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깊이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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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차이나 맨

평론: 민가경

‘불화’와 더불어 살아가기: 돈오 김의 『차이나 맨』1)

민가경(문학평론가)

1. 안전한 수동의 역사

   우리 모두는 호주를 위해(for this Australia), 그리고 지금 막 나타나기 시작한 [호주의] 민족 정체성(nationality)을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을 덮고 있던 커튼을 막 열어 제친 진보적 [호주] 국민들(people)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뒤에는 부서져가는 제국의 추락하는 왕실과 노망난 사람들(dotard races)로 뒤덮인 과거가 있고 우리의 앞에는 젊음의 열정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호주가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다. 2)

   1880년대 호주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윌리엄 레인의 선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당대 호주 사회의 여론을 반영하는 이 선언을 마주한 독자의 뇌리에 남을 만한 단어를 감히 추측건대, 그것은 ‘민족 정체성’ 같은 관념적 단어보다 ‘호주를 위해’라는 구체적이고도 열렬한 마음이 느껴지는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1901년, 여섯 개의 식민지 연합이 하나의 호주 연방으로 구성되어 ‘독립’의 역사를 썼으니, 호주가 ‘나아가야 할 미래’와 그것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선포하던 이 발언을, ‘일단은’ 기억하시라.
   본격적인 문제는 그 독립을 과연 온전한 독립으로 말할 수 있는가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국의 다음 행보가 스스로 국적법 체계를 유지함으로써 ‘영국 신민(British subjects)’으로 머무르길 선택했다는 것이다. ‘영국 신민으로서의 호주 시민’이 정식 폐지되며 ‘호주인’이라는 단독적인 지위가 명문화된 것은 무려 1984년 〈호주 시민권법〉의 개정에 이르러서였다. 우리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를 ‘뒤덮인’ 역사로 강조하며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주장하던 저 격렬한 항의는 어디로 휘발되었는가. 물론 그들이 식민 모국인 영국 의회로부터 주권을 원만하게 ‘양도’받았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정체성 확보에 절박해질 필요까지는 없게 만드는 요소였음이 분명하나, 지나치게 느긋한 행보와 저 선언의 맹렬함을 대조했을 때 저 선언의 진의만은 분명히 의심하게 된다. 결국 ‘영국계 백인 단일 인종’에의 소속을 자처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어떤 안온함과 자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안전한 수동을 즐기는 자의 걸음걸이다.
   여기서 ‘백호주의’와 ‘골드러시’라는 역사적 맥락을 포개어 한층 더 깊게 들어가 본다. 그리고 저 선언이 사실은 유명한 백호주의자이자 자문화 우월주의자의 목소리였음을 염두하고 다시 읽어 본다. 그러면 선언 속 ‘진보적 국민들’은 백인 단일 인종에 국한되고, 우리는 당대 호주 연방의 강력한 이민자 유입 억제 정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새로운 연방국을 향한 ‘젊음의 열정’, 그 맹렬한 사랑은 기저부터 명백한 한계를 지닌 구호에 불과해진다. 그 뜨거움도 결국은 국가를 통해 그들이 회수해야 할 금광의 ‘금’, 그러니까 일종의 보상을 향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 부호를 남기며.

2. 차이나 맨 없는 ‘차이나 맨’

