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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과 장소의 상상력

2024. 3. 1. 6호

트레이시 임 作 「꽃이 필 때면」 140cmx120cmx2cm, 장지에 채색화, 2022

표지에세이 보기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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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장소성과 문제적 장소

고인환 한국

   인간 영혼의 욕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간과된 것이 아마도 뿌리내림일 것이다. 그것은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욕구의 하나로 꼽힌다. 사람은 과거의 유산과 미래에 대한 어떤 예감을 생생하게 간직한 집단의 삶에 자연스럽게 실제로 가담함으로써 뿌리가 생긴다. 이러한 참여는 장소, 출생, 직업, 주변 환경이 자동적으로 이끄는 참여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기 다양한 뿌리들을 필요로 한다.1) 1. 디아스포라적 장소    삶이 공간에 스며들 때, 즉 인간의 삶이 어느 한 공간에 뿌리를 내릴 때 그 공간은 각별한 장소가 된다. 하나의 공간은 여러 사람 혹은 공동체들에게 서로 다른 복수의 장소로 공존하기도 한다. 디아스포라적 삶의 조건은 자기가 속해 있는 고유의 장소에서 이산을 강요당한 자들이 새로운 장소를 찾아 다시 뿌리 내리려는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타자의 장소, 즉 ‘과거의 유산과 미래에 대한 예감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다른 공동체의 영역에 이주하여 그 공간을 자신의 장소로 일구려는 고단한 삶의 여정이 음각되어 있다. 이에 따라 디아스포라적 장소는 서로 다른 공동체의 삶의 방식, 즉 가치관, 문화, 풍속 등이 교차하고 뒤엉키는, 차별과 관용, 폭력과 환대가 공존하는 문제적 장소가 된다.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토지·언어·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에 반해 디아스포라들은 자신의 장소에서 뿌리 뽑힌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이자, 이방인, 소수자인 경우가 많다. 이들의 삶은 전자들에 비해 고달프고 힘들기 일쑤지만, 다수자들이 고정되고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물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2)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디아스포라적 삶의 조건을 탐색하는 작업은 견고해 보이는 근대적 일상의 시스템을 발본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통해 근대 이후의 삶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수자의 시선으로 디아스포라의 삶과 작품을 흡수하기보다는 그들의 문제적 삶의 조건을 직시하며 ‘지금 여기’의 현실을 성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1863-1864년 사이에 두만강을 도강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유민들의 후손이다. 이들의 생활 터전은 한일합방 이후 의병 활동 및 항일운동의 근거지였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는 재러 한인 소비에트 건설을 위한 민족공동체의 요람이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에는 불모지와 같은 이국의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삶은 구한말에서 오늘에 이르는 험준한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 한반도와 러시아 연해주나 사할린 지역을 포함해서 중앙아시아 전역에 걸친 시공간에 입체적으로 걸쳐 있다.3)    ‘고국인 조선을 등지고 낯선 땅에 정착하고 이주하기를 반복’하며 떠돌았던 고려인 디아스포라들은 ‘항상 새로운 장소와 대면하기를 반복해 왔으며 그때마다 새롭게 안착한 특정한 장소’를 ‘내면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창조적으로 일구어 왔다.4) 2. 연해주, ‘신한촌’ ▲ 연해주 ‘신한촌’, 항일독립운동의 집결지 [ⓒ 경향신문]    연해주는 중앙아시아 고려인5) 문학의 요람이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즉 고려인의 역사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주로 경제적 궁핍 때문에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했다. 러시아는 변방을 개척하기 위해 외부인이 연해주에 이주해 오는 것을 허용하고 토지도 제공했다.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급증한 것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부터였다. 초기에는 구한말의 사회적 혼란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주가 주를 이루었다면, 점차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이 성격이 더해지면서 연해주의 한인 사회는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신한촌’을 건설했다. 이후 신한촌은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가 되어 국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렇듯, 연해주는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 독립운동가 등이 모여 조선인 공동체를 형성한 디아스포라적 장소였다.    한편 혁명(1917)과 내전 이후 러시아 사회는 급격하게 재편되었다. 이에 따라 한인 사회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연해주에서 간행된 한글 신문 《선봉》(1923-1937)은 고려인 문인의 등용문 역할을 하며 연해주 문단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조명희, 조기천, 한 아나톨리, 전동혁, 김시종, 김유경, 조규화, 최호림, 조동규, 연성용 등이 있다.6)    이렇듯 연해주에 이주한 한인들은 제정러시아와 소비에트 체제의 정책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신한촌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에서 연해주가 지니는 장소적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연해주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과 동행하며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저항의 장소였다. 연해주 고려인 문단을 이끈 조명희의 「짓밟힌 고려」(1928)를 필두로 전동혁의 「삼월 일일」(1936) 등의 시편들과, 김준의 『십오만 원 사건』(1964), 김세일의 『홍범도』(1967) 등의 장편소설은 일제에 맞선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 조선의 무리, 서울의 무리가- 밥과 자유찾는 무리가 만세를 부르며 닐어나던 장엄한 날. 밥대신에 탄환을 받고 자유대신에 철창을 받던 죽음과 공포의 날. 만세소리 변하여 울음소리 되고 피묻은 희ㄴ옷에 붉은피로 물들이던 슬ㅎ븜과 피의날. 이날은 언제던지 닞어지지 않으리라 이날에 아들죽언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도 이날에 어머니 잃은 아들의 머릿속에서도 이날에 남편 잃은 안해의 머릿속에서도.7) ”    인용시는 식민지 조선의 ‘3·1운동(1919)’을 기리며, ‘조선의 무리, 서울의 무리’와 동행하며 ‘밥과 자유’를 찾아 ‘만세’를 부르는 장소, 연해주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다. 연해주와 조선이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둘째, 연해주는 사회주의 체제와 공존하며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염원하는 장소로 그려진다. 1920년대 연해주 한인촌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지주-소작 관계는 여전히 농민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고, 러시아혁명과 내전은 생존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일본은 러시아 극동 지역에 군대를 파병하고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지원했다. 반면, 볼셰비키의 ‘무산계급 해방’ 이념은 고려인들의 궁핍한 삶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혁명군과 연합해 일제와 ‘백군’을 타도하고 소비에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김기철의 「복별」(1969)은 조선을 떠난 다섯 가정이 이국땅에서 새롭게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연해주에서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 땅의 지주들과 ‘백파’의 착취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이주한 고려인들을 국적과 토지를 부여한 ‘원호인’과 그렇지 않은 ‘여호인’으로 구분하여 관리했다. 이로 인해 부유한 원호인들은 여호인들을 차별하고 착취하기 일쑤였으며, 일부 원호인들은 ‘백파’ 나아가 일본군과 결탁하기도 했다. 작품 속 마을 사람들의 삶은 “해마다 땅부치는 값이 오르고 세납들이 늘고 또한 이런저런 부렴들이 잦아서 살림살이”가 “쪼그라들기만” 한다. “    어머니는 한달에 한두어번씩 끌려가서 진저리나게 질문을 당하군하였다. 때문에 나도 어머니도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신 우리는 다른것을 기다렸다. 그것은 붉은파들이 속히 쳐나왔으면 하는것이였다. 그래야 일본놈들이 쫓겨나고 백파들이 망하고 민회장 김주사, 땅지기 이와노브 따위가 없어지고 놈들에게 거덜이 난 동리가 춰설것이 아닌가? (중략) 하긴 양력 2월중순에 안쪽에서 새소식이 들려오기도 하였다. 나바롭쓰크 저쪽 그 어디에서 붉은파들이 백파들을 쳐서 크게 이기였는데 붉은파들에는 조선사람들도 많이 들어 싸웠으며 그 붉은파는 계속 쳐나온다는것이였다. (중략) -왜 복별이 없다구들하오. 하늘엔 없지만 땅우엔 있소. 저 붉은기에 새긴 저 별이 복별이 아니고 무엇이오?8) ”    화자의 아버지는 농사를 망치는 ‘백파’ 기병들에게 총을 쏜 후 마을을 떠난다. 어머니는 당국에 끌려가 ‘진저리나게’ 취조를 당한다. 화자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것’, 즉 ‘붉은파’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행운을 의미하는 ‘복별’은 ‘붉은파’의 ‘붉은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연해주에 뿌리내리려는 ‘신한촌’ 민초들의 염원이 러시아혁명의 이념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해방과 접속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이러한 연해주 고려인들의 열망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셋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에게 연해주(신한촌)는 ‘귀향’과 ‘희망의 상징’으로 표상된다.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고향은 이제 한반도(조선)가 아니라 신한촌, 즉 연해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    “신한촌 제비들이 여기로 날아오는 것은 아닐까?” (중략) 그렇다 봄이 오면 제비는 돌아올 것이다. 봄이 오면 우리도 집으로 돌아갈수 있을지 모른다. 하여튼 리선생은 제비둥지로 하여 그 어떤 희망을 얻었다. 그날부터 리선생은 밖으로 드나들 때마다 제비둥지를 쳐다봤다. 마치 귀향의 희망의 상징 같았다.9) ”    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기나긴 이주의 역사를 시사한다. 그들이 한반도를 벗어나 연해주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살아온 역사는 거의 150여 년에 이른다. 연해주에서 태어나거나 유년을 보내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2세대들에게 조선은 더 이상 직접적 조국이 아니다. 연해주가 고향이자 뿌리인 셈이다. 이러한 세대 간 고향에 대한 인식 차이10)는 한진의 또 다른 소설 「그 고장 이름은?」(《고려일보》, 1991.7.30-8.1)에서는 연해주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세대(이주 2세대)와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세대(이주 3세대) 사이의 차이로 변주된다. 작품에서 임종을 앞둔 어머니는 고향 연해주를 떠올리며 딸이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말로 ‘그 고장 이름은?’이란 말을 되풀이한다. 