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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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우리 말·글 발표회

최봄이

  내가 살던 마드리드에는 매주 토요일 스페인 한인들이 운영하는 한글학교가 있었다. 당시 한글학교는 마드리드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전문학교 건물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컴퓨터실, 미술 작업실, 목조 작업장, 종합운동장 등을 갖추고 다양한 전문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진 복합 건축물이었다. 한글학교는 마드리드 시의 허가를 받아 전문학교가 소지하고 있던 다양한 건물 중 하나를 빌려 한인 자녀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한글학교로 사용된 건물은 빨간 기와지붕과 벽돌로 지은 매우 투박하고 실용적인 구조물이었다. 건물 내부는 새하얀 복도를 따라 길게 나열된 교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유아부부터 고등부까지 반을 배치하여 한국어 수업을 진행했다. 한 반의 학생은 많아야 스무 명 정도 됐는데 교실 규모가 너무 커서 사용하는 공간보다 낭비하는 공간이 더 많았다. 교실에는 똑같은 모양의 초록색 책상들이 가득 비치되어 있었는데 그중 반 이상은 주인 없이 교실 끝에 쓸쓸히 놓여 있었다. 교실의 두꺼운 벽은 밖에서 내리쬐는 햇볕의 열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차단하며 무더운 여름날에도 차가운 냉기를 뿜어냈다. 그 낯설고 이색적인 공간에서 나는 한인 친구들과 함께 받아쓰기와 일기 쓰기를 숙제로 하며 한국어의 기본기를 쌓았다.
  마드리드 한글학교는 한국어 수업 외에도 소풍과 운동회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는데 그중 해마다 ‘우리 말·글 발표회’를 열어 한국어와 관련된 각종 연극이나 사물놀이 등을 학부모 앞에 공연하는 날을 가졌다. 이날은 발표회 말고도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쓴 편지나 그림, 글들을 교실 밖 복도에 전시하여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놓기도 했다. 실내 장식이 없어 허전하고 밋밋하기만 했던 새하얀 학교 복도는 이날만큼은 학생들이 정성스럽게 그리고 붙인 알록달록한 색종이와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초등학교 3학년이나 4학년 무렵의 ‘우리 말·글 발표회’가 있었던 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복도에 전시된 학생들의 작품들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준비한 글 옆에 엄마들이 작성한 작은 글도 함께 전시하셨다. 거창한 글은 아니었고 자녀와 관련된 질문에 대답하는 짧은 설문지 같은 거였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 맞는 간단하고 재미 위주의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엄마와 같이 각 교실에 전시된 작품들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내 그림 옆에 놓여 있는 엄마의 설문지를 보게 됐다. 엄마는 설문지를 꺼내 들더니 뿌듯하게 웃으며 내게 보여주셨다. 설문지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많던 질문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답변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녀의 장래 희망을 물어보는 단락이었는데 빈칸에 엄마 특유의 흘겨 쓰는 필체로 ‘작가’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엄마는 봄이가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썼어. 내가 쓴 글이 책으로 나온다는 게 얼마나 멋있는 직업이니?”
  물론 엄마는 내가 진심으로 작가가 되기를 바라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 설문지의 답변은 내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전까지 엄마는 내게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신 적도 없었고 내게 어떤 기대를 품고 계셨는지 말씀하신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설문지를 통해 엄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아 매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작가라는 직업을 좋아하셨는지 몰랐고 내 장래 희망으로 그 직업을 적으실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날 엄마가 다른 식으로 내 장래 희망에 대해 말씀하셨더라면 ‘작가’라는 단어가 그렇게 인상 깊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환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과 ‘멋진 직업’이라는 말 때문인지 그 순간만큼은 작가라는 직업이 멋있게 다가왔다. 어쩌면 직업 자체보다 밝고 자신 넘치는 엄마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 ‘우리 말·글 발표회’ 때 일어난 기억은 머나먼 추억이 돼버렸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일주일에 한 번 다니는 한글학교보다 주중에 다니는 스페인 학교가 더 중요해지면서 한글학교에 관한 관심도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내가 고학년이 될 무렵 학생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결국 마드리드 한글학교는 더 작은 규모의 스페인 공립학교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학교를 이전하면서 어릴 적 추억이 가득했던 전문학교에 발 디딜 일이 없어졌고 몇 년 후 나도 고등부 과정을 마치면서 정식으로 한글학교를 졸업했다.
  그사이 나는 엄마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다가도 사소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 서로 다투기도 하는 어른이 되었다. 가끔 자랑스러운 딸이 될 때도 있었지만, 실망을 안겨 드린 적이 더 많은 것 같다. 성인이 되면 불안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좀 더 생길 줄 알았는데 서른이 코앞인 지금도 아직 나의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이 짧은 글을 통해 어릴 적 ‘우리 말·글 발표회’ 때 엄마가 적으셨던 작은 바람을 소박하게나마 이루고 간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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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주중에는 마드리드 학교를, 주말에는 한글학교를 다니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공부했다. 스페인 한인 2세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독서를 통해 풀면서 자연스럽게 문학에 관심이 생기게 됐다. 마드리드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스페인 언어와 문학을 전공하고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한국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한 후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계속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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