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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인연, 나의 소망

남영전

신화 인연

   돌이켜보면,
   나의 동년은 참으로 신기하였다. 5, 6살, 어른들의 말귀를 좀 알아들을 때, 나는 할머니의 옛말이 그렇게 좋았다. 황홀한 세계, 마음대로 나는 세상,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밤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그 가물가물하는 석유 등잔 아래서 할머니는 나를 위해 옛말 보따리를 푸신다. 전기 없는 편벽한 시골의 밤, 나는 할머니의 옛말을 따라 그 멀고 먼 서천 서역국이란 신기한 곳을 여행한다.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나지 않아도 밤마다 재미있는 세상 구경을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 세 글자도 쓰지 못하는 문맹이다. 하지만 그는 기억력이 좋아, 그의 할머니한테 들은 옛말을 빠짐없이 다 기억한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8세 때, 조실부모하여 6세인 남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 노할머니는 동네에서 옛말 할매로 이름났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그 노할머니로부터 옛말 유전자를 이어받은 것 같다. 나 또한 할머니로부터 옛말 유전자를 물려받아 옛말을 그렇게 좋아했던 것 같았다.
   1955년 내가 8세, 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100리 먼 현성에 들어와 남의 집 뒷방살이를 하였다.
   할머니와 손자가 사는 단출한 집이라고, 밤마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와 이야기판을 벌였다. 나 역시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매일 저녁 그날 작업을 미리 해놓고 동네 할머니들을 기다렸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나는 동네 할머니들한테 새로운 옛말과 그들이 어렵게 살아온 역사를 알게 되었다. 어린 동심이지만 늘 찡한 마음이었고 나의 인생을 사색하게 되었다.
   1961년 가을, 중학에 올라가서 나의 앞에는 하나의 심각한 문제가 놓여 있었다. 중학을 졸업하고 고중을 가려면 응당 200리 먼 곳의 조선족고중으로 가야 하는데, 나는 집 떠날 형편이 못 되었다. 고혈압에 심장병인 할머니는 때때로 입원 치료를 받는 상황, 할머니를 홀로 두고 내가 외지로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내 앞에는 오직 현지의 한족고중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었다.
   한어로 봐야 하는 한족고중 입시 시험, 나는 중학 1학년 때부터 한족중학의 중문 교과서를 얻어다 보았다. 다행히 그 시기, 조선족학교와 한족학교의 교과서, 어문 외 기타 과목의 내용은 동일하였다. 조선족초등학교에서는 3학년부터 하루 한 시간의 중문 교육, 조선족 중3의 한어 수준은 한족초등학교 5, 6학년 정도.
   1964년 여름, 3년 동안의 준비가 있었기에 나는 순리롭게 한족고중 입시 시험을 통과. 한족고중반에 들어서니, 담임선생님은 나를 그 반의 반장으로 임명. 이유는 조선족중학에서 온 학생이지만 입시 성적이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를 부럽게 하는 것은 한족 동창들의 고한어 수준이었다. 그들은 고한어에 능숙했다. 어떤 동창은 고한어로 작문을 즐겼고 어떤 동창은 한어문 수업 시간이면 아예 붓글로 필기를 하고 붓글로 작문을 하는 것이 옛날 선비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밖에 나에게도 한족 동창들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었다. 그 시기 고중의 한어문 교육은 작문 능력 배양을 중요시하였다. 한 학기에 두 번 있는 작문, 어문과 임 선생님은 번번이 나의 작문이 재미있고 신선하다 하였다. 고중 2학년 때, 나의 작문이 본보기 작문으로 선정되어 학교 벽보란에 올라 1300여 명 되는 전교 중고중 학생들 속에 하나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왜 이런 일이 있었는가?
   어려서부터 나는 신화에 젖어 자라다 보니 알게 모르게 신화 요소가 살과 뼈가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작문 제목을 내놓으면 나는 그 제목 내용을 자연스럽게 신화와 연계하여 사색하여 글을 짓기에 다른 동창들의 작문보다 언제나 좀 이색적이었다. 실상 고중 때부터 나는 신화 사유가 형성된 것 같다. 신화 사유란 현실을 신화와 연계하거나 비교하여 사색하는 사유를 말한다. 실은 신화 요소가 작문의 재미를 도운 것이다. 그 후 나는 또 신화의 덕을 크게 보았다.