러시아말을 사용하는 딸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상에서 고려인 문학에 나타난 연해주는 식민지 조선의 한 연장 혹은 일부분, 이념이 다른 체제와 공존하며 새롭게 뿌리내려야 하는 장소, 강제 이주로 뿌리뽑힌 자들의 또 다른 고향 등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탑 [ⓒ 서울신문] 3. 우슈토베, 크즐오르다, 그리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는 연해주에서의 꿈과 삶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강제 이주 후 정착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려인 문학에서 크게 세 가지 모습으로 표상된다. ▲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경로 [ⓒ 조선일보]11)    첫째, 무력함과 절망, 죽음의 장소이다. 그야말로 ‘피로 물든 강제이주’의 공간이다. “    신한촌 천여호에 사는 고려사람들 수천명은 누구나 없이 죄다 사흘동안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뇌성같은 지령을 받았다. 우리는 집에 있던 모든 가구들을 포기하고 며칠동안 먹을 식료품과 극히 긴요한 생활필수품과 당장 입을 의복들을 트랑크부대에 넣어가지고 강제로 화물자동차에 실려 정거장으로 나갔다. 우리들은 짐승들을 싣는 화물열차에 실려 떠났다. 무슨죄로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떠났다. 소변볼데도 없고 대변볼데도 없고 세수할데조차 없는 그 더러운 차속에서 맨 장판에 딩굴며 한달 두달 가는동안에 얼마나 많은 노인들과 어린애들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부모들을 어느곳인지 알지 못할 정거장 철도둑에 파묻었고 부모들은 죽은 자식들을 껴안고 통곡하며 그 어느 정거장인지 알지 못할 철로변에 파묻었다.    지금와서 그 장례지낸 곳들이 어디인지 아무리 알려고 애써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그 이주는 피로 물든 강제이주였으며 고려인사람들은 짐승처럼 값없이 죽어갔다. 목숨이 붙어 당도한 사람들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쓰딴 산지 지방에 흩어졌는데 모두들 무인절도 황무지에서 잠땅, 모래벌, 갈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겨우 생명을 이어갔다.12) ”    신한촌의 고려사람들은 “무슨죄로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뇌성같은 지령”을 받고 “짐승들을 싣는 화물열차에 실려 떠났다.” 노인들과 어린애들을 포함한 고려인들은 “짐승처럼 값없이 죽어갔다.” “목숨이 붙어 당도한 사람들”은 “무인절도 황무지에서 잠땅, 모래벌, 갈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겨우 생명을 이어갔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이러한 고려인들이 최초로 하차하여 정착한 장소의 하나였다.    둘째, 무인절도 황무지를 콜호스로 일구는 경이로운 노동의 현장이다. 이는 연대의 공동체를 표상하는 생명의 대지이기도 하다. “    그다음 그는 카사흐인들이 정주생활을 시작할 때 걷던 그 수난의 길을 회상하면서 조선사람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효시하는것이였다.    “부모된 마음이야 다 한가지이지요. 그 숱한 아이들을 잃고 속들을 얼마나 태웠으며 눈물인들 얼마나 흘렸겠어요. 우리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지않은 괴변을 겪었다오. 바로 4년전 1932년이였어요. 이때까지 우리는 유목생활을 했지요. 이 넓은 평원에서 동과 서, 서와 동으로 풀과 물을 따라다니며 양도 치고싶은대로 치고 고기도 먹고싶은대로 배불리 먹으며 살았지요. 손님이 한분만 와도 양을 두세마리 잡는 것을 례상사였지요. 그러다가 불시에 정주생활로 넘어가 양무리들을 공유화하고 고기배급제가 생겼는데 그것조차 제때에 주지 않아 고기기근이 들어 죽는데……”13) ”    김기철의 「이주초해」는 새롭게 이주한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는 고려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은 원주민 카자흐인들의 도움을 받아 ‘씨르다리야 강’을 중심으로 콜호스를 형성하기 시작하여, 그 강변에 위치한 도시 ‘크즐오르다’에 이른바 ‘고려인들의 서울’을 건설하기에 이른다.14)    셋째,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존의 가치관을 꿈꾸는 곳, 즉 현재의 삶을 성찰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진행형의 장소이기도 하다. “    “너에게 아버지가 없고 네가 조선말을 모르는것은 네잘못이 아니다. 크면 너는 자기 민족의 력사를 알게 될거야. 지금 책에 쓴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속에 살아있는 력사를 말이다. 너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리라는것을 알게 될거다. 그것을 알게되면 넌 더 자유로울수 있겠지. 그리고 너보고 그런 말을 물어보는 사람들은 미련해서 그러는거야. 그것들은 앞으로도 그냥 그런 질문을 할거다. 그것들은 조국을 배불리 먹여주고 편안히 근심없이 살수 있게 해주는것으로만 여기기때문이야. 그래 그들은 자기들과 조곰이라도 다른 점이 있는 사람을 보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의심을 품고 근심을 하고 호기심을 내는거야.”15) ”    이는 언어와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 “기억속에 살아있는 력사”가 숨 쉬는, 차별과 배제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소이다. 조선말을 모르는 손자가 “자기 민족의 력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더 자유로울수 있”게 되는 세상을, 어린 화자의 할머니와 재혼한 러시아인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현주소, 즉 조선말과 할머니로 표상되는 세계(과거), 러시아어와 할아버지로 대변되는 세계(현재), “기억속에 살아 있는” 조선으로 상징되는 손자의 세계(미래)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슈토베, 크즐오르다 등으로 대변되는 중앙아시아는 연해주에서의 삶을 기반으로 황무지나 다름없는 죽음의 땅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생명과 연대의 공동체를 건설한 곳이자, 이를 바탕으로 후손들의 보다 자유로운 미래를 꿈꾸는 장소의 이미지로 표상되고 있다. ▲ 고려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우슈토베에 남겨진 비석 [ⓒ 필자 제공] 4. ‘주인’과 ‘종’이 아닌 ‘친구’로 “    “새로 정착할 땅에 조상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아온 이들이 있으면 그들과 친구가 되어라…… (중략) ……그들의 주인이 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16) ”    김숨의 『떠도는 땅』은 1937년의 강제 이주, 특히 중앙아시아 고려인 이주 150여 년의 역사를 응축한 ‘지옥 열차’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땅은 먼저 들어와 정착해 살고 있는 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다. 하여, 이주자들은 원주민들의 ‘주인’이나 ‘종’이 되지 말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단순명료하다. 하지만 우리는 ‘신대륙의 발견’이나 ‘대항해시대의 모험’ 혹은 ‘문명화의 사명’ 등으로 미화된 서구 제국주의 담론이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디아스포라적 삶을 양산했는지 잘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음에도 짐짓 모른 척하거나 지나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 뿌리내리기 위해 원주민들의 친구가 되었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에는 카자흐스탄 혹은 우즈베키스탄 주민들과 함께 살아야 했기에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은 한국, 연해주, 중앙아시아 사이에서 굴절·변형된 양상을 보인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또한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하여, 이들에게 한글 혹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그들의 문학을 ‘지금 여기’ ‘우리’의 기준으로 평가하기보다는 당시 그들의 상황을 참조하여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따라서 고려인 문학은 한국문학의 한 연장일 수 없다. 이들의 문학이 주목하고 있는 문제는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한국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기 어려운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고려인은 고려인 그 자체이고, 고려인 문학은 그냥 고려인 문학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고려인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고려인들이 한국 사람같이 말하면 그건 고려인이 아니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양원식) ▲ 크즐오르다시 상징탑. 꼭대기에는 고려인들의 노동을 상징하는 벼 이삭 조형물이 올려져 있다. [ⓒ 연합뉴스] 참고자료 1) 시몬 베유, 이세진 옮김, 『뿌리내림』, 이제이북스, 2013, 52쪽. 2) 서경식, 김혜신 옮김, 『디아스포라 기행』, 돌베개, 2006, 14-15쪽 참조. 3) 이명재, 「고려인 문단의 현황과 자료의 체계화」,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 2』, 국학자료원, 2006, 527쪽 참조. 4) 임형모, 「고려인문학에 나타난 낯선 장소와 공간 연구」, 『한국문학과 예술』 25집, 한국문학과 예술연구소, 2018.3, 192쪽 참조. 5) 중앙아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출생지와 생활 터전을 중심으로 개괄해 보면, 첫째 조선에서 태어나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중앙아시아로 간 경우, 둘째 연해주에서 태어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경우, 셋째 중앙아시아에서 출생한 경우, 넷째 북한에서 러시아로 유학 갔다가 망명한 경우, 다섯째 사할린으로 이주한 경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6) 연해주 고려인 한글문학은 소수민족의 문화적 자치를 허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정책을 기본 배경으로 하여 1923년 3월 1일 《선봉》 신문의 창간, 1928년 8월 포석 조명희의 소련 망명과 문학 활동, 1928년 3월 토박이 고려인 연성용의 희곡 창작, 《선봉》 신문 초대 주필 리백초의 새 문예 운동, 1928년 9월 막심 고리키의 격려 편지 등과 같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과 흐름에서 기원했고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성장했다. 1937년에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후에는 정치·사회적 여건이 일거에 고려인들에게 불리하게 변했고 한글문학을 지탱해 줄 물적 기반도 크게 손상되었다. 고려인 한글문학 자체는 연해주에서 형성된 형식과 내용 그대로 중앙아시아에 이식되어 전개되었다(김병학, 「중앙아시아 초원에 피어난 고려인 한글문학」, 《다양성+Asia》,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2023년 겨울 참조). 7) 전동혁, 「삼월 일일」, 《선봉》, 1936.3.1. 8) 김기철, 「복별」, 《레닌기치》, 1969.11.26. 9) 한진, 「공포」, 《레닌기치》, 1989.5.27. 10) 이러한 고향에 대한 인식 차이는 사할린 한인(고려인) 문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에서 태어나 사할린으로 징용된 이주 1세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고향(조국)은 한국(조선)으로 표상된다(장윤기, 「환향길 오십년」 등). 이에 반해 해방 후 사할린에서 출생한 이주 2세대 작가들에게 고향은 사할린으로 인식된다(리정희, 「살구꽃 필 때」 등). 사할린 한인(고려인) 문학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정선, 「사할린 고려인 한글 소설의 주제 양상 고찰」, 『국제한인문학연구』 제15호, 2015.; ‘박산향, 「사할린 한인문학의 현황과 의의」, 『인문논총』 48집, 2018. 등을 참조할 것. 11) 조선일보 2019년 7월 29일자 “영하 40도서 토굴 팠던 그 땅에… '同族如天' 첫 추모비” 12) 연성용, 「피로 물든 강제이주」, 《레닌기치》, 1995.2.4. 13) 김기철, 「이주초해」, 《레닌기치》, 1990.5.15. 14) 연해주의 주요 문화기관이었던 《선봉》(이후 《레닌기치》), 고려극장, 고려사범대학(이후 크즐오르다사범대학) 등은 이곳 크즐오르다로 이주하여 새롭게 활동을 시작했다. 15) 강알렉싼드르, 「놀음의 법」, 《고려일보》, 1991.8.30. 16) 김숨, 『떠도는 땅』, 은행나무, 2020, 215쪽.

