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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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뻴레산

리혜선

1.

   핸드폰을 끄려고 귀에서 내리는데 다음 소리가 왠지 속에 걸린다. 에이, 기어코 엄마를 닮았구나!
   아니요, 내가 닮았지, 언니가 왜 닮소? 라고 했다. 그러나 언니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 폰을 무릎에 내리고 생각했다. 뭐가 이상하지? 이상할…… 것도 없……지 무. 언니가 자기 엄마를 닮았다는데, 닮을…… 수도 있지 무. 결론은 그렇지 무였다.
   언니는 나랑 마적달(马滴达)로 가자고 했다. 이 팔촌들이야 내가 백년 기다려 봐야……라고 하며 섭섭해했다. 아들들이 언니의 뜻을 따라주지 않을 때마다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외할머니와 엄마가 떠올랐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임종 시에 나와 동생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외할머니는, 내가 없어진 후에도 너희들은 절대로 죽희를 빼놓으면 아니 되느니라, 라고 했다. 엄마는, 나는 일촌들이 있어 좋은데 죽희는 팔촌들뿐이니, 너희들은 죽희를 빼놓으면 절대로 아니 되느니라, 라고 했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공통된 인식은 딸은 일촌이라는 것이다. 아들이 팔촌이라는 것은 엄마만의 인식이다. 할머니에게는 만촌이었다. 아들은 집을 짓고 구들을 고치고 김치움을 파고 석탄을 퍼 들이던 시대에나 필요했는데 지금은 필요하지 않으니 아들을 낳았다는 것에 만족하자는 것이다. 일촌이요, 팔촌이요 할 때마다 나는 솜저고리와 가죽점퍼가 떠올랐다. 이는 딸과 아들에 대한 한족(汉族)1) 들의 이해이다. 솜저고리는 추울 때에 몸에 착 붙어 따뜻하다. 가죽점퍼는 추울 때에는 살갑지 않아 더 춥고, 더울 때에는 바람이 통하지 않아 더 덥다. 빛깔, 때깔이 좋은 비싼 옷을 자랑할 때에나 필요하다는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창문을 내다보니 언니가 와 있다. 문뜩 언니가 사실은 그 팔촌들- 아들들과 함께 마적달에 가고 싶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꿩 대신 닭이다. 언니를 유심히 살펴봤다. 3초간 숨을 죽였다. 순간 언니는 외삼촌으로 변하고 나는 언니로 변했다. 1986년도에 언니가 커튼에 몸을 숨기고 예리한 눈으로 창문 너머 외삼촌의 모습을 꼼꼼히 살피던 정경이 떠올랐다. ‘무조건 죽었다고 쓰거라!’라는 외할머니의 분부대로 우리 가족은 수십 년간 학교나 직장에 바치는 모든 등록표의 ‘사회관계’란에 외삼촌은 ‘죽었음’이라고 써 넣었다. 그런데 그 외삼촌이 40년 만에 나타났을 때의 일이다. 외할머니가 사망한 지 4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때 언니가 나의 엄마에게 속닥거렸다. 아재,2) 저 사람에게 옛날 일에 대해 말을 시켜보우. 혹시 내 아버지는 죽었는데 저 사람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 이 훈춘(珲春) 변경에 잠입한 남조선 간첩일지도 모르재이요. 우리 여기는 조선, 소련,3) 일본 삼국 변계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찔했다. 귓가에 접선 암호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책을 갖고 왔습니까? 가곡집입니다. 무슨 노래입니까? 아리랑입니다……. 이건 오늘 신문입니까? 오늘 신문은 다 팔렸습니다. 그 신문은……? 15일 신문입니다. 유명한 조선 반간첩 영화 〈보이지 않는 전선〉과 〈이름 없는 영웅〉의 명장면들이다. 이런 접선 암호들은 당시 중국 전역에서 모르면 간첩이었고 꽤 오랫동안 유행어로 됐었다. 그때 나는 방학마다 훈춘의 집으로 돌아올 때면 통행증 수속을 해야만 했다.
   언니가 그 말을 했을 때 방 안에서는 한창 돼지 족발 그을음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를 빼느라고 활짝 연 창문으로 겨울의 한기가 사선으로 서릿발을 치며 쳐들어왔다. 엄마는 며칠에 한 번씩 돼지 족발을 고아 외삼촌에게 대접했다. 외삼촌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돼지 족발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을리고 있는 부엌 아궁이를 들여다보며 엄마가 대꾸했다. 그 사람은 40년 동안 헤어졌던 내 엄마의 친아들이 맞고 내 친오로바이4)가 맞고 네 친아부지가 맞느니라. 그런 끔찍한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언니는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언니는 〈보이지 않는 전선〉의 남조선 간첩 ‘이춘옥’이거나 〈이름 없는 영웅〉의 조선 지하 공작자 ‘순희’를 닮아 보였다. 영화에 나오는 여간첩들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예뻤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언니를, 저건 닮지 말라는 지 에미를 닮아서, 라고 했을 때마다 언니는 난 엄마를 안 닮았소, 안 닮았소, 라고 하며 대들었다. 나는 내가 닮았소, 내가 닮았소, 라고 하며 언니 편을 들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언니의 엄마가 아주 예쁘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언니의 엄마를 닮아 예쁘고 싶었다. 나는 작은 눈에 열등감을 느꼈고 항상 냉수에서 건져낸 것 같은 초롱초롱하고 냉정한 언니의 커다란 외겹 눈이 부러웠다.

2.

