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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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야기

1부 과수원밭에서 새 이민 역사를 쓰다

엘리자벳 김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1850년 9월 9일 캘리포니아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31번째 주로 등록이 된 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의 하나가 되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후 1900년대로 들어서자 이곳은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에 개발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철도 산업이 활발해지면서 캘리포니아의 넓은 옥토에서 무진장 생산되는 농산물의 공급량이 확대되며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1903년부터 1905년 사이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농장으로 이민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개발 붐이 불자 약 2,000 여 명의 하와이 한인들이 1906년 농장 노동 계약 기간이 끝나자 미 서부 지역으로 터전을 옮겨 왔다. 끝없는 과수원이 펼쳐진 리들리 시(Reedley City), 다뉴바 시(Dinuba City), 새크라멘토, 샌프란시스코, 프레스노 등이 포함된 미 서부 지역들이 초기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화창한 봄날 나는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샌프란시스코 지부 회장인 권욱순 선생과 같이 중가주 지역인 리들리 시와 다뉴바 시를 찾았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인 마티네즈(Martinez) 시에서 리들리 시까지는 203마일(327킬로미터), 자동차로는 약 3시간 정도 남동쪽으로 달려야 하는 곳이다. 몇 개의 작은 도시를 지나자 과수원과 농장들이 줄을 잇는다. 리들리 시는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토마스 로 리드(Thomas Law Reed)의 이름을 딴 도시라고 한다. 그는 금광 붐을 타고 밀려오는 광부들에게 밀을 제공하기 위하여 이곳에 정착한 농부였다. 리들리 시는 ‘세계의 과일 바구니’라고 불릴 정도로 이곳을 관통하는 강줄기(Kings River)를 따라 신선한 과일들이 무진장 생산되고 있다.

  • 리들리 시의 강줄기를 따라 펼쳐진 과수원 풍경

  • 리들리 시의 한 과수원에서 일하는 농부

  • 리들리 시에 세워진 시계탑

  우리의 영혼을 기억해 주게!

  이곳은 샌프란시스코 한인 이민사와 독립 운동 역사를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역의 여름 낮 기온은 보통 화씨 110도(섭씨 약43도)를 훌쩍 넘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하루 10시간 정도 일해야 했던 노동자들의 삶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주로 하와이에서 이민 온 한인 1세들은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부를 구할 수 없어서 총각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거의 70퍼센트나 되었다고 한다.

  • 김형순, 김호 선생의 묘 앞에서 리들리 묘지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차만재 박사

  이곳 리들리 묘지 공원 안에는 초기 한인들의 무덤 177구가 모셔져 있다. 인삼 장수로 미국에 온 최초의 한인인 박영순, 또한 리들리의 최초 한인 거부였던 김형순, 김호 씨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김형순 선생은 당시 이화학당 1회 졸업생이었던 한덕세(Daisy Kim)와 결혼했다. 그리고 아내의 스승인 김호 씨와 힘을 합쳐 상호를 ‘김형제 묘목상’이라 칭하고 김형제 사무실을 차렸다. 이들은 복숭아 신품종 씨를 개발한 프레드 앤더슨 박사와 계약을 맺고 세계 최초로 털 없는 복숭아 ‘넥타린’을 개발하고 농장을 운영하여 거부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부를 쌓지 않고 이승만 박사와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었고 많은 한인 노동자들의 일터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때 이승만 박사는 김형순 선생의 딸 메리 김에게 청혼을 했하였다 한다. 인생이란 찰나의 선택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물길로 흐르기도 한다. 만약에 이승만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아닌 메리 김과 결혼했다면 한국의 역사는 또 다른 물꼬를 트고 흘러갔을까?

  • 버지스 호텔 현관 벽에 붙어 있는 두 애국지사의 동판

  • 버지스 호텔의 로비

  리들리 시의 11번가에는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이 묵었다는 버지스 호텔(Hotel Burgess)이 있다. 이곳은 1912년에 건립한 호텔로서 호텔 입구의 벽에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의 동판이 걸려 있다. 호텔 크기에 비해 아주 작은 로비는 무척이나 아늑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왼쪽 첫 번째 방이 이승만 박사가 오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안에는 방을 꽉 채운 침대 하나, 소파와 동그란 거울 그리고 작은 화장실 하나가 전부이다. 원래는 이승만 박사가 늘 갖고 다니던 타이프라이터를 올려놓는 작은 책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텔 서비스에 불만을 품은 투숙객이 그 책상을 부숴 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없다. 바로 건너편 방은 도산 안창호가 머물렀던 곳이다. 현재는 멕시코 여자가 자폐아 외동 아들을 데리고 홀로 이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이름이 웬디인 예쁜 얼굴의 호텔 주인은 ” 남편은 소방관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불 난 곳 찾아 떠돌아 다니고,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며 쓴 웃음을 짓는다.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도 역사 탐방을 하는 한인들에게는 유달리 친절한 모습이 고맙고 안쓰러웠다.

  • 1912년에 건립된 전 다뉴바 한인장로교회를 기념해 세운 십자가 모양의 기념비

  다뉴바 시에 가면 2008년 중가주 한인 역사 연구회에서 건립한 십자가 형상을 닮게 만든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비가 있다. 이곳에는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 상해 임시정부에 돈을 보낸 7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13,835달러가 모금되었다. (쌀 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김종림 선생이 4,000달러 정도를 보냈다.) 당시 하루 월급이 약 2불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놀라운 금액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 백인 농장주는 땅과 씨앗, 농기구 들을 전부 제공하고 수확물의 90퍼센트를 가져가는 제도가 있었다. 수확물의 10퍼센트만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는 소위 10퍼센트 딜(Deal)의 제도하에 김종림 선생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에 그는 노백린 장군이 1920년에 세운 윌로우스 한인 비행학교에 거금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중가주 및 북가주 지역과 당시의 사회적 환경은 미주 한인 사회를 이루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주 초창기에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열정, 그리고 독립을 위한 염원 등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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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벳 김. 현재 샌프란시스코 좋은나무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FIDM(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경희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 학사와 동 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시 부분과 수필 부분으로 등단을 했다. 샌프란시스코한국문학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학교협의회 주최 대회의 심사위원이다. 《샌프란시스코기독신문》 포토에세이와 《샌프란시스코한국일보》 고정 칼럼을 연재했으며 현재 《샌프란시스코현대뉴스신문》 고정 칼럼을 연재 중이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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