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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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깊이읽기

네루다 시선

평론: 고명철

망명 생활로부터 얻은 ‘커다란 기쁨’,
라틴아메리카 ‘민중 시인’에 이르는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이렇게 지상에서 상처 입고 불에 탄 뿌리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이런 뿌리는 오솔길을 가로막고 우리에게 나무가 자라는 땅속의 비밀을 들려주고,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질 수 있는 신비를 보여 주며, 식물 왕국을 일으켜 세운 근육을 자랑한다. 무성한 이끼에 덮여 비극적인 생을 마치는 뿌리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 낸 조각품,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이 바로 뿌리이기 때문이다.


—파블로 네루다, 「뿌리」,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중에서

1. 라틴아메리카의 상처와 고통에 이르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는 전 세계의 대중으로부터 지속적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그의 삶과 문학을 다룬 영화들 「일 포스티노」(1994)와 「네루다」(2016)가 상영되고 그의 자서전이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네루다의 문학 세계는 좀 더 대중적 친밀도가 높아졌다. 무엇보다 두 편의 영화가 네루다에 초점을 맞추는 가운데 문학적 상상력과 연관된 일상 속 정치가 민중의 현실에 어떻게 개입하고, 그것에 대해 민중은 어떤 정치적 감각과 인식을 갖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네루다의 문학 세계에 대한 이해가 보다 풍요로워졌다고 할까.
   그런데 네루다의 문학에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게 있다. 대문호들이 그렇듯이 네루다는 자신의 존재의 뿌리인 라틴아메리카의 대지와 민중을 새롭게 발견하는 그만의 힘겨운 문학적 도정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상처와 고통은 물론, 훼손되어서는 안 될 라틴아메리카의 뭇 존재의 위엄을 경이로운 눈으로 발견한다. 여기에는 20대 시절부터 축적한 외교관의 경험과 조국 칠레의 정치적 폭압으로부터 벗어난 망명 생활을 주시해야 한다. 아프리카를 제외한 세계의 곳곳을 외교관 신분으로서 그리고 망명자 시인으로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경험한 네루다에게 세계 도처에서 목도한 민중의 고통과 상처는 라틴아메리카의 그것과 자연스레 포개질 뿐만 아니라 예의 고통과 상처를 시인은 비껴가지 않은 채 응시하고 시로써 치유하며, 더 나아가 그의 시가 혁명을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다.

2.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적 존재의 위엄을 복원하는

   그의 여러 시집 중 『모두의 노래』(1950)는 “네루다의 역사의식이 아메리카적 구체성을 획득하는” “네루다의 전 작품에서 역사의 영향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 주는 정치시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1)듯, 이 시집은 그의 국내 정치적 역경 속에서 망명자 시인으로서 라틴아메리카의 대자연과 민중의 존재를 노래한 절창이다. 네루다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칠레 상원에서 연설하여 의원직을 박탈당한 채 반체제 요주의 인물로 체포령이 떨어져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비델라 정권의 반민주·반민중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 수위를 낮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피 생활을 하면서 시집 『모두의 노래』를 왕성히 집필하기 시작한다. 비밀경찰의 추적을 당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네루다는 오히려 그가 도피 생활에서 마주한 칠레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의 언어로 노래한다.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네루다에게 정치적 도피는 제도권 정치 안쪽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진 시의 언어가 제도권 정치 바깥의 생생한 거리의 현실 정치와 직접 맞대면하는 경험 속에서 민중의 삶과 현실을 육화한 시의 언어로 갱신하는 길을 제공한다.
   

12
형제여, 나와 함께 태어나기 위해 오르자.

그대의 고통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그댄 바위 밑바닥에서 돌아오지 못하리.
그댄 지하의 시간에서 돌아오지 못하리.
딱딱하게 굳은 그대 목소리는 돌아오지 못하리.
구멍 뚫린 그대 두 눈은 돌아오지 못하리.
대지의 밑바닥에서 나를 바라보라,
농부여, 직공이여, 말없는 목동이여,
수호신 과나코를 길들이던 사람이여,
가파른 비계를 오르내리던 석공이여,
안데스의 눈물을 나르던 물장수여,
손가락이 짓이겨진 보석공이여,
씨앗 속에서 떨고 있는 농부여,
점토 속에 뿌려진 도공이여,
이 새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대들의 피와 그대들의 주름살을 내게 보여다오.
내게 말해다오, 보석이 빛을 발하지 않았거나
땅이 제때에 돌이나 낟알을 건네주지 않아,
여기서 벌 받았노라고.
그대들이 떨어져 죽었던 바위와
그대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나무를 내게 가리켜다오.
그 오랜 부싯돌을 켜다오,
그 오랜 등불을, 오랜 세월 짓무른 상처에
달라붙어 있던 채찍을
그리고 핏빛으로 번뜩이는 도끼를.
나는 그대들의 죽은 입을 통해 말하러 왔다.
대지에 흩뿌려진 말없는 입술들을
모두 모아다오.
그리고 대지 밑바닥에서 얘기해 다오,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 땀 한 땀,
한 구절 한 구절, 한 발 한 발.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여다오,
노란 번갯불의 강처럼,
땅에 묻힌 호랑이의 강처럼.
그리고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몇 해고, 날 울게 내버려 다오,
눈먼 시대를, 별의 세기를.