   아래층에 내려가 언니와 함께 나란히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때에야 나는 왜 이상한 마음이 들었는지를 알았다. 언니가 갑작스레 훈춘에서 백 리나 떨어진 마적달로 가자고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마적달은 외할머니가 조선 두만강을 건너 시집온 곳이고 내 엄마 형제가 태어난 곳이고 언니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태어난 곳이다. 언니는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죽어라고 싫어했다. 언니의 엄마, 그 예쁜 외숙모는 해방 전에 우정국에서 일본말로 ‘모시모시’ 하면서 교환수로 근무했다. 외할머니는 화가 날 때마다 에그, 에그, 저 뻥테5) 는 눈에 명태 껍질이 씌어서 불여시 구신6)한테 홀려 한일평생을 망쳤지, 하고 넋두리를 했다. 그 ‘불여시 구신’이 외숙모였다. 외할머니는 아들이 그리울 때마다, 언니가 불쌍할 때마다 고작 2년간 며느리였던 언니의 엄마를 욕했다. 그 불여시 구신이……. 그런 엄마를 언니는 왜 지금에 와서야 닮았다고 할가?
   묻고 싶었으나 꼭 다문 언니의 입을 보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언니는 간첩을 닮았다. 이제는 70대 후반임에도 그 성격은 변함이 없다. 언니는 속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고 항상 비밀이 많았다. 그 비밀을 털어놓을 때마다 놀라야 했다. 일례로 언니가 약혼했다고, 곧 결혼할 거라고 말했을 때였다. 외할머니는 배신당한 듯이 분해하며 언니를 꾸짖었다. 이 할미는 괜찮다. 어쩌겠느냐, 이게 다 네 애비를 낳은 죄지, 그런데 네가 어찌 아재하고 아즈바이7) 를 몰래울 (모르게 할) 수 있느냐? 네 어시 (어버이의 방언)들이 널 몰라라 할 때에 네 어시로 돼준 사람들이 아니냐! 사람은 그렇게 살면 못 쓰느니라…… 그때 언니는 열아홉 살로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언니가 아무 말 없이 커튼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서 눈물을 똑똑 흘리던 정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또 이런 비밀이 있었다. 언니가 말했다. 난 네가 금방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로추이네 아이들과 아재네 아이들이 저 두만강에 빠지면 난 누구를 먼저 구할가? 누굴 구하겠소, 언니? 나는 초조해서 물었다. 마치도 내가 물에 빠져 한창 막 물을 들이켜고 배가 뽈처럼 똥똥 뿔어나 죽어가는 것 같았다. 너를 구하지, 네 동생들을 구하지, 그 생각이 딱 들더라. 번마다 (그 때마다) 똑같은 답이 나오더라. 그때 나는 진짜로 깊은 물에서 구원이나 된 듯이 기뻤다. 그렇지, 언니! 우릴 먼저 구하겠지, 언니! 하고 소리쳤다. 그 ‘로추이네 아이들’이란 언니의 엄마가 재가해서 낳은 언니의 의붓형제였다. 두만강 건너 조선에 사는 성이 최씨인 엄마의 남편을 언니는 로추이(老崔)8) 라고 불렀다.
   언니는 전쟁이 끝나자 통행증을 가지고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조선 훈융리에 사는 엄마에게로 다녀왔다. 언니는 번마다 (그 때마다)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으나 외할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어할 거라며 달래서 보내곤 했다. 어른의 말귀를 조금 알아듣게 되자 나는 언니가 언니의 엄마에게로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또 언니가 간 이튿날부터 돌아오기를 안타깝게 기다렸다. 언니는 언제나 책가방을 메고 갔고 책가방을 메고 돌아왔다. 그때마다 옷이든 신발이든 양말이든 어느 한 가지는 늘 새것이었다. 그때마다 언니는 바뀐 옷이든 신발이든 양말이든 다 책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와 나에게 주었다. 어떤 때에는 언니의 멋진 조선제 세라복9) 을 물려받기도 했다. 가끔은 까만 고무 코신이나 새 나일론 양말을 선물 받았다. 언니는 마른 통명태나 구운 밤을 가방에 담아 메고 오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의 조선제는 지금의 한국제, 미국제마냥 중국에서 인기였다. 그때마다 나는 마을 애들에게 빙 둘러싸였고 애들은 언니가 나에게 준 선물을 만져 보고 싶어했다. 언니는 그때 이미 한 해에 두 번씩 두만강을 십여차 건너갔다가 십여차 건너왔다. 그러니 자신을 십여차 시험대에 올려놓았고 십여차 모두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비밀인가.
   그 외에도 언니의 비밀은 항상 놀라운 것이었다. 마치 조개 속에서 오랫동안 숙성한 진주처럼 땅땅 여물고 기이한 빛을 내뿜는 것들이었다. 비밀이 있는 언니는 강했고 나는 그런 언니로 되고 싶었다. 나는 숨이 오르락거리는 언니의 부푼 가슴을 볼 때마다 그 속에 뭔가 근육처럼 똘똘 뭉친 것이 도사리고 있고 그것이 언니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장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3.

   우리가 훈춘 버스터미널로 갔을 때에는 마적달행 버스의 출발 시간이 40분 정도 남아 있었다. 휴게실에서 나는 잘 씻고 잘라서 비닐 도시락에 담은 참외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언니에게 주었다. 무슨 생각에 잠겨 말없이 먹는 언니에게서 외숙모랑 비슷한 데가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언니가 외숙모를 닮았다고 하면 방방 뛰며 대들던 일을 생각하자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언니는 나를 힐끗 볼 뿐 따라 웃지는 않았다. 1999년에 세관을 통해 두만강을 건너서 왔던 조선의 외숙모도, 1986년에 홍콩을 에돌아 왔던 한국의 외삼촌도 나는 다 그때 처음 봤다. 언니는 큰 외겹 눈과 약간 부푼 듯한 입술과 복숭아 모양의 약간 좁은 이마와 반양머리, 선명한 코 등 오관이 외숙모를 닮았고 진한 눈썹과 큰 귓방울은 외삼촌을 닮았다.
   언니도 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언니는 형부가 사망한 뒤 마음을 잡기 위해 한동안 우리 집을 들락거렸다. 이날 언니가 간다고 일어나자 문을 비쭉 열고 언니를 배웅했다. 잘 가우, 라고 하고는 바로 문을 닫았다. 네 살짜리 딸애가 모기에게 물릴가 봐 겁났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언니는 우리 집 봉당에서 허리를 굽혀 신을 신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선자야, 이따가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한참 있다가 닫거라. 나가자 바로 문을 닫아 버리니까, 내가 외딴 곳에서…… 버림……받은 느낌이 들……더라. 그때 나는 멍해서 언니의 후줄근한 잔등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어린 시절부터 시시각각 쳐들어오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물리치기 위해, 혹은 더 기억하기 위해 더 강했고 비밀도 더 많았던 것 같다.
   언니는 참외 조각을 두어 개 먹고는 입을 닦았다. 참외 두 조각 때문은 아니다. 혹시…… 언니가 혹시……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그 ‘혹시’ 때문에 나는 머리가 뗑 했다. 화장실로 간다고 하고는 부랴부랴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은 바깥 도로변에 러시아풍으로 예쁘게 지어져 있었다. 나는 언니의 팔촌들에게 전화를 했다. ‘들’은 아니다. 중·러 무역을 하는 큰 팔촌은 러시아에서 오지도 않았으니 연길에서 러시아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는 작은 팔촌에게 전화했다. 뚜뚜, 전화는 가는데 받지 않는다. 화장실에 뛰어들어가 소변을 보고 나와 또 몇 번 시도했다. 휴게실 쪽을 보니 언니가 허둥거리며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마적달행 버스가 들어서고 있다.

