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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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베트남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박지훈

   조상이 살던 나라를 떠나 남의 땅에서 터를 잡고 사는 삶이란 덜컹거리는 베틀 위에 두 발을 디디고 사는 바와 다름이 없다. 가로로 놓이는 씨실을 보며 안심할 만하면 이내 세로로 치고 들어오는 날실이 어렵게 찾은 안정을 흔들며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삶. 그러니 움직이는 베틀 위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잡기를 해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이란 남의 땅에서 살아갈 만한 지식의 내공이 쌓이고, 여섯이나 되는 성조를 구별하며 남방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어도 좀처럼 익숙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게다가 얼굴 생김으로도 이내 드러나는 이방인이라는 정체는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제법 가까워졌다 생각되는 그들과의 사이를 어느 순간 한껏 벌려 놓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해하는 그것이 옳은 걸까 의심되고 지금껏 알고 있던 그들이 과연 그들이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베트남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이 나라에서 십육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내게도 다르지 않다. 처음 공항에 발을 디딜 때와 달리 많은 것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변함없는 한 가지는 내가 이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처음 이 도시, 지금은 호찌민시라고 불리고 한때는 사이공이라 했던 이 도시를 처음 방문했을 때, 새벽잠을 깨우는 오토바이들의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음을 들으며 여유롭게 웃던 그 웃음은 언젠가부터 기억 너머의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같은 소음에 짜증을 내고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도시의 걸을 수 없는 거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거기에는 여행자로서의 낭만이란 없다. 생경한 도시에 대한 감상도 사치이다. 단지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토바이를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생활로 받아들이며 움직이는 베틀 위에 서서 조심조심 좌로 우로 균형을 잡는 일상만 남는다.
   처음부터 베트남에 오래 머물 계획을 했던 것은 아니다. 가족과 함께 미래를 이곳에 그려 보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그림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음에야 사람의 앞길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했을지라도 그 길을 이끄는 것은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는 잠언의 말이 그대로 옳다. 그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이의 일이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여전히 머물러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음은 그럴 수 있도록 손을 잡고 이끌어 준 어떤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연이라는 옷을 걸치고 기회의 문을 열어 주며 예기치 못한 어느 순간, 어느 사건을 택해 다가온다. 물론 그가 열어 주는 문에 들어섰을 때 그 안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만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게 2007년 5월은 기억할 만한 달이다. 당시 속했던 팀은 약 이 년간에 걸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포상으로 베트남 호찌민시로의 특별휴가를 받았다. 하필 베트남! 하지만 베트남을 두고 보면 기회라는 친구가 찾아준 때였다.
   베트남과의 인연은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1992년 12월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대기업들을 필두로 많은 기업이 새로운 기회의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 베트남으로 달려갔다. 내가 속한 설계사도 모기업의 프로젝트 지원을 해야 했으므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글로벌’이라는 표현이 생소하던 시절이어서 베트남에의 접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사의 선택지는 실패했을 때 출혈이 적은 사원급 디자이너를 투입하는 것이었고 덕분에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사회주의 국가 프로젝트를 경험하는 혜택 아닌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월남전과 베트콩에 대한 여러 얘기, 모든 게 빨간 줄 알았던 무시무시한 공산당 이야기는 현지에서 보내준 사진 몇 장으로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오래된 도시의 고즈넉한 골목길, 누렇게 덧칠해진 집들의 풍경, 황톳빛 거리, 그 사이를 아지랑이처럼 걷고 있는 하얀 아오자이. 하노이의 노란 햇살이 사진을 뚫고 나와 눈앞에 아른거렸다. 처음 보는 세계의 낯설고 생소한 풍경은 사진만으로도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베트남 정부에서 발행한 초청장을 받았을 때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거기에 찍힌 음험한 빛깔의 붉은 별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소년의 콩닥거리는 가슴에 찍힌 불도장처럼 자국으로 자리 잡았다. 애정이 싹텄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밤을 새워가며 일을 했지만 출장은 내 몫이 아니었다. 예뻐 보이던 화상의 별 모양 자국은 흉한 상처가 되었다.

