴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배의 언어를 적극 활용하되 지배권력의 통치에 무릎 꿇는 게 아니라 그것의 폭력과 총체적 부정에 대한 위반과 전복으로서 창조적 저항의 언어를 벼려내는 ‘유리병 편지’를 첼란은 띄운다. 그래서 첼란이 주목하는 말은 가령 이런 것이다.

밤에게, 침묵으로 얻은 그 말을.

껍질 벗기는 자 귀들이 화냥질하고
시간과 시대도 기어오르는
그 많은 다른 말들에 맞서
그것은 증언한다 마침내,

마침내, 사슬이 절거덕거리기만 하면
증언한다, 거기 황금과 망각 사이에
놓인 밤에 대하여,
예로부터 그 둘과 형제인 것에 대하여——
—「침묵의 증거」 부분6)

   어둠과 부정과 폭력의 말들로 공백화된 침묵, 그것의 장막을 찢고 터져 나오는 ‘증언’은 첼란에게 “시간의 균열 깊이/벌집 얼음/곁에서/기다리고 있다, 숨결의 수정(水晶) 하나,/폐기할 수 없는 당신의/증언.”(「결 드러나도록 닦아 냈다」)으로, ‘시의 언어’와 등가의 가치를 지닌다. 이 증언은 그러므로 “한 가닥 우렁찬 뇌성/진실 그것이/인간들 가운데로/들어서고 있다./은유의 회오리/한가운데로”(「한 가닥 우렁찬 뇌성」)에서 간명히 드러나듯, ‘진실’을 겨냥한다. 20세기 전반기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의 문명이 축적해 놓은 것들이 한갓 모래성의 누각인 양 총체적 부정과 파괴와 야만이 전횡한 현실을, 첼란은 “인(人)들과 간(間)들이 있는,/인간들이 함께 있는, 그래, 그/뒤엉킨 덤불과/눈 한 쌍이/거기 함께/눈물-또-/눈물로 함께 있는 그 동요를.”(「……좔좔 샘물이 흐른다」)에 스며들어 있듯, 무구한 슬픔의 동요로 자조(自嘲)한다.

4. 평화와 생명의 ‘시적 자오선’

   이처럼 첼란은 2차 대전 후 프랑스에서 나치 독일이 자행한 반유대적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과 저항의 시의 언어를 흡사 수도사처럼 수행 정진한다. 그러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2차 대전 후 아시아에서 일어난 베트남 전쟁을 외면하지 않은 시적 실천이다.

스스로 빛나는
포탄들이
하늘을 향하여 날아간다,

열 개의
폭탄이 하품한다,

속사(速射)는 피어난다,
평화처럼 그렇게 확실하게,

한 움큼의 쌀
네 친구로 죽어버린다.
—「아시아에 있는 어느 형제에게」 전문7)

   흔히들 첼란을 그의 유대인 문제에만 천착한 시인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첼란의 ‘유리병 편지’는 유대민족주의에 갇혀 있지 않다.8) 「아시아에 있는 어느 형제에게」란 시 제목에서 선명히 부각되듯이 첼란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여 전면전이 확대되는 소식을 프랑스에서 접한 후 위 시를 쓴다. 비록 프랑스가 베트남의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패배한 후 베트남에서의 식민 지배가 종식되었으나 인도차이나에서 서구의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미국의 힘을 빌려 본격화된 베트남 전쟁의 양상에 대해 다른 비판적 지식인이 그렇듯이 첼란도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이 시에서 첼란은 그의 살아생전 ‘죽음의 밤’ 사위에서 벼려낸 그만의 서정의 언어의 감응력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反戰) 평화의 시적 전언을 담은 ‘유리병 편지’를 띄운다: 베트남의 하늘 위에서 폭탄이 쏟아질 뿐만 아니라(“폭탄이 하품한다,”) 지상에서는 속사(速射)가 마치 꽃의 만개처럼 평화의 축포를 가장한 양 퍼붓더니(“속사는 피어난다,/평화처럼 그렇게 확실하게,”) 베트남 사람들의 생명 자체인 쌀-벼는 바로 예의 하늘과 지상의 무기의 파상공격으로 속절없이 죽는다(“한 움큼의 쌀/네 친구로 죽어버린다.”).
   이렇듯이 첼란은 프랑스에서 베트남 전쟁의 야만을 눈감을 수 없던 것이다. 첼란의 시적 감각기관 중 유대인 박해를 직접 경험한 시각-눈(眼)에 대한 부정적 심상을 고려해 볼 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첼란의 시적 응시는 이러한 부정적 심상을 꿰뚫고 전쟁이 동반하는 문명의 탈을 쓴 반문명적 폭력과 죽음의 현실에 대한 ‘대항의 말’ 9)이 지닌 창조적 힘을 간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첼란의 ‘유리병 편지’로서 시 쓰기는 존재하는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다. “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찾아내고 얻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10)란 첼란의 발언이 함의하듯,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심상과 시적 전언의 감응력은 그 자신이 2차 대전의 지옥에서 “그 자체의 ‘대답 없음’을, 무서운 실어(失語)를, 죽음을 가져오는 연설의 수천 겹 어둠을 뚫고 가야했”11)던 것처럼 이 악무한의 세계에 봉인되고 갇혀 있는 현실을 넘어선 뭇 존재들과 이어지는 평화와 생명의 ‘시적 자오선’을 찾아내는 데 미친다. 이것은 첼란의 ‘유리병 편지’가 띄워지는 이유다.

참고자료

1) 파울 첼란, 전영애 옮김, 「자유 한자 도시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 「죽음의 푸가」, 민음사, 2011, 223쪽.

2) 파울 첼란, 「자오선-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 연설」, 위의 책, 245쪽.

3) 위의 책, 40-41쪽.

4) 2차 대전 종전 후 첼란의 고향 체르노비츠는 소련 점령 지역의 우크라이나에 편입된다. 이후 첼란은 1947년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에 밀입국했고 1948년 짧은 프랑스 여행 후 파리로 이주하여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간다.

5) 위의 책, 22쪽.

6) 위의 책, 96쪽.

7) 파울 첼란, 허수경 옮김, 「파울 첼란 전집」 2, 문학동네, 2020, 308쪽.

8) 파울 첼란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 장 볼락은 첼란이 탐구하는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은 이른바 유대주의에 귀속되는 것을 넘어 ‘대항하는 유대주의’, 달리 말해 자신의 진실과 역사적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문학의 역사와 자유가 중요한 것으로, 우리가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의 유대인 시인이 아님을 역설한다. 장 볼락, 윤정민 옮김, 「파울 첼란/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에디투스, 2017 참조

9) 파울 첼란, 「자오선-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 연설」, 앞의 책, 228쪽.

10) 파울 첼란, 허수경 옮김, 「출판인이자 서적상인 플링커의 설문에 대한 답변, 파리(1958)」, 『파울 첼란 전집』 3, 문학동네, 2020, 212쪽.

11) 파울 첼란, 「자오선-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 연설」, 앞의 책, 222쪽.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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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문화를 공부하는 트리콘의 대표이다.
디아스포라 웹진 편집기획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고 있다.
1998년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로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여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