4.

   차창으로 시골의 풍경이 지나갔다. 6월이라 한창 푸르다. 멀리 우거진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듯하다가 빙빙 몸을 돌리며 멀어져 갔다. 하늘은 파랗지는 않고 푸르끄레한 회색이다. 쨍하지 않은 흐릿한 햇빛을 받아 산들은 약간의 자줏빛이 섞인 진녹색이다.
   버스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언니가 말했다. 옛날에는 이 터널이 없었다. 산을 넘어서 다녔지. 그랬구만, 하고 대답하며 나는 작은 팔촌에게 슬그머니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별일 없지?
   어렸을 때 양력 설에 이 산을 넘어오던 일이 생각나는구나. 그게 어느 핸데? 라고 하며 문자를 넣는다. 지난 목요일에 엄마가 연길 너희 집에 갔다 왔다던데? 팔촌이 계속 말이 없다.
   그게 1953년도 양력 설이었지, 하는 언니의 말에 설에 왜 집에서 곱다란히 설을 쇠지 않구 산을 넘어다녔다오? 라고 하며 계속 문자를 넣는다. 엄마가 너랑 만났을 때 별 말씀을 안 하시더니? 기색이 이상하지 않더냐? 계속 말이 없다. 전화를 하지 말거라, 지금 엄마가 옆에 있어서.
   그날 어찌두 춥던지. 옷두 변변찮았지 무. 수건으로 머리를 귀신처럼 동였는데두 귀가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더라. 훈춘 버스부에서 도랑꾸10) 를 탔지 무. 표를 내미니까데 도랑꾸에다가 나무 계단을 놓아줘서 그걸 딛구 올라갔지. 바람 가리개도 없는 적재함에 사람들이 물건처럼 꽉 박아 앉았지 무. 너무 추워서 아매11) 가 날 당신의 두 다리 사이에 꼭 끼워 넣구 당신 소캐와기12) 단추를 벗기구 가슴에 꼭 안더라.
   언니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외할머니에게 언니는 친손녀였고 나는 외손녀였다. 부모가 없는 아버지가 장모 집에 들어오면서 외할머니는 경제 대권을 모조리 틀어잡았다. 나는 외할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언니에게도 잘 보이고 싶었다. 외할머니에게 잘 보여야 외할머니가 군일 집에 가서 치마폭에 언니 몫으로 챙겨 온 떡을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언니에게 잘 보여야 외할머니가 가끔 상점에 가서 언니에게만 사주는 사탕을 나눠 먹을 수 있고 언니가 뜯어주는 강태나 땅꽈리를 먹을 수 있고 긴시13) 랑 돌차개랑 노는 언니 무리들을 따라다닐 수 있었다. 이 두 갈래의 생존 전략은 동시에 내 어린 무의식 속에서 진행됐다. 외할머니가, 나는 일을 잘하는 아이가 젤 곱더라, 라고 한 뒤로 나는 외할머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외할머니가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달려가 양칫물을 떠왔고 학교에 갔다 올 때에는 반드시 말라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라도 들고 들어와 불쏘시개에 보탰다. 외할머니에게는 언니가 우선이었고 그 지위를 우리 집 식구는 다 알았다. 그런데도 외할머니는 가끔 엄포를 놓았다. 죽희는 내 외아들이 남겨놓은 주씨네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다. 너네 집을 나가서 남의 애기를 봐줘도 난 죽희를 변변히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맞습지비, 잘 압꼬마, 하고 공손히 대답했고, 엄마는 약간 언짢아서, 그래 지금 누가 뭐이람둥? 하고 낮은 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나의 머릿속에서는 외할머니가 툭툭 던지곤 했던 아리송한 이야기들과 언니의 말들이 시간과 순서에 따라 이리저리 이어지고 맞춰지는 작업이 분주히 진행됐다. 무슨 팔촌? 이런 문자가 온 줄도 몰랐다. 말이 없는 작은 팔촌에게 짜증이 나서, 정말 팔촌은 팔촌이로구나! 하는 문자를 보냈던 사실도 잊었다. 엄마는 오지도 않았는데? 하는 문자가 떴는데도 몰랐다.

5.

