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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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현장

재아문인협회 소개

장영철

  내 나라의 말과 글이 있어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곳이 있다.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니고, 정치 이념 등으로 극심한 통제를 받기 때문도 아니다. 이민자들의 삶이 그렇다.
  어떤 이유에서든,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서, 문화와 풍속이 전혀 다른 곳에서 초기의 이민 생활은 내 나라의 말과 글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이질적이고 생소한 언어로 우선 급한 밥벌이에 나서야 하는 이민 가장의 다급한 모습은 비감한 생활, 그 자체이다.

같은 배를 탄 운명 공동체

  아르헨티나의 공식 이민은 1965년 8월 영농이민 1차 13세대(78명)가 부산항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고향을 찾아 부모‧형제 친지들을 볼지 알 수 없는 착잡한 마음에 멀어져 가는 부산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 끝내 눈물을 쏟아낸 이들은 항해 두 달여 만에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에 닻을 내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내 나라의 말과 글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야 했다. 당시 이들의 현지어 수준은 “항해 기간 중 얻어들은 몇 마디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간단한 현지어 한두 마디 내뱉는 수준에서, 잘 놀던 아이가 갑자기 고열과 함께 경기(驚氣)라도 일으킬 때면 아이를 둘러업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가기만 했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관공서에 일 보러 가서도 현지어를 모르니 내 순서는 뒤로 밀리고 밀리다 퇴근 시간과 함께 끝내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 모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겪는 수모였다, 초창기 이민 1세들의 가슴을 열어보면 아마도 모두 까맣게 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까맣게 탄 가슴으로 동포들을 만나면 쌓였던 한을 토해내듯 우리말로 서로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받고 격려해 주었던 이들은 오로지 내 동포들뿐이었다. 피를 나눈 동기간 이상이었다. 우리말은 동포들을 만나야 가슴에서 끄집어내졌다.
  해외동포를 ‘바람꽃’이라 부른 조선족 작가가 있다. 바람이 불면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바람이 멈춘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으리라. 남미, 아니 아르헨티나에도 바람꽃 날아와 자리를 튼 지 반세기가 넘었다. 이 바람꽃은 그때 아무런 밑그림도 없이, 현실을 이겨내야 한다는 각오만으로 두 다리를 서 있게 하는 힘이었다. 지금 서 있는 이 땅에 대한 ‘믿음’을 가질 최소한의 정보조차 얻지 못했음은 물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차분한 계획을 세울 처지가 되지 못했다. 당시 남미의 이민자들은 사실상 방치된 이들이었다, 나가서 뿌리내리고 살면 다행이고 잘못 돼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고국 정부도, 거주국에서도 관심의 대상 밖에서 초기 이민자들은 각자도생의 삶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주역들은 이제 생존해 있는 이조차 몇 남지 않았다. 시간이 만들어 낸 변화다. 사반세기는 구시대에서 신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받는 세대교체의 시간이었다. 구시대의 대칭적 개념으로 불렸던 신세대도 이제는 신신세대에게 자리 물림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시간은 순리에 어긋남이 없이 흐르고 흘렀다.
  아르헨티나 1차 영농이민자 78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3일 후 2차 영농이민자 5세대가 부산항을 떠났다. 이 배에도 1차 영농이민자들 때처럼 아르헨티나를 포함해 브라질, 파라과이로 가는 이민자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러나 파라과이 영농이민자들은 현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내 아르헨티나로 재이주, 1965년 말부터 1966년 사이에 동포 수가 늘면서 영주권 문제 등 이민 생활 전반에 대해 개인이 스스로 대처하기에 어려움을 겪자 비로소 자신들의 주장과 민원을 대신해 줄 단체 구성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1966년 3월에 ‘재아(르헨티나)한인회가 설립되었다. 1차 영농이민자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지 반년 만에 비교적 빨리 설립됐다.

우리 말과 글을 가슴에서 끄집어내게 한 정보 매체

  이민 초창기의 동포들은 현지 정보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정보에도 목말라했다. 한국과 아르헨의 거리만큼 문화적 고립감은 그만큼 컸다. 고국의 정보는 개인이 전화로 전해 들은 소식을 동포들에게 다시 전하는 수준이었고, 대사관에서 들여온 신문을 가져와 돌려 읽는 것이 고국 정보를 얻는 정도였다. 또한 동포들은 이민 사회의 물정을 대충 짐작만 할 뿐 정확히 알 수 없어 정보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다소나마 이 갈증을 풀어준 것이 교회의 ‘주보’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1967년 한인회가 ‘교민회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모양은 타이프 용지(33cm*23cm)를 두서너 장씩 철해 원지를 써서 등사하는 재래식 방법이었다. 내용은 만화, 만평, 이민 수기, 동포 사회의 동정, 이민 사회의 각종 정보 그리고 대사관에서 모국 신문을 가져와 일부 내용을 옮겨 싣는 정도였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문화 활동을 주도한 청년들과 신이민자의 유입