   그런 베트남에 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특별휴가란다! 다가설 수 없는 꿈처럼 마음에 잠시 품었을 뿐인데 십이 년이라는 시간 뒤에 실제가 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도시 사이공이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휴가를 정말 휴가답게 특별하게 보냈다. 동행한 직원들과 어울려 방향을 정하지 않은 길을 걸었고 길을 걷다 좋아 보이는 카페가 보이면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연유 커피의 진하고 달콤한 향을 느끼며 베트남에 온 것을 실감하곤 했다. 삽시간에 쏟아지는 열대성 소나기를 피해 건물 밑으로 뛰어 들어가 헐떡이는 것도 유쾌한 기억들로 쌓여 갔다. 시클로를 타보고 논이라는 불리는 전통 모자도 써보았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생경한 놀라움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 놀라움의 정점을 찍은 것은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도시에서 듣게 된 알아보는 이의 목소리였다.
   박 이사? 여기 웬일이야?
   회사에서 베트남 프로젝트를 하던 시절에 인연을 쌓았던 그룹사의 지사장이 걷고 있는 거리 끝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그의 눈도 내 눈만큼 커져 있었다.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어딘지 비현실적인 만남이었지만 그가 전해 준 얘기도 그리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잘나가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베트남 현지 재력가들의 제안으로 투자금융회사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조직을 갖추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가 만나려고 했는데 이렇게 사이공에서 만나게 되었다며 놀라워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러했다. 회장단과 인터뷰를 했으면 하니 생각해 보고 답을 알려 달라고 했다. 기회가 문을 열었다.
   만남이 있은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투자개발사의 공식 초청으로 베트남을 다시 방문해 회장단과 인터뷰를 했다. 다니던 직장의 동의를 얻어 베트남으로 들어올 것을 결심했다. 모든 절차가 빨랐고 순조로웠다. 그렇게 떤선녓 국제공항에 발을 디딘 것이 2007년 9월 7일이었다. 그날 사이공에는 비가 내렸다.

   기회는 좋거나 나쁜 것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기회는 다만 기회일 뿐이다. 그것을 좋게 혹은 나쁘게 만드는 것은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베트남에서의 첫 삼 개월은 베트남에 있는 것인지 한국에서 근무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생활이었다. 숙소와 사무실, 기껏해야 회장단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새로 설립된 회사이니 준비해야 할 일도 많았고 투자개발 사업이라는 분야도 익숙하지 않았다. 커뮤니케이션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중에 새해가 찾아왔다. 그리고 가족이 입국해야 할 그해의 초입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터졌다.
   신년 사업계획 보고로 회장단 회의에 다녀온다고 나갔던 대표가 사색이 되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회장이 지난밤 비밀경찰들에 연행되어 하노이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마약 혐의라고 했다. 어리둥절했다. 마약? 비밀경찰? 압송? 익숙지 않은 단어들이 머리 위로 맴돌았다. 이튿날 신문의 경제면은 회장의 소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회장단 비서들에 의해 서류들이 어디론가 옮겨졌다. 외국인 이사진들의 숙소는 노출되지 않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들이 말하는 안전은 우리의 불편함을 의미했다. 불안함은 덤이었다.
