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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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5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소감

예니 에르펜베크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상을 받게 되어 큰 영광이며,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 기회를 통해 이호철 작가의 작품과 함께 알려질 수 있는 것, 힘들고 다사다난한 한국의 역사에 대해 깊고 감동적인 인상을 받게 된 것도 큰 기쁨입니다. 분명한 점은 분단된 국가에서 산다는 경험이 저와 마찬가지로 이호철 작가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인이 시작한 세계대전의 결과는 전쟁 이후의 전쟁―이전 동맹국 간의 냉전―이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로 독일이 분단되었고, 또한 그 전쟁의 결과는 한국전쟁과 38선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으며, 그 결과는 같은 점령국과 권력의 배경을 가진 두 나라의 국민들이 겪은 여러 경험들입니다. 분단선과 함께 사는 것, 그 분단 너머에 조부모님, 심지어 부모님, 형제자매들 혹은 고모, 이모, 삼촌, 사촌들이 있는 것, 그들의 일상이 뜻하지 않게 분리된 것,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분단의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도록 해줍니다. 독단적으로 가족, 언어, 고유의 문화까지 어긋나게 한 이 분단선은 우리에게 정치적 결정이 얼마나 개인의 인생 경로에 개입하는지, 그리고 내국과 외국이라는 개념이 실질적 근거리 또는 원거리를 얼마나 적게 설명하는지 느끼게 해줍니다.
   저는 베를린 장벽 인근 인발리덴 거리(Invalidenstraße)에서의 한 장면을 기억합니다. 아마도 1986년이나 1987년 여름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작은 제본소에서 일하던 저는 점심시간 동안 베를린 장벽과 가까운 어느 공장의 뒤편에 위치한 묘지에서 30분 정도 산책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벽의 반대편에서 공사 중인 집을 보았습니다.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서쪽을 보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라이프치히 거리(Leipziger Straße)의 한 고층 건물에서 자랐습니다. 집 열쇠를 잊어버리거나 어머니가 집을 비웠을 때, 13층 계단의 창문에 서서 저는 서독 저편에서 지나가는 2층 버스 숫자를 세었습니다. 묘지에서 산책하던 그날 갑자기 장벽을 넘어 다른 세계에서 온 건축의 소음을 들었습니다. 망치로 쇠를 때리는 소리, 드릴로 구멍을 뚫는 소리,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그 자연스러운 소리는 제가 눈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소리가 실제로 제 귀를 어루만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갑자기 물리적으로 또 다른 평범한 세계가 그곳에 있었고, 그것은 제 평범한 세계와 거의 비슷했지만 발을 들일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두 세계가 만나지 못한 채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국경이 존재합니까? 여전히,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는 것을 방지하거나 위태로운 것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결국은 둘 다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경사가 자연적으로 추구하는 것, 즉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역으로 성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어쨌건 (이런저런 이유로) 차이를 유지하기 위해. 즉 불평등한 압력, 비중 또는 불평등한 번영의 균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혼란을 예방하거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또한 무엇보다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이것은 소네트의 14행이나 유기체의 세포벽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경계가 인간에 의해 인간에 대적하여 만들어진다면, 당연하게도 항상 강자와 약자가 있는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강자로부터 또는 약자로부터, 적어도 한쪽에서 다른 한쪽에 대항하여. 보호하기 위해서 또는 빼앗기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해. 권력을 증명하기 위해. 독창성을 유지하기 위해. 친밀함이나 사유 재산을 위해. 먹을 것. 마실 것. 존엄. 그리고 시인 하이너 뮐러는 “전쟁의 최후 목표는 호흡하는 공기이다”라고 썼습니다. 그가 이 문장을 썼을 때, 그는 이 문장이 코로나 시대에 얼마나 실제적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경계에는 그것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경계 짓기는 힘을 필요로 합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저는 20대 초반이었고, 우리는 그것이 한 사람의 목숨도 앗아 가지 않고 쉽게 무너진 것이 행운이라고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동독 정부는 그 당시 1968년의 프라하나 1956년의 헝가리에서와는 달리, 소련이라는 전차가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몇 주 만에 제가 나고 자란 국가가 사라졌습니다. 모든 동독 주민들은 서독으로부터 소위 환영금(Begrüßungsgeld)을 받을 수 있었고, 반년 뒤 화폐 통합과 함께 공식적인 통일―서독에서는 편입이라고도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독일 민주 공화국은 끝이 나고 독일 연방 공화국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 국가원수 에리히 호네커 또는 슈타지(Staatssicherheitsdienst: 구동독 국가공안국―옮긴이) 최고 책임자 에리히 밀케에 대해, 또한 서독의 총리 헬무트 콜에 대해서도 어떻게 생각하는지 소리 높여 얘기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모두가 파리나 베네치아 또는 뉴욕으로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칭하는 새로운 ‘소프트웨어’에 대해서 기뻐하는 동안, ‘하드웨어’는 이미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동독의 몇몇 공장들은 1마르크에 서독 기업에 매각되어 문을 닫았고, 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또한 대학교수들과 강사, 학자들은 해고되었고 그들은 서독의 대학교수들과 강사, 학자들로 대체되었습니다.
   화폐 통합 이후 임대료는 하루아침에 10배가 되었습니다. 부동산은 서독의 사업가들이 사들였고, 공기업은 민영화되었습니다. 이른바 독일의 ‘통일 ’은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 아니라 40년의 역사 동안 분리되어 낯설어진 두 나라의 ‘결합’이었음이 점차 밝혀졌습니다. 서쪽에는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규칙을 수십 년 동안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반면에 소위 ‘신연방주’의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하룻밤 사이 배워야만 했습니다. 이는 한편에서는 거만함과 아는 체, 다른 한편에서는 실망과 생존에 대한 공포를 초래하여 객관적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는 조모, 이모, 삼촌, 친척들을 언제든 방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온 가족이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동독과 서독의 언어가 완전히 다른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같은 어휘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의 첫 번째 인생과 장벽과 동독의 붕괴를 통해 그때부터 시작된 두 번째 인생 사이에는 시간적 경계가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전환되는 경험 없이는, 오늘날 저는 아마도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글은 분단에 대한 숙고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일생 동안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숙고,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도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지에 대한 숙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동구권의 붕괴는 이제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 냈습니다.