   1968년 겨울, 우리는 문화대혁명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하고 지식 청년이란 이름으로 농촌에 내려갔다가 후에 다시 현성으로 돌아와 공장의 학도공이 되었다.
   1971년 봄, 각 지방에서는 문화대혁명으로 폐간되었던 문학지를 다시 회복하기로 결정되어 내가 있는 길림성에서는 문학작품 공모 활동을 벌였다. 우연한 기회, 공모작품 편집실의 시가 담당 선생은 내가 조선족 신분인 것을 알고 조선족 실생활을 반영하는 단시 한 수를 부탁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시를 써본 적이 없었지만 다행히 신화 사유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쓴 단시가 공모 잡지에 발표되어 중국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1978년 12월 말부터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문학은 문학의 본연으로 돌아왔다. 그 시기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신화 전설을 서사시로 엮는 일이었다. 각기 200행이 넘는 애정신화시 「원앙호」, 「천지의 전설」은 지방 문학지의 인정을 받아 문학상까지 받았다.
   1984년부터 내가 중앙 문학지에 발표한 서정서사시 「조모」, 「휘우듬한 그림자」, 「부친」이 1985년에 육속 국가급 상인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1등상,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 길림성 정부 최고문예상인 ‘장백산문예상’을 받아 화제가 되었고 나는 시인의 신분으로 중국 주류 문단에 서게 되었다.
   솔직히, 그때 나의 시가 창작은 나 개인의 고봉이었다. 고봉이 있으면 다음은 내리막이다. 시인의 생명은 새로운 창조란 것을 내가 알고 있기에 문인들의 박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새로운 도약의 고민에 빠졌다. 때마침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가 나에게 토템 깃발을 들어 주었다.
   일생 동안 인도주의를 주장해 온 그는 임종 한 달을 앞두고 절절한 유언 ‘오늘의 희망’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것은 토템식 형제 관계다. 이것은 비록 신화이지만 하나의 진리이다.”
   그렇다. 나의 가정 비극 같은 민족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전쟁을 피면해야 하고 인간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토템시로 인류 평화 염원을 표현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려서부터 줄곧 신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나는 지난 20세기 1980년대 초부터 또 신화의 모체인 토템 미학 공부에 흥취를 가져 토템 정의를 터득하였고 토템 예술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민족의 상고 신화에서 그 민족의 토템을 찾을 줄 알았지만 우리 민족의 토템은 어느 학자의 책에서도 거론되지 않아 무척 섭섭하였다.
   다행히 1985년 나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가지게 되었다. 기이편을 펼치니 우리 민족의 생동한 신화들이 반갑게 뛰어나왔다. 도합 31건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신화들 모두 토템 정의에 부합되는 토템 신화였다. 나는 기뻤다. 콜럼버스가 미주 신대륙을 발견한 기쁨이었다. 31건의 토템 신화에서 나는 우리 민족 여러 씨족에 속하는 50여 개의 토템을 찾았다.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들이었다.
   1986년, 나는 토템시 창작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토템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일반 시의 창작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어야 한다. 토템은 조상을 탄생시킨 조상신, 우리의 선인들이 이 조상신을 숭배하고 신앙하는 그 정신 경지와 이상 추구를 터득하여 그 토템물의 형상 특징을 빌어 상징 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 실상 한 수의 토템시, 하나의 토템을 깨닫는 작업, 하나의 토템을 깨달으면 한 수의 토템시가 나온다. 연평균 3수의 토템시였다.
   1987년부터 나는 토템시를 발표, 처음 나간 토템시 「산혼」이란 제목으로 「달」, 「곰」, 「사슴」, 「학」 4수가 《시인》(9, 10월호) 시간지 톱 자리에 실렸다. 시가 새롭다고 문단의 반응이 좋았다.
   1993년 12월, 나는 생각밖에 미국문화예술원으로부터 ‘영예문학박사학위증서’를 받았다. 알고 보니 미국 LA의 김운송 시인이 나의 토템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시간지에 발표를 했었다. 미국문화예술원에서는 나의 시가 자연 문학에서 독특한 특색을 가진 시로 평가되어 이 증서를 발급한 것이다.