   하늘에서 폭격기가 날아오는 소리, 산속에서 얼굴을 싸 안고 납작 엎드려 있는 여자애, 폭격기가 고막을 찢어내는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선회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을 일으키고 크고 작은 흙덩이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다. 소리가 조용해지자 아이는 한참 머리를 내밀고 살피다가 벌떡 일어나 미친듯이 온몸을 긁는다. 아이는 풀숲을 헤치며 뭔가를 찾는다. 노랑꽃술, 하얀 이파리의 꽃이 달리고 파란 열매와 까만 열매가 달린 풀 앞에서 멈춰 선다. 가장자리에 파도식 톱니가 달리고 끝이 뾰족하다가 점차 둥글어진 파란 잎사귀 한 장을 뜯는다. 그것을 작은 손바닥에 놓고 착착착 친다. 손바닥에 초록색 물기가 묻자 한 손을 들어 정수리 쪽의 머리카락을 헤친다. 손바닥에 누워 있는 그 축 늘어진 잎사귀를 부스럼 위에 조심스레 얹고 손가락으로 조금씩 눌러서 가제처럼 붙인다. 똑 같은 방식으로 강태 잎사귀를 뜯어 한 장 한 장 손바닥에 놓고 착착착 쳐서 머리와 엉덩이와 무릎과 다리와 팔에 난 부스럼에 붙인다. 그 초록색 ‘가제’들이 떨어지면 또 손바닥으로 ‘가제’ 한 장을 만들어 떨어진 자리에 붙인다. 부스럼과 그 주변은 강태 물을 먹어 까맣다. ‘가제’를 다 붙이고 나자 까만 진주알처럼 영근 강태 열매를 송이채 따서 입안에 밀어 넣는다. 달큰한 냄새를 맡은 벌 몇 마리가 날아와 윙윙 소리를 내며 맴돌고 아이는 두 손을 내저어 벌을 쫓는다. 잠깐 사이에 아이의 손과 입술과 볼과 혓바닥이 까만 강태 즙으로 물든다.
   아이는 숲을 나와 늦은 오후의 기다란 그림자를 밟으며 오솔길을 걷는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숲에서 멀지 않은 산비탈의 호박밭이다. 호박밭에도 그늘이 비꼈다. 채 여물지 못한 퍼런 호박들도 폭격을 피하듯 커다란 잎사귀 밑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 아이는 새로 나온 여린 잎을 한 장 한 장 따서 책장처럼 차곡차곡 따로 놓고 한뽐 이 넘는 늙은 줄기를 뜯어서 하나하나 실을 앗아 치마폭에 담는다. 호박밭 가장자리 풀숲에서 쇠투리 (씀바귀의 중국조선족 방언)와 민들레, 달래를 몇 뿌리씩 뽑아 흙을 털어 저고리 섶에 담아 한 손으로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호박 잎과 줄기를 꽃묶음처럼 들고 산을 내린다. 색이 바랜 하늘색 인조견 치마는 풀 물, 강태 물, 호박 줄기 물, 땟물에 물들어 얼룩덜룩하다. 치마는 군데군데 실이 끊겨 다리가 벌겋게 보인다.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산 둔덕을 내려 자작나무를 세워 엉성하게 지은 피란막으로 들어간다.
   두 집씩 이어서 지은 피란막들이 산 속에서 일정한 거리를 사이 두고 서 있다. 피란막 안에 짙은 어스름이 깔렸다. 폭격의 진동에 의해 흙이 떨어져 내린 벽 틈으로 옆집의 네 식구가 밥상에 앉아 오손도손 저녁을 먹는 정경이 보인다. 아이는 앞마당에 바윗돌들을 마주 세워 놓고 흙을 발라 세운 부뚜막에 불을 피워 물을 끓인다. 푸성귀를 씻는 사이 물이 다 끓자 호박 줄기를 넣어 데친다. 구석에 신문지를 덮어 두었던 묵은 조밥을 꺼내 놓고 호박줄기와 푸성귀를 간장과 된장에 찍어 반찬 해 먹는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사각사각 이빨 사이에서 씹히는 푸성귀의 소리가 수림의 숨소리처럼 들린다. 방안이 어둠에 함몰되자 성냥을 그어 등잔불을 밝힌다. 등잔이라야 엎어 놓은 사발 밑굽에 기름을 조금 붓고 무명실 심지에 기름을 묻혀 늘어뜨린 것이다. 오도카니 앉아 농끈 으로 꽁꽁 매놓은 문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기척 소리가 날 때마다 문으로 달려가 바깥에 귀를 기울인다. 등잔불을 보다가 비명을 지른다. 옆집 아주머니가 벽 틈으로 얼굴을 내민다. 왜, 왜 그러니? 왜, 왜? 또 쏠쌔미 (송충이)가 나왔니? 그 머저리 쏠쌔미, 콱 밟아 죽여라! 옆에 아주마이도 있고 아즈바이도 있으니까데,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러나 아이는 검은 줄이 간 흑갈색 털외투를 입은 쏠쌔미가 등잔불 옆에서 수많은 발로 꿈틀대면서 벽 밑으로 사라질 때까지 얼굴이 파래서 보기만 한다. 멀리에서 쾅쾅,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대충 바른 흙벽에서 흙이 와시시 떨어진다.
   죽희였다.
   아빠가 사라진 후의 어느 날 죽희의 엄마도 조선으로 갔다. 그날 죽희는 할머니의 잔등에 업혀 동네 마실을 갔고 엄마는 보따리를 든 외할머니와 이모들을 따라 작은 보따리 하나를 챙겨 들고 두만강을 건넜다. 3년 후 1950년 음력설이 지난 며칠 후였다. 해가 어슬어슬 지는 어느 날 저녁 무렵에 할머니는 어린 죽희를 데리고 잉크 색으로 깊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두꺼운 얼음 강판 밑에는 일곱 개의 점이 또렷이 보이는 칠성장어 무리들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죽희의 엄마가 조선에 발을 붙였으니 죽희를 보내달라는 쪽지를 인편에 보내온 것이다. 할머니와 죽희는 밀수꾼의 지시대로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리고 걸으라고 하면 걸으면서 보초병의 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넜다. 그들이 강둑에 올라섰을 때에는 날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그때 죽희의 눈에 뜨인 것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문이 가득 달린 이상한 ‘집’들이었다. 조선 훈융리역이었다. 기차를 본 적이 없는 죽희는 이곳의 집은 저렇게 이상하게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다.
   처음 폭격을 맞은 날을 죽희는 기억했다. 엄마가 한창 동네 물펌프를 자아서 (잣다, 양수기나 펌프로 물을 빨아 올린다는 뜻임.) 고등어를 씻고 있는데 하늘에서 귀청을 째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폭격이다!” 하고 소리쳤다. 엄마와 이모들이 뭘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고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이모 사촌언니가 벽에 걸린 옷견지들을 걷어다가 부엌에 감추던 일이 생각난다. 어느 날부터 산 속으로 들어가 피란막에서 엄마와 둘이 살았다. 또 어느 날부터는 엄마가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다고 하면서 이웃집에 죽희를 맡겨 놓고 바깥으로 돌았다. 엄마는 어느 날은 고등어를 들고 왔고 어느 날은 소고기 조림을 갖고 왔다. 또 어느 날부터는 엄마의 배가 점점 더 커졌고 집으로 오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죽희는 그런 전쟁 난리판에도 송화인민학교에 입학해 이 골 안, 저 골 안 옮겨 다니며 공부를 했다. 죽희는 혼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것이 쏠쌔미였다. 무서울 때마다 책장을 찢어서 “마저억따알, 죽희”라고 연필로 새겨 쓰고는 제비 꼬리 모양으로 쪽지를 접었다. 낮이면 쪽지를 가득 넣은 책가방을 메고 풀숲에 몸을 숨기고 폭격을 피해 가면서 훈융리역 철길을 넘어 두만강 가로 갔다. 그 쪽지를 들고 그 누구라도 붙잡고 할머니에게로 데려다 달라고 졸랐다. 번마다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쫓겨나곤 했다.
   그렇게 해가 저물었다. 1953년 양력설이 오기 전날 새벽, 문밖에서 자취 소리가 났다. 죽희는 벌떡 일어났다. 눈물이 먼저 할머니를 알아보았다. 쏴아, 하고 쏟아져 내렸다. 달려가 농끈을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할머니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죽희를 품에 꼭 그러안았다. 멀리에서 폭격 소리가 쿵쿵 울렸다. 그들은 그 새벽에 또 가만히 두만강을 건넜다. 도보로 훈춘 팔련성에 이르러 친척집에서 밤을 지내고 양력 설날에 트럭을 타고 마적달에 도착했다.

