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5호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경계 넘기
오태영
▲ ⓒ 연합뉴스
21세기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개념은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화’라고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다채롭게 쓰이고 있다. 특히 세계화에 이은 전 지구화 흐름 속에서 근대 세계 체제의 성립 이후 발생한 인구의 이동과 정착, 그들의 문화적 실천을 포착하고 설명하기 위해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자가 증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의 추방과 이산을 가리키는 특수하고 제한된 용법으로 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희생자(victim) 디아스포라에 노동(labour), 제국(imperial), 무역(trade), 탈영토화(deterritorialized) 등 디아스포라의 하위 범주가 추가되면서 디아스포라는 시기적으로는 기원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국민국가와 지역 질서, 세계 체제가 연동하는 가운데 공간 질서의 재편과 이동, 주체의 정체성 구축과 사회적 연대, 그리고 문화적 실천들을 설명하기 위한 술어로서 디아스포라가 쓰이는 것은 이제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아르준 아파두라이가 「고삐 풀린 현대성」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넘어 “지구 전체에 퍼져 있는 사람들과 집단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으로 상황 지어진 상상력들에 의해 구성된 복수의 세계들을 구성”하기 위해 ‘-스케이프(-scapes)’ 개념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설명한 전 지구화 이후 세계를 포착하고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제시되었지만, 디아스포라 개념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개념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아스포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로서의 지금-여기의 글로컬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다. 로빈 코헨이 「글로벌 디아스포라」에서 제시한 바에 따르면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본래의 고향으로부터의 이산, 종종 트라우마에서 비롯. (2) 일자리, 사업, 식민주의 야망의 확장. (3) 본국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신화. (4) 조국의 이상화. (5) 귀환 운동 혹은 본국과의 지속적인 유대 관계. (6) 오랫동안 지속되는 민족성에 대한 강한 의식. (7) 거주국과의 불편한 관계. (8)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동족과 책임 의식 공유. (9) 거주국이 관용적일 경우 창의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가능성. 물론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의 공통된 특성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 개인과 집단, 그들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으로 분기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통된 특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디아스포라가 이산(離散) 이후의 정체성 구축 및 삶의 조건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디아스포라 개념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에서 1945년 해방 이전까지의 제국-식민지 체제기 체제 변동과 사회 구조의 재편 과정에서 그 위상에 심대한 변화를 겪은 한국(인, 문화)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디아스포라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선취한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의 길을 걸으면서 동아시아 각 지역과 국가를 식민지로 개척·경영했고, 그를 통해 기존의 한자 문화권과 조공-책봉 체제에 묶여 있었던 동아시아 지역 질서가 재편되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때를 같이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진출 및 후발 제국으로서 일본의 지리적·문화적 팽창 과정에서 근대 한국(인, 문화)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상에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제국-식민지 체제기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상호 연루되어 있으면서도 구조적인 차별이 발생한 가운데 한반도를 살아가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제국 일본의 국민이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체제 변동과 사회 구조의 재편 과정에 조응해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이동은 범박하게 말해 제국주의적 질서 속에서 마련된 이동의 문법과 장치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위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구축된 제국주의적 통치 질서에 의해 한반도를 둘러싼/관통한 정치적·경제적 경계들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삶의 조건들로 작동하면서 탈향과 상경, 이주와 정착을 추동했고, ‘뿌리 뽑힌 자’들의 이산과 이후 벌거벗은 신체들로서의 삶을 낳았다. 따라서 근대 한국인과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디아스포라 개념을 적용한다고 했을 때, 무엇보다 그것은 제국-식민지 체제의 지배/피지배, 경영/수탈, 이주/정착, 억압/저항의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제국-식민지 체제기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발생과 관련해서는 여러 정치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대체로 그것은 제국 일본의 식민화의 결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국의 식민지 개척의 역사가 그러하듯, 20세기 초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조선총독부를 통해 이원화된 통치 체제를 구축했고, 내지/외지의 이원화된 통치성을 발현하기 위한 각종 정책과 제도의 시행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과 조선의 자원들이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동을 수탈이나 동원 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지배/피지배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근대 한국(인)을 위치시키는 것인데, 무엇보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통치 권력이 작동하는 데에는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제국적 주체’들의 움직임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염상섭의 「만세전」이다.
