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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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야기

2부 태평양 바라보며 독립을 염원하다

엘리자벳 김

  태평양 건너 조국을 바라보며 독립을 기원했다

  조선 왕조 말기의 혼란 속에서 정치는 방향을 잃고 조선은 풍전등화의 처지였다. 그 와중에 일본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백성은 가난을 벗어날 수도 없는 극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너무나 삶이 척박해서 조국을 떠나왔던 우리 조상들의 눈물겨웠던 삶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도 그들의 기막힌 삶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은 구천을 떠돌고 있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잃어버린 유산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또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잊히지 않고 계속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역사가 눈물겹도록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할지라도…….

   나는 우리 나라를 위해 그(스티븐스)를 저격했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미 죽임을 당한 동포의 영혼을 위로하고 또 장차 스티븐스에게 죽임을 당할 동포를 구했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사람은 죽음의 길을 알아야 한다.

   ―장인환이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기자에게 써준 의거 목적 중 일부



  • 리들리 한인이민역사기념각에 있는 독립문(Reedley Korean Heritage Pavilion, 2010).

  마침 내가 방문한 4월 8일은 로스앤젤레스 흥사단 지부에서 주최하고 다른 여러 단체가 같이 참여한 제 2회 청소년 역사 탐방의 날이었다.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을 3분의 1크기로 건축한 독립문 및 리들리 한인이민역사기념각 앞에서 간단한 행사가 있었다. 리들리 시의 메리 L. 패스트(Mary L. Fast) 시장이 행사에 참여했다. 2010년 11월에 세워진 이곳은 리들리 시에서 제공해 준 부지에 세워졌는데 한인 이민 역사 초기에 많은 기여를 한 이 시대의 인물 10명(김호, 김형순, 김용중, 이승만, 안창호, 윤병구, 한시대, 김종림, 이재수, 송철)의 기념비가 있다.

  이번에 장인환, 전명운 그리고 한덕세의 기념비가 더해졌다.



  •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을 보도한1908년 3월 25일자 《BISBEE》.

  “샌프란시스코의 한여름은 내가 겪은 가장 추운 겨울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이 지역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찬바람과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바다 안개가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1876년 조선은 일본의 강압으로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후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등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조선 말기의 시대는 혼돈 그 자체였다. 1895년에는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무참하게 일본의 낭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백성은 먹을 것도 없이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떠도는 작은 나무조각 위의 표류자 신세였다.



  • 샌프란시스코의 엠바르카데로(Embarcadero)에 있는 페리 빌딩.



  • 페리 빌딩 내부.



  • 페리 빌딩 2층 내부에서 내려다본 로비의 모습.

  이 시대에 미국, 특히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활동한 지도자들은 그러한 조국의 암담함에 독립 투사가 되어 많은 부분에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곳에서 활동했던 이승만 박사, 안창호 선생. 서재필 선생 등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조선인을 하류민 취급했던 더럼 스티븐스(D. W. Stevens)를 저격, 암살한 장인환, 전명운 지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정부 고관이었던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빌딩에 나타났다. 그때는 베이 브리지(1937년 완공)를 짓기 전이라 철도를 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오클랜드 쪽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 전날 그는 이미 그가 묵고 있었던 페어몬트 호텔에서 정재관 등 4명의 한인들과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에 조선을 비하하는 스티븐스의 글이 실리자 모욕감을 느낀 한인들이 스티븐스가 있는 호텔로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이에 격분한 한인들이 스티븐스를 주먹으로 친 사건이었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예정보다 일찍 떠나기로 했다. 1908년 3월 25일자 애리조나 《BISBEE》라는 신문에 3월 23일 장인환이 손수건으로 감싼 32구경 리볼버(32 Caliber Revolver)라는 회전식 총기로 스티븐스를 저격했다고 나와 있다. 총 3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그렇지만 1발은 스티븐스와 엉켜 몸싸움을 하고 있는 전명운을 맞혔고 2발은 스티븐스의 등을 맞혀 중상을 입혔다. 먼저 전명운이 그에게 총격을 가했으나 그것이 오발되자 당황한 전명운은 총을 거꾸로 쥔 채 스티븐스를 가격하며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 혼란 속에 기회를 잡아 장인환이 3발의 총을 쏜 것이다.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에 의해 고종 황제의 외교 담당 고문 자리를 맡아 정치 형세에 대해 조언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친일적인 사람으로 조선의 이익보다는 일본의 야욕을 정당화하는 데에만 급급해 있었다. 더럼 스티븐스는 이틀 후 병원에서 숨졌다.





바닷가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샌 퀀틴 주립 교도소. 전망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전명운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장인환은 9개월 이상 끌어온 재판에서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징역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죄수 번호 23295를 받고 마린 카운티(Marin County) 바닷가 옆에 있는 샌 퀀틴(San Quentin)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한다. 샌 퀀틴 교도소는1852년에 문을 연 후 중범죄자들이 주로 수감되는 곳이다. 가까이서 본 교도소는 크고 아름다워 보였다. 장인환은 수감 생활 중 지독한 인종차별과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10년 후인 1919년 1월 10일 가석방된 후 1924년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후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살았다. 우울증을 앓았던 그는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병원에서 창밖으로 몸을 던져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인생을 바친 그의 삶이 이렇게 마감되었다. 또한 장인환과 함께 의열 투쟁을 했던 전명운 역시 평생을 가난과 험난한 삶에 시달리다가 1947년 눈을 감았다. 더럼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나비효과처럼 한인 사회 및 역사에 커다란 폭풍우를 몰고 왔다. 자신의 안위보다 독립을 염원한 그들의 정신은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까지 역사 탐방을 하게 만들며, 미래는 역사를 알지 못하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알려 주고 있다. 이렇듯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한인사는 지금 돌이켜보아도 파란만장하고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거쳐가고 있는 징검다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봄 햇살이 따사로운 며칠 전 교도소 사진을 담기 위해 나는 리치몬드 다리(Richmond Bridge) 위를 걸었다. 멀리 보이는 베이 브리지와 반짝이는 수면 위의 햇살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며 험한 교도소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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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벳 김. 현재 샌프란시스코 좋은나무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FIDM(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경희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 학사와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시 부분과 수필 부분으로 등단을 했다. 샌프란시스코한국문학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학교협의회 주최 대회의 심사위원이다. 《샌프란시스코기독신문》 포토에세이와 《샌프란시스코한국일보》 고정 칼럼을 연재했으며 현재 《샌프란시스코현대뉴스신문》 고정 칼럼을 연재 중이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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