   1995년, 시 평론가 오개진, 효설 선생은 각기 중국작가협회의 《시간》(6월호), 중국사회과학원의 《민족문학연구》(3호)에 나의 토템시 평론을 발표, 이때부터 중국에서 토템시란 새로운 문학 장르가 출현하였다.1994년 8월, 서울전예원출판사는 김운송 시인의 영역 토템시 21수를 거두어 중국어, 한국어, 영어 대조본 《남영전시선집》 정장본을 출판, 나의 첫 번째 토템시집.
   그해 문학 이론가 곽지우 선생이 21수의 토템시를 논한 3만 자의 시평 「인성본연의 부름, 민족영혼의 재주조」가 『중국개혁개방이론과 실천』(중국대지출판사, 2000, 1989쪽) 대형 논문집에 수록, 또 우수 논문상으로 선정, 토템시의 출현은 중국 개혁개방의 하나의 성과가 되었다.
   1997년 8월, 서울 제17차 세계시인대회 때, 대회 집행 주석 백한이 시인은 나의 시와 논문을 두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시인들의 영원한 주제, 하지만 500년 동안 누구도 이 주제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다. 이번에 남영전 시인이 토템시로 이 명제를 명중하였다”고 하였다.
   시인대회가 끝난 이튿날, 나는 귀국하려고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하였다. 놀랍게도 고구려출판사 이보온 사장이 나 먼저 공항에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사연인즉 나의 토템시를 한중(韩中), 중한(中韩) 두 가지 판본으로 출판하려고 하는데 귀국 후 속히 메일로 두 가지 문자의 시고를 보내라는 부탁이었다. 그해 11월에 24수의 토템시를 수록한 두 가지 판본의 멋진 토템시집이 출판되었다.
   1998년, 슬로바키아 제18차 세계 시인대회 때, 슬로바키아는 농업국으로 나의 토템시 「흙」을 특별히 좋아하였다. 그들은 대회 기간 ‘중국 시인의 밤’ 행사를 마련하여 나더러 토템시 「흙」 낭송을 부탁하였다. 이 행사는 전국 TV 생방송이었다. 그날 행사를 지켜본 백한이 시인은 날 보고 “이번에 남 시인이 슬로바키아에서 판을 쳤네요” 하였다.
   이번 대회에서 세계 시인대회 주석인 미국의 로스마리 여사는 대만 시인이 중문으로 번역한 자기의 단시 한 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해변가의 풍경」, 아주 재미있는 시였다. 그래서 내가 시 감상을 말했다. 바다는 사람으로 인해 활기를 띠고 사람은 바다가 있기에 즐겁다고. 대만 시인이 옆에서 통역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로스마리 시인은 새로운 시집을 출판할 때마다 나의 시평 한마디를 시집 뒤표지에 올려놓았다. 후에는 또 그 한마디 말을 넣은 책갈피를 제작하여 새 시집과 함께 부쳐 왔다. 지금도 나의 책장에는 그 한마디 말이 뒤표지에 있는 그의 새로운 시집 세 권이 기념으로 간직되어 있다.
   어쩌면 세월은 그렇게도 빨리 흘러갔다. 나에게 옛말을 들려준 나의 할머니와 동네 할머니들, 모두 옛말 속의 주인공이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상기의 귀인들 중 효설(1935년생) 선생 외, 모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효설 선생은 1995년 봄, 중국 문단에서 선참으로 토템시평 깃발을 들어준 시 평론가로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나의 토템시 창작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분이다. 2020년, 그는 내가 한어로 쓴 『삼국유사』 신화 해설문을 보고 또 「남영전의 새로운 발견」이란 논평을 썼다. 이 논평은 2022년 10월에 새로 출판된 그의 논문집에 수록되었고 책이 출판되는 즉시 택배로 곤명에서 나에게 보내주어 내가 큰 감동을 받았다.



나의 소망

   2003년 8월, 18년의 깨달음, 42수의 토템시, 나의 소망 『원융』 이름으로 출판.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은 ‘원융’의 뜻이 좋아서 교훈(校训)으로 하려고 교육 담당 부총리였던 이람청 선생을 찾아갔더니 그는 연변대학은 민족대학으로 ‘원융’ 이념이 너무 좋다고 하면서 붓을 들어 ‘원융’ 두 글자를 멋지게 써주었다고 한다.
   또 재미나는 일이 있다. 줄곧 나의 토템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 평론가 추건군 교수는 자기가 몸담은 중남민족대학이 나의 토템시 연구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 무한 중남민족대학은 중국의 토템 학설 개척자 잠가오(岑家梧)가 문화대혁명 이전에 대학 부총장으로 전국 토템 학설 연구 중심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미나의 활성화를 위해 작자는 불참이라고 하였다.
