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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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흐름 위의 보금자리

홍성철

   여행은 낯선 곳에서 내가 사는 곳을 돌아보게 해준다. 지내 온 곳에서 한 걸음 떨어져, 찾아온 곳은 무엇이 다른지 가늠하다 보면 그동안 관성처럼 살아온 내 모습이 비로소 보이기도 한다. 하물며 이민을 와서 사노라면 무심코 지나쳤던 예전 한국에서의 내 일상이 얼마나 많이 새롭게 느껴지겠는가. 좋은 걸 좋은지 모르고 지냈고 다르게 풀어 나갈 수 있던 것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캐나다로 이민 온 지 25년 되었다. 이제는 한국을 방문하면 캐나다에서의 내 모습이 보인다. 당시 예닐곱 살이던 두 아이가 어느새 서른을 넘겼다. 지난 이민 생활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본다. 기대와 불안이 롤러코스터 탄 것처럼 교차하던 이민 초기로 시작하여 이제 몇 해 지나면 현업에서 은퇴할 시점에 이르렀다. 새삼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진다. 이민 온 사람의 감회가 많이들 그렇겠지만, 나 역시 고국에 남겨 둔 가족과 친구 그리고 많은 추억이 그리움으로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다. 때때로 한국을 방문하는데 언젠가부터 소설 제목 하나가 머릿속에 맴돌곤 한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You Can't Go Home Again)’.

〈신세계〉 교향곡 4악장

   군에 다녀와서 복학하기 전에 반년 정도 비는 시간이 있었다. 해외로 배낭여행을 가려고 열실히 알아보았는데 나갈 수가 없었다. 88올림픽 이전에는 해외여행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45세 이하의 국민은 법규에 의해 유학, 취업 등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개인적 사유로 국경을 넘을 수 없었다. 이를 확인하니 갑자기 한반도가 섬처럼 다가왔고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그럴수록 가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더 커졌다. 언제부턴가 넓은 바깥 세계를 떠올리면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느꼈다는 전율이 전해졌다. 기관차가 점점 빠르고 힘차게 달려 나가는 모습을 묘사한 〈신세계〉 교향곡 4악장의 웅장한 선율은 신대륙에 대한 내 동경의 주제곡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0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감행한 이민이었다. 이민을 결심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직장 생활 중에 경험한 해외 출장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콘퍼런스 참석과 업무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겉모습만 접했던 서구 사회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낯선 환경에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의 동경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었다. 망설이던 아내에게는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자고 설득했다. 마음을 굳히고 얼마 되지 않은 1998년 가을에 우리 가족은 토론토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2000년도가 다가오면서 컴퓨터 업계는 밀레니엄 버그가 큰 이슈였다. 연도 표기를 두 자릿수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2000년도가 되면 1900년으로 인식하게 되는 오류가 많이 발생할 거라는 우려였다. 그냥 걱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산업 전반에 공포로 다가왔기에 이민을 받아 주는 국가에서는 한시적으로 전산 인력을 우선 수용하는 방안을 도입했다. 이민을 막 알아보는 시점과 새로운 이민 정책이 잘 맞아떨어졌다. 내가 프로그래머로 근무한 경력 덕분에 손쉽게 이민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전산 인력을 공급하고자 하는 현지 업체와 연결되어 비교적 손쉽게 취업 비자를 받았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이민국 신청 서류를 받아 작성하고 각종 증빙 서류를 첨부하여 대사관에 제출하니 면접도 없이 취업 이민이 성사되었다. 미국과 캐나다를 두고 고민했는데 캐나다의 공교육이 더 낫다는 자료를 접하고 망설임 없이 캐나다를 선택했다.
   낯선 땅에는 생소한 것도 많았다. 혼란스러웠지만 조금씩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들도 힘들어하면서도 잘 버텨 주었다. 어른도 그렇게 부담스러운데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안쓰럽다. 처음 1년은 신기한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아서 더듬더듬 익혀 나갔다. 사소한 모든 것을 새로 배워 가면서 최선의 선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생활했다. 다행히 일자리를 먼저 구해서 들어왔기에 부담이 적었다. 동네 도서관에서 이용 카드를 발급받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의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사회 복지였다. 책도 빌려 보았지만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 비디오를 자주 빌렸다. 해당 도서관에 없어도 다른 곳에 있는 자료를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며칠 지나서 픽업해 가라는 전화 메시지가 왔다.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구경 갈 곳도 잘 몰랐기에 함께 영어 공부도 할 겸 좋은 영화를 찾아 영화 삼매경에 빠졌었다. 큰아이는 지금도 오드리 헵번이 제일 좋다고 한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교양과 상식이 부족한 여자 주인공이 말하기와 에티켓을 익혀 가는 장면에서 자기가 학교에서 영어 배우는 것을 교차하여 감정 이입한 것 같다. 그 외에도 〈길버트 그레이프〉, 〈가을의 전설〉, 〈반딧불이의 무덤〉 등 잘 만들어진 영화를 아이들과 함께 풍성하게 섭렵하던 시기였다.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은 가족 시간이었지만, 외톨이 가족이 고독을 맛보며 견디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아이들이 영화에 대해 자기 견해를 갖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보는 것이기에 선정성과 폭력성을 피하면서도 수준이 있는 영화를 고르는 것이 그 당시 나에게 어려운 숙제였다.