   1970년대 이후 호주 정부가 다문화주의 정책을 공식화하기까지 그들에게 있어 ‘민족 정체성’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을 꾸역꾸역 밀어내고, 그 담을 높이, 더 높이 쌓는 방식에 의해 구축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오해된 대상으로는 돈오 김(Don’o Kim, 한국명 김동호, 1936-2013) 소설의 제목 속 ‘차이나 맨’, 즉 ‘중국인’이 연상된다. 당대 호주인들에게 중국인은 자신들의 금광에 떼 지어 들이닥치거나, 심지어는 호주 전체를 집어삼킬 위협적인 존재로 표상된다. 실제로 호주 식민지 정부는 입국하려는 ‘차이나 맨’을 대상으로 인당 10파운드의 인두세를 부과하거나 배 크기에 따라 중국인 탑승객 수를 제한시키는 정책과 ‘중국인 법(Chinese Act)’을 시행한다. 그들이 선전 포스터 속 묘사해 놓은 중국인은 ‘도박, 아편, 강도, 값싼 노동, 세금 도둑, 서양인들이 혐오하는 생물인 문어, 재화를 쓸어 담는 11개의 팔, 탐욕’과 같은 부정적인 키워드로 축약 3)된다.
   당시 호주인의 모습은 ‘국가를 사랑한다’는 자신들의 서사를 통해 국가를 빼앗아 갈 것으로 ‘상상된 타자’를 증오할 권리를 취득한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자신들의 땅과 금광을 “‘빼앗아 가는’ 타자로 인해 상처받았다고 느” 4)낀 호주의 백인들은 ‘황색 공포(yellow peril)’라는 정서 아래 하나로 결속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애국’으로 형상화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이따금씩 어떤 증오를 정당화한다. 익숙한 장면이다. 특히 정치적 상황에서 더더욱. 어느 민족은 함께 증오하며 하나가 된다. ‘어느’라고 해서 반드시 먼 풍경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오늘 이곳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돈오 김의 『차이나 맨』을 다시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인’을 소설의 제목으로 내걸고, ‘일본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한국인’이 쓴, 이 복잡다단한 소설을.
   돈오 김은 한국 전쟁 당시 월남한 실향민이자 호주의 한인 1세대 이민 작가이다. 돈오 김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주제는 바로 그가 택한 언어일 것이다. 모국어의 뿌리를 붙들기보다 영문 문학으로 자신의 창작 세계를 구축했던 돈오 김은 스스로 “영어로 포장한 ‘보편적 테제’” 5)를 추구한다고 밝힌 바 있다. 재외 한글 문학에서 비켜선 그의 문학 세계를 우리는 자칫 ‘우회한 문학’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돈오 김의 문제의식도 우회 중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자가 갖는 욕구불만으로 인해 더 크게 튀어나오는 목소리”(143쪽)가 있었다. 또 결과적으로 그 목소리가 그의 문학을 호주 문단에 거뜬히 진입시킬 만큼 강력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면, 그의 전략은 ‘우회’라기보다 오히려 입지 선취를 위한 ‘정면 돌파’였음을 깨닫게 된다.
   언어의 현지화에 더해 돈오 김 소설의 공통점을 한 가지 더 뽑자면, 그가 다양한 아시아 유색 인종을 골고루 형상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 베트남 시골 소년(『내 이름은 티안(My Name is Tian)』, 1967), 중국인 장교(『암호(Password)』, 1974), 일본인 대학원생(『차이나 맨』, 1984)을 차례로 등장시킨다. 이때 앞서 언급한 그의 전략은 한층 더 두드러진다. 자신의 메시지를 한국적 민족주의라는 안전한 틀 안에 귀결시키지 않기 위해 일정 거리를 두는 대신, 등장인물을 아시아계 유색 인종 전체로 확장해 낸 그의 작업은 모든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보편적 문학’에 대한 응답이자, 자기 뿌리에 대한 비타협 정신, 그러니까 모종의 자존심의 발로로 읽힌다. 그가 자신의 모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 생전 마지막 작품(『태극(Grand Circle)』, 2010)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언어적 거리두기, 그리고 지협적 뿌리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작가의 오랜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3. 살아 낸 자의 글쓰기