   2003년 6월 22일, 중남민족대학, 무한대학, 사천대학, 화중과기대 등 네 개 대학의 교수와 관계 부문의 학자, 그리고 석박사 연구생들이 참석한 세미나는 대단히 재미있었다고 하면서 세미나 현장의 녹음 테이프를 나에게 보내왔었다.
   그해 11월, 추건군 교수가 편찬한 토템시 논문집 『원시토템과 민족문화』가 출판되어 토템시 연구에 선두 작용을 하였다. 지금도 나는 이 논문집에 수록된 석박사 연구생들의 논문을 읽으면 그들의 학술 수준에 감탄을 거듭한다.
   2004년 7월, 사천성 성도의 율원소적 등 4명 시 평론가들의 공저 『남영전 토템시 감상』이 출판.
   그해에 중국서부문예통감위원회, 사천대학, 서남민족대학, 사천사범대학, 성도시예술가협회의 공동 주최로 광서 《美术界》, 성도 《星星》, 《四川侨报》, 《阿坝日报》를 발표 원지로 하는 남영전 토템시 서화 공모전을 가졌다.
   2005년에는 남영전 토템시 서화 공모전 전시 작품집 『시서화의 시대공진』이란 화책이 출판되어 하나의 풍경선이 되기도 하였다.
   2005년, 토템시집 『원융』은 두 개의 큰 문학상을 받았다. 1월에는 길림성 정부의 최고 문예상인 장백산문예상을, 6월에는 국가급 상인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준마상을.
   2006년 3월 28일, 중국 시평계의 두 거두인 사면(谢冕), 오사경(吴思敬) 교수의 주선으로 수도사범대학에서 ‘남영전시가연구회’를 가졌다. 오사경이 사회를 보고 사면이 주제논문을 발표하는 이 세미나는 수도 시평계의 유명 학자, 평론가들의 참석으로 열띤 분위기였다.
   2007년 4월, 오사경이 편찬한 『남영전 토템시 탐론』 출판.
   2007년 6월, 절강성 호주사범학원 마명규 교수가 편찬한 『남영전 토템시론 정수』 출판.
   2007년 12월, 마명규 교수의 저서 『남영전 토템시학』 출판.
   그 시기 우리 문단에도 주류 문단과 동행하는 세 사람이 있었다.
   개혁개방 후, 줄곧 주류 문단의 문학 동태를 주시하고 한어 작품을 많이 독서하는 시인, 시평론가 한춘 선생은 1995년에 예술인류학으로 토템시를 조명하는 시평 「영원으로 달리는 신들의 잔치」를 내놓았다.
   박식한 시인, 시 평론가 박화 선생은 나의 토템시 창작을 적극 지지하였고 우리 민족의 토템물은 38개라고 말해 주었으며 토템시평 2편을 발표하였다.
   동북사범대학 중문계를 나온 임범송 교수는 대학 시절에 토템 미학과를 통해 토템 예술을 알았다면서 두 편의 중문 논문을 2004년 연변대학 중문학보에 발표하였다.
   하지만 나의 토템시, 많은 독자들에게는 어리둥절한 시였다. 문학 행사에서 자주 만나고 개인적으로 허물없이 지내는 《천지》 주필 이상각 시인은 나를 보고 “한족들이 그렇게 좋다 하는 남 주필의 토템시, 나는 한어가 짧아서 중문으로 봐서는 좋은 줄 모르겠고 우리말로는 또 아리숭하다이” 하였다. 그렇다. 토템시는 토템을 알아야 읽을 맛이 나지만 토템을 모르면 그냥 좀 유별난 영물시로 읽힌다. 솔직한 이상각 시인의 말, 대다수 독자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이다.