6.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간 마적달 촌은 한적했다. 동서로 쭉 뻗은 도로 양 역으로 마적달버스부, 우정국, 양고기꼬치집, 슈퍼, 식당들이 서 있고 북쪽 산기슭에 잘 지어 놓은 마적달학교도 보인다. 그러나 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폐업이라고 써 붙인 가게들도 보인다. 사고 방지용으로 도로 양역에 늘어선 먹녹색 철제 울타리 위에서 ‘짚 태우기 금지’라는
   빨강 글이 찍힌 노랑색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언니는 급한 걸음으로 선홍색 기와를 얹고 초록색 간판이 달린 우정국 건물 왼편으로 굽어든다. 모퉁이에 길죽한 잎사귀를 빽빽하게 펼치고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6월의 삽지나물이 푸르다. 경운차가 겨우 다닐만한 길이 북쪽 산 비탈로 향해 사선으로 올리 뻗었다. 지금은 청명도 아니고 추석도 아닌데 언니가 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합장한 묘지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렇거니 하자, 생각했다. 길 옆 주변에 진녹색 잎사귀들을 가득 펼쳐 든 참나무들이 있다. 언니는 가방에서 큰 종이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커다란 톱니가 있는 그 잎사귀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그 속에 넣는다. 언니, 이걸 어데다 쓰려구? 약에 쓰려구? 말이 없다. 역시 신경을 끄자.
   언니는 작은 나무 함 하나를 꺼내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묘 앞에 놓고 제사상을 차린다. 그게 뭐요? 라고 물었다. 언니는 말없이 나무 함 덮개를 열었다. 양말 목을 잘라서 만든 작은 주머니가 들어 있다. 나는 그것이 외할머니가 36년 동안 목에 걸고 있었던 열아홉 살 외삼촌의 사진임을 알았다. 외할머니는 그것이 아들의 명줄이나 되는 듯이 세수를 하거나 목욕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목에서 벗어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언니도 그 사진을 품에 넣고 아버지의 명줄을 꼭 잡고 있었던 것일가? 그러나, 왠지 헷갈린다. 그랬다면 왜 1986년에 훈춘 외사과에서 온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그렇게 냉정하고 단호했을가?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슴다. 아버지를 절대로 오지 못하게 해주쇼. 나한테 밥 한 숟가락 먹여 준 적 없는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겠슴다.
   이미 향항14) 에 도착했습니다.
   향항에 도착해도 나한테는 오지 말라고 하쇼. 또 무슨 정치 운동이 일어나면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은 다 반주검이 돼야 하는데, 안 만난다구 해주쇼.
   그리고 외삼촌이 도착하던 날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직장에서 빌린 봉고차에 앉아 역으로 마중하러 나갔다. 그날 언니는 개찰구와 이어진 철제 울타리 한 켠에 쪼크리고 앉아 퍼런 물을 토했다. 멀미를 했다. 언니의 손에는 ‘주죽희’라는 팻말이 들려 있었다. 언니의 이름은 중국어 발음으로 ‘주주지’였고 성조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상해서 상소리처럼 들렸다.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언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바탕 놀림을 당하며 자랐다. 언니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이름을 고치겠다고 하자 외할머니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 이름은 네 아부지가 지었으니 네 아부지가 반드시 그 이름을 부르며 널 찾아올 것이니라. 그러나 언니에게는 그 이름이 어떤 안 좋은 주술처럼 느껴졌다. 정치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언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주지, 하고 지명 비판을 당했고 그때마다 일제 시대 순사로 됐던 아버지의 죄를 비판하고 자기를 비판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외삼촌이 순전히 예쁜 외숙모의 눈에 들기 위해 순사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고 외숙모를 원망했다. 그것이 외할머니의 생각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때 외삼촌은 열아홉살이었다. 결혼한 그해 막바지에 언니가 태어났다. 얼마 후 일본이 망했고 이듬해 1946년에 외삼촌은 증발됐다. 교실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찾아와 ‘주주지’를 부르면 언니는 벌벌 떨었다. 꼭 아버지의 일본 순사 경력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아버지 대신 죄인이 되곤 했다.
   그날 나의 아버지는 개찰구 네 개에 길다랗게 줄을 선 여객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주죽희의 아버지께서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주죽희의 아버지께서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엄마는 엎드려 토하고 있는 언니를 부축해 일으키고 언니의 손에 잡힌 ‘주죽희’라고 쓴 팻말을 높이 추켜들었다. 그때 한 60대의 사나이가 두 손의 트렁크를 땅에 탕 놓고 달려왔다. 마중을 간 우리 다섯 명 중 엄마만이 외삼촌의 얼굴을 알았다. 철제 울타리의 굵은 쇠창살 사이로 외삼촌의 두 팔이 나와 언니를 안았다. 외삼촌은 울기만 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언니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눈을 내리 뜨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언니가 청명도 아니고 추석도 아닌 때에 말린 명태와 낙지와 색과자, 과줄15) 을 차려 놓고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나도 따라서 절을 세 번 했다. 언니는 외삼촌의 사진이 든 그 작은 함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묘지 옆에 묻었다.
   정리가 끝나자 산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언니가 털썩 앉으며 말한다. 그러시더라. 밥은 여러 곳에서 먹어도 잠은 한 곳에서 자야 하느니라. 그래서 우리 집에 묵으셨지.

