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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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작가들

발효된 꿈과 모어(母語)의 지층: 허수경의 시

이은란


▲ [ⓒ 문학과지성사]

  허수경(許秀卿, 1964-2018) 시인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진주다. 경상국립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시인은 상경 후 방송작가로 활동하다가, 1992년 독일에 유학하여 뮌스터대학교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과 시작(詩作) 메모, 작품론이 담긴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 2019)을 제외한다면, 생전에 허수경이 펴낸 시집은 총 여섯 권이다. 이 중 네 권이 독일 유학 이후 출간되었는데, 여기에는 독일뿐 아니라 고고학 발굴 작업을 위해 중동 지역에 체류한 경험도 축적되어 있다.
  암으로 작고하기 전까지 지속한 허수경의 유목적 삶은 ‘고향과 타향’, ‘이주와 정주’라는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시인은 한 산문집에서 “고향을 떠나는 일은 많은 이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 가운데 하나다. 살아남기 위하여 뿌리를 떠나는 고전적이고도 수없이 되풀이된 이 행태는,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행태만은 아니다 1)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은 문명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인간을 ‘호모 모빌리쿠스(Homo-mobilicus)’로 바라본다. 정주가 농경으로 대표되는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라면, 이주는 ‘호모 모빌리쿠스’의 생존 전략이자 생물학적 본능이다. 남강이 흐르는 진주, 대도시 서울, 낯선 독일과 중동을 거쳐 간 허수경의 궤적은 생존을 위한 고투의 흔적이자, 아득한 원생(原生)으로의 회귀일 것이다.
  그렇다면 허수경은 왜 떠나야만 했을까.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사, 1988)에 묘사된 고향 진주는 수탈과 전쟁이 거쳐 간 인고의 극지(極地)로서 귀환 병사의 썩은 삭신, 아낙의 젖 마른 가슴, 원폭 희생자의 짓무른 육신으로 형상화된다. 민중의 참혹한 역사는 허수경의 뿌리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1950년 7월 서울 남산’을 배경으로 한 시 「조선식 회상 9」에는 세 청년이 등장한다. 한 청년은 “제국주의자로부터 이 민족을 자유케 하는 인민해방전선”으로 가고, 다른 청년은 “무모한 도발을 획책하는 붉은 군대로부터 이 민족을 건지기 위해 국군”이 되고, 마지막 청년은 “집”으로 향한다. 시 말미에서 밝혀지듯, 이 마지막 청년이 바로 허수경의 ‘아버지’다. 평생 고향 땅을 일구어 왔음에도 ‘석 자 이름이 등기된 한 뼘의 땅’조차 보전하지 못한 아버지의 삶은 “문서로 남지 못한 청맹과니 역사”(「국경」)와 등가에 놓인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정주에 대한 회의는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에서 구체화된다. 탯줄을 끊은 아버지의 손은 시인의 삶에 “온몸 핏줄 바람살 드난살이 골”(「나를 당신 것이라」)의 설고 비루한 운명을 새긴다. “정주하는 것들의 하릴없는 믿음보다/싸전 푸줏간 주막 사당들의 정주하지 못함”(「山城 아래」)을 택한 허수경에게, 정주는 ‘이곳’을 지키려는 살육과 투쟁의 원인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시인은 “공중에서 자라나는 뿌리마저/제 손으로 자르며 날아가는 나무”(「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로」)가 되기로 한 것이 아닐까.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된 1992년, 허수경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곳, 허기와 비애만을 가져다주는 서울을 떠나 독일이라는 먼 나라에서 ‘허공에 집짓기’를 택한다.
  반면 ‘어머니’는 정주가 파생하는 고통을 묵묵히 발효해 내는 존재다. 첫 시집에 실린 시 「젓갈 달이기」에서, 가시를 걸러 내기 위해 젓갈을 달이는 ‘어머니’의 행위는 전쟁 때 처형된 “지리산 밤사나이 친정 오빠”에 대한 사무침과 겹쳐진다. 해풍을 맞으며 젓국을 발효시키는 어머니의 화덕은 독일 유학 이후 펴낸 세 권의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비, 2001),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2005),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에서, 집시, 난민, 부랑자, 고아, 소년병, 상이군인의 음식을 끓이는 ‘국솥’으로 변주된다. 크고 우묵한 ‘국솥’은 뜨거운 기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촛대’(「우리의 촛대」), ‘온 세상을 먹일 젖’을 품은 ‘만월’(「달이 걸어오는 밤」)과 같은 환형(環形)의 모성성과 동궤를 이룬다. 따듯하고 풍요로운 젖을 머금은 모성성은 유물과 인골을 촉촉하게 감싼 흙의 생명성으로 확장된다. 덩이줄기처럼 땅속에 산재한 유물들은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정주의 국경을 횡단한다.
  허수경의 시선은 유물의 횡단성과 ‘글로벌’이라는 상징적 기치를 날카롭게 구별한다. 시 「글로벌 블루스」에서, “울릉도산 취나물 북해산 조갯살 중국산 들기름/타이산 피쉬소스 알프스에서 온 소금 스페인산 마늘 이태리산 쌀”을 볶아 내는 ‘독일 냄비’는 “글로벌이라는 새 고향”이 은폐한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허수경은 독일에 머무르며 중동 및 아프리카 출신의 난민들을 목격했고, 내전과 재해를 겪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시인에게 가난과 전쟁은 ‘나’와 분리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현재진행형의 폭력이다. 나아가 시인은 연대기에 따라 유물을 분류하고 그것의 가치를 화폐로 환산하는 고고학의 근대적 폭력성을 포착한다. 시 「시간 언덕」의 화자는 발굴된 유물에 따라 지질의 연대를 측정하는 동안 이곳에 ‘참치 캔’을 숨기는 일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고고학적 상상력’ 혹은 ‘문명사적 사유’라는 수식어로 허수경의 시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말년에 이르러 허수경의 사유가 닻을 내리는 곳은 ‘영혼의 모어(母語)’다. 진주 방언, 한국어, 독일어, 고대 문자를 거쳐 간 언어 경험과, 지병 속에서 매진했던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 전집 번역은 ‘시의 언어’에 대한 근본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물론 허수경은 진주 방언으로도 시를 썼고, 독일에서는 한국어로 『모래도시』(문학동네, 1996), 『아틀란티스야, 잘 가』(문학동네, 2011) 등의 장편소설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어와 진주 방언은 모어일지언정 ‘나’를 발화할 수 있는 진정한 ‘영혼의 모어’는 아니었다.