   회장이 돌아오기까지는 몇 개월이 더 필요했다. 그 사이 모든 프로젝트는 연기되거나 중단되었다. 회장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갑자기 돌아왔다. 그의 압송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바닥에 깔려 있었고 회장단의 자산을 일부 포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맺어졌다. 포기된 자산에는 우리가 속한 사업체도 들어 있었다. 기회라는 열쇠를 쥐고 베트남에 들어온 지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잘못된 문을 연 것일까? 가족이 들어오기 전에 결정을 해야 했다. 남아야 할까 아니면 돌아가야 할까?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항공권만 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곳에서 이룬 것이 없었다. 불과 몇 개월 뒤면 아들의 중학교 졸업과 함께 가족이 합류하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몰랐다. 좋은 조건에 멋진 대우를 받으며 간다고 함께 기뻐해 준 한국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불면의 끝에 의문이 매달려 나왔다. 나는 왜 여기에 오게 되었을까? 내게 준 기회의 의미는 무엇일까? 크리스천의 정체성으로서 볼 때 하나님은 나를 망가뜨리고 수치를 주기 위해 유혹치 아니하심을 알고 있기에 이 의문은 중요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제대로 가질 수 없었던 의문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결론은 쉬웠다.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이 있구나. 그래서 나를 이곳까지 부르셨구나.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바닥에 떨어진 지금, 베트남 잔류와 한국으로의 복귀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감추어진 이유를 찾아야 했다. 베트남에 있으면서 베트남이 어떤 곳인지 몰랐던 그간의 현실이 떠올랐다. 가슴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래, 먼저 베트남을 알아야겠다.

   중고 오토바이를 샀다. 가족은 안전을 염려했지만 주말만 타겠다는 약속으로 동의를 얻었다. 베트남 사람과 같은 눈높이로 걷고 타면서 주말이면 거리를 탐색했다.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니 그동안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우아하게 몸을 눕히고 있던 때와 다르게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베트남어를 공부했다. 돈을 아껴야 하니 어학원을 다닐 수는 없어서 독학을 하기로 했다. 연습은 재래시장으로 갔다. 숙소에서 가까운 반타잉 시장의 좌판 아주머니들이 선생님이 되었다. 그들에게 책에서 공부한 문장들을 말하고 배웠다. 지금은 시장을 대신해 펄플라자라는 현대식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지날 때마다 감사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의 하나가 되었다.
   호찌민시의 북으로는 동나이강까지, 동으로는 사이공강을 넘어 롱탄까지, 서로는 떤푸로, 남으로는 빈짜인까지 구석구석을 오토바이로 훑었다. 파하사라는 국영 서점에서 지도 한 장을 사 들고 24개 군과 현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도시 구조가 눈에 들어왔고, 길의 이름이 익혀졌고 그 이름에 담긴 역사와 인물이 궁금해졌다. 그들을 공부했다.
   블로그도 열었다. ‘몽선생의 베트남견문록’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보고 느낀 것을 정리했다.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하는 순간 살아 있는 베트남이 다가왔다.

   베트남을 궁금해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생겼다. 이유를 알게 되었다. 베트남을 바라보는 내 눈이 편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내 안에는 보이지 않는 자가 있었다. 시각에는 눈금이 그려져 있었다. 보이는 것들은, 경험하는 정보들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편견의 여과지를 통해 판단되었다. 그것을 버려야 했다.
   그들이 미안하다는 얘기를 안 하는 것은 단지 자존심 강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어디서 읽은 책의 기준으로 해석했던 일, 그들이 입는 홈웨어를 잠옷을 입고 돌아다닌다고 혀를 찼던 일, 업무 종료 시간 땡 치면 바로 회사를 떠나는 그들에게 직업윤리가 없다고 비난했던 그 모든 일들이 잘못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베트남에 살면서도 여전히 한국식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편협한 아전인수격의 해석에 불과했다. 아열대에서 열대 몬순을 넘어서는 자연환경이 준 그들의 관습, 또한 경제의 규모 및 전쟁과 식민지 생활의 여파 그리고 체제 전환 국가의 특성과 오랜 항쟁의 역사가 쌓여 모인 그들의 지혜들, 그것이 삶과 문화를 이루어가는 실제 정체임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베트남이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쓰는 베트남어가 경상도 사람에게 전라도 방언으로 얘기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생소하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럼에도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귀를 기울여 주는 식당의 웨이트리스가 고마워졌다. 외국인이라고 무엇이라도 도우려고 귀찮도록 참견하는 그들의 선을 넘는 친절이 감사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보였고 사회의 구조가 눈에 들었고 그들의 문화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방인의 눈에 그들의 삶이 들어왔다. 기회가 던져 올린 흔들리는 베틀 위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견의 꺼풀을 떨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니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함께 사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사람의 앞길은 모른다. 준비를 해나가니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나를 베트남의 전문가로 인정한 한국의 회사로부터 법인장 지위를 제안받았다. 그렇게 쌓아가다 보니 십육 년이 되었다. 한국으로 떠나야 하나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아예 눌러살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 사이 하나뿐인 아들은 베트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녔고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듣도 보도 못했던 병원균이 활개 치는 속에서 군을 전역했다. 남의 나라 말은 한 마디도 못하던 아내는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투덜대기를 일 년을 채우더니 어렵게 시작한 공부를 마치고 자격을 얻어 베트남 호찌민시의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강의한다. 가족이 모두 베틀 위에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방법을 찾은 셈이다.