   한쪽에서 모르는 것을, 다른 한쪽에서 자꾸 좋다고 하면 모르는 쪽에서는 반감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몇몇 문학 동료가 인터넷에서 나에게 공개 질문을 하였다. 곰 토템? 곰이 우리의 시조모라면 우리는 곰의 새끼란 말인가? 이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우리 민족교육은 한족들과는 달리 대학을 나와도 토템 미학과가 없기에 토템을 모른다. 심지어 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져도 토템 미학은 여전히 공백이다. 이러한 문단 현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2008년 봄, 한국 한림대학 교수, 『중국조선족문학의 어제와 오늘』의 저자 정덕준 선생이 장춘에 날아와서 제안을 하였다. “토템시를 죽여야 하는지 살려야 하는지 세미나를 가져보자”고 하였다. 때마침 장춘사범대학 문학원 원장 손박 교수가 학생들에게 토템시를 강의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래서 그해 6월 30일, 한림대학교와 장춘사범대학이 손잡고 장춘에서 한중 토템시 세미나를 가졌는데 중국작가협회의 관계자, 길림성위 선전부 문화 담당 부장이 와서 축하하는 등 아주 성공적이었다.
   2009년 12월, 역시 정덕준 교수의 제안으로 부산 부경대학과 중국작가협회가 손잡고 부경대학에서 한중 세미나를 가져 하나의 화제가 되었다. 또 울산문화원의 관계자 이두철 회장, 진주 한국국제대학 고영진 총장의 요청으로 이 두 곳에서 또 세미나를 가져 호평을 받았다.
   ‘남영전 토템시 공동선택과(한 학기)’를 개설. 학생들의 호감으로 이과 학생들도 대거 참여, 400개 좌석의 학당에 자리가 모자라 복도에 선 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학생들의 작업, 토템시 논평을 마명규 교수가 책으로 묶어 나에게 보내주어 큰 감동을 받았다.
   2010년 3월, 그동안 무거운 직책으로 정신없이 달려온 내가 퇴직하게 되어 글 쓰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오랜 숙원, 대만을 두 차례 방문할 수 있어 대만 원주민들의 토템 풍속을 실감할 수 있어 큰 수확이었다.
   2012년 12월, 『원융』의 42수 토템시와 그동안의 53수의 시를 묶어 시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출판.
   이 시집은 길림성전민열독협회 중점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일련의 행사가 있었다.
   2014년 9월, 길림성전민열독협회가 장춘공업대학과 손잡고 남영전 토템시 특별 강연 활동 진행.
   2015년, 길림성전민열독협회기관지 《天下书香》은 『남영전 토템시 특집』 출간, 전성 각 협회에 2만 부를 배포.
   2015년 4월 27일, 길림성위선전부, 길림성문화청, 길림성점민열독협회의 공동 주최로 길림성 대학교수와 방송국 아나운서로 조성된 ‘남영전 토템시 낭송회’를 새로 건립된 장춘도서관에서 성대히 진행, 장춘의 문화 풍경선이 되었다.
   2018년 여름, 나는 놀라운 소식 하나를 접했다. 평생 『삼국유사』를 연구한 한 학자의 말, 지금까지 출판된 단군신화와 『삼국유사』 전문 연구 저서가 250종, 논문이 5000편이 넘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연구 저서, 토템 학설로 조명한 것은 한 편도 없는 것 같았다. 무척 안타까웠다.
   알고 보면 『삼국유사』의 신화는 모두 토템 정의에 부합되는 토템 신화, 이 토템 신화를 토템 학설로 조명하지 않으면 신화의 진면모가 밝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해 9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토템 학설로 『삼국유사』를 조명하는 글 「삼국유사는 조상들의 토템이야기」를 집필하였다.
   2020년 4월, 길림신문사의 홍길남 사장은 나의 글을 보고 토템과 민족문화 관계 이야기를 부탁하였다. 하여 나는 토템과 성씨 관계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조 단군왕검은 호가 단군이고 왕씨 성에 이름은 검이라 했더니 한 독자가 벌떡 뛰었다. 시조의 이름이 단군이고 왕검은 임금이란 말인데 무슨 동화 같은 얘기냐고?
   나도 깜짝 놀랐다. 1985년, 내가 『삼국유사』를 처음 접할 때, 나의 머릿속에 시조의 호가 단군이고 이름이 왕검이란 것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본 『삼국유사』(권상로 옮김), 웅녀가 낳은 아이를 단군왕검, 이 네 글자의 뜻을 명확하기 위해 원문을 읽었다. 고한어인 원문에 호를 단군왕검, 좀 애매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전편을 보면 坛君은 호이고 이름은 王俭인 것이 명백해진다. 2009년 2월, 중국 악록사(岳麓社)가 출판한 『삼국유사』 해설, 원문의 이 한 곳의 애매함을 감안하여 해설에서 단군은 호이고 왕검은 이름이란 것을 특별히 밝혔다.