   아버지가 역에서 철제 울타리 쇠살창 너머로 날 안았을 때에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무. 고슴도치처럼 온 몸의 털이 빳빳하게 살아나는 것 같으면서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라. 밤에 아버지의 손이 문턱을 넘어와 내 머리칼을 샅샅이 만지시는데, 아버지는 방에 눕고 난 정주에 누웠지, 상처라도 찾듯이 머리칼 밑을 귀밑까지 꼼꼼히 더듬고 또 내 손을 만지시더라. 그래도 난 꼼짝 안하고 자는 척 했지무. 아버지의 그 홍씨라는 아내와 세 자식이 떠오르더라. 속으로는 간첩이 아닐가, 그런 생각을 했지. 그 때 아버지가 중얼거리시더라. 내가 떠날 때에는 손이 요렇게 작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 다 내 죄지, 내가 죄를 지은 게지…… 그래도 내 마음은 끄떡없더라.
   그날 낮에 아버지를 마중해서 너의 엄마 집에서 첫 식사를 할 때에 내가 아버지한테 한 첫마디가 이거였지. 왜 편지에 날 물어보지 않았슴까. 부모, 형제보다 제일 먼저 알아봐야 할 사람이 자식이 아님까! 그 편지를 본 날부터 나는 내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한테서도 철저히 버림 당했다는 생각을 했슴다.
   아버지는 오기 석 달 전에 인편에 편지를 보냈지무. 마적달에 살았던 누구의 아들이며 형제는 누구, 친구는 누구라고 적어서 보내면서 누구든 알면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지. 여러 사람을 통해 그 편지가 내 손에 들어왔지무.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너의 엄마랑 다들 죽었거니 한 사람이 살아 있다고 좋아서 난리가 났다. 그런데 나는 대성통곡을 했지. 그 편지에 글쎄 내 딸 죽희를 찾는다는 말 한 마디만 쏙 빠졌더라. 그래서 난 아버지는 진짜로 죽었다고 마음먹었다. 엄마한테서도 버림받았고 아버지한테서도 버림받았다, 난 혼자다, 그렇게 생각했지.
   내가 따지니깐 당신은 내가 조선 전쟁에서 폭격에 죽은 줄로 알았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그렇지, 정말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물어봐야 할 게 아님까! 하고 대들었다. 제 자식을 모르는 사람이 간첩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지.
   헤어질 때에는 어쨌소?
   혈육을 뭐로 끊겠느냐…… 그런데, 아버지란 말이 입에서 그렇게도 나오지 않더라. 아버지를 불러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헤어지려고 하니 설음이 북받쳐서 아버지, 하고 부른다는 게 그만, 아즈바이, 하고 불렀다. 나도 놀라서 아, 아니지, 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맞지, 아……즈……바이가 맞지, 아니, 아즈……바이……보다 못……하……지…… 그러시며 낙루하시는데 기차가 떠나더라…… 그때에야 난 알았지, 네 아버지-아즈바이가 나한테서는 아버지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었더라.
   이때 갑자기 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두웠던 언니의 얼굴이 순간 상추꽃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누구요? 했더니, 지지양삑또르다. 에고, 살라는지 죽으라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며 나한테 폰을 넘긴다. 언니의 손주, 작은 팔촌의 작은 팔촌이다.
   삑또르는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가진 이름이고 중국 이름은 츠쯔양(池智阳), 우리말로는 지지양이다. 언니는 자기 이름이 중국어 발음으로 ‘주주지’여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손자의 이름이 우리말로 ‘지지양’이어서 이름자를 동의하지 않았다. 왜 하필 지지양이냐? 지지구 볶는다는 말이냐? 그러나 아들은 기어코 이 이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띠 해에 태어난 남자애는 이름에 물도 있고 태양도 있어야 하는데 이 이름은 물도 있고 태양도 있다는 것이다. 보나마나 학식이 많은 한족 사돈이 지었을 것이어서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족 엄마한테서 태어나 한족 학교에서 공부했고 사회관계도 다 한족이니 우리말 이름자는 신경 안 써도 된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그래도 지 아들을 보내줬다는 생각에 언니는 감격했다. 지지양의 말을 통역해서 언니에게 전달하고 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언니는 팔촌도 아닌 십육촌이 왔는데도 그렇게 좋아하네! 언니 얼굴의 상추꽃은 산을 내려 도로변에 서 있는 봉고차로 달려가 십육촌을 껴안으며 더욱 활짝 폈다. 지지양아! 우리 지지양아!

7.