   가족 모두에게 쉽지 않은 시작이었는데 마음이 열리니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더 하게 되고 납득이 되니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해진다. 온갖 풍상을 겪어도 사람은 다 그렇게 제가 머무는 땅에서 살게 되는 모양이다. 아내는 사이공에 정이 들어 이제는 은근히 나이가 더 들어도 한국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속셈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가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베트남에는 공식적인 영주권이나 시민권 제도가 없다. 이민 제도도 없다. 그런 나라에서 머무는 삶이란 불안정성을 기본으로 한다. 마음이 열려 있건 얼마나 사랑하건 하는 일과 관계가 없이 정착할 수 없기에 그렇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회가 넘치게 보여도, 힘이 있어도 이 나라 사람들과 같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처자가 어찌어찌 잘못되었다는 기사가 나올 때, 특히나 그것이 사망 사건으로 번졌을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돌아보니 여기뿐 아니라 떠나온 조국에 대해서도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이공에서 만나게 된, 베트남에서 오래전부터 사업을 일구고 사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한 해에도 수차례 한국을 방문한다. 그런 그가 문득 자신의 시계가 멈춰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시간은 한국을 떠나왔던 그때, 베트남에 도착했던 이십 년 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했다. 그 깨달음은 한국을 떠나온 이후로 고국의 변화에도 속하지 못했고 지금도 부단히 일어나고 있는 베트남의 변화에도 속하지 못했음을 알았던 순간에 왔다. 돌아보니 그의 정체성은 한국도, 베트남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멈춰 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그 사람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에 대하여도 이방인이지만 고국에 대하여도 어정쩡한 입장이 되어버린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재외국민이라고 불리는 꼬리표는 우리를 본국의 동포와 구별되게 한다. 베트남에 살지만 베트남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음이야 당연하다지만 한국인으로 한국인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나마 유지하던 균형잡기의 한 축이 흔들림을 느낀다. 코로나바이러스 시국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재외국민은 한국인을 위한 백신 접종에서 제외될 뿐 아니라 한국에서 백신이 남아돌아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 한국에서 무시하는 어떤 종류의 백신이라도 베트남에서 접종해 주면 머리를 조아려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된다. 지원금을 받을 때도 비록 고국에 세금을 내고 있을지라도 재외국민은 제외된다. 살면 살수록 우리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넘쳐간다.