—「마추픽추 산정」 부분2)

   네루다는 외교관 시절 칠레로 귀국하는 길에 페루를 경유하면서 잉카 문명의 고대 유적 마추픽추 산정을 오른다. 안데스산맥의 마추픽추에서 네루다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의 삶과 역사를 파괴했던 악무한의 폭력을 응시하면서, 유럽 근대 문명의 식민 통치 아래 창졸지간 역사의 무대 바깥으로 사라져버린 라틴아메리카 문명을 살아낸 민중을 호명한다. 네루다의 이러한 시적 응시와 호명이 바탕을 이룬 시에서 예의주시할 대목이 있다. 이 시를 눈으로만 읽는, 묵독(默讀)만으로는 네루다의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소리를 내면서 읽는 낭독이 병행되었을 때 이 시의 심상과 의미가 배가된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그럴 때 마추픽추 산정에 오른 시의 화자와 함께 독자는 안데스산맥의 가파르고도 유려한 형세에 절로 어우러진 대지의 뭇 존재는 물론, 그 생사고락을 다했던 잉카의 민중을 제대로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네루다의 시구와 행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시의 리듬과, 민중을 향한 간절한 반복적 호소와, 민중의 역사적 희생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제의적 역할에 자족하지 않고, 그들의 맺힌 한을 대신하여 풀어냄으로써 이 모든 과정이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적 존재의 위엄을 복원하고 복수하는 네루다 시의 한바탕 말과 노래로 불리고 있다. 그리하여 유럽의 미적 전통에 기댄 근대 문자중심주의 시적 재현과 확연히 다른, 그래서 문자성이 바탕을 이룬 근대의 심미적 체험을 통해 시적 진실의 본원적인 것을 찬찬히 톺아보고 음미하는 시적 향유와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적 구술성 및 연행성이 한데 버무려진 구연적 상상력이 네루다의 시적 정동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이유다.

3. 제국의 식민주의 정치 문화에 대한 비판

   기실, 유럽의 근대 문자중심주의 시적 재현에 대한 네루다의 강렬한 비판은 라틴아메리카의 자기발견을 향한 네루다 자신에 대한 각성과 동시에 오랫동안 유럽의 식민주의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냉철하고 준열한 자기비판을 수행하는 일이다.

너희들은 무엇을 하였느냐, 지드주의자들아,
지식인들아, 릴케주의자들아,
신비주의자들아, 실존주의의
가짜 마법사들아, 무덤에서
붉게 타오르는 초현실주의의
양귀비들아, 서구화된
유행의 시체들아,
자본주의 치즈의 창백한
구더기들아, 너희들은 무엇을 하였느냐?
고뇌의 시대 앞에서,
이 암울한 인간 존재 앞에서,
이 걷어차인 평정 앞에서,
똥물에 잠긴 이 머리
앞에서, 짓밟힌 이 가혹한
삶의 본질 앞에서.


너희들은 도망치기에 바쁘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파편 더미를 팔았다.
너희들은 천상의 머리칼을,
비겁한 식물들을, 짓이겨진 손톱을,
‘순수미’를, ‘마술’을,
가련한 겁쟁이들의 작품을 좇았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섬세한
눈동자를 뒤얽히게 하기
위해, 주인들이 던져주는
더러운 음식 찌꺼기로
연명하기 위해.
너희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돌을 바라보지 않았고,
꼼짝 않는 무덤가
썩은 꽃들 위로
비 내릴 때, 묘지의
화관(花冠)보다 더 눈먼 채.