   마적달에는 중러변계를 의미하는 화강암으로 세운 살자비16) (萨字碑)가 있습니다. 자, 화면을 돌립니다. 저기 저 산 비탈에 말발굽 모양의 더기가 보이지요, 그 위에 푸른 불벽돌로 지은 천1200여 년 전의 옛 탑이 있었답니다. 이 곳 지명은 간략하여 마제탑(马蹄塔, 말발굽탑)이었는데요, 수많은 세월 입에서 입으로 와전되면서 지금은 마적달로 불리고 있지요. 세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러우충돌이 백열화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도 십육촌은 자기 여행사의 관광객 유치와 아버지 회사의 러시아 상품 마케팅을 위해 중러 변계에 있는 마적달 영상을 촬영했다. 더우인 숏폼에 올릴 예정이다.
   봉고차가 들추기는 통에 옆구리가 터진 김밥이 입에 채 들어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흘러내렸다. 옷섶에 떨어진 오이며 단무지며 쏘세지 조각들을 입안에 주어 넣는 사이 사이에 십육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1920년이었습니다. 이해따라 늦게 내린 첫눈이 마적달 전체를 뒤엎었는데요, 그 하얀 눈 위에서 마른 참나무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선연한 빨간 빛을 내뿜었답니다. 북쪽 마적달산도, 남쪽……십육촌이 마이크를 끄고 백미러로 나를 보며 물었다. 할머니에게 물어봐 주세요. 남쪽 산 이름이 뭐지요? 내가 통역을 했더니 언니는 김밥을 가득 문 입을 조금 벌리고 내뻴레, 한다. 뭐이라오? 내뻴레산. 나는 이 내뻴레를 뭐라고 번역하면 좋을지 생각나지 않아, 이건 무슨 말이오? 내뺀단 말이오? 아니면 소련 말이오? 아니면 청나라 만족 말이오? 했다. 나두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더라. 아버지도 내뻴레산을 넘어 갔다더라. 하도 배고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소련 땅으로 넘어 갔다더라. 어찌어찌하다 보니 한국까지 갔는 갑더라. 내뻴레산. 언니는 태연히 김밥을 씹는다.
   통역에 차질이 생겨서 봉고차는 길 옆에 서고 나는 폰으로 마적달 남쪽 산의 이름을 검색했다. 입안에서 김밥이 콱 뿜겨져 나와 차 안 사방에 흩어져 내렸다. 밖에서 촬영하던 십육촌이 영문을 몰라 창문으로 들여다본다. 나는 웃음이 터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남별리(南别里), 중국어 발음은 ‘난비에리’이다. 중국말을 몰랐던 조선 이주민들은 ‘난비에리’를 ‘내뻴레’라고 부르며 살았고 그렇게 백 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잠간 심각해지는데 눈만 멀뚱거리는 십육촌을 보자 곧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가 내 웃음이 멈추기 바쁘게 영상 촬영이 계속됐다. 전설17) 이기는 합니다만, 하얀 첫 눈 위에서 마른 참나무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선연한 빨간빛을 내 쏘았답니다. 북쪽 마적달산도, 남쪽 남별리산도 온통 다 새빨갛게 물들었답니다. 사람들은 그 정경을 보고 아연실색하여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답니다. 그 빨간 빛의 거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해 엄청난 굉음이 울리더니 천년 옛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답니다……
   일순간 겨울 참나무 잎사귀들의 그 섬뜩한 붉은 빛깔이 내 눈을 빨갛게 물들이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십육촌이 작업을 마치고 백미러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언니에게 통역해 주었다. 지 애비가 할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자기를 보냈다오. 어째서 오란다니? 언니가 묻는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러시아산 야생 털게를 대접하겠다고 한다오.
   솔만자교(甩湾子桥)로 가자고 해라.
   백미러로 할머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눈만 멀뚱거리는 십육촌에게 나는 언니의 뜻을 전했다.
   쏴이완즈쵸우(솔만자교)?
   십육촌은 눈을 커다랗게 치뜨고 백미러로 할머니를 본다.
   솔만자교?
   나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때부터 내 속이 부글거렸다. 작은 팔촌이 왜 아들을 보냈을가? 왜 언니를 연길로 모셔 오라고 했을가? 혹시…… 그 혹시가 나를 죽인다. 창밖으로 나무 그림자들이 언니 얼굴에 그늘을 날리며 지나가고 언니는 혼곤하게 잠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언니가 어떤 이벤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왜?
   솔만자교는 언니가 1950년 음력설 후에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언니의 엄마가 살고 있던 조선 훈융리로 가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면서 지났던 다리이다. 또 전쟁이 한창이었던 1953년 양력설 전날 할머니의 손을 잡고 중국으로 오면서 지났던 다리이다. 그 다리를 건넌 것은 아니다. 솔만자교는 일본군이 중국의 자원을 약탈해 일본으로 운송하기 위해 1938년에 건설했다가 1945년 패전을 앞두고 퇴각하면서 소련군을 방어하기 위해 폭파해 버린 다리이다.
   딩동, 하고 문자가 왔다. 작은 팔촌이다. 아재, 전화 됨까? 안된다고 급히 문자를 보내던 중이었다. 잠들었거니 했던 언니의 목소리가 뒤에서 튕겨와 와뜰 놀랐다. 비가 오지 않을가? 돌아보니 언니가 평온한 얼굴로 창밖 두만강을 바라보고 있다. 글쎄, 하며 하늘을 보니 검은 구름이 슬금슬금 뭉치고 있다. 요즘은 무슨 일 때문인지 국경 경비를 특별히 강화한다고 하던데요, 하고 십육촌이 걱정한다. 그 말을 통역했더니 언니가, 쪼금만 있다가 간다구 해라, 한다. 그 말을 전했더니 십육촌이 킬킬거린다.
   마적달에서 솔만자교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언니가 말한다. 사람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옷이 닳더구나. 훈융리에 있는 엄마 집에 가서 20일 동안 가마목18) 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아래 내복 엉덩이에 구멍이 나더라. 언니, 설마? 하며 봤더니 전혀 농담하는 기색이 아니다. 왜 가만히 있기만 했소, 모처럼 만난 엄마와 함께 실컷 나돌아다니며 놀았어야지?