염상섭의 「만세전」은 전근대적 질서와 가치로부터 벗어나 근대적 개인으로서 자기를 구축해 가는 식민지 조선인 청년이 문명/야만=제국/식민지의 위계화된 위상이 구축되어 가는 가운데 야만의 식민지에서 문명의 제국으로 향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동 과정 중 식민지인으로서의 자기와 조우하고 식민지적 현실에 대해 자각하는 장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 목욕탕에 들어간 이인화는 일본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면서 식민지 조선인들이 내지 일본의 곳곳으로 팔려가는 상황을 알게 된다. 일본인 브로커가 순사나 헌병의 지원 속에 조선의 농촌으로 들어가 가난한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 내지의 공장이나 광산 노동자로 모집하고, 그들의 취업을 알선해 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상황을 들은 이인화는 식민지 조선인의 인신매매의 참상을 알게 된다. “가련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으로 몸이 팔려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인화는 애써 외면해 왔던 식민지 조선인의 현실을 목도하는 것이다.
「만세전」의 이 장면을 통해 제국-식민지 체제기 식민지 조선인들이 동아시아 각 지역으로 이산하는 데 있어 제국주의적 통치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고 있었던 각종 브로커들의 교활한 술책이 만연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내지 일본을 비롯해 동아시아 곳곳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장밋빛 전망이 좌절되고 척박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생존 그 자체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신체들로 전락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세전」의 서사에 나타난 것처럼, 제국 일본인 브로커들에게 식민지 조선인들은 타이완의 생번(生蕃)과 마찬가지로 야만적인 존재로 멸시되고, 공장과 광산의 하층민 노동자인 ‘조선 쿠리(苦力)’로서 위치 지어졌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재일 조선인 노동자와 재만 조선인 개척 농민으로 표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사량의 「무궁일가」는 일본 도쿄의 빈민촌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서사화하고 있다. 이 소설은 각각 꿈과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했던 조선인들이 자신들만의 생활 공간에 안착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유리걸식하는 과정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시 통제 경제 정책이라는 제국주의적 권력뿐만 아니라 재일 조선인 사회 내부에서 같은 조선인들을 착취하는 조선인의 존재를 상기시키면서 이중의 소외 상태 속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조선인 하층민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로서 그들은 “발돋움을 해서라도 뛰어오르려고 뛰어오르려고 할 때, 적어도 자신들은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깊이 진창 속으로 발을 딛기만 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사량의 「무궁일가」는 재일 조선인 하층민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서사화하면서 그들이 정착·안주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떠돌게 될 것임을, 자신들의 극빈한 처지를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안수길의 「새벽」은 만주 이주 개척 농민의 척박한 삶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소설은 만주 이주 조선인 농민들이 식민지 조선의 지주-소작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빚을 갚지 못해 몰락해 가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 준다. 마름 격에 해당하는 지팡주는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로 젊은 여성을 요구하고, 이에 무기력한 가부장은 아내나 딸을 교환 가치의 대상으로 거래한다. 물론 이는 극빈한 상황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가족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새벽」에서도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지팡주 박치만이 공권력을 악용해 가난한 농부의 딸을 빼앗아 가려 하고, 그러한 박치만의 첩이 될 수 없었던 딸이 자살하는 것으로 서사가 종결된다. “이런 되놈 땅에 끄을구 와서 죽을 고상 다아 시키다가 나중에는 딸까지 팔아먹겠소”라며 절규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 일가가 만주 이주 이후 경제적 착취의 굴레 속에서 삶을 이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김사량의 「무궁일가」에 나타난 재일 조선인 노동자와 안수길의 「새벽」에 나타난 재만 조선인 농민들의 모습을 가지고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표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식민지 조선의 고향을 떠나 일본과 만주로 이주했고, 이주 이후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극심한 노동 앞에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생존을 위한 척박한 삶이 결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제국-식민지 체제기 배제되고 소외된 조선인 하층민이 어떻게 유민으로서 전락해 제국의 권역을 떠돌고 있는가, 거기에 식민주의적 착취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만세전」에서의 ‘조선 쿠리’를 떠올리게 한다.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표상은 이처럼 재일 조선인 하층민 노동자와 재만 조선인 개척 농민의 처절한 삶과 그 현장으로 대표되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의 패전과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기존 제국-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낳았다. 제국의 해체와 식민지의 해방은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재구축을 추동했고, 식민지 조선 또한 한반도의 경계를 재구획하면서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미소군의 38선 분할과 남/북한 진주 및 점령, 군정 체제에 의한 신탁통치, 그리고 1948년 단독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통일 민족국가 건설은 좌절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민족국가 건설의 담론이 넘쳐나고 각종 정치 세력이 등장하여 헤게모니 쟁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과거 식민의 체험과 기억을 청산하기 위한 탈식민화의 움직임이 전개되었지만, 군정 체제에 뒤이은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 남한 사회의 좌/우익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충돌 과정 속에서 새로운 경계들이 만들어지고 중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계들은 다시금 사람들을 포섭/배제하는 생명 정치의 테크놀로지를 작동시켰다.