   실상, 『삼국유사』 원문은 알기 쉬운 고한어, 오직 원문을 읽을 수 있는 독자라면, 坛君은 시조의 호, 王俭은 시조의 이름, 변론할 여지 없는 명백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조는 일찍 잃어버린 자신의 성씨와 이름을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하늘에서도 서운하여 한숨을 짓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상고 신화 문자 기록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 시기 중국의 상고 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쌍벽을 이룬 시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자는 상고 신화에 반감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출생이 떳떳하지 못하여 그 어떤 위축감이 있었던지 삼황오제의 기이한 출생설을 괴력난신으로 비난하였다.
   그 시기 노자의 도학파, 공자의 유학파, 묵자의 법학파가 백가 중 대표적인 삼파였다. 삼파 중 묵자는 공자를 맹렬히 비판하는 학파였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주장을 묶은 《论语》가 나오자 묵자의 제자들도 묵자의 주장을 묶은 《论语》를 내놓았다. 이 묵자의 『논어』는 주로 공자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 시기 공자는 20년 연상인 노자를 스승으로 칭하였지만 노자는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무제 때부터 공자의 ‘仁, 义, 礼, 智, 信, 忠, 孝’의 주장, 특히 백성은 부모에 효도해야 하고 천자에 충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권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기에 ‘파출백가, 독존유술(罢黜百家, 独尊儒术) 국책을 실시, 동한 때부터는 유학을 아예 국교로 지정, 그로부터 2000년 지속되는 유교, 무성했던 신화수(神话树)는 가지와 잎이 다 떨어져 나갔다. 삼황오제의 출생설도 한두 토막의 이야기로 남았다. 이리하여 그리스로마 신화가 세계에서 판을 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김부식 시대, 송나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신화도 중국과 똑같은 운명이었다. 조정은 김부식에게 명하여 공자가 중국의 삼황오제를 뻬버린 사서 《商书》를 본보기로 삼국의 역사를 다시 엮게 하였다. 그래서 김부식이 엮은 『삼국사기』는 고조선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마저 빼버렸다.
   130년 후에 출생한 일연은 유교, 도교, 불교를 깨달은 성인으로 공자와 김부식의 과오를 알았기에 김부식이 버린 신화를 원형 그대로 『삼국유사』에 거두었다. 하지만 유교를 성지로 삼는 조정, 『삼국유사』의 간행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다행히 일연의 훌륭한 제자들에 의해 『삼국유사』는 전승이 되었다. 또 행운인 것은 수탁본으로 전해지는 『삼국유사』, 귀인 육당 최남선을 만났다. 시인이고 역사학자인 최남선,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김부식과 안정복의 사서를 읽고 자란 역사학자이지만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역사지리학부의 유학으로 토템 학설에 눈뜨게 되었고 일본인 손에 흘러 들어간 『삼국유사』를 발견하고 되돌려 받았다.
   최남선은 『삼국유사』를 읽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민족문화유산의 보물이었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수탁본으로 전승되는 『삼국유사』는 누락된 글자와 오자가 많았다. 고한어에 조예가 깊은 최남선, 『삼국유사』 복원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기간의 심혈, 1927년 계명사가 최남선의 교정본 『삼국유사』를 출간. 그 후 최남선의 교정은 계속되어 1943년에 三中堂의 신증본, 1946년 또 三中堂의 신증본이 출간되었다.
   만약 최남선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삼국유사』를 영영 잃었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최남선의 공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 일찍부터 서양 문화에 눈을 돌린 일본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고 있기에 공자의 괴력난신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상고신화를 더더욱 중요시하였다. 그들은18세기부터 서양 인류학자들의 저작을 받아들였고 19세기 말부터는 토템 학설 연구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부터 동양의 토템 학설 연구 중심이 되었다. 신화 의미의 발견으로 1950년, 일본은 자국의 상고신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재 등록 제안에 성공하였다.
   우리 민족은 지난 세기 초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토템 학설에 눈뜰 기회를 놓쳤다. 다행히 최남선의 일본 유학으로 그가 『삼국유사』를 만구하였고 『삼국유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최남선은 『삼국유사』를 고대사의 신전(神典), 신화전설집(神话传说集)이라고 높이 평가. 하지만 구체적으로 해설하지 않았다. 학계에서 토템 학설을 모르고 있는 상태, 시기상조였다. 그는 『삼국유사』의 신화 터득을 후세의 작업으로 놓아두었다.