  이 무렵 문화 활동을 주도해 온 이들은 청년들이었다. 구이민자의 자녀들이 주축이 되었다. 부모와 함께 쓰라린 이민 생활을 같이하며 그 과정을 목격하면서 성장한 세대다. 이들은 스스로 조직한 ‘모임 우리들’(1972)을 통해서 더욱 결속됐으며, 이민지에 대한 인식도가 높았기에 동포 사회에서 전위적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 중심에는 ‘모임 우리들’이 있었다.
  ‘모임 우리들’은 잡지를 발행했다. 이는 이민지의 문화를 더 가까이 이해해 보려는 청년층과 스페인어로 된 출판물을 읽을 수 없는 장노년층을 위해서였다. 그중 일부는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La Plata Hochi》)을 정기 구독하는 이도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들(Nosotros)》’의 발행은 이민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1977년 첫 유료 주간지인 《교포통신》이 발행되고, 1988년 한국일보 지사가 설립됐다. 이후 《중앙일보》(1991), 《조선일보》(1997)가 발행되면서 아르헨티나 동포 사회는 물론 인접국 동포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3개 일간지와 3개의 주간지에 투고하는 독자들의 생각은 풍성했다. 아르헨티나 동포 사회의 문예부흥기였다. 기고나 응모, 독자투고 등을 통해서 우리 글에 굶주려 있던 동포들의 필력을 다듬어 주는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후일 문학적 역량을 키운 40여 명의 교민 문학인들이 한국 문단에 시, 소설, 수필로 등단하는 발판이 돼 주었다.
  아르헨티나 동포 언론의 융성은 신(투자)이민자가 대량 유입된 시기였고, 동포 사회도 의류 삯일 일변도에서 벗어나 자가 생산‧판매로 전환하는 시기와 무관치 않았다.

<사진 1> 《로스안데스》 통권 21호와 창간호 표지.

  1960-1970년대에 갈등기와 정착기를 벗어날 무렵 19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동포들은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크게 출렁이게 한, 두 개의 격랑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하나는 영국과의 포클랜드(스페인어명 말비나스) 전쟁이며, 또 하나는 오랜 군사독재 정권이 종식되고 들어선 민주 정권이었다. 이 두 개의 격랑을 겪으면서 기성세대는 평화의 소중함을, 젊은이들은 말로만 들었던 전쟁의 참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나라 사랑’ 정신과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새삼 알게 했다.
  사실 동포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전쟁을 걱정하며 살 줄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1982년 4월 영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를 아르헨티나가 무력 침공하자 동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25의 참화를 경험했던 동포들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동포 사회의 분위기는 빈민촌 생활을 끝내고 새롭게 변화하려는 처지였기 때문에 전쟁이 격화되면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이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이민지를 찾아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다행히 전쟁은 개전 72일 만에 끝나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투자이민 허용과 동포 사회 새바람

  한국인의 이민을 제한했던 조치(5‧4 이민 제한 조치, 1977)가 풀리고, 1985년 한‧아르헨티나 간 ‘한국인 이민 송출 및 절차에 관한 의정서’ 체결로 3만 달러 투자이주가 허용되었다. 1970년대에는 농업이민이 끊기고 연고 초청이 성행했으나 이 조치로 본국에서의 유입은 물론 인접국 볼리비아나 파라과이 동포들까지 들어오지 못해 동포 사회 분위기는 여러모로 정체되어 있었다. 그랬던 분위기가 투자이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1985년 전후로 아르헨티나 동포 수는 약 1만 명 선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투자이민이 허용되면서 신이민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연평균 1천 가구 이상 들어오면서 동포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신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당시 추계된 동포 수는 3만 5천여 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투자이민자들의 유입은 업종의 다변화뿐 아니라 여가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동포들의 생활이 확실히 ‘성장기’를 거쳐 ‘안정기’에 들었음을 의미했다.
  이민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생성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수용, 변화, 승화시키는 창조적 노력은 사람들을 공감하며 서로 소통하게 한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이민자들이 동포들의 생활 스포츠를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했다면, 투자이민 세대는 문화 활동에 더 신경을 썼다. 투자이민 세대는 모국의 발전적인 경제 성장을 경험해서인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문화 활동에 기여한 단체가 많지만, 특히 ‘재아문인협회(이하 재아문협)’와 ‘재아(르헨)이민문화연구원(이문연)’의 활동은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의 발자취 중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단체로 동포들은 기억한다.