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유리 돔 아래 15억 명의 세계화 승자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내부 공간(weltinnenraum)’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는 보이지 않지만, 외부로부터 이 세계의 내부 공간으로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들이 극복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전쟁 난민, 추방자들, 무산자들. 올해만 해도 이미 1,400명의 사람들이 지중해를 지나 유럽으로 건너려 시도하다 익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 수가 확인된 사람들일 뿐, 아무도 없을 때 보트가 침몰한 사람들의 수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벨라루스와 폴란드 사이의 숲에서는 미지의 땅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에 의해서 방임되었고 더 나아간 여정에서 폴란드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또한 벨라루스에서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땅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잎사귀를 먹고 죽어갑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무방비한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럽 변두리의 폭력적인 독재 정권과 협정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재 정권이 아닌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는 매일 도착하는 난민들을 그냥 내버려 둡니다. 연대는 유럽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 아니며,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연대 없이는 평화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라고 불리는 것이 죽은 자들, 난민들, 더 강한 자들에 의한 폭력으로 측정된다면, 이미 유럽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전쟁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가장 잘 알고 계시듯, 전쟁은 흔적을 남깁니다. 파괴된 도시의 폐허가 된 들판과 새로 생겨난 국경의 가시적인 흔적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애도해야 하거나 힘든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영혼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자신의 삶의 의미였던 모든 것들을 잃은 후 사람들은 그들이 본래 누구인지, 왜 구출된 육체를 계속 끌고 가야 하는지 자문해야만 했습니다.
   전쟁과 전쟁 지역으로부터의 도피 역시 다음 세대에 흔적을 남깁니다. 전쟁은 가족 관계의 균형을 깨고 2세대, 3세대 어쩌면 4세대까지 확장됩니다. 공포, 슬픔, 폭력의 경험들이 전해집니다. 전쟁에서 얻어진 차가운 감정은 아이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은 자신의 무력함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 동안 부담이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세 살이었던 제 어머니는 지하실의 폭탄 저장고에 앉아 할머니와 두 형제와 함께 살아남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되지 않더라도 만약을 대비해 노래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손을 잡고 인도하소서/나의 축복받은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히’. 이 찬송가는 수십 년 후 나의 증조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또한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고, 유족들은 매번 의자에 앉아 울면서 폭탄 저장고를 떠올리며 그들이 거기서 살아 나온 것을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은 이런저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작되지만, 그것은 자의성과 우연의 지배로 일어나고 경험됩니다.
   저는 여전히 그 폐허를 알고 있고, 폭격 맞은 오래된 거리를 대체하기 위해 지어진 새로운 건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새 건물에서 자랐습니다. 또한 빈자리들도 전쟁의 결과입니다.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그곳에도 이전에는 성장했던 도시가 있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영혼 없는 쇼핑 구역들도 전쟁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파괴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전쟁의 유산입니다. 괴벨스가 “전면전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라고 환호성을 지르던 독일인들입니까? 아니면 전쟁이 끝나던 시기에 전략상 중요하지도 않았던 독일의 수많은 도시를 폭격한 영국인과 미국인입니까?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저는 저녁마다 평화롭게 잠들고 아침마다 평화롭게 일어나는 것을 당연시 여긴 적이 없습니다. 이따금 친구와 동네 산책을 하고, 낮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좋은 음식을 요리하고, 저녁에는 아들이 학업에 대해 얘기할 때 귀를 기울이거나, 남편과 체스를 두는 이 시간 동안 영원히 집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또한 하룻밤 사이에 도망쳐야 할 일이 생긴다면, 우리 가족의 중요한 기념품들을 담을 수 있는 큰 여행 가방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추억으로 가득 찬 것들을 보존하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지키려는 제 소망은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소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정체성을 확립하고, 개개인의 운명을 초월한 연관성을 형성하고, 그와 동시에 당사자들의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것들은 글쓰기를 통해 시도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렇습니다. 저에게는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부모님이 겪었던 전쟁이 뼛속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과 돈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심어진 유일한 원동력인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멸시가 없는 평화 협정이 있을 수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의 대가로 한 사람의 삶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요.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출처: 이 글은 제5회(2021)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소감임을 밝혀둡니다.

번역정보

번역 : 김나리 (독 → 한)

   2021년 10월 19일
   예니 에르펜베크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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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서사적 소설가. 훔볼트대학교에서 연극학을 공부하고 한스 아이슬러 음악학교에서 오페라 연출을 공부했다. 이때 하이너 뮐러, 루트 베르크하우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베를린과 오스트리아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수많은 오페라 작품을 연출했다.에르펜베크는 현재 전업 작가와 연출자로 활약하며 베를린에 살고 있다.
* 사진 출처: ©Katharina Behling/은평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