   아버지가 왔다 간 후로 오랫동안 엄마 집으로 못 갔지무. 자본주의 남조선에서 아버지가 왔다 갔으니 그 소식이 혹시라도 그쪽에 전해지면 엄마나 나나 다 고생할가 봐 걱정스럽더라. 그러다가 6년이 지나서 1992년에 큰 마음을 먹고 갔지무. 엄마에게 보탬이 될가 싶어 물건을 큰 트렁크 두 개에 꽉 박아 가지고 갔다. 옛날 우리가 조선제를 좋아했듯이 그쪽에서는 지금 중국제를 좋아하니깐. 가서도 두문불출하고 가마목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지. 엄마는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더라. ‘로추이’와 아이들이 없을 때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라. 그래도 나는, 벽에 귀가 있소, 하며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 7년 뒤에 엄마가 우리 집에 왔을 때에도 아버지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옛날 정치 운동 때마다 내가 아버지의 ‘역사 문제’ 때문에 고생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더라. 아버지가 보내온 엽서는 보여 드렸지. 한 장 한 장 찬찬히 보시고 손으로 자꾸 만지시더라. 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식구들에게 엽서를 보내오셔서 꽤 많이 모여졌지. 엄마는 그중 한 장을 자꾸 훑어보시더니, 너 아버지랑은 훈융리에서 한동안 같이 살았다, 하더라. 난 깜짝 놀랐지. 죄가 있는 사람이니깐 아버지는 조선에서 또 도망을 친 거지. 엄마는 그 엽서를 손에서 놓지 않더니……
   갑자기 차가 밀렸다. 차가 가다 서다를 거듭하더니 변방 군인이 나타났다. 차 문이열리고 신분증과 트렁크 검사를 했다.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다. 십육촌이 재빨리 솔만자촌에 할머니의 친척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잠깐 더 달렸다. 또우러, 또우러! 십육촌이 다 왔다면서 차를 솔만자촌 마을 입구에 세우고 도어를 쫙 열었다. 1.8미터의 큰 키를 낮추고 차안으로 손을 쑥 내밀어 언니를 부축했다. 나는 뭘 찾는 척하고 차안에서 전화를 했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에 후둑후둑 떨어져 내린다. 작은 팔촌이 다급히 말했다. 엄마가 엄마를 닮았다고 한다니깐 연변 병원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알아봤소, 엄마의 엄마가 자궁암으로 사망했다니깐…… 엄마가 여러 검사에서 자궁벽 병변이 발견돼 생체 조직 검사를 받았다오. 3일 내지 5일 사이에 결과가 나올 거고 암이 의심되면 더 긴 시간이 걸릴 거라오. 그런데 오늘이 6일 째인데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소…… 작은 팔촌은 입안이 말라드는지 쩝쩝거렸다. 나도 혀가 입천장에 들러붙어 쩝쩝거렸다.
   비가 뽀얗게 내리기 시작했다. 언니가 비를 맞으면 안되는데, 생각하며 뒤를 쫓아갔다. 앞에 불쑥 어떤 군인이 나타나자 우리는 와뜰 놀라 멈춰 섰다. 핸드폰을 검사하고 돌려주면서 어서 돌아가라고 했다. 촬영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십육촌이 중얼거렸다. 차로 돌아왔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졌다. 솔만자교가 지척에 있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배경음으로 들리는 가운데 빗소리에 잘려서 들려오는 언니의 말은 현실감이 없다. 티브이에서 음악도 깔리지 않은 어떤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이 실인물 내레이터의 입을 통해 울리는 것 같다. 울아버지가 편지에 마적달의 …… 참나무…… 잎을 뜯어서 보내주렴…… 그래서 편지 속에 넣어 보냈지…… 어느 참나무 밑에서……두 사람이 처음 만났는데……엄마가 손수건을 잃어버린……나무……라고…… 나는 지금…… 엄마 산소도, 아버지 산소도 모르니…… 갑자기 언니가 차 도어를 쫙 열자 빗소리가 세차게 들리고 언니의 말소리가 반토막이 난다…… 쪼금만 있다가…… 온다…… 해라…… 언니가 종종걸음 치며 달린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 때문인지 사면이 뽀얗고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솔만자교’라는 녹이 쓴 간판이 붙은 다리에는 새로 만든 철제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그 위에 노란색 글씨로 경고문이 적힌 붉은색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오른편에는 총알 자국이 가득하고 시멘트 벽이 군데 군데 흉물스럽게 떨어지고 벽 틈에 풀들이 가득 자란 일제 시대의 또치카가 90년의 시간을 멈춰 놓고 서 있다. 그 왼편에는 ‘홍색 문화 광장을 만들고 아름다운 훈춘을 공동 건설하자’라는 글이 적힌 벽보가 서 있다. 주변은 전부 철사망으로 막혀 있다. 내가 헐떡거리며 도착했을 때 이 칠십대 후반의 노인은 벌써 녹물이 가득 번진 시멘트 난간에 서서 큰 봉투 두개를 꺼내 들고 있다. 왜 두 개일가, 생각하고 있는데 언니가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냐? 다리 밑을 바라보니 중국 쪽의 강물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나고 조선 쪽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들고 보니 두만강 마른 바닥의 중조변계에 철사망이 늘어서 있다. 비가 더 속도를 낸다. 천지사방이 빗발에 가려 뽀얗다. 멀지 않은 강 바닥 중심에 어렴풋이 수형이 아름다운 아름드리나무 몇 그루가 철사망을 사이에 두고 비를 맞고 있다. 얼른 말했다. 언니, 다 마음이 하는 일인데 강물이 말랐다고 어찌 언니 마음이 전해지지 않겠소! 그럴……가? 언니의 그 마지막 ‘가’ 소리가 비소리에 삭제되고 ‘그럴……’만이 내 귀에 와 닿는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언니의 손가락 사이로 아직도 싱싱한 참나무 잎사귀들이 마른 강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언니의 젖은 손이 후들거려서 두 번째 봉투는 내가 열었다. 언니의 말소리가 중간중간 삭제되며 들려왔다. 엄마…… 그 엽서……보고…… 대성통곡…… 내가 너 아버지하고……이별할 때……이렇게…… 훈융리역 철길 기차 옆에서…… ……딱 그 장면이구나, 딱…… 딱 …… 나는 내손에서 비를 맞고 있는 엽서를 찬찬히 보았다. 일남일녀가 서 있는데 안개가 뽀얗게 낀 철길 위에서 연기를 토하며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엽서로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디자인인데 언니의 엄마에게는 특별했다. 뒤집어 봤지만 누구에게 보낸다는 글은 없다. 언니의 손에 넘겨줬더니 엽서는 곧 빗바람에 날려 두만강의 마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언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그럽데. 내가 어찌 네 엄마를 잊겠느…… 갑자기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가 언니의 소리를 잘랐다. 즉시 떠나시오, 즉시 떠나시오……

   2023년 8월 3일

참고자료

1) 중국 본토 민족.

2) 중국 조선족의 방언. 아버지 여동생인 고모, 엄마의 여동생인 이모, 젊은 여자를 ‘아재’라고 부른다.

3) 구소련이 해체되기 전이다.

4) 중국 조선족 방언. 오빠.

5) 중국 조선족 방언, 바보스러운 사람.

6) 불여우 귀신.

7) 중국 조선족 방언, 고모부, 이모부, 결혼한 젊은 남자를 호칭하는 말이다.

8) 중국인은 자기보다 나이 든 사람을 연장자라는 뜻의 ‘로(老)’자에 성을 붙여 호칭한다.

9) 교복을 뜻하는 일본식 낱말.

10) 중국 조선족방언, 트럭.

11) 중국 조선족 방언, 할머니.

12) 중국 조선족 방언, 솜저고리.

13) 중국 조선족 방언, 고무줄놀이.

14) 수교 전에는 홍콩으로 에돌아 다녀야 했다.

15) 방언, 한과

16) 1886년에 중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세웠다.

17) 「훈춘 전설 이야기」, 『훈춘시문사자료 8』, 훈춘시정협문사자료위원회 , 18쪽.

18) 구식 함경도식 부엌 구조, 가마 두개를 걸고 주변을 시멘트로 발랐으며 가마 사이와 구들이 이어진 부분을 가마목이라고 한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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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중문학부 한어(汉语)학과 졸업, 노신문학원 수료. 연변일보사, 길림신문사 편집, 차장, 연변작가협회 전업작가(专业作家), 창작실 주임 등을 역임하고, 정년 퇴임했다. 중국작가협회 제6기, 7기 전국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장편소설 『빨간그림자』, 『생명』, 소설집 『푸른잎은 떨어졌다』, 『야경으로 가는 녀자』, 『완행렬차』, 아동소설 『폭죽소리』, 『사과배 아이들』, 『김학철 이야기』, 장편 르포르타주 『코리안 드림,그 방황과 희망의 보고서』, 『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 『정률성 평전』, 『정률성』 등 10여 권을 중국과 한국에서 출간했다.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 준마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단군문학상 외 각 잡지사 문학상 등 다수를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