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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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작가들

손창섭, 방법론적 외부자의 문학

방민호


▲ 이 사진만큼 한국과 서울을 멀리서 조망하는 작가 손창섭의 시선을 잘 드러내는 것이 없다. 1962년 6월경의 손창섭이다. [ⓒ 필자 제공]

  작가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은 한국의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왔다. 전후 문학이 한국에서 언제까지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필자는 1960년의 4월 혁명을 넘어서 대략 1965년 무렵에 제1차 전후가 종료된다고 보았다. 손창섭의 전후 문학은 그의 장편소설 『낙서족』(1959)을 넘어서 1960년대 중반까지 「잉여인간」(1959)과 「신의 희작」(1961) 등 여러 중·단편소설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의 첫 장편소설 『낙서족』은 여러모로 당대 비평가들을 당황케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한국전쟁의 상처와 유산 뒤에, 그리고 4월 혁명을 앞둔 심각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는 ‘뜬금없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밀항해서 성장해 가는,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소년의 이야기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 내재된 손창섭의 자전적 사연들, 그리고 손창섭과 장용학 등으로 대표되는 전쟁 세대(일본식으로 말하면 전중파)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고, 곧이어 발표된 손창섭의 장편소설들 역시 『길』(1968-1969)과 같이 세태적, 시대적 성격이 뚜렷한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그 1960년대에 손창섭은 『부부』와 『이성연구』를 비롯한 문제작들을 여럿 발표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한국의 정치 상황은 격랑에 휩싸여 갔다. 군사 정부는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1972년 가을 박정희 정부는 돌연 헌법을 중지시키고 장기 집권을 향한 외길을 선택한다. 이즈음, 곧 1973년 말에 손창섭은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이것은 몇몇 그를 아는 문학인들에 의해 한국의 정치 정세에 대한 불만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사실이기는 할 것이다. 평양에서 출생한 손창섭은 소학교 졸업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곧 일본으로 건너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아직 학적 서류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니혼대학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을 맞았을 때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있던 손창섭은 혼자서 현해탄을 건너 귀국 행렬에 합세했다. 38선으로 갈린 남한에서의 여의치 않은 생활 때문에 북한으로 올라가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한 손창섭은 북한 체제의 취체를 피해 다시 남하, 한국전쟁을 맞이한다. 그의 잘 알려진 일화 가운데 하나는 피난지 부산에서 한국으로 떠난 손창섭을 찾아 현해탄을 건너온 아내와 극적으로 해후하게 되었다는 것. 환도 이후 서울에 올라와 작가 생활을 해나간 손창섭의 주된 삶의 거처는 지금의 흑석동 근처였으며 여기서 그는 여러 문제작들을 발표하며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대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필자가 보기에, 그러면서도 손창섭은 오랜 일본 생활 끝에 돌아온 한국의 모든 것을 낯선 이방인과도 같은 시선으로 불편하게 관조했다. 그는 한국의 정치 상황뿐 아니라 만연한 부정부패와 지독히 혈연 중심적인 가족주의, 부정직과 협잡 같은 일상적 세태까지 못 견뎌 했다. 그는 한국의 모든 부정적 현상들을 고통스럽게 마주 대했고 4월 혁명이 그 모든 것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했다. 현실은 그러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고, 그는 마침내 한반도를 떠났다. 일본으로 떠난 후에도 그는 그를 중요시한 《한국일보》 사주의 요청으로 『유맹』과 『봉술랑』을 발표하는 등 한국어 창작 생활을 간간이 보여 주기는 했다. 그러나 손창섭의 일본 연락선은 공식적으로는 끊겨 버렸다. 이후 소문은 손창섭이 끝내 일본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번져 나갔고, 바로 이 때문에 손창섭의 문학적 명성은 어떻게 보면 결정적인 상처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손창섭이 2010년 여름 세상을 떠난 후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하나는 손창섭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그가 199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시기에 70편이나 되는 한국어 시조를 유작으로 남겨 놓았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은 민족주의적 이상이 아직도 크게 작용하는 한국인들에게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제야말로 손창섭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는 몸을 일본으로 옮겼을 뿐, 자신을 한국인으로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의식으로 말년을 살아가며 시조까지 남겼다. 그의 문학은 방법론적 외부자, 방법론적 메토이코이(재류외인)의 문학이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의 의미를 독자적으로 탐구한 전혀 별종의 문학일 수 있었다.

▲ 흑석동 손창섭의 자택 전경. 사진첩 같은 페이지의 인물 사진이 1966년 4월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의 자택 사진으로 보인다. [ⓒ 필자 제공]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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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충남 예산 출생.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상문학회 회장. 주요 저서로 『이광수 문학의 심층적 독해』,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일제 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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