만주, 민족의 기억과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토포스

김형규 한국

1. ‘만주’와 근대문학의 동행 “ 잘 살려고 故鄕 떠나 못사는게 他鄕사리 간 곧마다 펴친 心荷 뜰때마다 허실됏다 흐무할 품을 찾어 들뜬 마음 잡으려고 두러서 東海를 漁船에 실려 대인 곧은 漠漠한 벌판이엿다 싸늘한 北風바지 헤넒은 곧 떼장막을 치고 누어 떠들든 몸 쉬이려든 心思 불쌍한 流浪民의 꿈이엿다 서글펴 가엾든 부모형제 헐벗고 주림을 참든 일 지금도 뼈 아픈 눈물의 紀錄 잊지 못한 拓史의 血痕이엿다 ―심연수, 「만주」(1941) 전문 ”   인용한 시는 심연수의 유고작 중 하나인 「만주」란 제목의 시이다. 이 시를 찬찬히 읽다 보면 간절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난 이주민의 심경이, 그리고 유랑과 정착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고난과 시련의 모습이 그려진다. “막막한 벌판”과 “싸늘한 북풍”을 떠돌던 유랑민의 꿈, 그리고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어 온 “눈물의 기록”과 “拓史(척사)의 혈흔”이라는 표현에서 그들이 이국땅에서 보낸 수난사를 떠올릴 수 있다.   1918년 강릉에서 출생한 시인은 6살 때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났고 연해주와 중국 동북 지방을 떠돌 듯 지내다가 1935년 간도의 용정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이 시에서 드러나는 ‘만주’에 대한 인식은 곧 시인이 살아온 이주와 유랑의 체험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시 「만주」가 보여주는 이주민의 고난과 시련은 시인 개인의 체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식민지 시기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식민 지배의 여파로 생계가 막막해진 농민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생존과 생계를 위해 쫓기듯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국땅 만주에서 어떻게든 삶을 이어 가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토착 세력과의 갈등, 마적의 횡포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와 통제 속에 그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위 시의 표현 그대로 “잘 살려고”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못 사는 게 타향살이”였다.   18세기 후반 경작지를 찾아 사이섬(간도)을 넘나들던 조선 농민들의 이동이 국경을 넘는 집단적인 흐름으로 확대된 것은 1900년대 초반이다. 이 시기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 수는 7만 7천여 명 정도라고 한다, 이러던 것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토지조사사업 등 한반도 내 식민 수탈이 본격화된 후인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50만여 명으로 증가하고, 일제의 중국 침략 야욕이 더해진 일제 말기에는 200만여 명을 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출신이 다양해지고 막연한 기대 속에 만주로 향하는 ‘만주광’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이 모두가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야 할 비극적 동력이 그만큼 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면 심연수가 표현하고 있는 ‘만주’ 표상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식민지 시기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모습, 그들이 처절하게 감수하고 겪은 당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뼈아픈 눈물의 기록”은 식민지 시기 만주로 밀려난 수많은 조선인의 모습이 역사적인 차원에서 각인된 ‘민족의 기억’인 셈이다.   근대 초기 본격화된 조선인들의 한반도 이탈과 만주로 향함은 우리 근대사와 이민사에 있어 거대하고도 중요한 한 흐름이다. 그런 만큼 우리 근대 문학에서도 중요한 소재와 장면을 차지한다. 일찍이 「소금강」(1910), 「소학령」(1912) 등의 신소설을 비롯해 1920, 1930년대 주요 작가들의 많은 작품에서 만주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다. 이광수는 물론 김동인, 염상섭, 최서해, 강경애, 주요섭, 이태준, 이기영, 이효석, 백석, 박팔영, 유치환, 서정주 등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근대문학의 이름 있는 작가들 대부분이 식민지 시기 내내 이어진 만주행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했다. 우리 근대문학의 여정은 ‘만주’와 함께 시작되어 동행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식민지 시기 만주는 그 자체로 중요한 문학 장(場)이었다. 안수길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에도 검열 제도가 있었으나 국내처럼 가혹하지 않았으므로 필자들이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일제의 관리와 통제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적으로 본국보다 감시와 통제로 인한 제약이 덜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일제 말기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주요 문예지도 발행이 어려워지는 등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이 강도를 더해갈 때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문인들은 한글 문학의 창작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북향(北鄕)’이라는 동인을 구성해 동인지를 발간했으며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창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싹트는 대지』, 『만주 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그리고 안수길의 작품집 『북원(北原)』 등의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만주국의 테두리 안이라는 제한을 가지기는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 문단’은 우리 민족의 삶과 현실을 우리글로 표현하는 한글 문단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으며 민족 문학의 상상력을 지속하는 우리 문학의 또 다른 현장이었다. ▲ 룽징 명동학교 민족학교는 민족 공동체의 거주와 영속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주 지역에 근대적인 민족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은 1906년 서전서숙에서부터이다. 사진은 서전서숙에 이어 1908년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시에 설립된 명동학교의 옛모습이다.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외에도 만주 지역에는 창동학교, 신흥학교, 동창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등 수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 연합뉴스] 2. 개척과 정착, 수난의 시공간에서 디아스포라의 영토로 “   간도는 천부금탕이다. 기름진 땅이 흔하여 어디를 가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농사를 잘 지으면 쌀도 흔한 것이다. 삼림이 많으니 나무걱정도 될 것이 없다. 농사를 지어서 배불리 먹고 뜨뜻이 지내자. 그리고 깨끗한 초가나 지어놓고 글도 읽고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쳐서 이상촌을 건설하리라. 이렇게 하면 간도의 황무지를 개척할 수도 있다… ―최서해, 「탈출기」(1925) 중 ”   최서해는 만주 체험을 통해 식민지시기 조선 이주민들의 삶에 집중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인용문은 그의 작품 「탈출기」의 한 장면으로 주인공이 간도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감을 표현한 부분이다. 보다시피 작중 인물에게 간도는 기름진 땅이 흔해서 농사 걱정, 나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새 희망’의 ‘새 세계’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만주행에는 봉건적 모순 구조와 식민지라는 모국의 역사적 환경이 배경으로 자리하는데 이는 결국 경제적인 몰락과 이로 인한 생계 위협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에서 고국산천을 떠나는 조선 이주민들에게 만주 지역은 인용문에서처럼 생계 문제를 극복하고 식민지적 굴레에서 벗어나길 희망하는 욕망의 공간으로 호명된다.   하지만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삶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탈출기」의 인물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비참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난과 추위는 계속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주변인이자 소수자에 불과한 그들의 처지 또한 그대로였다.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꿈꾸던 만주라는 공간은 그러한 기대와 욕망이 좌절되고 그러한 좌절을 확인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이주한 농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그들이 겪는 수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당대 현실을 생각할 때 당연한 양상이다. 「고국」(1924), 「해돋이」(1926) 등 최서해의 다른 작품은 물론이고 만주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삶에 집중한 또 다른 작가 강경애나 박계주의 작품에서도 수난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주에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창걸의 초기 작품들에서도 만주 지역이 조선 이주민들의 기대와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닌 좌절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마도강이라 돈바람만 분다더니 ᄶᅩᆨ지ᄭᅦ 바람에 어ᄭᅢ만 붓”(「暗夜」, 1939)고 여전히 “가난의 설흠이 북밧처 목노아 울고”(「거울」, 1940) 싶은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조선에서 이주한 농민들에게 만주는 결코 기회의 땅일 수 없는 셈인데 이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일제가 만주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상황을 고려하면 그리 새로운 결론은 아니다. 다만 만주 지역의 이주 조선인들이 겪는 수난은 만주 지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정착하고자 하는 ‘정주 의식’을 강조하면서, 조선 내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리고 좀 더 복잡하고 중층적인 차원에서 계급, 인종, 민족 등이 얽힌 모순 구조를 드러낸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토착 농민들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 소위 ‘완바오산 사건(萬寶山事件: 만보산 사건)’을 제재로 한 작품들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완바오산 사건은 1931년 길림성 완바오산 주변에서 집단 거주하던 조선 이주 농민들이 중국 현지 농민들과 충돌한 사건이다. 조선 농민들은 논농사를 위해 수로 공사를 진행했는데 이를 현지 토착 농민들이 반발하고 가로막았다. 이들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안대와 일본 영사관 경찰이 충돌하고 서로 총격 대응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사망자 없이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제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왜곡 확대함으로써 한중 갈등을 부추기고 이를 빌미로 ‘류타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류조호 사건)’, ‘만주사변’ 등을 연속해 일으킨다. 김동인의 「붉은산」(1932), 이태준의 「농군」(1939), 안수길의 「벼」(1941) 등이 이때의 상황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모두 현지 토착 세력과의 갈등에 초점을 두어 조선 이주 농민의 수난을 강조한다.   이들 작품 속 조선 농민들은 토착 세력과 갈등을 겪으면서 죽임을 당하는 등의 큰 피해를 겪지만 결코 수로 공사를 멈추지 않는다. “죽어도 여기밖에 없고 살아도 여기밖에 없”(「농군」)고, “죽어도 예서 죽고 살아도 예서 살 밖에 없는 그들”(「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논농사를 위해 공사를 멈추지 않고 기어코 수전 개발에 성공한다. 이런 모습은 어떠한 수난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조선의 방식으로 농토를 개척하면서 안정적인 거주와 영속적인 생활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국땅 만주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 이국땅을 떠돌 듯 지내는 유랑 의식이 만주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는 정주 의식으로 조정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개발과 정착이라는 이야기는 만주 장악을 위해 일제가 적극적으로 펼치던 이민 정책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만주국의 국책을 수행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일제는 1936년에 조선인의 집단 이주를 관리하기 위해 ‘선만척식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만주 지역 20여 곳을 조선인 이주 지역으로 지정하여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 조선총독부는 1942년부터 제2차 개척민 5개년 계획을 통해 해마다 조선인 1만 명을 이주시켜 만주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전을 활용한 벼농사가 조선인들에게 익숙한 고유의 농사 기술이라 하더라도 개발과 정착의 이야기는 당시 일제가 추진하던 국책과 연관될 여지가 다분하다.   특히 수전 개발을 통해 만주 지역을 미개척 공간으로 간주하고 토착 세력의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을 상대적으로 야만의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 구도를 강조하는 일제의 식민주의 논리와 매우 닮아 있다. 또 세부적인 차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 작품들이 ‘완바오산 사건’과 관련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차원에서 왜곡하거나 선택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일제가 이 사건을 악의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안수길의 「벼」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의 개입을 기대하고 일본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는 조선인의 보호를 명목으로 내세워 조선인을 만주 점령의 첨병으로 활용했던 일제의 의도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에 있었고 만주 지역 또한 일제의 통제하에 있었던 점, 그리고 이러한 사정 때문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귀향의 전망을 쉽게 가질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난 속에서도 정착에 힘쓴 농민들의 이야기를 국책과 관련하여 비판적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이후 총동원 체제를 실시하여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고 한글 문학의 창작과 발표에도 엄격한 감시 체제가 적용되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국책 수행이라는 반민족적인 위치에서 조선 이주 농민의 수난과 정착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당시 조선 이주민들이 처한 중층적인 모순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 집단 간의 갈등은 만주국이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민족협화’의 논리에 균열을 가할 뿐 아니라 이주민과 토착민,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과 피식민으로서의 조선인 등 다양한 층위에서 갈등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조선인의 처지를 보여줌으로써 민족과 국가(국책)의 관계를 단순하게 보기 어렵게 만든다. 최서해가 「해돋이」에서 “그네들은 일본과 중국과의 이중 법률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런 힘없는 그네들은 두 나라 틈에서 참혹한 유린을 받고 있다. 그래도 어디 가서 호소할 곳이 없다”라고 한 표현은 이런 차원의 현실 인식이자 통찰이라 할 것이다.   식민지 시기 ‘만주’와 관련된 작품들은 조선에서 이주해 온 농민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보여준다. 이들은 이주민으로서 겪는 수난과 시련의 양상을 비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만주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장소화하는 정착 지향을 드러낸다. 