   날을 채우고
섬은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와 나의 간격이라는
원초 비극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영혼의 모어가 생겼다
엄마 말이 아닌 내 말로


—「엄마와 나의 간격」 부분2)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에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성을 ‘섬’으로 인식한다. 시 「엄마와 나의 간격」의 ‘나=섬’은 ‘엄마’ 안에서 자랐기에 그녀이면서 그녀가 아닌 존재, 단독자이면서 또한 고립되지 않는 존재다. 이 시의 화자가 응시하는 “엄마와 나의 간격”, 즉 본토와 섬 사이에서 유동하는 바다는 섬을 단절함과 동시에 개방하는 공간이다. 주어진 모국어를 벗어나 독일로 유학하고, 생활어가 된 독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시 모국어로 작품을 썼던 것처럼, 허수경의 언어는 “엄마와 나의 간격”이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부단히 헤엄쳐 왔던 것이 아닐까. ‘원초 비극’의 바다와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난 “내 영혼의 모어”란, ‘나’의 존재성을 발화하고 타자에게 개방할 수 있는 실존적 언어다. 모두가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감각하듯이, 내 몸을 통과한 경험적 순간들을 표현하는 시의 언어도 다르다. 매 순간 촉발되는 감각적 경험은 ‘나’의 내부에조차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고아’들을 낳는다. 따라서 “내 영혼의 모어”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입말이 아닌, ‘고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허수경은 유고집에서 “이 세상에 많은 좋은 시는 완벽한 모놀로그를 다이얼로그로 만들 때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다”3)라고 썼다. ‘모놀로그(독백)’와 ‘다이얼로그(대화)’는 고립과 개방이라는 섬의 양면적 속성을 연상시킨다. 시인이 마지막에 정주를 택한 장소이자 고향인 ‘섬’에는 세계를 향한 통로인 바다가 있다. ‘나=섬=고아’라는 인식과 더불어 ‘모어의 지층’에 대한 시인의 탐사는 뿌리를 박탈당한 난민들, 전쟁과 매춘에 내몰린 아이들, 거리의 부랑자들과 같은 지상의 무수한 고아들과 연대할 수 있는 원천이다. 허수경의 시가 고독하며, 또한 ‘고아’인 까닭이다.

참고자료

1) 허수경,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난다, 2018, 82쪽.

2)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128~129쪽.

3)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난다, 2019, 58쪽.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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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예비평》 2022년 겨울호에 「‘감응의 페티시즘(fetishism)’을 위한 제언」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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