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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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깊이읽기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평론: 우석균

생과 사의 경계를 감내해야 하는 디아스포라 전사: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를 읽다

우석균(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1. 몸에 각인되는 디아스포라

   요샛말로 ‘안습이었다’. 칠레 유학 시절인 1993년 학교에서 발생한 시위를 보고 느낀 감정이었다. 퇴임 후에도 군 통수권을 움켜쥐고 여전히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피노체트를 규탄하는 시위였다. 학생들이 최루탄에 돌팔매질로 응수하고 있었다. 어찌 그리도 못 던지던지……. 야구를 하지 않는 족속들이라 그런가 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같은 생각을 한 이를 발견했다.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 1942- )이다.

그때 나[도르프만]는 경찰들이 한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가는 광경을 보았고, 그러자 내가 몇 년 후 모네다궁[대통령궁]의 폭격당한 벽돌을 보면서 느끼게 될 분노에 비해 정도는 약하지만 비슷한 분노가 속에서 치밀었다. 내 주위의 학생들 모두 돌을 주워들었고 하늘은 곧 돌팔매가 빗발치듯 했으나, 그 대부분이 목표에는 거의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몸을 구부려 야구공만큼 단단하고 둥글고 잡기 좋은 돌을 하나 주워들고 목표물을 겨냥하여 공중에 던졌더니 그것이 다른 돌팔매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맷집 좋은 한 경찰관의 방패를 때렸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끝내주는 팔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양키 스포츠인 야구 솜씨를 이용함으로써 축구를 즐기는 학과 친구들보다 더 멀리 돌을 던져, 미국에 의해 훈련받고 무장된 칠레 경찰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문화적 모순이었지만, 이를 분석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1)

   도르프만은 국내에서는 『죽음과 소녀』(1990)의 저자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에게는 위 인용문이 담긴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1998)가 더 인상 깊었다. 자신의 이중 문화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일종의 회고록인데, 디아스포라를 양산한 근대의 전 지구적 역사와 그 아픔이 절절히 담겨 있어서다.
   그는 어린 시절 약 10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열두 살부터 칠레에서 성장했다. 위 인용문은 그 후 6년 뒤인 1960년, 막 칠레대학에 입학한 도르프만이 난생처음 참가한 시위에 대한 기억이다. 마음은 칠레 경찰에 분노하고, 나아가 이들을 탄압 기계로 ‘조련한’ 미국까지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몸뚱어리는 여전히 ‘양키’의 그것이어서 처음 시위에 나섰는데도 “끝내주는 팔”을 선보였다. 디아스포라는 때로는 마음보다 몸에 더 끈질긴 상흔을 남기는 것이다.
   도르프만은 아메리칸드림에 열광한 ‘양키’ 소년이었다. 고국 아르헨티나를 떠나 뉴욕에 정착하자마자 스페인어 사용을 거부하고 영어 사용을 고집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세 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말이다. 그리고 적어도 1946년에는 확고한 “네살배기 양키”(98쪽)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칠레 이주는 일종의 트라우마였고, 그 후 미국 물건과 문화를 오매불망 그리는 성장기를 보냈다. 부친이 준외교관 특권이 있는 유엔 산하 경제발전위원회 고위직 인사였던 덕분에 칠레에서도 석 달에 한 번씩 받아볼 수 있었던 미국 물건들에 대한 도르프만의 집착이 그 일단을 보여준다.

가족 모두가 함께 나누어 가질 콘플레이크, 허쉬 시럽과 캠벨 토마토 수프, 앤트 제미나 팬케익 가루와 쉬래프 아몬드 과자 그리고 잡지와 책, 레코드, 셔츠, 수영복 등이 나왔다. 나만을 위한 선물도 있었다. 열두 개의 막대사탕 다발이었다. (……) 정확히 열두 주 후의 다음 화물이 구호물자를 가져다줄 때까지 이것으로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나를 통제한다면,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야만인의 공격과 무자비한 시간의 수레바퀴에 저항할 수 있을 터였다. 말하자면 내가 유혹을 이겨낸다면, 이 막대사탕들은 나를 예전의 그 아이로 남아 있게 하고 매일 밤 한 입씩 먹을 때마다 미국을 떠올리게 하여 내가 실제로 고향[미국]으로 돌아가 동네가게에서 한껏 먹을 수 있게 될 그날까지 나를 지켜줄 것이었다.(173쪽)

라틴아메리카 작가 이야기를 하면서 ‘양키’ 소년 이야기를 부각하니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르프만의 ‘양키’ 소년 시절은 일종의 부작용의 산물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근대의 특징으로 지목한 “겹치는 영토, 뒤섞이는 역사” 속에서 디아스포라인으로 살다 보니 발생한.