완바오산 사건을 제재로 한 이야기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주민으로서 그들이 겪는 수난과 그에 대한 대응은 조선인 공동체라는 소수민족 집단(ethnic community)의 차원에서 토착민과의 갈등과 대립을 표현하기도 한다. 동시에 일본 국민도 아니고 중국 국민도 아니면서 두 국가의 관리와 통제 사이에서 식민과 반식민, 원주민과 이주민의 경계에 놓인 유동적인 상황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생존과 정착 과정에서 겪는 수난의 양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처한 복잡하고 혼종적인 삶의 한 양상을 그대로 전한다. ▲ 만보산 사건 이후 파괴된 평양의 화교 거리(1931년 7월) 일제는 수로 공사 과정에서 벌어진 충돌로 조선인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오보를 의도적으로 제공함으로써 한중 갈등을 폭발시켰다. 이런 여파로 당시 조선 각지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폭력적인 배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특히 평양에서는 중국인 상점과 상인을 향한 폭동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출처: 히노데신문 편찬 『만주 건국과 만주·상하이 대사변사』 쇼와 7년 5월 (1932년 5월)) ▲ 만보산 사건의 배경이 된 이퉁 강 관개수로 조선인이 주도하여 건설한 이퉁강(伊通河)의 수로 모습. 이 수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완바오산 사건이 발생했다. (출처: 오츠키 서점 『사진 도설 일본의 침략』) 3. 근대 도시의 화려함과 디아스포라의 비애 “   “(……) 남신경(南新京) 근처부터 벌써 이곳저곳에 맘모스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우뚝 보이더니 이내 웅대한 근대 도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건설 도중이라는 느낌은 있었으나 갓 나온 연녹색 버들 사이로 깨끗한 콘크리트의 주택들이 깔리고, 멀리 보이는 큰 건축물들의 동양적인 지붕도 눈에 새로웠다. (……)” ―유진오, 「신경」(1942) 중 ”   ‘웅대한 근대 도시’, 만주국의 수도 신경에 대한 인상을 묘사한 부분이다. 만주국 건립 후 일제는 장춘(창춘, 长春)을 수도로 정하고 그 이름을 ‘신경(신징, 新京)’이라 했다. 그리고 신경을 동북아 대도시로 건설하고자 거대한 광장과 거리를 조성하고 웅장한 새 건물들을 연달아 건설한다. 일제가 야심 차게 기획한 계획도시 신경의 모습을 유진오는 동양식 지붕을 얹은 거대한 건축물들을 통해 위와 같이 묘사한다.   이러한 근대 도시의 화려한 면모는 이전 장춘 시대와 대비된다. “잡초가 우거져 있던 초라한 시골 도시”의 풍경은 “사방으로 뻗어 나간 큰 길가에 보기 좋게 늘어선 큰 집”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겉모습은 장춘 시대에 비해 훨씬 거대하고 화려해졌지만 이와 달리 작중 인물 ‘철’의 심경은 이전과 달리 허무함을 느끼며 더 초라해진다. 학생들의 취직 알선을 위해 신경에 왔으나 성과는 없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 사람의 ‘복잡미묘한’ 지위만 새삼 느꼈다. 여기에 절친한 벗이었던 ‘욱’의 죽음까지 겹치다 보니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에 대한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만주국의 수도 신경이 보여주는 화려함에 대비되는 이러한 상실감이 결국 “일본과 러시아와 장학량의 세 세력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장학량의 헌병도 중동철도의 사원도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위세가 커진 일제 식민 권력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식민지 조선인의 비애와 연관되는 것임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만주국 시기 또 다른 대도시인 봉천(현 선양(沈阳), 심양)을 배경으로 한 주요섭의 「봉천역 식당」(1937)도 이전 시기와 달라진 분위기를 전한다. 서울역과 비슷한 분위기의 봉천역이지만 만주국 건립 후 ‘으리으리하게’ 변했다. 이러한 도시의 화려함에 대비되는 상실감과 비애는 「신경」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이 작품은 정거장 식당에서 우연히 보게 된 여인의 인상을 통해 당시 조선인의 처지를 좀 더 직접적으로 얘기한다. 첫 만남 때 그녀는 “행복이 넘치고 흘러서 그 순진스런 즐거움이 온 방 안 공기를 진동시키고 남”은 모습이었으나 두 번째 만남 때는 양장을 하고, 화복을 입은 여성과 함께 대여섯 남자 틈에 끼어 앉아 있었다. 만주사변 직후 세 번째 만남 때는 “두 뺨이 핏기 하나 없이 노래져 버린 데다가 입가에는 벌써 가는 주름이 잡”힌 “웃음은 어디로 가고 아주 우울한 얼굴의 한 권형”이 되었다. 그리고 화려한 도시로 변모한 만주국 시기에 그녀의 모습은 “눈물 날 만치 구슬픈” 인상을 띤다.   작가 스스로가 그 여인을 “해외로 떠도는 조선 여성의 한 타입의 표본”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그녀의 변모된 인상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인생사를 압축한 듯하다. 식민지적 굴레에서 벗어날 기대감에 만주 지역으로 이주했고 다국적 분위기 속에서 주변인이자 소수자로서 안간힘을 쓰며 생활해 왔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비극적 상황은 여전함을 그대로 전한다. 이렇게 “조선인으로서의 비극, 여자로서의 비극, 인류로서의 비극”이 부단히 이어질 듯한 “쇠사슬 같은 연쇄의 영원”에서 오는 통탄과 우울감은 봉천역의 거대함과 화려한 변모만큼 크고 깊다.   만주국의 또 다른 특별시 하얼빈(할빈(哈尔滨))을 표제로 한 이효석의 「하얼빈」(1940)도 도시의 화려함을 변화의 차원에서 그려낸다. “새것이 요란스럽게 밀려드는 꼴”이라거나 “이 위대한 교대의 인상으로 말미암아 하얼빈의 애수는 겹겹으로 서러워가는 것”이란 식으로 말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하얼빈의 키타야스카야 거리는 ‘신경’이나 ‘봉천역’에 비해 다국적 분위기와 이국적인 화려함을 더한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외면의 화려함 속에 ‘나’가 느끼는 허무주의와 비애는 크게 부각된다. 이러한 허무감은 조선인인 ‘나’뿐 아니라 폴란드 출신의 혼혈 ‘유우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키타이스카야는 이제는 벌써 식민지에요”라고 그녀는 말하며 죽음을 얘기하기도 한다. 화려함에 감춰진 제국주의의 폭력과 왜곡된 근대주의 아래 이민자들의 비애는 조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만주국 시기 인구 30만을 넘었던 대도시 신경, 봉천 그리고 하얼빈을 표제로 한 작품들 모두가 대도시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상실감과 비애를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화려함과 거대함으로 포장된 왜곡된 근대주의, 그리고 만주국의 체재와 존재 자체가 보여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조선인의 지위는 황국신민이고 일본인이지만 어떤 때는 만주인으로, 어떤 때는 일본인으로, 또 어떤 때는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조선인이라는 이등 국민으로 간주 되는, 복잡하고 애매한 처지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니 “우정과 신분은 다른 것”으로 “신분만은 서로 확실히 해두는 것이 옳”다는 「하얼빈」 속 작중 인물의 발언은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이중적인 속마음을 대신 전하는 것으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만주국이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민족협화와 세계주의가 지닌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주국 건립 이후 대도시 개발이 속도를 내는 만큼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도 늘었다. 조선인의 경우도 이 시기에 만주로 유입되는 인구의 반수 이상이 도시로 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중 적지 않은 인원이 도시 내 실업자나 부랑자 등 하층민으로 전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중에서는 당시 만주국의 사회 문제 중 하나였던 아편 밀매에 빠져드는 인원도 많았다고 한다. 이효석의 「하얼빈」에서 “조선 사람만 보면 그걸 연상한다구”라는 표현은 바로 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김창걸의 「청공」(1940)과 안수길의 「토성」(1944)은 도시로 진출한 조선인의 이야기를 아편 문제와 연관하여 전하고 있다. 「청공」은 아편의 위험성을 고발하면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는 인물들을, 「토성」은 아편 밀매 사업을 벌이려고 가족 관계나 윤리 의식마저 버리고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편 중독자인 남편 때문에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맡게 되는 강경애의 「마약」(1937)도 아편 중독의 위해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 모두 조선인 이민 사회의 한 단면을 당시 심각했던 아편 문제를 통해 드러낸다.   그런데 이 중 「청공」과 「토성」은 국책 수행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청공」의 경우 만주국의 아편금단 정책에 부응하는 이야기이며, 「토성」의 경우 ‘안전 농촌’을 명목으로 조선 이주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토성을 쌓았던 만주국의 조선인 정책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에 대한 국책 수행의 관점 역시 단순하지 않다. 이들 이야기를 통해 아편을 표면적으로는 금지하면서도 일부 방관하기도 하고, 또 재배지를 확대하여 생산을 허용하기도 하면서 이권과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일제의 이중적 행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 작품 모두 아편 문제를 극복하는 데 조선인 공동체 집단의 힘과 내면화된 연대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기 어렵다. 오히려 만주국의 표면적인 이념과 논리에 감춰진 이중성과 허구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민족 집단의 차원에서 모순적 상황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신경시 대동대가(1939년) 1939년 신경시 대동대가의 모습이다. 왼편의 큰 건물은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그 옆에 동양식 지붕이 탑처럼 솟은 건물은 강덕회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로는 길이 13km에 이르고 폭은 최대 100미터에 달했다. (출처: 마이니치신문 『쇼와사 별권 1-일본 식민지사』) ▲ 만주국 시기의 펑텐역 봉천(선양)은 만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만주국 시기에 신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 제일의 대도시로, 철도 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38년의 봉천역사의 모습이다. 돔을 얹은 거대한 역사로 당시 만주 지역 철도역 중 가장 규모가 컸다. [© 중국 선양시 기록 보관소] ▲ 하얼빈을 대표하는 번화가인 키타이스카야 거리 모습이다. 이효석의 『하얼빈』에서 나오는 것처럼 카바레와 호텔이 많았고, 일부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철도 건설로 도시가 형성되었으므로 유럽풍·러시아풍의 건물이 즐비한 것을 사진에서 볼 수 있다. 하얼빈의 겉모습은 이렇듯 국제적이고 화려하지만 안중근 의거, 731부대 등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출처: 『하얼빈 인상』 상편) 4. 재만 문학의 유산과 유동하는 디아스포라   식민지 시기 재만 조선인들은 중층적인 타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봉건지주와 제국주의가 억압하는 타자의 삶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이주지에서 토착민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질서에 배척되는 타자적 삶 또한 경험했다. 게다가 만주는 친일의 공간이면서 항일의 공간이기도 했다.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독립 투쟁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만주국에 순응하는 2등 국민으로의 삶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만주에서 조선인의 삶은 이렇게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민의 수난 그리고 도시의 비애를 다룬 작품들의 예처럼 이 시기 소위 재만 조선인 문학은 디아스포라로서의 삶과 처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에서 이주해 왔고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조상들의 경험과 지식을 내면화해 온 존재라는 뿌리 확인에 치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노동과 육체가 일상적으로 운용되는 곳이며, 이를 통해 자신들만의 문화적 습관이 가시적으로 축적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를 통해 만주가 삶의 기원을 확인하거나 강조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삶을 지속해야 할 정주 공간임을, 동시에 제국과 민족의 관계에서 이방인이자 소수자로 환기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공간임을 확인시켜 준다. 생존의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친밀한 생활 공간’으로서 ‘만주’라는 특수한 장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주는 독립운동의 경험과 유산이, 그리고 그 역사와 함께 한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적극적으로 행동한 민족의 장소였기에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게 현재화되는 기억이다. 또한 동아시아의 주변인들이 모여들었던 이산과 마이너리티의 공간을 장소화하면서 민족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이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공간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귀속 의식이 바탕이 되어 침탈된 고국의 대안공간으로 역할을 했지만 이 때의 귀속 의식은 이미 기존의 귀속 의식으로 회귀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국가와 민족의 복잡한 경계에 존재했다. 재만 문학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민족과 국가의 경계 안에서 때로는 순응과 지지를, 때로는 갈등과 저항을 하며 삶의 경계를 재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민족 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재구성하는, 복잡하게 얽힌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서 유동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재구성하고자 끊임없는 시도와 행위를 이어온 것이다. 해방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으로 이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연속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 온 조선인 집거지와 그를 토대로 이루어진 한글 문학의 유산에 바탕을 둔 조선족 디아스포라 문학이 지닌 유동성은 이런 차원에서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현재적이다. ▲ 동북조선인민보 일제 패망 이후 만주에서 꾸준히 발행된 한글 신문들은 민족 문학의 역정(歷程)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9월 창간된 《한민일보》를 시작으로 《길동일보》, 《인민일보》, 《길림일보》 등 여러 신문이 발간되었다. 사진은 1949년 5월 8일, 8월 6일에 발간된 《동북조선인민보》 문예면의 일부이다. 이 신문은 연길의 《연변일보》, 하얼빈의 《민주일보》, 통화의 《단결일보》를 통합하여 1949년 4월 1일부터 발행하기 시작했다. 1955년 《연변일보》로 제호를 바꾼 후 지금까지 발행을 이어오고 있다. [© 필자 제공] 참고문헌 김경일 외,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역사비평사, 2004. 김동인 외, 『한국문단 이면사』, 깊은샘, 1983. 김영필,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만주아리랑』, 소명출판, 2013. 김창걸,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 제3집: 김창걸 문학편』, 중국조선민족문화예술출판사, 2003. 김형규, 『민족의 기억과 재외동포소설』, 박문사, 2009. 민족문학연구소 엮음, 『일제말기 문인들의 만주체험』, 역락, 2007. 심연수,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 제1집: 심연수 문학편』, 중국조선민족문화예술출판사, 2004. 안지나, 『만주이민의 국책문학과 이데올로기』, 소명출판, 2018. 이광일‧김강 엮음, 『‘한국근대문학과 중국’ 자료총서 3: 단편소설 1』, 역락, 2021. 이광일 엮음, 『‘한국근대문학과 중국’ 자료총서 4: 단편소설 2』, 역락, 2021. 주요섭, 장영우 엮음, 『사랑손님과 어머니: 주요섭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2012. 천춘화, 「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만주 공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4. 표언복, 『해방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 한국문화사, 2004. 니카무라 유지로, 박철은 옮김, 『토포스: 장소의 철학』, 그린비, 2012. 이-푸 투안, 이옥진 옮김, 『토포필리아』, 에코리브르, 2011.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과 오사카 이카이노

