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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 버스정류장에서, 대곶면 사거리 과일가게 앞에서

함민복

양곡 버스정류장에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낮은 산골짝마다 작은 공장들이 숨어 있고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네팔 몽골 우즈베키스탄 국기가
구멍가게 간판에도 그려져 있는
대곶면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말들을 닮은 얼굴들
수염을 기른 젊은 말들
깊은 눈빛에서 솟는 말들
웅얼웅얼 굴러가는 어깨 좁은 말들
이곳보다 더 추운 나라에서 왔거나
처음 눈을 맞아보았을 말들이
주말이라 외출을 나왔다가 돌아가며
영하의 공중에 나직나직
말들의 섬을 만들어 놓는다

태양열로 온기를 공급하는
긴 간이의자에 앉아 있다가
곁이 된
한 사내의 통화를 듣는다
먼 고향에서 들려오는 듯
안쓰러움 담긴 나이 든 여인의 음성
찌릿― 감전이 되어
사내의 고단한 노동 현장을 그려본다

펭귄 울음소리처럼 몰려 서 있다가
버스가 들어오자 우르르 몰려가는
저들에게, 여기는, 지금은,
저들 인생 어디쯤의 정류장일까

대곶면 사거리 과일가게 앞에서

대곶면 사거리 버스정류장 옆에
동남아 여인이 주인인 과일가게가 있다
도통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과일들뿐인데
손님들은 좋고 나쁘고 신선한 것들을
딱 보아 구별할 수 있는지
검은 비닐봉지에 잰 손놀림으로 골라 담고
주인은 웃으며 말을 건넨다

혹여,
‘고향에서의 과일 신선도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 과일들이 우리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마음을 헤아리자고’
농담을 던진 건 아닐까

언제였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사연 하나

‘동남아에서 경상도 시골로 시집을 왔는데
말은 통하지 않고 시집은 너무 가난해
하루하루를 견뎌내기가 힘들었지만
남편의 착한 마음만 믿고 살았지요
고향이 메콩강 강가라
민물고기만 좋아하는 입이 짧은 나를 위해
남편은 자주 민물고기를 잡아 오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물에서 뇌전증 발작을 해 남편이 죽고 말았어요…’

그 동남아 새댁은 어찌 되었을까
그 동남아 새댁의 꿈은 어찌 되었을까
이 땅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저 과일가게 여인처럼 고향 사람들에게
고향의 일부인, 향기 나는 흙, 과일을
전해 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저리 생각에 젖어 올려다보기도 하며

필자 약력
함민복_프로필.jpg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계간 《세계의 문학》 등단.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노래는 최선을 다해 곡선이다』 등의 시집 발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애지문학상, 권태응문학상 등을 수상.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