뿌리 얕은 나무

   이민의 시작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으나 타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취업한 회사에서 한동안 급여가 잘 나왔지만, 밀레니엄 버그 프로젝트는 오래가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영어가 더 유창했다면 일자리를 이어 갈 수 있었을 텐데 내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준비가 덜 되었음을 깨달았다. 직장이 참 쉽고도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 후로 오랫동안 캐나다의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다. 한국에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민 와서 갑자기 국제 미아가 된 느낌이 들었다. 안에 있을 때 나는 바깥을 바라보며 나가려 했고, 밖에서는 다시 안을 보며 그리워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펼쳐지는 이런 아이러니를 탓하고 원망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 학년을 올라가니 부양의 의무감은 더 무거워져 갔다.
   구직을 위해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돌리고 간간이 면접도 보았지만, 성과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 당시 스트레스가 커서 그랬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심한 근육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내가 나를 고용하기로 마음먹고 조금 가진 돈과 은행 융자를 합쳐서 장사를 시작했다. 토론토 대학 인근에서 컴퓨터 가게를 열어 수년간 운영했다. 처음 3-4년은 수지가 맞아 잘 꾸려 나갔지만, 스마트폰이 출현하니 사정이 달라졌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컴퓨터가 손안에 들어오는 시대가 되면서 고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컴퓨터가 이번에는 행운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던 어느 날, 셋집 월세 낼 돈이 부족함을 확인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소한 일로도 종종 티격태격하기도 하던 동갑내기 부부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가붙이 없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은행 마이너스 구좌를 써가면서 수년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듯 버텼다. 거친 광야에 오롯이 우리 네 가족만 뚝 떨어져 있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미국인들이 프런티어 시절의 경험으로 지금까지도 총기 소지를 선호하고 실용주의적인 처신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프런티어란 도와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모든 문제와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입장이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지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실감했다. 신규 이민자의 관문을 거칠게 통과하면서 그 절박함에 우리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지냈다.
   손해를 보고 사업을 접을 무렵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곧 대학에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험한 일은 피하려 했지만 이제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아이들 가르치고 먹여 살릴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몇 가지 일을 거쳐 목수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취미로 가구를 만들어 왔기에 관련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고 기본적인 연장을 다룰 줄 알았다. 몇 군데 건축 회사를 거치며 경력을 쌓았고 이제는 개인 사업자로 일하고 있다.
   처음 작업복을 입고 일하러 갈 때가 생각난다. 사무직으로 일해 오던 나는 소위 화이트칼라라는 자의식 때문에 마음 앓이를 했다. 작업 현장에서는 발끝이 강철로 보호되는 안전화를 신어야 하는데, 그것을 신고 다니는 것을 망설이며 따로 갖고 다녔다. 의식 저 아래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사회에서 자산이 없고 안정된 수입이 없다는 현실은 정확하게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한다. 아는 사람이 없는 이 땅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일단 나의 처지를 인정하고 나니 심적 저항감이 줄었다. 그 후로 작업복을 입고 거리에 나서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였다. 아이들 뒷바라지를 생각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저잣거리로 나선다는 생각에 시작은 부담스럽고 힘들었지만, 그 일은 의외로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나무를 다루고 구조물을 만드는 일이 적성에도 잘 맞아 지금까지 목수로 일하고 있다. 작업을 완성하고 만들어진 결과물을 점검할 때, 세워진 실물을 보면 일종의 성취감이 느껴진다. 나의 노력과 수고로 가구와 구조물을 말끔하게 만들고 나면, 그것이 비록 나의 소유물은 아니지만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그 안에 있음을 본다. 목수 일을 통해 생계를 이어 가고 일이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나만의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설계 도면을 보며 생각으로 구조물의 입체를 그려 보고 결합 방법을 찾는다. 숙련될수록 구상의 시간은 길어지고 만드는 시간은 짧아진다. 예전에는 기술적인 지식을 새롭게 얻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생소한 자재를 만나도 그다지 긴장되지 않는다. 유튜브에 올라온 많은 지침이 방법을 잘 알려 준다. 쟁이 수준의 작업을 더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끌어올리고 싶은 욕구가 느껴진다. 나의 창의성이 전개되는 장이니 그것이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채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목수로 일하는 게 좋은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가늘어지던 팔다리가 근육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수입이 적어 힘들던 시기에 마침 아내가 취업했다. 참을성 있게 파트타임 일을 견디더니 캐나다 언론사에서 정규직 자리를 얻은 것이다. 그 후로 다소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힘을 모아 우리 가족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의 지붕과 나의 벽이 있고 그 안에서 두 발 뻗고 편히 쉬는 것이 새삼 값지게 느껴졌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의 무게를 나누어 진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막내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는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의 졸업이 기쁘기도 하지만, 드디어 내가 부모로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졸업한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어깨가 가벼워졌다. 군장을 메고 행군하다가 마침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부부는 이민 후 지나온 힘들던 정착 시기를 흔연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내는 어떻게 우리가 그 시절을 버텼는지 모르겠다며 신기하다고 한다. 나 역시 동감이다. 내게 아내는 생활 전선에서 함께 싸워 가족을 지켜 낸 전우(戰友)다. 함께 힘들고, 함께 견디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의리를 나누게 되었다. 어려움을 함께 나눈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선물 같은 마음이 가슴을 따뜻하게 채운다.