김환기 한국

1. 일제강점기의 오사카와 조선인   일제강점기에 자의·타의적으로 일본으로 들어간 코리안들은 해방 직전(1944년)에 무려 200만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했고, 상업 도시 오사카에 수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 작용한다. 당시 오사카는 중소 영세 기업이 많아 일본어를 몰라도 건강한 육체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생활환경이 열악했던 지역이라 다른 지역보다 조선인들이 비교적 쉽게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1) 제주도민의 4분의 1이 일본(오사카)으로 이주·이동했다는 통계도 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오사카는 재일 코리안들의 집거지로서 ‘부’의 역사성과 민족의식을 상징하는 특별한 시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1945년 조국의 해방과 함께 코리안들은 약 140만 명만 귀국길에 오르고 약 60만 명은 그대로 일본 땅에 남게 된다.2) 조국이 해방되었음에도 많은 코리안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귀국길에 오르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는 ‘연합국 최고 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GHQ)’가 귀국하는 조선인들에게 지참할 수 있는 짐의 무게(114킬로그램)와 지참금(1,000엔)을 제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GHQ가 코리안들의 귀국길에 짐과 지참금 제한한 것은 결국 당사자들에게 전 재산을 일본에 남겨 놓고 떠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한 코리안들은 정국의 격심한 정치적 혼란에 불안을 느끼고 재차 일본으로 되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해방 정국의 혼란과 맞물린 민족적 비극 ‘제주 4·3 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던 역사도 있다. 그렇게 해방을 맞았음에도 재일 코리안들은 본의 아니게 식민 지배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현재의 오사카 이쿠노구3)는 이러한 재일 코리안들이 살아남기 위해 역사적, 사회문화적으로 생존 투쟁을 벌여야 했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특히 오사카의 JR쓰루하시역 주변은 일제강점기 각종 암시장이 유행했고 ‘쓰루하시 국제 상점가’를 형성하며 많은 대륙의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오사카는 일본의 제국주의·군국주의와 근대화·산업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방직 공장을 비롯해 금융과 상업 중심지로 역할을 했고, 오사카를 관통했던 히라노강과 네코마강을 농업 생산량 확보 차원에서 정비(농지 확보, 도로·수로 건설 등)하면서 많은 조선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곳 오사카에서 재일 코리안들은 살아남으려 일본·일본인·일본 사회를 상대로 지난하게 투쟁했고 생명력 있게 민족적 주체성을 견인해 왔다. 오늘날 오사카의 JR쓰루하시역과 코리안타운은 그러한 민족적 ‘부’의 역사성과 굴절된 현대사의 간고함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공간이다.   해방 직후 GHQ와 일본 사회를 상대로 오사카·고베를 중심으로 펼친 재일 코리안 사회의 ‘4·24 교육 투쟁’은 주체적인 민족 교육을 보장받기 위한 간고한 투쟁이었다. 1947년 재일 코리안 사회는 일본 전국에 “초등학교 541개교(56,961명), 중학교 7개교(2,761명), 고등학교 8개교(358명) 교원 1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학교’를 건립”4)해 민족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GHQ는 조선인 학교를 공산당의 온상지로 취급하고 1948년 모든 조선인 학교에 대해 폐교를 명령했고, 그로 인해 재일 코리안 사회는 1948년 GHQ와 일본 사회를 상대로 오사카·고베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4·24 교육 투쟁’을 벌인다. 결과적으로 일부 ‘폐교령 철회’(효고현)와 ‘공립 조선 학교’5)형태의 교육 기관을 확보하지만 GHQ의 강경한 대응은 조선인 학교의 폐교와 ‘재일조선인연맹’의 강제 해산과 재산 몰수 단행으로 이어졌다. 현재 일본 전국에는 조선 학교 총 56개교, 한국 학교 총 4개교가 설립·운영되고 있지만 지금도 민족 교육의 현장에서는 일본 사회의 차별 문화에 맞서 투쟁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재일 코리안의 주류(중심) 사회를 향한 민족적 생존 투쟁은 교육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참정권 문제, 지문 날인, 귀화 문제 등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민족 운동의 중심지인 오사카와 재일 코리안 사회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그동안 ‘부(負)’의 역사성과 함께 정치사회, 교육 문화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예컨대 해방 직후에 창간된 《민주조선》을 비롯해 1970-1980년대의 《마당》, 《삼천리》, 《청구》, 《민도》 등을 통해 재일 코리안의 쟁점 사안들(참정권,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조총련), 민족 교육, 남북통일, 한일 관계, 정체성 등)을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를테면 『재일 한국 조선인: 역사와 전망』(강재언 외), 『재일 조선인(在日朝鮮人)』(사토 가쓰미), 『재일 조선인 문제의 기원』(문경수),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도노무라 마사루), 『자이니치의 정신사』(윤건차) 등은 대표적인 연구 성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재일 코리안 문학계는 작품을 통해 그들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소환하고 기억하며 한일 문단으로부터 주목받는다. 대체로 주류(중심) 사회를 상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마이너리티의 주체적 소리를 확보하는 형식이다. ▲ 1929년부터 1945년까지 제주와 일본 오사카를 오간 여객선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 [ⓒ 제주의소리] 2.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과 오사카   재일 코리안 문학과 오사카의 관계는 단순한 지역적 개념을 넘어 민족의 굴절된 역사와 사회문화적 쟁점과 깊게 맞물린다. 우선 재일 코리안 작가들만 보아도 김석범을 비롯해 김시종, 양석일, 종추월, 김창생, 김길호, 원수일, 현월, 정장 등 오사카 출신이 적지 않다. 이들 재일 코리안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주류(중심) 사회와의 갈등·대립, 남북의 화해·통일, 민단과 조총련의 갈등·대립, 참정권, 민족 교육, 민족적 정체성 등 다양한 현대사적 쟁점들을 주제화한다. 실제로 오사카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국 한반도의 근현대사적 변곡점과 함께 웃고 울기를 반복했던 공간이다. 특히 오사카는 제주도와의 관계가 특별한데 거기에는 일제강점기의 ‘기미가요마루’(제주도-오사카를 왕복했던 배)와 해방 직후의 민족적 비극 ‘제주 4·3 사건’의 영향이 크다(오사카로 제주도민의 밀항).   재일 코리안 문학은 그러한 조국의 굴절된 현대사적 쟁점들을 다양한 소리와 색으로 소환하고 주제화했다. 창작을 하는 작가란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역사의 수많은 하위 주체들에게 강요된 침묵과 억압당한 생채기들을 활성화하는 존재”6)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재일 코리안 작가들은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살려 끊임없이 ‘부’의 역사성, 민족의식, 타자의식, 자기(민족) 정체성을 고뇌했던 것이다.   김석범은 디아스포라의 상상력으로 ‘부’의 역사성을 ‘제주 4·3 사건’을 중심으로 주제화한다. “시대적으로는 1948년 전후 해방 정국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삼고 공간적으로는 제주도-목포-광주-대전-서울-부산의 육로와 해로, 일본의 홋카이도-도쿄-교토-오사카-고베를잇는 한반도 바깥의 육로와 해로를 아우르는”7) 해방 정국의 혼란상을 소환한다. 김석범은 『까마귀의 죽음』을 근간으로 대하소설 『화산도』을 통해 전면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서사화했는데 현재(99세)도 “기억은 내외부의 억압과 공포에 의해 망각에 갇혀 화석처럼 굳어지지만 결코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8)라는 관점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제주 4·3 사건’의 원죄 격인 외가의 친척 정세용과 친구 유달현이 처형당하는 『화산도』는 작가의 민족정신은 물론 창작 의도를 명확히 읽을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러한 김석범의 디아스포라적 상상력은 오사카와 제주도(4·3)의 역사적, 사회문화사적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일찍이 한국 문학계에서 채우지 못했던 문학사적 공백을 메우는 지점이기도 하다. 양석일은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중간 세대 작가로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작가이다. 그는 오사카에서 김시종과 함께 동인지 『카리온』을 발행하며 시를 발표했고 거주지를 도쿄로 옮긴 이후에는 택시 운전사 생활을 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소설 『택시드라이브』, 『광조곡』, 『피와 뼈』, 『밤을 걸고』 등은 작가로서의 문학 정신과 도전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대표작 『피와 뼈』는 역시 제주도가 원고향인 최양일 감독에 의해 영화로 개봉되어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소설에서 상정되는 일제강점기의 오사카 공장 지대는 그곳이 재일 코리안들에게 얼마나 간고했던 생활 공간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공장 이층에 있는 4평 넓이의 방에는 여섯 명의 직공이 살고 있었다. 술에 취해 흙투성이 옷을 입은 채 곯아떨어진 사람도 있고,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치료도 않은 채 그냥 자고 있는 사람도 있다. 목욕탕에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은 네모토 노부타카(根本信高)는 온몸에서 퀴퀴한 쉰내를 풍기고 있었다. 솜이 비어져 나온 이불은 피와 땟국과 기름에 절어, 목에 닿는 부분이 검게 번들거리고 있다. 게다가 1년이 넘도록 이불을 걷은 적이 없고 청소도 하지 않은 방은 온갖 잡동사니와 술병과 누더기 같은 속옷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돼지우리보다도 지독한 상태였다. 천장의 네 귀퉁이와 벽장 속에는 거미줄이 처져 있고, 겨울인데도 바퀴벌레가 기어다녔다. 