   다른 이와 어울려 사회를 이루는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속성인 것처럼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그러니 어디에도 확실하게 속해 있지 못함을 발견할 때, 특별히 그것을 떠나온 조국으로부터 느낄 때의 당혹스러움은 참을 수 없는 무엇이 되어 가슴을 때린다. 그런 섭섭함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 얼마를 살았건 사람들은 종국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아무리 베트남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말년에는 고국으로 들어가리라는 꿈을 잃지 않는다. 단순히 시민권과 같은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여우도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눕는다는데 사람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업에서 파견된 주재원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속하지 못한 이의 갈등을 겪는다. 베트남에 진출한 이름 다 아는 공기업, 대기업의 주재원들은 갖은 혜택과 지원을 받고 있어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 시간이 다했을 때 이미 흘러간 시간만큼 본사, 그리고 고국의 환경과 멀어져 있음을 실감해야 한다.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경쟁이 덜한 베트남의 교육 환경에 만족감을 느끼고 상대적으로 나은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는 동안 인터내셔널 스쿨에서 좋은 교육을 영어로 받은 그들의 자녀는 더 이상 부모가 쓰는 한국어의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 역시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어디를 떠도는 속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장기 주재하다 귀국 명령을 받았을 때 퇴직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은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꿈꾸는 마지막 정착지는 고국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위태해지기에 십상이다.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삶의 모습이 속출한다. 대기업의 주재원으로 화려하게 입성하는 이들이나 베트남에 오래전에 들어온 제1세대 정착 한국인들이나 어떤 점에서 그들의 삶은 유사성을 띠게 된다. 생활의 토대가 빈약하니 삶은 천박함으로 귀착되기 쉽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보니 서로를 경계한다. 베트남을 비난하고 같은 한국 사람들에 대해 투덜거린다. 함께 하는 일에, 서로를 인정하는 일에 무뎌진다. 생활이 안정된 회사에 속한 이들도 다름이 없다. 한 회사 안에서 한국인 사이에 너는 현채 직원, 나는 주재원으로 구별되는 관계는 차별과 반목을 일으킨다. 거기에 동반자 의식이 자리할 수 없다. 7군의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푸미흥이라는 지역에서는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남, 강북으로 구별해 자기끼리 짝하여 서로를 구분하기도 한다. 임시로 주어진 것을 자기 소유인 듯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주인도 아니면서 임차인끼리 네 집이 크네 내 집이 크네 목소리 높여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이곳에 있다. 그렇게 이어간 베트남 디아스포라의 삶이 삼십 년을 넘겼다. 그 기간이 짧지 않듯이 두 나라 사이에도 많은 것들이 변했다. 경제 협력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성과를 이뤄가고 있다. 한국의 언론 매체에서도 베트남 소식이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한 발전의 객관적인 지표들을 만들어가는 실질적인 힘은 인적 교류에 있다. 베트남에 들어오는 한국인들, 한국으로 들어가는 베트남인들의 수는 다른 나라에서 보는 양상과는 사뭇 다르다. 거기에 수많은 ‘가족’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젊은 부부들 가운데에도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맺어진 ‘한베 가정’을 쉽게 접할 수 있으리만큼 양국 관계는 특별하게 묶이고 있다. 이들의 존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은 두 나라를 연결하는 새로운 다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양국의 국민 관계가 지금과 같이 되리라고는 처음 수교 당시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수교한 지 한 세대가 지났다는 일이 의미를 갖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숫자로 인해서가 아니라 커가는 나무의 덮인 흙 아래 감추어진 넓고 깊게 뻗어가는 뿌리의 연결로 인해서이다. 이 특별한 관계의 형성은 그 속에 울고 웃은 애환의 수많은 이야기를 얼키설키 알처럼 품고 있다. 이 알들이 결과가 되어 깨어날 때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편견을 떨치는 일이 과제였지만 처음부터 두 나라 문화의 공통성과 차이점을 수용하면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베트남 사회는 어떻게 다가오게 될까? 한국 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까? 경계를 사는 이방인이 아닌 두 곳을 향유하는 다른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정말 궁금하다.

   그러한 장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이곳에서 이방인이다. 기업의 주재원으로 왔든, 한베 가정이든, 각자의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이십 년 전에 온 사람은 지난 이십 년간 이방인이었고, 이제 막 공항에 도착한 사람은 지금부터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거기에 미덕이 없을까? 우리가 우리의 이러한 정체를 직시한다면 오히려 이방인이기에 같은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힘듦을 이해하여 격려할 수 있고, 또 이방인이기 때문에 주인의 것을 존중하는 미덕을 보여주기에 수월하다. 그것이 이방인으로 사는 지혜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므로 주인 된 땅의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될 때야말로 서로 다른 민족이 모여 함께 갈 수 있는 출발선이다. 서로 간에 돕고 도와가며 동반자로 살아가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리는 시점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방인은 머무는 땅에 지분이 없다. 내 땅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그렇다고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집착할 어떤 것도 없으니 자유롭고, 그러기에 쉽게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같은 이유로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이 있었다. 그분이 자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 그에게 물었다.