—「천상의 시인들」 전문

   네루다는 가차없이 비판한다. 유럽의 근대 지성사에서 20세기 전반기 영향력을 미친 사상들이 그 몫을 다 하고 있지만, 네루다에게 그들은 “서구화된/유행의 시체들” “자본주의 치즈의 창백한/구더기들”에 불과할 뿐이다. “이 암울한 인간 존재 앞에서,/이 걷어차인 평정 앞에서,/똥물에 잠긴 이 머리/앞에서,” 근대 지성사를 이루는 예의 찬란한 교양주의 담론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떠받치는 서구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시적 판단을 드러낸다.
   이처럼 네루다의 날카로운 시적 비판은 유럽의 뒤를 이은 미국이 다국적 기업의 경제 형식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농업 경제를 착취하고 부패한 정치 세력과 유착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진전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겨냥한 「유나이티드 프루트사(La United Fruit Co.)」에서 음울히 진단한다.

피에 굶주린 파리 떼 사이로
유나이티드 프루트사가 상륙해,
자신들의 배에 커피와 과일을,
물속에 가라앉은 우리 조국의
보물을 쓸어 담고
쟁반처럼 미끄러져 갔다.


그 사이, 항구의
달콤한 심연으로,
아침 안개에 묻혀
원주민들이 떨어졌다.
몸뚱이 하나가 굴러떨어진다. 한낱 이름 없는
물건, 나뒹구는 하나의 번호,
쓰레기 더미에 내동댕이쳐진
썩은 과일 한 송이.


—「유나이티드 프루트사(La United Fruit Co.)」 부분

   위 시는 21세기 전 지구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여기에서도 현실감이 결코 뒤처지지 않는 현재성으로 육박해 들어온다. 라틴아메리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반)주변부의 정치경제학적 현실에 놓여 있는바, 민중의 궁핍한 일상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채 미국 중심의 다국적 기업과 정치 부패 세력은 정경유착의 밀월 관계를 공고히 유지하며 그들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면서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더디기만 하고, 민중은 풍요로운 대지의 삶이 훼손되는 데 이렇다 할 저항과 대안이 없는 정치경제적 피지배자와 빈곤한 소비자로 전락해 있다. 네루다는 그러므로 『모두의 노래』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이러한 현실에 대해 슬픔과 분노와 냉철함 등속이 어우러진 민중을 향한 노래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4. ‘민중 시인’으로서 자기각성과 자기발견

내가 과거에 탐구했던 그림자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돛대의 항구적인 기쁨이 있다.
숲의 유산, 길가의 바람
그리고 대지의 빛 아래서 결의했던 어느 날의 기쁨이.



(중략)



나는 민중을 위해 쓴다, 설령 그들의
투박한 눈이 나의 시를 읽을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내 시의 한 구절이, 내 삶을 휘저었던 대기가,
그들의 귓가에 닿을 날이 오리라,
그러면 농부들은 눈을 들 것이다,
제동수(制動手)는 이마의 땀을 닦고,
어부는 팔딱거리며 그의 손을 불태우는 물고기의
반짝거림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될 것이고,
갓 씻은 깨끗한 몸에 비누 향기 가득한
기계공은 나의 시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는 동지였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며, 그것이 내가 바라는 월계관이다.


—「커다란 기쁨」 부분

   네루다는 도피와 망명 생활 속에서 조국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찢겨진 삶을 지켜보았고, 그 상처와 고통의 삶 속에서 사랑하며 노래하는 민중의 싱싱한 삶의 역동성도 체감했다. 「커다란 기쁨」을 음미하다가 문득 그의 자서전 중 ‘민중 시인’으로서 자기각성과 자기발견에 네루다가 큰 감명을 받은 대목이 한층 더욱 실감으로 다가온다. 갈수록 ‘민중 시인’으로서 정치 윤리의 위상과 실재가 위축되고 협소해지는 우리의 문학과 삶의 현실에서 네루다의 ‘기쁨’을 곰곰 숙고해 본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로 통과한 끝에 민중 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내 글이나 시집도 아니고, 시어를 해석하거나 해부한 비평서도 아니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3)


참고자료

1) 파블로 네루다, 김현균 옮김, 『네루다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17쪽.

2) 파블로 네루다, 같은 책, 120-122쪽. 이하 인용되는 네루다의 시는 김현균 번역본 『네루다 시선』이므로 각주를 생략한다.

3) 파블로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박병규 옮김, 민음사, 2008, 263쪽.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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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철.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문화를 공부하는 트리콘의 대표이다.
디아스포라 웹진 편집기획위원회에서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을 주간하고 있다.
1998년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로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여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으며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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