기둥과 벽의 갈라진 틈새에는 직공들의 피를 빨아먹고 통통하게 살이 살찐 빈대들이 떼 지어 행진하고 있고, 이들도 신나게 뛰어다니며 흥겨운 광란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9) ”   양석일의 『피와 뼈』에서 펼쳐지는 오사카 어묵 공장의 직공들이 묵는 숙소의 생활환경은 역하기 짝이 없다. “피와 땟국과 기름에 절어”버린 이불이며 바퀴벌레와 빈대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흥겨운 광란의 잔치를 벌이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청운의 꿈을 안고 제주도에서 ‘기미가요마루’를 타고 오사카로 온 주인공 김준평은 그곳에서 ‘신체’를 무기로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육중한 ‘신체’는 그가 ‘적국’에서 살아남는데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고 그 ‘신체성’은 광기와 폭력, 도박과 여자, 고리대금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재화된다. 특히 야쿠자로 등장하는 장남 다케시(武)와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벌이는 부자간의 우중 혈투는 당시 오사카 공장지대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루했는지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김준평의 강렬했던 ‘신체성’도 세월과 함께 녹아내고 끝내는 ‘피와 뼈’로 표상되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북조선’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식민 지배국에서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재일 코리안의 절박한 심경을 특유의 엔터테인먼트로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양석일 문학은 한일 양쪽의 문단에서 평가받고 있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원수일은 김석범과 양석일처럼 민족의 굴절된 현대사적 쟁점을 부각하기보다 재일 코리안들이 지금 현재 집단 거주하고 있는 오사카 이쿠노의 생활 공간 구석구석에 시선을 집중한다. 작가 스스로 “내가 자아에 눈뜬 유년기의 의식에는 조선 시장, 운하, 제사, 정치, 싸움, 이별, 통곡, 웃음이라는 이카이노의 풍경이 복잡하게 얽혀 침전되어 있다”10)고 했을 만큼 오사카 이카이노는 원수일 문학의 원풍경을 녹아낸다. “    풀 먹은 감을 재단하는 둔탁한 금속음, 담갈색으로 바랜 담벽에 붙어있는 ‘조국귀환’이라 흰 삐라, 햅번샌들의 상부와 바닥을 압착하는 공기압축기 소리, 고동색 전신주에 감겨있는 ‘주민증 필수’라고 명기된 부동산 광고, 정수리를 찌를 듯이 볼링기가 쏟아내는 하이톤의 금속음, 구멍가게 처마 끝에 달린 흰색 줄넘기, 노란 고무, 빨간 종이풍선, 나사 박는 기계가 껍질을 벗겨내는 듯한 소리, 기름과 먼지로 범벅이 된 회색 골목길에 가득 내놓은 전통문양의 알록달록한 이불, 플라스틱 방출성형기의 완만한 소리, 움막 같은 어두운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인 폐품들의 짓무른 듯한 피부색의 상자, 햅번샌들의 ‘깔창’을 가공하는 연속음, 감색의 포렴을 늘어뜨린 술집 앞에 어지럽게 놓인 깨진 변의 파편이 빛에 반사되어 발하는 은색의 반짝임, 공장에서 공장으로 돌아다니는 오토바이의 배기음, 갈색으로 칠한 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설치된 간이 빨랫줄에 걸려있는 흰 속옷, 검은 슬립, 꽃무늬 팬티, 플라스틱 덩어리를 분쇄하는 분쇄기의 건조한 금속음, 안달증이 폭발한 성난 목소리, 절멸하는 노란색 신호등, 흰구름이 길게 늘어진 창공을 향해 솟아있는 고무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11) ”   원수일의 소설 「재생」은 이카이노에 정착해 살아가는 코리안들의 다이내믹한 실생활 공간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영춘은 나그네처럼 방황하며 오사카 이카이노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각종 시끄러운 소리와 색에 ‘감각의 마비’를 경험한다. 태생적으로 ‘재일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활공간의 각종 “시끄러운 소리와 색에 마비된 감각”까지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체화된 실생활의 ‘마비된 감각’을 운명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재일 위치, 그 삶의 실존적 지위를 원수일 문학은 인간사 희로애락으로 얽어낸다.   종추월은 재일 코리안 사회에 남아 있는 유교적인 가부장제를 비중 있게 다룬다. 소설 「이카이노 태평 안경」은 “오빠를 부여잡고 등 뒤에서 울던 어머니처럼, 순자 또한 남편의 등 뒤에서 슬픔”12)을 안고 울며 살아가는 여성을 그리고 있고, 「불꽃」은 남편의 사업 실패와 반복되는 가정폭력을 피해 가출한다는 경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종추월의 소설에서는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 여자들, 주변 대부분의 여자들을 “다소의 차이는 있더라도 재일의 원시적, 원초적인 카르마에 통곡하는 통곡했던 여자들”13)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김창생의 소설은 이러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관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의 소설 「도새기」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산소와 제사 문제를 둘러싸고 형제자매 간에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다룬다. 어머니의 제삿날 장남인 큰오빠가 동생들을 향해 “내가 부모를 산소로 모신다. 제주도에 산소를 만들 것”14)이라고 선언한다. 동생들이 부모의 산소를 제주도에 모시면 찾아뵙기가 어렵다며 반대했지만 장남인 원하는 동생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본인의 생각대로 부모의 유골을 제주도로 모셨고 산소 비용으로 천만 엔까지 챙긴다.15)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여성보다 남성은 우선이고 “맏이는 부모 맞잡이”라는 논리가 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듯했다. 하지만 두 여동생은 큰오빠의 일방적인 행동에 동의하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응수한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오빠지만 장남이란 이유로 형제자매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라며 소리친다.   그 밖에도 오사카 출신인 현월은 『그늘의 집』을 통해 오사카 JR쓰루하시역 주변의 거미줄처럼 얽힌 전통시장 골목을 배경으로 집단촌의 모순/부조리를 주제화한다. 현월의 「무대배우의 고독」, 「젖가슴」, 「나쁜 소문」 등도 거대자본의 강력한 힘과 폭력에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는 소수민족, 마이너리티의 소외 의식을 주제화한다. 김길호는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뉴커머 작가로서 작품을 한국어로 발표한다. 그의 소설 「몬니죠」, 「나가시마 아리랑」, 「들러리」, 「이쿠노 아리랑」 등은 오사카 이쿠노를 중심으로 “동포 사회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일상적인 신변사를 소재로 하여 형상화”16)한 작품들이다. 특히 오사카 이쿠노를 배경으로 재일 코리안 사회와 일본·일본인·일본 사회가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고 상호 협력하며 공생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재일 코리안 문학은 오사카 이카이노를 배경으로 다양한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JR쓰루하시역과 코리안타운을 중심으로 재일 코리안 사회의 ‘부’의 역사성과 민족의식, 사회문화와 실생활 측면에서 부각되는 문제적 지점들을 호소력 있게 주제화한다. 디아스포라적 상상력을 발휘해 경계의식과 트랜스네이션을 천착하고 글로벌 시대의 글로컬과 혼종의 가치를 읽고 실천하는 힘을 보여준다. 3. 오사카 코리안타운에서 발신하는 공생/평화의 메시지   오사카 이쿠노구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JR쓰루하시역과 코리안타운을 중심으로 재일 코리안 사회의 역사민속, 정치경제, 사회 교육, 문화예술의 세계와 가치를 유지·계승하며 끊임없이 변용을 거듭한다. ‘코리안타운’을 중심으로 설립된 ‘오사카 코리안타운 역사자료관’, ‘오사카 코리안연구 플랫폼’ ‘코리아NGO센터’ 등은 그러한 민족의 역사성과 정신사를 기억하고 기록물로 남기면서 선순환적 변용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주류(중심) 사회를 상대화하는 마이너리티의 시공간을 통해 글로벌 시대의 경계, 월경, 혼종의 가치관·세계관, 거기에서 현재화되는 ‘자이니치’, ‘조선적인 것’, ‘민족적 정체성’, ‘글로컬·글로컬리즘’, ‘한류 문화’, ‘다민족·다문화’ 사회의 핵심적 가치·이미지를 주목한다. ▲ 오사카 코리안타운에 위치한 ‘공생의 비’   오사카 코리안타운에 세워진 김시종의 「헌시(獻詩)」가 각인된 ‘공생의 비’는 그러한 주류(중심) 사회와 비주류(주변) 사회의 경계를 넘어 공생할 수밖에 없는 시대정신을 명징하게 담고 있다. 김시종은 ‘공생의 비’에서 “고집 센 자이니치의 계승 덕분에/불고기도 김치도 일본 전체가 좋아하는/풍부한 음식”이 되었고 “무뚝뚝한 조센징/그 속에서 가게를 열고/함께 버티며 삶을 도우며/ 마침내 코리아타운의 일본인이 된/사랑스러운 ‘이웃사촌’들” 그리고 역시 “흐름은 넓은 바다에 도달하는 것,” “작은 흐름도 합류하면 본류가 되는 것,” 그렇게 “곧 문화를 가지고 모이는 사람들의 길이 크게 열릴 것”이라고 노래했다.   재일 코리안 사회를 비롯해 일본·일본인·일본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마이너리티 주체성, 주류(중심)을 향해 던지는 안티 테제·시대정신, 그것은 오늘날 한층 다민족·다문화 사회로 이행 중인 한국과 일본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참고문헌 1) 고정자·손미경, 「한국문화 발신지로서의 오사카 이쿠노 코리안타운」, 《글로벌문화콘텐츠》 5, 2010, 95쪽. 2) 문경수의 『재일 조선인 문제의 기원』에 의하면 재일 조선인의 인구는 1911년 2,527년, 1920년 30,189명, 1930년 298,091명, 1940년 1,190,444명, 1944년 1,936,843명, 해방 직후 1945년 980,635명, 1946년 647,006명, 1947년 598,507명, 1948년 601,772명으로 변화를 보여준다(『在日朝鮮人問題の起源』, クレイン, 2007, 65쪽 참조). 3)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남북으로 흐르는 히라노강의 동서 0.8킬로, 남북으로 1.9킬로 지역을 가리킨다. ‘아카이노’라는 지명 자체는 1973년 ‘주소 표시 변경’에 따라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정자·손미경, 앞의 글, 94쪽 참조). 4) 같은 글, 95쪽. 5) 1949년 당시 ‘공립조선인학교’는 도쿄와 오사카에 설치되었고 이들 학교는 일본의 교육제를 따르며 민족 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고 오사카의 ‘공립 일본 학교’는 방과 후에 ‘민족 학급’을 보장하는 안이 모색된다. 6) 김환기, 「평화를 위한 진혼곡」, 김석범, 김환기·김학동 옮김, 『화산도 12』, 보고사, 2015, 371쪽. 7) 김환기, 「김석범‧『화산도』‧〈제주4‧3〉」, 《일본학》 41, 2015, 1-18쪽. 8) 趙秀一, 『金石範の文學-死者と生子の声を紡ぐ』, 岩波書店, 2022, pp. 234-235 참조. 9) 양석일, 김석희 옮김, 『피와 뼈 1』, 자유포럼, 1998, 20쪽. 10) 원수일, 김정혜·박정이 옮김, 『이카이노 이야기』, 새미, 2006, 243쪽. 11) 같은 책, 201쪽. 12) 宗秋月, 「猪飼野のんき眼鏡」, 《民濤》 1, 1987, p. 218. 13) 宗秋月, 「華火」, 《民濤》 10, 1990, p. 68. 14) 김창생, 「도새기」, 《제주작가》 15, 2005, 107쪽. 15) 같은 글, 121쪽. 16) 강재언, 「재일동포사회와 호흡을 같이하는 작가」, 김길호, 『이쿠노 아리랑』, 제주문화, 2006, 6쪽.

