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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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작가들

황운헌, 탈경계를 향한 시인의 산조(散調)

방승호


  황운헌(黃雲軒, 1931-2002)은 함경남도 단천(丹川)에서 태어났다. 1956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57년 《문학예술》에 「손」, 「석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황운헌은 1957년 《세계일보》 문화부 기자를 시작으로 《민국일보》와 《대한일보》 등에서도 기자로 활동했다. 1969년부터는 《현대시》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이 시기 첫 시집 『불의 變奏』(삼애사, 1969)를 발표했다.
  황운헌이 브라질로 이주한 해는 1973년였다. 사실 한국인들의 브라질 이민은 1963년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1) 1966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농업 이민’이 추진되었고 1971년에는 ‘기술 이민’ 명목으로 브라질에 1,400명이 이주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행 이민에 실패한 이주자들의 브라질 재이주와 같은 ‘연쇄 이민’, 1980년대 전경환 당시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이 주선한 ‘농업 이민’ 등의 경향이 나타났다. 황운헌이 브라질로 넘어간 시기도 바로 이러한 흐름이 주요했던 시기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흐름이 ‘브라질 한인회’와 같은 재브라질 한인들의 커뮤니티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며, 그 속에서 황운헌을 비롯한 권오식, 김우진, 목동균, 안경자, 연봉원, 이찬재, 주오리, 한송운 총 9명의 동인이 의기투합한 《열대문화》가 창간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황운헌은 《열대문화》를 통해 재브라질 이주자들이 겪는 이질적 문화 갈등 해소를 위한 문학적 신념을 표출했다. 또한 재브라질 사회를 ‘주연의 영역’으로 언급하며 문화적 혼종 상황에서 경험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활성적 가치들을 강조했다.2) 이러한 경향은 황운헌이 참여한 《열대문화》 제3호의 주제가 ‘한국과 브라질의 동질성과 차이점’이었다는 부분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재브라질 문화의 이질성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문학적 사유, 그리고 혼종적 공간에서 피어나는 탈경계적 디아스포라 의식은 황운헌의 시에도 잠재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과 브라질의 로컬리티가 혼재되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화물선 타고 멀리 멀리
상파울로까지
북회귀선(北回歸線) 싶푸런 바람 속을
건너 온
동균네 미역국
영일만 언저리 쪽빛 해소가
운다
―「영일만(迎日灣) 언저리」 부분

  향수를 형상화한 텍스트이지만, 위 시는 한국의 감각이 바다를 건너 디아스포라 공간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이것이 디아스포라의 이분법을 해체하기 위한 황운헌만의 방식이랄까. 그의 사유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 의식을 넘어선다.3) 그의 디아스포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허물고 구심과 원심, 주체와 타자가 함께 존재할 수 있도록 공동의 공간을 창출한다. 마치 먼 바닷바람을 건너온 “동균네 미역국”으로 인해 이어지는 ‘상파울로’와 ‘영일만’의 만남처럼 말이다. 이주지에서 한국을 떠올리는 방식이 아닌, 한국의 이미지를 현재 공간으로 가져오는 방식으로 황운헌은 공간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이다.
  황운헌은 이주자들의 문화적 자본 창출과, 국가 간 경계를 허무는 탈경계적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단지 한 가지 문학에만 몰입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일본 사람들과 소통하며 꾸준히 교류를 넓혔고, 시를 비롯하여 평론과 수필을 발표하며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재브라질 한일 시인의 특별 교류 차원에서 ‘일본인 르네 다구치(ルネ田口) 시인과 한국인 황운헌 시인의 교류전’을 개최하는 등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재브라질 한인들의 소통 문화를 구성한 것은 물론, 한국 문학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새기게 하는 유의미한 작업이었다.

  황운헌의 디아스포라 의식은 1986년 발표한 시집 『散調로 흩어지는 것들』에 드러나 있다. 일찍이 브라질 이주 전부터 김종삼과 교유했다는 점은 그가 기법적 측면에서 김종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김종삼의 「라산스카」에 잠재된 지상에 유배된 수인 이미지가, 『散調로 흩어지는 것들』의 시편들에서 시적 자아의 존재론적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모습은 이러한 영향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특히 「현훈(眩暈)」에 드러나는 「청산별곡」의 ‘사슴’ 이미지, 다시 말해 고독한 이주자의 표상은 「음악」에서 “팔레스트리나 듣고 있”는 김종삼의 자아를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황운헌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자신을 “天涯를 흐르는 한 마리/물새”로 형상화하며, 이주지의 틀을 벗어나 공존의 공간(천상)을 향한 시적 자아의 신념을 드러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간되는 《울림》에 평론을 실으며 한인 문학 활성화를 위해 탈경계의 사유를 펼친 황운헌. 그가 남긴 산조는 영일만과 브라질 상파울루를 이어놓고, 그가 기록한 언어는 지금도 브라질 열대 문화 속에 생동하고 있다. 그의 이주지는 브라질이지만 그의 사유는 남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서양에 만연한 이분법의 경계를 허물고 주체와 타자, 타자와 주체가 공존할 가능성. 그 환대의 자리를 기다린다면 주저하지 말고 황운헌의 언어를 따라가 보자. 그곳에서 당신은 디아스포라의 미래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자료

1) 최금좌, 「재브라질 한국이민사회: 세계화 시대 도전과 성취 그리고 전망」, 《중남미연구》 25(2),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2007.

2) 황운헌, 「遍歷과 回歸」, 《열대문화》 7, 열대문화동인회, 1990, 56쪽.

3) 물론 《열대문화》 창간호에 실린 「가을이 왔는데도」라는 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의 작품에는 한국에 대한 향수나 우울, 소외 의식과 같은 정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황운헌의 대외 활동은 이러한 차원에 머물지 않고 문화 교류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조규익·김병학, 『한진의 삶과 문학』, 글누림, 2013.

김환기, 『브라질 코리안 문학 선집: 시·소설』, 보고사, 2013.

김환기, 「재브라질 코리언 문학의 형성과 문학적 정체성」, 《중남미연구》 30(1),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2011.

김환기, 「남미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고향/조국의 기억: 한국전쟁기 반공포로와 근대화/산업화를 중심으로」, 《한림일본학》 35,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9.

최금좌, 「재브라질 한국이민사회: 세계화 시대 도전과 성취 그리고 전망」, 《중남미연구》 25(2),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2007.

최종환, 「‘마주한 시간’과 ‘도래할 시간’ 사이에서: 남미 지역 한인시 연구」, 《현대문학의 연구》 75, 한국문학연구학회, 2021.

최종환, 「일본-브라질 지역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 연구: ‘김시종’과 ‘황운헌’의 시를 중심으로」, 『우리문학연구』 제62, 우리문학회, 2019.

황운헌, 『불의 變奏』, 삼애사, 1969.

황운헌, 『散調로 흩어지는 것들』, 나남, 1986.

황운헌, 「遍歷과 回歸」, 《열대문화》 7, 열대문화동인회, 1990.

필자 약력
방승호 프로필 사진 2_크롭.jpg

대전 출생. 문학평론가. 문학 박사. 계간 《시작》에 허수경 유고시론을 발표하며 등단. 디아스포라 및 정동 이론, 신유물론에 관심이 많다. 기성 문인들의 시를 다시 읽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