2. 유령 가족과의 저녁 식사

   도르프만은 유대인이었다. 부모 모두 아기 때 각각 제정 러시아 치하의 오데사(우크라이나)와 키니사우(몰도바)에서 아르헨티나로 건너왔다. 부친은 꽤 인정받는 경제학자로 성장해서 아르헨티나에 무난히 뿌리를 내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에 열광하던 페론주의자들의 행태를 참지 못해 공개적인 비판을 감행했다. 유대인으로서 의당 해야 할 비판이었지만,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지 말았어야 할 비판이었다. 아르헨티나 근대사 최초의 해직 교수로 이름을 남겼으니 말이다. “더러운 유태인 개자식 도르프만”을 “그가 속한” 러시아로 돌려보내라는 신문 기사까지 나는 판이어서 시민권 상실과 투옥 가능성 때문에 전전긍긍했고, 신변에 위협마저 느꼈다. 도르프만의 부친은 결국 망명하다시피 미국으로 이주했다. 부친의 비판이 전적으로 유대인 정체성 때문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부친 가문은 세속화된 유대인 집안이었고, 아르헨티나 이주도 포그롬(유대인 박해) 때문이 아니라 그저 도르프만 조부의 개인적 선택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도르프만의 모친 집안은 포그롬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경우이다. 그렇다 해도 도르프만 부친은 좌파로서의 신념이 페론주의 비판에 더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페론주의자들에게는 좌파 역시 용납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도르프만 부친은 유대인이자 좌파라는 이중의 원죄를 지닌 셈이었다.
   도르프만 부친은 1943년 2월에 홀로 미국으로 갔다가 2년 뒤 가족을 데려왔다. 그런데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어린 도르프만은 폐렴에 걸렸고, 그는 자신이 그때의 트라우마로 ‘양키’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추측한다. 병원에 격리 입원되어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신이 모르는 언어만 하는 간호사들에게 내맡겨졌을 때, 방치되었다는 느낌, 나아가 죽음의 공포까지 느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고 한다. 그리고 퇴원 직후부터 칠레 이주 전까지 스페인어를 단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았다. 목숨을 보장하지 못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유대인 좌파 부친의 아들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냉전이 고조되고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부친의 이중 원죄가 다시 문제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앞마당 격인 라틴아메리카에서 파시즘이 발호하는 것을 막고자 록펠러 주도로 국무부에 설치된 남북아메리카 연락사무국에서 일한 경력도, 외교관에 준하는 면책 특권이 보장되는 유엔 산하 경제발전위원회 부책임자라는 지위도 소용없었다. 1950년 7월 유대인이었던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폭탄 설계 정보를 소련에 제공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이후, 도르프만 가족은 1953년 그들이 처형당한 밤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다.

매일 저녁 식탁에는 그냥 도르프만 가족 네 명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50년대 초를 통틀어 저 다른 가족의 유령들, 즉 로젠버그 가족―두 부모와 두 아들―네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로젠버그 부부가 1950년에 체포된 이후부터 3년 후 그들이 처형당하는 밤까지 3년 동안 이렇게 총 여덟 명이 줄곧 함께 저녁식사를 한 셈이었다. 그들이 줄곧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언제나 상기시켜주었다.(111쪽)

   아직 어린 도르프만은 철없는 일을 하기도 했다. 부친과 사소한 말다툼 끝에 느닷없이 “선생님한테 아빠가 공산주의자라고 일러줄 거야”(108쪽)라고 말해서 부모가 사색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리다 해서 툭하면 화제로 오르는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조국으로 여기던 미국이 가족을 박해하고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부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미국 재입국에 문제가 생겼고, 급기야는 1954년 매카시 상원의원이 경제발전위원회에 직접 전화를 걸어 그를 해임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경제발전위원회는 부친에게 방콕이나 산티아고 근무를 종용했고, 그는 칠레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결정이야말로 훗날 아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디아스포라를 야기할 역사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었다. 1973년의 피노체트 쿠데타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칠레에서의 도르프만은 꽤 오랫동안 ‘양키’ 소년으로 살았다. 그러나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상대적으로 좌파가 강한 나라였고, 도르프만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쿠바 혁명의 성공(1959)으로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가 개막된 직후였고, 부친의 직장이었던 경제발전위원회 산티아고 주재소는 ‘종속 이론’의 산실로 그 시대 좌파 이념의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었고, 1970년에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사회주의자로서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도르프만은 ‘양키’ 소년에서 민족 해방 전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반미 집회에 참여하고, 아옌데 당선의 밀알이 되고자 칠레 국적을 취득하고, 창작 언어를 영어 대신 스페인어로 바꾸었다. 그러나 칠레는 워낙 이념 갈등이 심한 나라였고, 미국이 쿠바 사례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국가였다. 파국은 예고되어 있었다.