하와이 이주와 《태평양잡지》

전해수 한국

1   지난 2004년에 하와이 한인문학동인회에서 102편의 시를 수록한 『하와이 시심(詩心) 100년』을 간행했다. ‘102’는 하와이 이주의 역사를 기억하는 의미 있는 숫자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02편의 시는 1902년 12월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1903년 1월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의 첫 이민자의 수와 동일하다.   『하와이 시심(詩心) 100년』에 수록된 첫 번째 시는 하와이 이주의 심경을 쓴 최초의 시「이민선 ᄐᆞ던 전날」인데, 1905년 4월 6일자 《국민보》에 실렸던 이홍기의 시이다. “가만히 도모하는 행리”(이하 「이민선 ᄐᆞ던 전날」에서 인용)에 “만 가지 생각”이 든다고 토로한 시인은 “돌아올 때는 넉넉히 봉운한 몸을 지으리”라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이홍기 시인은 이 당시 대다수의 하와이 이민자가 그러했듯 처음의 뜻과는 달리 고국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하와이에 묻혔다.   또한 이 책에는 익명씨의 「하와이 흥부가」, 최용운의 「망향」, 한인기숙학교 「국혼가」와 「대한혼가」가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활동 중인 하와이 거주 한인문학동인회의 시들 가운데 대표작도 포함되어 있다. 「발간사」를 통해 “선조들의 거룩한 얼이 깃든 하와이에서 100년이 된 시심(詩心)의 발자취를 기록”하여 “하와이 이민문학을 집대성”하고자 하는 출판 의도를 밝혔다. 그런데『하와이 시심(詩心) 100년』발간 이후 어느덧 20년이 더 흘렀으니, 이제 하와이 한인 이주의 역사는 120년을 경유하고 있다.   이 글은 최초의 한인 사회를 형성한 ‘하와이’에서 발행된 《태평양잡지》를 주목한다. 1) 1913년에 간행된 《태평양잡지》는 초기 하와이 이주와 맞물려 있다. 초기 이민자들은 1904년 이주 후 일제 치하에 놓인 고국을 바라보며 식민지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체감했다. 그들은 태평양 건너 먼 이국땅에서《태평양잡지》를 발간하여 결속을 다지며 어떤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에 참여할지 고민했다. 특히 《태평양잡지》는 식민지 디아스포라의 집결로써 초기 이민문학의 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태평양잡지》의 발간 목적에 대해서는 1915년 《신한민보》에 실린 「ᄐᆡ평양잡지 발ᄒᆡᆼ」이라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태평양잡지)는 (이국의 땅에서) 동포의 학력을 양성하기 위해 정치, 문학, 소설, 내지소식 등을 실었다”고 적시하고 있다. <자료 1> 《태평양잡지》한글 표제와 영문 표기 및 목차   이처럼 1913년 9월부터 1930년 10월까지 약 18년간 하와이에서 간행된 《태평양잡지》는 우선 정치적, 종교적 성향을 띠면서 사회, 교육, 여행, 문학 등에도 관심을 둔 종합지였던 것이다. 영문 제호로 “The Korean pacific magazine”을 사용했고, 영문 목차도 함께 수록했다. 실제로 《태평양잡지》의 내용 가운데 “문학, 소설”의 경우는 “정치, 내지소식”에 비해 제한적이었으며, 조선의 식민지 문제, 자치권 문제, 독립운동 고취를 위한 글 등이 주로 실렸다. 구체적으로는 이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친 「이민문제」(1913년 4월호),「외국인과의 혼인」(1924년 7월호),「미국시민권」(1924년 7월호),「영어와 국어」(1930년 5월호),「국기해설」(1930년 7월호), 「하와이 섬 여행기」(1914년 6월호) 등 이민자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이 앞서서 게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민문학’과 관련하여 주목해 볼 점은 하와이 이민 사회의 특별한 공동체 정신이 《태평양잡지》문예란에도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   우선《태평양잡지》를 통해 1910-1930년대에 하와이에서 발표된 문학은 창가, 시, 장편소설, 단편소설, 번역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로 그 성격 및 특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시기 이민이 문학에 끼치는 영향 관계는 식민지 디아스포라의 성격과 의의를 내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바, 하와이는 1902년 12월 정책적인 공식 이민으로 시작되었으며, 1903년 1월에 본격 개시되어 1905년 8월 8일에 미국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7300여 명의 이민자가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처럼 초기에 하와이로의 집단 이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영어를 구사하는 선교사들이었는데, 선교사 존스(George H. Jones)를 중심으로 감리교에서 선교의 확장을 도모하는 방편으로 하와이 이민을 적극 권했다. 그런데 당시의 이민은 가족 이민보다는 독신 이민이 많았으며, 1905년 이민 금지 정책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혹은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 본토로 건너가는 이주민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하와이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거점이 되었으며, 하와이 이주민과 하와이 이민 사회는 자체적으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을 위한 자금 모금과 외교 선전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태평양잡지》에 수록된 단편소설 『토이기샹민』의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이 소설에서 통상, 여행, 파견 등 주로 외국을 드나드는 상인 이야기가 전제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로 하와이는 유학생, 망명자, 노동 이민자, 상인들의 주요 이주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민 사회의 정착 후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이민문학’이다. 이민문학은 모국어와 영어, 번역어 등 자국 언어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으로 형성된다. 이민문학은 정치, 경제, 사회적 원인으로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동한 이민자들이 쓰거나 향유하는 문학을 일컫는다. 하와이 이민사 120년에 달하는 현시점에서, 하와이 이민문학을 다양한 관점으로 재조명해 볼 수 있겠지만, 1900년대의 이민 초기에는 조선어로 쓰인 한인문학이 이민자에게 주는 역할은 특별한 것이었다. 이 시기 《태평양잡지》문예란처럼 한글로 쓰고 읽힌 이민문학은 이민 사회 형성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와이 이민문학이 형성된 과정에는 ‘이민자의 현실에서 바라보는 문학’이 존재한다. 근대 초기의 이민문학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의 이민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제 치하 식민지가 되어버린 고국과 낯선 이국 사이를 방황하는 이주민의 정서적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본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에서 싹트게 된 ‘망명 의식’이 있다. 이민문학을 망명문학과 같은 의미로 보는 입장은, 내용, 소재, 표현 등의 상이함에서 오는 지역적 차이를 우선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민문학 연구 초기에는 조동일, 김영철 등이 만주 지역 한인들의 문학을 망명(지)문학으로 명명했으며, 그 저간에는 이러한 인식이 자리한다. 그러나 개인적 도피나 유민의 관점이 아니라 하와이 이주처럼 정책 차원의 공식적인 이민으로 태동한 초기 하와이의 이민문학은 망명문학과는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또한 이민문학과 근접한 개념으로 ‘유이민(流移民) 문학’이 있는데, 윤영천은 만주를 비롯하여 해외 거주 동포들을 ‘유이민’으로 파악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원인들을 근거로 하여 그들의 시문학을 분석한 바 있다. ‘유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일시적으로 해외에 머무는 것으로 인식하여 상황이 호전되면 고국으로 귀환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하와이 이민자들의 경우 귀환의 순간에도 자의적, 타의적 이유로 하와이에 그대로 머무르거나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등 미국 본토로 이주하는 ‘선택’을 했다. 조규익은 하와이 이민은 ‘망명’이나 ‘유민’ 혹은 ‘유이민’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원래 살던 나라와 옮겨가는 나라라는 두 장소가 있어야 이민이 성립되므로 이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 두 장소는 각각 구세계와 신세계로 대비되는 것이며, 이 공간은 체험의 전이와 대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가치지향적인 공간”으로 설명한다. 이민문학은 이러한 장소의 이동으로 발생하는 두 세계 간의 이질적인 체험이 충돌하면서 문학적 형상화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거나, 문학적 원형으로서의 동화(同化)와 갈등(葛藤)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표출된다.   특히 하와이 이민문학의 형성은 개화기의 망명문학이나 앞서의 유이민 문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인데, 급변하는 근대 전환기에 겪은 ‘식민지 디아스포라’와 세계 밖의 이질적인 체험의 충돌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의 구한말에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이민을 선택한 이들의 일탈(逸脫)은 분명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이민 이후에 예기치 못한 일제강점기를 나라 밖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이민자로서의 정신적 충격과 갈등적인 태도를 보인다.   1910년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이 시기에 《태평양잡지》의 문예란은 그러한 이민문학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유학이나 도피행각과 달리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선택된 하와이는 ‘해외 노동 이민’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처럼 지식인 유학생이 아니라 ‘노동자’와 기독교 감리교 ‘선교사’가 중심이 된 하와이 이민 사회의 형성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초기 이민문학의 특징을 결정지었다.   당시의 이민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보다 나은 땅을 찾아 나선 선택지였으나, 하와이 정착 후 이들은 식민지가 되어버린 고국을 바라보며 예기치 못한 ‘실향 의식’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하와이 초기 이민문학의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실향 의식이 실제로 《태평양잡지》의 문예란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3   하와이 이민자들은 낯선 서방에서 《태평양잡지》와 같은 종합지를 통해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나름의 한 방식으로 문필(문학)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이민문학은 《태평양잡지》에 수록된 문학작품의 장르와 특징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태평양잡지》에 수록된 문학작품은 편수는 적으나 거의 모든 문학 장르가 등장한다. 번역소설, 연재소설, 단편소설, 시, 창가, 노래 가사, 희곡 등 다양한 장르가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태평양잡지》는 근대 초기 이민문학의 성격과 의의를 문학 장르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도 규명해 볼 수 있다.   《태평양잡지》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발간이 중단된 시기를 고려하더라도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물론 《태평양잡지》에 반영된 초기 이민문학은 문학이 예술의 고유한 차원으로 향유되지 못하고, 하와이 이민자의 정착 및 일제강점기 이민자의 공동체적인 입장과 목적을 위해 (문학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이민자들에게 이민문학은 예술성보다는 다만 흩어진 이주민을 결집하는 데에 더 효과적인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태평양잡지》에 게재된 문학작품을 발표 시기별, 장르별, 특징별로 정리한 것이다. 장르 구분 작품명 저자 게재일 및 기타 정보 1 번역소설(총 6회연재) 하멜의 일긔 헨리 하멜(Henry Hamel)역자 표기 없음 1913년 11월호-1914년 4월호(1913년 12월호는 누락됨) 2 시 전진가 저자 미상(블라디보스토크 동포가 지은 것이라 소개함) 1914년 1월호(새해에 축사로 사용됨) 3 단편소설 ᄇᆡᆨ셜과 홍월계 저자 미상 1914년 3월 4 단편소설 토이기샹민 저자 미상 1914년 6월호 5 시 3·1절 공동묘지에서 저자 미상 1923년 3월호(3·1절 기념시로 사용됨) 6 번역소설(3년간연재) 금낭비결 스폴딍 여사 저태평양잡지사 번역 1923년 6월호-1925년 7월호(총 13편이 누락됨) 7 장편소설(총 3회) 흰누이 저자 미상 1925년 8월호-1925년 10월호 8 시 종소리 하태용 1925년 8월호 9 장편 희곡(총 6회) 피의잔 흰옷 1930년 4월호-1930년 9월호(총 4회 보존/3호(1930.6)와 5호(1930.8)는 누락됨) 10 시 우리쳥년혈성ᄃᆡ 리정암(곡조-콜럼비아) 1930년 5월호(총 3연/후렴 있음/악보 없음) 11 시(창가) 망향가 리정암(곡조-Swanee River) 1930년 7월호(총 3연/후렴 없음/ 악보 없음)   《태평양잡지》에는 창간 시기인 1913년 9월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13년 11월호에 「하멜의 일긔」가 먼저 번역되어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이민문학의 출발은 번역문학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멜의 일긔」는 17세기에 네덜란드 선장인 ‘하멜’이 낯선 조선 땅(제주도)에 표류한 후 13년 20일간의 기록을 일기 형태로 작성한 것이 훗날 문학작품으로 탈바꿈한 『하멜표류기』이다. 「하멜의 일긔」가 《태평양잡지》에 실린 것은 낯선 하와이에 이주한 이주민이 느낀 ‘표류 의식’과도 연관된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멜의 일긔」는 총 6회로 게재되었는데, 1913년 11월부터 1914년 4월까지 연재되다가 중단되었다. 이후 번역소설 『금낭비결』의 경우는 약 3년간 장기 연재되었다. 