   베트남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단한 이방인의 삶. 그분에게 그런 게 없을 리 없었다. 알면 알수록 늪에 빠진 것처럼 답답해지는 베트남 생활, 최소한 사오 년을 넘어 지낸 분들은 다 느껴보았을 그런 느낌. 그런데 그는 이런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기로 한 것이란다. 그는 베트남을 사랑한다고 했다.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이해 안 되는 이해의 근원을 찾아 탐구한다고 했다. 그분은 한국으로 복귀했지만 그의 말이 남긴 자취는 길고도 깊었다.

   베트남을 바로 알고자 하는 노력은 나와 우리를 위해서이다. 사건이 벌어질 때 눈치를 보며 불안으로 요동치지 않게 하고 나를 보전하며 우리를 지속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결과의 열매는 모두가 향유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알고자 하는 노력의 첫 단추는 편견을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것과 마음을 여는 것으로 꿰어져야 한다. 나쁘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숨은 가능성을 헤아리고 어지러움 속에서 질서의 끈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남의 땅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 땅의 사람들과 함께 미래를 나눌 방법이다. 미래는 함께하고자 하는 공감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방인인 우리는 열심히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이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잠시가 되건, 오랜 세월로 머물건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려면 먼저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입장을 앞서 요구하는 것은 순서에 어긋난다. 주인인 그들의 삶을 배워야 한다. 가끔 마음은 닫아 놓고 한국과 비교하며 언성을 높이는 분들을 본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보면 고혈압 외에는 남는 게 없다. 이방인으로 살면서도 번번이 정체를 잊고 목소리를 높이고 남의 땅에서 주인처럼 행세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뭐하나 빠르게 처리되지 않아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이 사람들이, 말 없는 미소로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해 울화통이 터지게 하는 베트남의 이 사람들이 주인이요 실상은 나를 도와서 목표하는 바를 더불어 이루어가는 동반자라는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의 앞길을 알 수 없듯이 앞으로의 나와 가족의 삶이 어떻게 이곳에서 펼쳐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길을 걷기 위해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워온 해묵은 단어들을 꺼내 들어야 한다. 나와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이해, 그들에게 먼저 배우고자 하는 겸손, 문을 열어 주기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 함께 가는 길에 쌓아가는 신뢰. 이 단어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디아스포라의 삶이 비록 흔들리는 베틀 위의 그것일지라도 잡아주는 손길이 되어 균형을 이루게 해 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여전히 이곳 베트남에서 머물러 함께 살며 그들과 성장의 열매를 나누어 먹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음을 기대하게 되지 않을까? 비록 마지막엔 고국으로의 귀환을 꿈꿀지라도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이 오기까지 그 단어들을 캐어내 가슴에 안고 곁에 선 이들과 손을 잡아 온기를 나누는 것이 지혜이다. 남의 땅에서 이방인의 날이 길어질 수 있는 길이다.

필자 약력
박지훈 프로필 사진.jpg

건축가(건축학 박사), 작가, 일러스트레이터이다. 2007년부터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정림건축 소속으로 현지법인을 일구고 제2기의 도전을 모색하고 있다. 베트남 생활에세이 『몽선생의 서공잡기』, 소설 『크룩스 크리스티』, 베트남 도시 개발 사업의 이해를 돕기 위한 『베트남, 체제전환국가에서의 도시개발』의 저자이다. 베트남에서는 『몽선생의 서공잡기』의 베트남어판인 Park Tiên Sinh Sống Giữa Sài Gòn이 출간되어 있으며 이 책은 『당신이 몰랐던 진짜 베트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023년에 국내에서 선보였다. 호찌민시 소재 반랑대학교(VLU)에서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한국인 커뮤니티인 아름다운 공동체와 베트남 청년들로 이루어진 물빛청년그룹, 베트남 결손 가정 아동을 돌보는 행복의 집을 섬기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