   알고 보면 『삼국유사』 신화는 동양의 대표적인 신화, 동양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보물, 응당 일찍이 세계에 선보여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빛을 못 보고 있다.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동안 나의 토템시, 학자들의 전문 저서, 논문집 13권 출판, 국내외 12차례 세미나, 하지만 토템시는 우리 문단에서 홀로 아리랑이었다. 2008년부터 인터넷에서의 시와 비의 쟁론은 막을 내렸지만 사람들 머릿속의 시와 비는 현안(悬案)으로 남았다.
   이러한 형국이 안타까워 윤윤진, 권혁률 교수는 한어문 토템시론을 주류 문단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2018년에 동행자 한 분이 나타났다.
   그는 우리 문단에서 유일하게 중문으로 중국 4대 고전 명작을 읽은 작가.
   그는 중국 고문헌의 소재로 중국 역사소설을 엮어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준 소설가.
   그는 우리 문단이 토템시를 놓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몹시 궁금하였다.
   그래서 그는 2년간의 각고의 노력으로 토템 학설과 『삼국유사』의 신화를 터득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 민족 씨족들의 토템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래서 그는 나의 토템시의 토템이 왜 우리 민족의 토템이고 또 왜 영물시가 아닌 토템시인가를 하나하나 밝혔다.
   그의 해설문 시리즈는 요령신문, 흑룡강신문에 각기 일 년 동안 연재, 조글로는 그 즉시 전재하여 문단의 풍경선이 되었다. 이 일을 두고 줄곧 토템시를 지지하고 성원한 평론가 김룡운 선생은 중국 조선족 문단의 일대 장거라고 평가하였다.
   지금 현춘산 선생은 중국 토템 학설의 개척자 잠가오가 1937년에 출판했고 금년 1월에 재판된 그의 토템 저서 『토템예술사』를 번역 중이다.
   이 책이 독자들과 대면한다면 토템 학설의 사막지대인 우리 문단이 점차 토템 문화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을 쓰기 직전인 11월 24일 오전, 길림성작가협회, 길림TV방송국 연합 취재팀이 나의 자택을 찾았다. 이번 취재의 마지막 질문, “시인님은 왜 몇십 년 동안 토템 문화, 이 한 개의 우물을 파십니까?”였다.
   나는 두 가지 이유라고 답했다.
   첫째, 알고 보면 토템은 세계 각 민족의 문화와 풍속 습관을 형성시킨 뿌리 문화다. 만약 한 개의 민족이 토템이 없다면 그 민족은 역사가 없는 민족, 불완전한 민족이다. 이 뿌리 문화인 토템은 그 민족 성원들에게 “인생삼제(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답을 주는 문화, 그래서 토템은 그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지는 문화다. 그래서 토템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과 관계되는 문화다.
   둘째, 토템은 사람과 자연 관계의 생명철학. 사람도 자연에서 왔기에 자연 족속, 자연 족속은 반드시 자연법칙을 따라야 한다. 자연법칙을 따라 천인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실상 우리 생활에 건강과 음식물의 관계, 중요한 천인합일 문제다. 만약 이 천인합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몸에 병이 온다.
   이상 보듯이 토템은 우리 매개인의 인생과 건강과도 밀접히 관련된 문화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도 토템 문화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토템 문화를 파고들다 보니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 계속 더 깊이 파게 된다.
   나의 견해에 취재팀도 공감해 주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쯤에서 끊는다.
   하지만 토템은 계속 우리와 동행이다.

   2023년 12월 23일 장춘에서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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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출생. 중국작가협회 회원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장백산잡지사, 길림신문사 사장 역임. 시집 『상사집』, 『원융』, 『남영전토템시집』 등 20권 출판. 네 차례 국가급 문학상 수상, 2010년 중국당대 걸출민족시인 10인, 2017년 중국 신시 100년 100인 선정. 1987년부터 토템시 발표, 토템시 창시자로 『남영전토템시학』 등 학자들의 전문 저서, 논문집 13권 출판. 국내외 12차례 세미나, 그중 한국과 4차례 세미나 진행, 『남영전토템시학』은 중국 내 대학교 교재, 석박사생들의 논문 대상이 되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