   특히 『차이나 맨』은 타 인종을 향한 백인의 멸시가 역사를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를 포착하면서도 그 극복을 비단 ‘백인의 자기반성 촉구’라는 방식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치열한 디아스포라의 현장을 직접 살아 내고 있던 돈오 김이 목도한 폭력은 비단 동양계 이주민이 겪은 피해 차원에 국한되는 현실이 아니었으며, 더 근원적인 차원의 국가 폭력이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10-1970년대에 걸쳐 최소 10만 명의 호주 원주민 어린이를 그들의 원가족/원주민 공동체로부터 강제 분리시켰던 호주 연방의 정책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보호’라는 미명 아래 원주민 아이들을 백인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 실시된 모종의 폭력이었다. 그들이 영문도 모르고 겪어야 했던 단절의 고통을, 직접 남북 분단을 경험했던 돈오 김이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몽환적인 자연을 경외하고 우러러보는 돈오 김의 문장에서는 얼핏 호주 대자연의 영적 신성을 간직한 원주민들의 구전 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음을 감안해 보자. 이 지점에서 어쩌면 그가 제시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단순한 ‘화해’를 통한 고통의 치유보다,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정치”, 즉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 곁에서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가 아님을 배우는 정치” 6)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나 맨』은 과연 영리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호주 동북부 퀸즐랜드 주의 해안과 산호섬을 오가며 원점 ‘더 그로브’로 복귀하기까지의 여로형 소설이며, 동시에 ‘쿼바디스 호’라는 밀폐된 요트 위 인종 간 갈등과 구조화된 차별이라는 문제의식을 중첩시킨 세태 고발 소설이기도 하다. 작중에는 자신에 대해 많은 정보를 밝히지 않는 과묵한 선주 ‘갓프리’와, 그에 의해 기관사로 고용된 일본인 주인공 ‘죠오’, 그리고 비서양계 유색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우월감을 가진 백인 항해사 ‘빅’이 등장한다. 문학도 ‘죠오’는 “시적인 기계공”(18쪽)이라 불릴 만큼 기계 구동 메커니즘에 익숙하여 정당한 상주 기관사 자격으로 승선하지만, ‘빅’은 거침없는 언사와 행동으로 ‘죠오’에게 사사건건 모욕을 주며 선상의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우리는 작가가 가장 공들이고 있는 작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가장 천착한 작업은 인물 간의 갈등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비범한 개인의 활약을 그리는 것이 아닌, 동북부 퀸즐랜드 주의 장엄한 경관과 그곳의 다양한 생태성을 소묘하는 것이었다. 그는 천여 마일에 달하는 ‘더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의 장엄함과 찬란한 자연 풍경, 해안의 역동성과 수면 아래의 다층적인 생태 구조, 그리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존재하는 산호를 전경화하는 일에 고집을 더한다. 이는 독자가 그 이국적 정취를 통해 몸소 이방인 되기를 체험케 할 뿐 아니라, 태초부터 우뚝 솟은 채로 수 세기의 문명을 지켜봐 오고 그 역사를 온몸에 날인해 온 자연의 장엄함에 압도되게 만든다. 한마디로 돈오 김의 문장에서 호주의 자연은 단순히 소설의 배경에 그치지 않을 만큼 영험한 정신의 현현이자 ‘늘 거기 있던 시간’이다.
   어쩌면 대자연이라는 중심부의 가장자리로 밀려오고 쓸려 가는 ‘인간’이 차라리 배경으로 배치된다면 배치되고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초호화 요트도 망망대해 위에선 결국 ‘한 점’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할 때, 그리고 고밀도 현미경으로 아주 오래 확대해야만 겨우 확인되는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대조할 때, 가령 인종과 피부 색깔에 따른 우리의 범주화 작업은 지나치게 소모적이고 무용하기까지 한 것이 된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밀물 또는 썰물’이라는 공통의 종적 특질로 묶이며 ‘인류’라는 하나의 종족으로 재편된다. 이것이 바로 자연 경치를 삼켜 버리는 대신 직접 자연 안으로 들어가 객관적인 인간의 실재를 담백하게 그려 내는 돈오 김의 기법이다.