어린 이민자

   막내 아이가 열 살 때 이렇게 물었다. “나 한국 사람이에요, 캐나다 사람이에요?” 캠프에서 캐나다인 아이들이 다 함께 부르는 노래를 자기는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국 노래를 따로 아는 것도 아니니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 들었나 보다. 나는 어떻게 답해 줘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그냥 한국에서 온 캐나다 사람이라고 답해 주었다. 시원한 대답이 아니라는 아이의 표정이 역력했다. 서랍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자기 여권을 찾아, 어릴 적 자기 사진과 캐나다 이민국 스탬프를 한참 보던 막내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이르자,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혼란스러운 것에 대한 불만이 더 커졌다. 그사이에 가족 모두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했고 아이들은 점점 한국적인 것을 멀리했다. 자기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반감으로 한국식 유행을 따르는 한국 친구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가정에서의 대화가 부모는 한국말, 아이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도 모르는 캐나다의 세세한 관습을 알려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말만 사용하라고 요구하기도 어려웠다. 다행히도 이는 대학에 가면서 완화되었다. 대학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 교우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수업과 과제를 수행하면서 많은 시간을 그 한국 학우들과 보내면서 정체성에 대한 반감이 많이 풀어졌다. 그러나 지나온 과정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였다. 아이들이 겪는 마음의 방황을 보며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라 안타까웠다.
   연변의 조선족 어느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우리는 짜장면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중국 음식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 거라고 합니다.”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는 심정을 토로한 것이리라. 대여섯 살에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 온 나의 두 아이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소외감을 느껴 보았다. 뿌리를 옮긴 나무가 추운 겨울을 넘기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서른이 넘어 자기 앞가림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니 두 아이가 지금은 한국 출신 캐나다인임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캐나다로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 학생들이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 머물고 입시, 취업 경쟁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춘기의 불안감과 방황은 단지 국적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내가 겪었던 사춘기도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싸우던 광폭한 시기였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십 대가 겪는 많은 혼란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데 더해 한국과 캐나다 사이의 소속감 문제가 얹혔을 것이다.
   한국인인가 캐나다인인가라는 문제를 풀어 가는 열쇠는 자기가 자기다움을 스스로 세우는 데 달린 것 같다. 한 인격체로서 자기다움을 찾고 자존감을 형성해 나가면 국적은 단지 서류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이민 1.5세, 2세가 겪는 국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결국 자존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인으로만 머문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지만, 사람이 누구의 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민 세대 간의 갈등이나 정체성 혼란에 대한 고민이 쉬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이다. 어차피 살아가는 것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연습 같은 하루하루가 아닌가. 나도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어도 새로 마주하는 현실을 서툴게 알아 가며 살아가는 것 같다. 성인이 된 나의 아이들이 자기다움을 찾고, 자기 안에 있는 엔진을 스스로 점화시켜 자가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무를 옮겨 심으면 잔뿌리가 잘려서 겨울에 동해(凍害)를 입기 쉽다고 한다. 이민을 통해 삶의 터전을 옮기고 새로운 세계를 체감하자면, 잔뿌리뿐 아니라 굵은 가닥도 숭덩 잘린 느낌이 든다.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눈앞의 어려움에 매달리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큰마음이 힘든 시기를 비참하지 않게 할 것이다.
   겨울을 넘긴 단풍나무에서 고로쇠나무처럼 수액을 받아 그것을 천천히 끓이면 설탕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은은하고 품격 있는 단맛이 나온다. 캐나다의 특산물, 메이플시럽은 겨울을 견딘 나무가 주는 선물이다. 옮겨 심은 나무가 눈보라에도 우뚝 서서, 자기가 내린 뿌리로 이 땅을 움켜쥐는 모습을 그려 본다.