재아르헨 문협의 설립과 활동

  한인 이민자들을 전쟁이나 가난을 피해서 이민 온 사람들 정도로 생각하던 현지인들의 인식은 88서울 올림픽 이후 확연히 달라졌다. 아르헨티나 동포들의 문화 활동 중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하면서 장수하는 곳 중의 하나가 ‘재아문협(이하 문협)'이다.
  창립 이전에는 배정웅(시인, 부산 출생) 외 1인이 주도했던 ‘문학동호인회’가 있었다. 그러나 문학 동호인 대부분이 미국으로 재이주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사진 2> 고 배정웅 시인.

  당시 배정웅(전 《미주시학》 발행인, 재미시인협회장 역임)은 유일한 등단 문인(《현대문학》 추천)이었다. 이국에서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문학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를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재아 문협 설립을 주도했다. 그는 자신의 호를 딴 남미 유일의 문학상인 ‘가산 문학상’을 제정, 2001년 미국으로 재이주할 때까지 문협 회원을 물론 동포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우며 변방문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성심을 다했다. 남미와 북미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을 이끈 그는 새천년이 시작되자 남미에서 방랑을 멈추고 다시 북쪽으로 시맥을 찾아 떠나 미국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배정웅은 남·북미 대륙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의 문학 의욕을 북돋아 주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로스 안데스》도 그의 의욕에서 시작됐다.
  재아문협이 발행하는 《로스 안데스》 지는 1996년 창간호를 낸 이래 현재까지 통권 21호가 발간되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2013년에 김환기(동국대) 교수가 창간호부터 제13호까지 게재된 작품 중 일부를 엄선하여 『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선집』 2권으로 엮어 한국에서 발행한 일이었다. 문협은 김 교수가 아르헨티나 방문 시 출판기념회를 열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또한 이민 4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현지인을 상대로 공모해서 뽑은 스페인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한국엄마 외』를 발행, 처음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사진 3> 첫 현지인 공모 작품집.

  아르헨티나 문화계와의 교류도 재아문협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다. 2013년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삶과 문학’이란 주제의 세미나를 비롯해 아르헨티나 ‘시인협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아리랑이 탱고를 만났을 때』라는 번역 시집이 발간됐다. 이 책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5명과 꾸준히 활동하는 회원의 시 21편을 모아 우리말과 스페인어로 교차 번역한 책으로 한‧아르헨티나 두 나라의 문화와 역사, 예술을 함께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201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도서전에서 『한국문화시선집』과 『한국단편소설번역집』을 소개, 아르헨티나에 한국문학을 알리는 문학 외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로스 안데스》에 실린 작품들은 이민자들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갖가지 애환과 이중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독특한 문체와 화법이다. 어디서도 확실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는 회색 경험을 통해 쓰는 글들 즉, 이민진의 『파친코』,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와 같은 작품이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고국 독자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는 오로지 이민자들만의 고유 경험을 글로 풀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로스 안데스》는 한인 커뮤니티 유일의 문예지다. 이민지에서 겪는 삶의 애환을 우리 글로 표출시켜 왔다. 이는 2세들에게 문학의 지평을 더 넓게 열어 주고, 우리 말과 글에 관한 관심은 물론 문학적 의욕을 북돋고 재능을 키워 주는 작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가 종이책으로 출간되어 나오는 기쁨을 대체할 더 나은 수단은 없다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사진 4> 재아문협 창립 주역들의 1994년 첫 등단 문인 2명 배출 기념 ‘문학의 밤’ 행사. 앞줄 왼쪽이 배정웅 시인. 그 뒤가 필자.

<사진 5> 김환기 교수 『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 선집』 출판 기념 행사 모습.

<사진 6>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제 도서전시전에서 한국작가의 작품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현지 출판사에서 출판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장 사르미엔토 홀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 모습.

<사진 6> 국제 도서전시전 현장. 왼쪽부터 출판사 대표 미겔 발라구와, 윤선미 교수, 추종연 대사, 이병환 한인회장. 현지 출판사 달빛아래(Bajo de luna)가 스페인어 번역판 한국 현대 시선집 『19,459km(Antalogia de poesia coreana contemporanea)』와 단편소설 선집 『12시간 전의 생명(La vida 12 horas antes)』을 출판했다. 이날 추 대사와 한인회장 등이 한글 시를 낭독하고, 미겔 빌라구와 대표와 윤 교수는 번역한 시를 스페인어로 낭독하는 특별한 출판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참고문헌

아르헨티나 문인협회, 《로스 안데스 문학》.

아르헨티나 한인이민문화연구원, 『아르헨티나 한국인 이민 40년사』, 2005.

재아르헨티나 한인회,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50년사』, 2017.

연합뉴스(www.yonhapnews.co.kr).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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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조선일보 기자. 재아 이민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아르헨티나 이민 40년사』 집필. 『아르헨티나 이민 50년사』 편찬위원장.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