4. 분리된 실체가 드러날 때

   그러나 이를 작가가 동양계 이주민들이 겪는 생활의 문제까지 좌시했다는 뜻으로 비약하면 곤란하다. 그는 수많은 ‘죠오들’이 살아 내야만 했던 공포를 밀도 있는 심리 묘사를 통해 실감 나게 그려 낸다. 망망대해 위 한 배의 운명 공동체로 표류 중인 ‘죠오’와 ‘빅’ 사이에 전개되는 신경전은 ‘죠오’로 하여금 자꾸 도망을 시도하게 한다. 같은 선상에서 ‘빅’과 함께 열린 상태에 놓여 있을 때 그와 최대한 멀어지려는 ‘죠오’의 상태는 ‘공포’ 외의 다른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공포의 감정은 몸의 움츠러듦을 수반한다. 선상에서 내내 운신의 폭을 좁히고, 더 작고 더 적은 공간만을 찾아 나서는 위축된 ‘죠오’의 모습이 그러하다. 특히 ‘빅’이 ‘죠오’를 향해 드러내는 무의식은 ‘죠오’의 운명을 단정 짓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개인의 몸에서 집단을 인식”7)하는 것이 ‘증오 범죄’의 핵심이라면 ‘빅’의 행위 전반은 ‘죠오’의 정체성을 단일화함으로써 동양 집단에 전체적 폭력을 가하는, 엄연한 증오 범죄이다.
   둘의 갈등을 가장 결정적으로 다루는 사건은 암초 사이에 서식하는 유독성 물고기 ‘차이나 맨’을 발견한 ‘빅’이 광분 섞인 목소리로 곧장 ‘그것을 죽여 버리라’며 소리를 지른 대목일 것이다. ‘차이나 맨’이라는 치명적인 어종의 작명에 대한 은근한 동의가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는, 한 어종을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실천할 수 있던 동양인 혐오의 역사를 가늠케 한다. ‘죠오’는 거기에서 자신을 향한 ‘빅’의 살의를 읽는다. 백인의 언어 그 자체가 공포의 감정으로 의미화되는 과정은 ‘죠오’가 자신의 철저한 무방비 상태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백인의 무례한 언사를 애써 ‘살아 내야’ 하는 ‘죠오’는 “참고 견디어야 했던 것들이 모두 그의 심장으로 간”(87쪽) 느낌을 받는다.
   사라 아메드는 그러한 언어를 ‘끈적임의 언어’로 표현한다. 증오의 언어들은 접착력이 강해 어딘가에 달라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차이나 맨’이란 기호는 사실상 ‘죠오’ 자신과 무관할 수 있는 기호였지만, 이것이 근원적인 인종 차별임을 안 이상 ‘죠오’의 표피에는 ‘빅’의 언어가 끈적하게 달라붙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는 오랜 감정 누적의 결과이기도 하다. 자신의 피부색이 백인들의 일회성 내기거리로 전락했던 경험이랄지, 배의 방향타를 쥐었다는 이유만으로 ‘죠오’의 영역을 무시하며 무리한 기계 조작을 감행하던 ‘빅’을 향한 무력감은 그의 내면에 켜켜이 쌓인다. 그렇게 두꺼워진 더께는 떼어 내려 해도 잘 안 떨어지는 것이었고, 설사 억지로 잡아떼어 내도 기어이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독침을 가진 가오리가 ‘빅’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를 그대로 방치하고 싶어 하는 ‘죠오’의 모습은 그의 깊은 상흔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빅’의 도발을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그에게도 지울 수 없는 콤플렉스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보게 된다. 당장 “영국의 제국주의가 아니었더라면 호주는 물론, 이런 장소도 존재할 수가 없었을 거”라는 ‘빅’의 발언은, 호주가 “뉴 차이나(New China)나 뉴 제펜(New Japan)이라고 불리”(99쪽)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안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동양은 반드시 열등한 것이라는 ‘빅’의 인식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극단적인 언사를 거치지 않고는 표출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뿌리 깊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같은 백인 안에서도 ‘영국’의 자장 안에 머무르기를 추구하는, 즉 ‘앵글로색슨 이민자’라는 파생품이자 ‘주류의 꼬리’로 남기를 바라는 굴종적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영국과의 관계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호주 인종주의자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 소설이 쓰인 지 약 40여 년이 지난 2023년의 오늘날, ‘빅’의 발언과 한 치 오차 없게 되풀이된 호주 전 총리의 발언 8)을 기억해 보면, 이 문제는 과연 현재 진행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오 김은 이미 오래전 소설에 역사를 향한 자신의 믿음을 은유적으로 삽입해 두었다. 그 비유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아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만든다. 어느 작은 물고기 떼는 자신들의 침략자를 피해 얕은 물가로 향한다. 그러나 얕은 물가일수록 그들은 죽음에 더 쉽게 노출되고, 떠내려간 그들의 시체가 ‘물을 혼탁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고작 한 치수 큰 또 다른 물고기 떼는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공격”(102쪽)해 온다. 이 생태의 연쇄 속 약소민족이 겪는 악순환의 고리는 결국 ‘공격’을 ‘방어’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파시즘의 전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돈오 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독 속에서 먹이를, 적군 속에서 아군을 찾아 번성”해 내는 산호의 모습을 제시한다. 온갖 야만 아래에서도 이민자들이 “한 점, 한 점, 한 구멍, 한 구멍, 한 인치 한 인치씩 정복하고 개척”(97쪽)하여 일구어낸 생의 지평들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죠오’ 역시 ‘빅’의 조종간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 채 눌러앉아 있기를 관두고 스스로 몸을 일으킨다. 또 선체를 뒤흔드는 맹렬한 우박, 장대비와 돌풍으로 인해 모두가 배를 떠나가는 와중에 오로지 ‘죠오’만이 쿼바디스 호를 구하겠다는 의지로 배에 남는다. 이는 ‘죠오’가 “내 실체가 질서 있는 세상과 공존할 수 없을 것”(236쪽)임을 각성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는 폭풍우를 뚫고 결국 항해에 성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초한 삶보다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발견한다. 돈오 김에게 있어 “공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동이 아닌 분리된 실체”, 즉 “공생이 아닌 행진 그 자체”(95쪽)였으며, 강력한 위계를 전복시키는 방법은 결국 그들의 방식―은근과 끈기―을 따르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죠오’를 통해 구현되는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양식은 무력한 ‘살아 냄’을 벗어나 ‘다르게 살아 냄’을 실천하는 것이다.