두고 온 마음

   어머니와 고향을 생각하자면 마음속에서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이 떠오른다. 인생은 짧아도 음악가가 남긴 예술은 길이 남는가 보다. 위로를 건네는 선율이 엉킨 마음을 풀어 준다. 이민 가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에 나온 어머니를 나는 출국대에서 돌아보지 못했다. 어머니를 두고 떠나간다는 심정에 눈가가 젖어 오는데, 그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일 수가 없었다.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다는 미안함에 수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했다.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과 더불어 내가 자라고 성장한 삶의 뿌리를 찾아 타국 생활에 지친 내 마음을 위로받고 싶다는 바람도 컸다. 서울이 출생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줄곧 서울에서 자라며 학교 다녔고 직장 생활도 한 곳이기에 나에게 고향은 서울이다. 그러나 서울은 대도시라서 어느 지역을 특정하기가 모호하다.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대상은 내가 다닌 학교가 적합할 것이다. 그중에서 대학에 대한 느낌이 가장 애틋하다. 청춘과 낭만이 깃들어 있기도 하지만 군부 독재에 저항하던 시절, 함께 항거하고 토론을 이어 가던 장소와 친구들이 내게는 고향이요 준거 집단이다.
   수년에 한 번씩 대면하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은 실로 대단했다. 경이롭게 달성한 경제 성과가 그대로 반영되어 거리는 활력이 넘치고 전에 없던 세련된 건물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새로 큰 길이 나고 지하철과 고속철이 개통되어 첨단과 편리가 세계 여느 도시보다 앞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니 25년 전에 한국을 떠난 이의 눈에 그 변모가 놀라운 건 무리도 아닐 것이다. 거듭된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 낸 성과이기에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추억이 담긴 모습이 사라져 아쉽기도 했다. 향수를 달래려는 방문자에게 그 많은 변화는 무언가 섭섭함을 안겨 준다. 어릴 때 뛰어놀던 뒷산에는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고 학생증을 맡기고 술을 마시던 주점은 건물째 사라졌다. 종로 뒷골목에 맛집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던 피맛골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미명하에 반듯하고 높은 빌딩으로 바뀌었다. 마음속에 간직해 온 추억의 보금자리가 희석되는 걸 아쉬워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푸념이 새어 나왔다.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

   맨 처음 캐나다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하늘을 올려 보았을 때,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한국에서 내가 봐오던 것과 같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가족과 친구들하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는 것이 왠지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언젠가부터 미국 작가 토마스 울프의 소설 제목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가 마음속에서 점점 커지는 북소리처럼 울렸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연을 담은 소설에서 주인공은 고향이 개발과 투기로 급격하게 변하여 마음속에 그리던 그곳이 아님을 목격하게 된다. 이문열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향수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실된 것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예전을 그리워하는 나는 어쩌면 그리움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지금도 새로 만들어진다.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비행기가 토론토 상공에 들어서자, 이제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나를 반긴다. 어느새 이민 와 사는 토론토가 나의 터전이 된 것이다. 내가 사는 마을, 내가 만나는 이웃이 나의 고향을 이루게 된다. 한국이 발전하고 변하듯 내가 사는 토론토도 항상 개발되고 변모한다.
   시인 오상순은 「방랑의 마음」에서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이 향수를 갈무리하는 내 심정을 잘 대변한다. 내 마음속에 향수로 간직한 고향의 모습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내가 의식하지 않은 채 좋은 이미지만 골라 만들어 낸 이상향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고향 또한 그 흐름에 놓여 있다. 내가 안주할 곳이 있다면 아마 그 흐름일 것이다.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나의 혼”이라는 시구처럼, 세월과 인생의 흐름 속에 흘러와 머무는 이곳이 내가 미래에 품게 될 그리움이 움트는 자리일 것이다. 아마 나는 한국인이거나 캐나다인이 아닌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에 이른 것 같다.

필자 약력
홍성철_프로필.jpg

1963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IT업체에서 근무하다 1998년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에 정착했다. 이민 온 후, 음식도 한국 음식이 그립듯 우리 글이 더 애틋하여 습작을 써오다, 2015년 캐나다한인문인협회 신춘문예에서 시 「무너진 자리」가 선정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 미주한국일보 문예 공모에서 시 「양파를 썰면 눈물이 난다」, 동년에 미주수필가협회의 공모에서 수필 「너의 이름, 물푸레」로 각각 입상했다. 캐나다한인문협에서 수필 동인과 시 분과에 참여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