3. 생사의 경계가 무너지다

   미국 대중문화에 익숙했던 도르프만은 가끔 동료들이 생각도 못한 성취를 거두었다. 가령, 노동자 의식화와 그들과의 연대를 목적으로 한 이동대학 활동을 할 때의 일이었다. 아이들이 많이 와야 성인 청중도 많이 모인다는 조언을 들은 그는 자기 강의 날에 영사기로 디즈니의 〈마이티 마우스〉를 틀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어서 애니메이션 상연 후에 수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다만 기겁할 일이 생겼다. 다음날 강사로 나선 친구가 그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했다. 사연인즉슨, 애니메이션을 다시 틀어달라고 난리인데, 무려 학교에 불을 지르겠다며 겁박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도르프만으로 하여금 문화 산업의 중요성, 또 그 배후에 도사린 문화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똑똑히 인식하게 했다. 이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이 그의 최초 성공작이자 스테디셀러인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1972, 아르망 마텔라르와 공저)이다.
   이 책은 속칭 도르프만의 출세작이다. 이 책으로 구축된 문화 연구자로서의 입지 덕분에 일약 아옌데 정부의 대통령궁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3년 9월 11일 쿠데타 때의 상황을 짚어 보면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책이기도 하다. 쿠데타 당일 많은 직원이 대통령궁에서 연행, 구금, 고문을 겪었고 일부는 처형당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대학교 1학년 때부터의 친구였던 끌라우디오 히메노에게 닥친 운명이었다. 사실 그 운명은 도르프만에게 닥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당직을 바꾸면서 그는 살고 친구는 희생자가 되었다. 도르프만은 죄의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망명 후 환영에 시달렸다.

그후 여러 해 동안 그[끌라우디오]는 거기에 하나의 환영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내 죽음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어김없이 그려볼 것이다. 나는 눈이 가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그 그림 속에선 불가능하게도 나 자신을 쳐다보고 있고, 제복 차림의 한 남자가 다가오는데 오른손에는 뭔가를, 막대기인지 한쌍의 전극봉인지 긴 바늘인지 흐릿하고 뾰족한 것을 들고 있다. 아직도 언제 어디서건 예기치 않게 나를 엄습하는 그 환영 속에서 복구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을 몸은 끌라우디오 히메노의 것이다. 그는 발가벗겨져 그 의자에 앉아 있다. 그런데 몸은 그지만 얼굴은 나였다. 내 얼굴인 까닭은 그 근무가 원래 내게 주어졌고, 9월 10일 밤 모네다궁[대통령궁]에서 야간근무를 서고 있었어야 할 사람은 나였고, 해군이 발빠리이쏘[산티아고 인근의 항구도시]에 방금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수했어야 할 사람은 나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쿠데타가 터졌음을 알리기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대통령의 전화번호를 돌렸어야 하는 손도 내 손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그 정보를 받게 될 사람은 끌라우디오이다.(24-25쪽)

   당직을 바꾼 이유는 ‘양키’ 소년으로 성장한 디아스포라인으로서의 도르프만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아옌데 정부에게 치명타가 된 일은 물류를 마비시킨 운송 파업이었다. 특히 우파와 CIA의 돈을 받고 운송업자들이 트럭으로 주요 도로를 막으면 대처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다. 칠레가 남북으로 길쭉한 나라인지라 가장 중요한 남북 간선도로 하나만 막혀도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도르프만은 파업 타개에 일조하고자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홍보용 애니메이션 대본을 써놓은 터였다. 그리고 쿠데타 당일 오전에 국영 TV 방송국 사장과 제작 협의 일정이 잡혀서 친구에게 당직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일이 결국 두 사람의 생사를 가른 셈이다. 도르프만으로서는, 유년기에 로젠버그 가족의 유령에 시달렸듯이, 이번에는 친구의 환영에 시달리게 되었다. 디아스포라인은 때로 그런 비극을 안고 산다. 고인이 된 지인과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는 삶,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진 삶을 감내해야 한다.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가 유난히 심금을 우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디아스포라는 떠나온 땅에 대한 그리움이나 새로운 땅에서 겪는 애환을 넘어 유령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1) 아리엘 도르프만, 한기욱·강미숙 옮김,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창비, 2003, 143-144쪽. 이후의 인용은 페이지만 적는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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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졸업, 페루 가톨릭대학 중남미 문학 석사, 스페인 마드리드콤플루텐세대학에서 중남미 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칠레 칠레대학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수학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해나무, 2005)와 『쓰다 만 편지』(글누림, 2017), 편저역서로 『마술적 사실주의』(한국문화사, 2001), 『역사를 살았던 쿠바』(글누림, 2018), 『오르비스 테르티우스』(그린비, 2021), 역서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민음사, 2004),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민음사, 2008),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 열린책들, 2012), 『작가』(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2021) 등이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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