5. 쿼바디스, 인류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죠오’의 조력자 ‘딘’이 출항 전 ‘죠오’에게 건넸던 한 권의 책 『소공자의 죽음』이다. ‘죠오’의 각성에 『소공자의 죽음』과 그것의 작가 ‘미스터 리’의 영향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 액자식 장치는 ‘죠오’와 ‘돈오 김’을 중개하는 중요한 도구로 기능한다. 해당 소설은 호주 이민자 초기 세대이자 양반 출신의 한국인 작가 ‘미스터 리’가 쓴 것으로, 그의 사후에 발견된 일기형 소설이다. 이 소설이 유명해진 것은 ‘미스터 리’의 급진적인 인터뷰 내용 때문인데, 그로 인해 ‘미스터 리’는 ‘서구를 파멸시킬 스파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실상 그 인터뷰 내용을 들여다보면, 약소국에 대한 서구 정치의 횡포에 대한 정당한 이의 제기만이 있을 뿐이며, 이를 접한 백인들은 그 표현 방식이 적나라하다는 이유만으로 ‘동양인이 갖는 일방적 편견’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낸다.
   실제로 해당 내용에 대한 당혹감을 드러내는 백인 여성 ‘베아트리스’를 향해 ‘죠오’는 그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느라고 바쁠 테고, 가난뱅이들은 먹고사느라고 바”(145쪽)쁠 뿐이라는 말로 대답을 갈음한다. 그 답변의 중핵에는 ‘인종’ 대신 당대 ‘인류’가 직면한 새로운 질서 ‘자본주의’와 그 문제를 환기해 내려는 시도가 있다. 돈오 김은 인종주의에 대한 물음에 직면한 주인공이 그 자리에서 가치 판단을 내리기보다, 더 보편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의 대답을 제시하게 만드는 작업에 매우 탁월하다.
   이는 어쩌면 인종을 다루는 문제가 결국 “두 개의 날을 가진 칼”(147쪽)이라는 점을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돈오 김은 자신의 소설 안에서 특정 인종의 이해관계가 지나치게 편향되어 강조되는 상황을 경계한다. 폭풍우를 이겨낸 ‘죠오’가 혼자만의 승리를 만끽한다는 평안한 결말로 소설이 마무리되지 않는 것 또한 그 경계심의 증빙일 것이다. 소설 말미, 쿼바디스 호가 서서히 침수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챈 ‘죠오’는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갓프리’의 선체 설계가 제아무리 완벽했더라도, 결국 그 배를 항해한 ‘빅’과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었던 이상 모든 설계가 무용해진다는 결론이었다. “단순히 인간이 설계를 하는 한 이상적인 배는 있을 수 없”(243쪽)다는 ‘죠오’의 발언처럼, 인간은 결국 자신의 존재 본질―‘불완전함’―을 능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힘을 겨루어 승리/패배나 억압/피억압 관계를 나누어 가질 필요가 없게 된다. ‘죠오’의 승리는 동양인의 승리를 드러내거나 유색 인종을 우뚝 세워 위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 신의 완벽한 설계를 그르치는 인간의 미숙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여기서 돈오 김은 질문한다. 서구 중심주의, 백인 우월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와 같은 질서 체계는 과연 누가 만든 것인가. 모든 원리의 설계자인 신에게는 혐의가 없고, 오로지 그 안을 항해하는 ‘인간 그 자신’만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에서 ‘무능의 공동체’를 이룬 인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돈오 김이 그린 ‘쿼바디스 호’의 여로는 결국 ‘쿼바디스’ 9)그 자체가 되었다. 그가 무려 40년 전 제시한 이 물음―쿼바디스, 인류?―은 아직 별 진전 없이 표류 중이기만 하다. 그가 던지고 간 이 물음 앞에 우리는 조금 더 무거운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참고자료