소실되고 누락된 내용이 많아 내용 전개 및 내용 분석에 많은 아쉬움이 남지만, 보존된 것만으로도 그 내용 일부를 살펴볼 수 있다. 요컨대『금낭비결』은 “연애와 모험과 외교와 애국”을 다룬 이야기임을 부제로 밝히고 있다. 등장인물과 이야기 구조가 하와이 이민의 사정에 맞게 번안되었으며 개작되었다.   이외에도 《태평양잡지》에는 장편소설 『흰누이』가 3회 연재되었는데, “활동사진으로 세계에 유행한 소설/ 이탈리아 이야기(연애, 종교, 모험)/ 창자를 끈으며 가삼이 터지고 사샹을 높이는 긔담”을 다룬 소설임을 제1회에서 예고편의 내용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창작소설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이탈리아 소설을 번안해서 수록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소설로는 단편소설 「ᄇᆡᆨ셜과 홍월계」(1914년 3월호)와 「토이기샹민」(1914년 6월호)이 있다. 번안소설이 연재물인 데 반해서 창작소설은 단편이라는 점이 대조적이며 특징적이다. 단편소설 「ᄇᆡᆨ셜과 홍월계」, 「토이기샹민」은 모두 작자가 밝혀져 있지 않아 독자 투고로 짐작되며, 독자 투고는 이민문학의 한 특징을 드러낸다.   이 시기의 이민 사회에서 중요시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애와 우정, 통상(상업) 등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ᄇᆡᆨ셜과 홍월계」는 장화와 홍련을 연상시키는 ‘자매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자매로 태어난 ᄇᆡᆨ셜과 홍월계의 우애와 효심을 주로 다루고 있다. 반면에「토이기샹민」은 황금이 담긴 감자항아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내용으로 하는데, 황금을 훔친 범인을 색출하는 재판의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법정소설이라 할 수 있다.   소설과 달리 시의 경우는 《태평양잡지》에 수록된 작품이 매우 적은 편수이다. 창가, 노래 가사까지 모두 포함하여도 총 5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초기 이민문학에서의 시 장르는 수록 편수가 적고 또한 시의 서정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등 개인의 문학적 예술성보다는 공공의 노래로써 동원된 점을 엿볼 수 있다. 시는 집단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노래로 불릴 수 있도록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악보가 함께 실리기도 했다). 「전진가」, 「우리청년혈성대」등은 비록 몸은 고국을 떠나 있으나 고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협력하려는 모습을 시로써 형상화하고 있다. 요컨대 시의 경우는 식민지의 충격적인 체험과 나라를 잃은 상실의 정서가 나라 밖 머나먼 하와이 이민 사회에서 예술적인 요소로 작동하기보다는 ‘공동체 의식’을 더욱 중요시 여겨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모두 저자를 알 수 없으며(이 시기의 이민문학은 구태여 저자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구전된 혹은 집단적으로 향유되는 노래 형태로 불리는 창가 등을 통해서 표출된다. 시는 소설보다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전파력을 지닌 운문 장르였기에 개인의 서정보다는 오히려 집단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 밖에도 《태평양잡지》에는 희곡이 수록되어 있다. 무대와 등장인물, 대사와 지문 등 희곡적인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작품인 「피의잔」은 주인공 ‘박금란’을 둘러싼 사랑과 이별, 질투와 술수 외에도 왜병의 처단(결말)이라는 개인적, 정치적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작품이다. 특히 여주인공 ‘박금란’은 후반부에 남편을 떠나 여승이 되는 등 신분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기독교 성향이 짙은 《태평양잡지》로서는 의외의 설정과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짐작건대 이민자의 향수와 공감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법당’과 ‘여승’을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처럼「피의잔」은 《태평양잡지》에 실린 유일한 희곡작품으로서 주제 및 대사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와 주인공의 역할로 표출되는 인물의 캐릭터가 식민지 디아스포라의 한 양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해 볼 만하다. 이 작품은 저자가 밝혀져 있는데, ‘흰옷’이라는 가명(假名)이 사용된 점이 또한 특기할 만하다. 아마도 필명일 것인 저자명은 흰 저고리와 흰 치마로 상징되는 조선을 연상시키며, 고결하고 염결한 자주정신을 ‘흰옷’이라는 명명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이민 사회에서는 누구의 작품인가보다는 어떤 작품인가가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며,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상징적 의미와 파급력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흰옷’으로 적시된 작가의 상징성을 이와 연관하여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희곡 「피의잔」에는 전(前) 경상감사였으나 현재는 왜병의 정라(앞잡이)가 된 ‘구츄세’와 미모의 부인인 ‘박금란’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박금란’은 지금의 경상감사인 ‘김츙션’의 아내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구츄세’의 연인이었던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과거에 ‘구츄세’는 ‘금란’에게 사랑의 징표로 ‘금잔’을 선물했는데, 이 ‘금잔’이 2막에서는 파국을 알리는 ‘피의 잔’이 되고 만다. “ 벽두 연약ᄒᆞᆫ 월계화도 가시가 잇고 온슌ᄒᆞᆫ 쇼약국도 츙렬이 잇다 약ᄒᆞᆫ자의 고개를 갓ᄒᆞᆫ자이 벌ᄋᆡ라도 약ᄒᆞᆫ자의 영혼이야 아모딘들 죽을쇼냐 육신으로 지난자ᄂᆞᆫ 졍신으로 승리ᄒᆞ고 물질로ᄂᆡ이ᄂᆞᆫ자 도덕으로 패ᄒᆞ노라 아-발가벗고 환도찬 세셩의 야만들이 사천년 반도 영광 압죠에 능욕ᄒᆞ니 의리에 짓고짓든 문명의 근원이야 아모려도 살아잇다 죽기언들 엄숙으리 인도가 잇ᄂᆞᆫ곳에 텬리가 웨업으랴 쥭엄에서 일어나서 패무ᄒᆞᆫ자 승리ᄒᆞ리 연극의인물 구츄세 전 경상 감사로 지금은 왜놈의 정라 김츙션 ᄒᆡᆼ인, 경상감사 박금란 김츙션의 부인, 그후에ᄂᆞᆫ 녀승 류졍련 녀승 시비 하인 상로 아ᄒᆡ 흑뎐 왜대장 가등 송평 귀족 뎨일막 배경(일) 경상감영이 멀리 보히ᄂᆞᆫ곳 표장을울리자 그뒤에서 몸이ᄂᆞᆫ것은 녀승들의 념불하ᄂᆞᆫ쇼래다 산비탈에 돌틈으로 업헤서 아해 하나이 머루를 ᄯᅡᆫ다 일병한ᄯᅢ가 사로잡은 사람 하나를 결박ᄒᆞ여 달이고지난다 구츄세가 들어셔며 휘휘 둘러본다 그래자 저먼곳 념불소래가 들린다 -「피의잔」 1회 도입부 부분(1930. 4) ”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희곡 「피의잔」의 도입부에는 등장인물과 무대장치를 설명하는 시공간이 모두 제시되어 있다. 「피의잔」은 두 개의 무대를 보여주는데, 그중 하나가 경상감영에 도착하기 직전 여승의 “념불소리”를 들으며 과거의 박금란을 추억하는 구츄세(왜병의 정라)의 모습이 드러난 제1막의 무대이다. 희곡 속의 구츄세가 회상하는 박금란은 “미인”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금란은 지금의 경상감사인 김츙션의 아내가 되었으며, 금란의 남편 김츙선은 “일본에 반대하는” 조선인이었기에 구츄세는 자신이 왜병의 정라로서 그간의 공로를 세운 점을 내세워 지금이라도 금란을 데려올 생각에 젖어 있다. 전개 부분에는 구츄세의 그간의 삶이 밝혀지는데, 구츄세는 제주 사람으로 일본에서 성장한 이력을 지녔다. 또한 구츄세는 왜장 ‘흑뎐’의 앞잡이로 살아온 내력과 연관된 부분이 작품 속에서 드러난다. “ (박금란) (빗겨 안즈면서) 술이 진ᄒᆞ면 진ᄒᆞᆫ 것이 술인지 사랑이 진ᄒᆞ면 진ᄒᆞᆫ 것이 사랑인지 아즉이야 말할 수 잇습니가. 술에도 독이 잇고 사랑에도 가시가 잇습니다 (흑뎐)이게 무슨 소리냐 아! 내가 속앗구나 (벗적 니러서려다가 픽 곡굴어진다) 박금란) 이잔은 구츄세가 나에게 선사한 잔인데 이 잔은 ᄎᆞᆷ 나의 남편과 나의 나라를 위ᄒᆞ여 큰 공이 잇구나 이 잔으로 먹은 술은 우리 세 사람의 마즈막이다 (흑뎐) (박금란 다려) 아! 내가 당신한테 속기는 ᄒᆞ엿으나 나는 당신을 용서ᄒᆞ고 당신을 사모합니다 (구츄세 다려) 일본에서 너갓흔 개를 쓰기는 ᄒᆞ지만은 너갓흔 개는 열 번 죽어싸니라 (구츄세) 오냐 죽는 놈이 무슨 소리를 못ᄒᆞ겟느냐 너 멋대로 다 짓거려다 내가 김츙선에게 좆겨난 후에 그놈에게 긔어히 셜치를 ᄒᆞ려고ᄒᆞ다가 그것은 셩취를 ᄒᆞ엇으나 내가 일평생 생각기를 여자가 남자의 놀림감으로 알앗더니 지금 저 계집 (박금란을 바라보면서)에게 속앗다만은 내가 본래 일본의 세력을 빌어 나의 목적을 셩취ᄒᆞᆫ 후에 일본을 반항하려 ᄒᆞ엿스니 그전에는 내가 알지못ᄒᆞ고 일본을 친ᄒᆞ엿더니 지난 3년동안 일본놈들 속에 가셔 살아본즉 일본놈은 귀쳔을줄든하고 사괴일 수 업는 놈인줄도 알앗다 (박금란)철이나자 죽는고나 회개가 발셔 느즌 모양이다 (흑뎐)아이구! (구츄세)아이구! 머리 몹시 압흐다 여보시오 김부인 살녀쥬시오 물 한그릇쥬시오 (박금란)우리 대감 죽일 때에......, 아이구 나무아미타불 (구츄세, 흑뎐)나무아미타불 -ᄭᅳᆺ -「피의잔」3회 결말 부분(1930. 9) ”   「피의잔」은 총 6회 가운데 3회(1930. 6)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결말이 보존되어 전체적인 구성을 파악할 수는 있다. 「피의잔」의 두 번째 무대는 경상감영 내의 별당이다. 위 인용문(결말)은 별당 내에서 독이 든 잔을 나누어 마신 세 사람이 등장한다. 왜장 흑뎐과 왜의 앞잡이가 된 과거의 연인 구츄세는 금란이 건넨 금잔이 독(毒)잔인 줄도 모르고 마시며, 그릇된 세상을 회의(懷疑)하면서 마침내 여승이 된 금란은 독이 든 ‘피의 잔’을 두 사람에게 건네어 세 사람 모두 죽음에 이르는 파국이 결말을 통해 드러난다.   희곡「피의잔」은 비록 멀고 먼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온 이민자의 신분이지만 일제 침략을 묵인할 수는 없으며 더욱이 맞서 싸울 의지의 분출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독교 선교사의 근대 의식을 접하면서 차츰 기독교화되어간 하와이 이민자들의 종교 의식은 이민 사회 전체의 공감을 형성하기 위해 과거의 종교적 분위기를 부인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와이 이민 사회 뒤편에 내재된 고국을 향한 애정과 정신적인 지원(독립운동)은 희곡 작품을 통해 구체적인 결집의 방향성을 드러내면서 나타나고 있다. 4   《태평양잡지》에 실린 문학작품의 특징들이 말하고 있듯 자신이 처한 이민자의 입장으로 표출되는 자기 경험이 공동체 경험과 맞물려서 역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하고도 절실한 하와이 이민문학이 지닌 소통의 방식으로 여겨진다. 하와이 이주를 통해 가치 전환의 장소 이동이 ‘이민’이라면 ‘이민문학’은 구세계를 버리고 신세계로 이동하여 환경적, 사회적, 정신적인 모색을 내면화하고, 타자의 문학(번역문학)을 우선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태평양잡지》에 게재된 문학 장르는 번역소설, 연재소설, 단편소설, 시, 창가, 노래 가사(노래시), 희곡 등 매우 다양하며 공동체 지향적이다. 하와이 이민문학은 다양한 문학 장르를 모두 수용하여 활용한 측면이 있으며, 공동체의 결집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 처한 고국에게 동포애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경우는 연애와 모험, 종교를 부각하여 식민지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다소나마 극복하려는 내용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현순은 5년간 하와이에서 통역관으로 체류한 자기 경험을 「포와유람기」(1909)로, 육정수는 「송뢰금」(1911)으로 하와이로의 이주 과정을 반영하여 변화하는 사회상을 소설을 통해 육화시켰다. 특히 육정수는 하와이 이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소설을 통해 드러내어 1세대 이민자의 세계관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개인의 활동에 비견하면, 《태평양잡지》에 게재된 소설은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보편적 연애를 토대로 한 이국적인 모험과 종교가 적용된 이야기를 선취했다. 번안소설을 통해 우선적으로 한인 사회가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여 소통하고 점차 개선되길 바란 의도가 엿보인다. 이처럼 《태평양잡지》의 소설들은 이민 사회에서의 분열을 타파하고 공동의 정서를 환기하여 보편적 대상으로서의 이야기를 모색한 점이 당시 이민문학의 면면이라 할 수 있다. 시의 경우는 정서적 결집의 방편으로 혹은 사회적 선동과 추진을 기획하려는 대상으로 시가 선택되었다. 창가는 사회적 궐기와 참여를 이끌려는 것이었고, 노래시는 곡조에 맞추어 부름으로써 집단의 목표를 주지하고자 선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희곡의 경우는 단 한 편이지만 이민 사회의 보다 구체적인 정치성, 현장성을 잘 드러낸다. 희곡 「피의잔」은 독립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연애의 삼각관계를 통해 표출하되 그 이면에는 조국애와 자주독립의 염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하와이 이주민이 겪은 식민지인의 실향 의식은 《태평양잡지》의 문예란을 통해 귀향의 욕망은 일시적으로 잠재우고, 이민자들 간의 다양한 협력을 모색하여, 낯선 장소에서 새롭게 이민 사회를 결집하며 추구해 나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자료 1) 이 글은 두 편의 졸고 『일제강점기 《태평양잡지》에 반영된 이민문학』, 《인문사회21》 제10권5호, 아시아문화학술원, 2019과 『가치전환으로서의 장소이동과 이민문학의 메타모포시스-하와이 《태평양잡지》를 중심으로』, 《국제한인문학연구》 제25호, 국제한인문학회, 2019를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feature_detail .letter_contents_wrap p{word-break: auto-phrase;} .table-wrap{margin-bottom:30px;} .table-wrap table{width:100%;border-collapse: collapse;} .table-wrap table th{padding:0 10px;height:3rem;background-color:#eee;} .table-wrap table td{padding:0 10px;height:3rem} .table-wrap table th, .table-wrap table td{border:1px solid #555;} .table-wrap table td:nth-child(1){text-align:center;} .table-col--01{width:5%} .table-col--02{width:10%} .table-col--03{width:14%} .table-col--04{width:28%} .table-col--05{width:auto}

너머의 새 글

너머의 한 문장

아무리 손바닥을 들여다보아도 손금이 눈에 익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손금 보듯 안다고들 하는지도 몰랐다. 돌아서면 까먹을 남의 일일 테니.

손금 「 손홍규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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