1) 김동호, 『차이나맨』, 한국문학도서관, 2008. 이하에서는 괄호 안에 쪽수를 표기한다.

2) R. A. Gollan, “Nationalism, the Labour Movement and the Commonwealth, 1880-1900”, Australia: A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Angus&Robertson Publishers, 1967, p. 146; 김범수, 「‘호주인’의 경계 설정: 호주 민족 정체성의 등장과 변화」, 《아시아리뷰》 2(1), 2012, 215쪽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3) 이응철, 「글로벌 문화자본의 기대와 차별의 경험 사이에서: 호주 중국인 유학생들의 일상과 생활」, 《아시아연구》 23(2), 2020년, 329쪽.

4) 사라 아메드, 시우 옮김, 『감정의 문화정치』, 오월의봄, 2023, 24쪽.

5) 윤정헌, 「호주 한인소설에 나타난 이주민의 정체성: 돈오 김의 『차이나 맨』을 중심으로」, 《현대소설연구》 48, 2011, 113쪽.

6) 사라 아메드, 앞의 책, 98쪽.

7) 같은 책, 128쪽.

8) 존 하워드는 최근 한 인터뷰(《디 오스트레일리안(The Australian)》, 2023. 7. 26.)에서 “17-18세기에 호주 대륙이 식민지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호주에서 일어난 가장 운 좋은 일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는 발언을 했다. 임병선, 「하워드 호주 전 총리 ‘영국의 식민지 된 것은 행운…유익한 식민 지배’」, 《서울신문》, 2023년 7월 26일 자.

9) 최후의 만찬 중 십자가를 지게 될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예수에게 베드로가 한 질문, “도미네 쿼바디스?(Domine, quo vadis?)”,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에서 비롯한 것이다.

필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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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