해방을 맞아 과거 제국-식민지 체제기 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이산되었던 식민지 조선인들은 귀환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해방 조선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주체로서 새롭게 자기를 정립하기 위해 지리적·심리적 귀환을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귀환의 과정에서 허준의 「잔등」 속의 인물들처럼 과거 식민의 체험과 기억을 청산하는 제의의 과정을 수행했다. 해방 조선의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과거의 자기와 기꺼이 결별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의의 과정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식민지 체제기 식민지 조선을 떠나 내지 일본이나 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이산했던 조선인들은 제국의 통치역(統治域) 속에서는 신민으로서의 책무를 강제받았지만, 개별 삶의 장소에서는 제국의 신민이자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동요를 겪으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제국-식민지 체제기 동아시아 각 지역으로 산포한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은 해방이라는 사건을 통해 단일하고 통합된 조선인으로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해방을 맞아 한반도로 귀환한 자들 못지않게 소위 조국과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자들, 즉 잔류를 선택한 자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 조선의 입장에서 그들은 민족국가 경계 내부로 들어오지 않은 자들로 배제되어 비가시적 존재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관통한 체제 변동과 사회 구조의 재편 과정에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자들, 간난신고 끝에 이주지에 정착하고 새로운 삶의 토대를 마련해 결코 떠나올 수 없는 자들, 죽음을 무릅쓰고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재민’으로 낙인찍혀 한반도 내부에서 또다시 배제되고 소외된 상태 속에 놓인 자들을 떠올렸을 때, 미귀환자들은 민족의 배반자나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비-국민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해방 이후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회성의 「백년 동안의 나그네」는 1947년 사할린을 탈출한 조선인들이 하리오 섬 수용소를 거쳐 부산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오르는 과정을 서사화하고 있다. 1921년 함경남도 고향 마을을 떠나 일본 곳곳을 전전하다 사할린에 흘러든 박봉석과 16세 때 정신대로 징집되어 오사카 공장과 사할인 탄광촌 포주집을 거친 김춘선, 20여 년 전 먹고살기 위해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고 일본에 도착해 떠돌다 마쓰코를 만나 가정을 꾸린 유근재, 탄광 노무반장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학대하던 이재길 등 그들은 대체로 “먹고살 수가 없으니까 거기까지 흘러 들어간” 자들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무국적자가 된 그들은 전후 일본 사회의 책임 회피와 해방 조선의 망각, 그리고 냉전적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이용한 소련과 미국으로부터 내버려진 존재들이었다. 하리오 섬 수용소에 도착한 그들은 해방 조선의 상황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38선 봉쇄와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주택난과 물가 앙등 등 해방 조선의 정치경제적 혼란은 그들의 귀향 열망을 좌절시켰는데, 무엇보다 거기에는 귀환 이후 또다시 조선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자로서 해방 조선의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해서 전후 일본 사회에 그들의 자리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 어느 곳에서도 자기만의 자리를 점유하고 정착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귀환을 멈추고 잔류를 선택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일본인 처와 사할린 태생의 조선인 2세들이 배제되고 소외된 상태에 놓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대로 일본에 남아야 하는가 이 일본 어디가 좋아서 이 땅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는가. 또다시 이 객지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쳐도, 이 나라는 우리의 고뇌를 얼마나 이해해줄 것인가. (……) 또다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앞으로는 재일(在日) 조선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박봉석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재일’은 제국의 해체와 식민지의 해방, 동아시아 냉전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새롭게 창출된 인간 존재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흘러가는 삶을 증거한다.
한편, 염상섭의 「해방의 아들」은 해방 이후 재만 조선인의 귀환 과정을 서사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조준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적(日本籍)인 외조부의 민적에 이름을 올려 일본인 마쓰노로 행세해 오고 있었다. 일본인 처와 결혼해 만주 안동에서 해방을 맞았던 그는 그동안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생활을 영위해 오고 있었는데, 해방을 맞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성을 되찾고자 한다. 또한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고자 하지만 원자탄 피폭 이후 상황을 알 수 없어 조선에 정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일본인 마쓰노로 행세했던 그는 조선인회로부터 국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해방과 동시에 그는 “조선 사람 편에서 미워할 것은 물론이요 일본인 측에서 탐탁히 여겨주지 않고 만인(滿人)도 좋아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홍규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지만, 신의주에서 처자식과 재회한 뒤 일본인들이 집단생활을 하던 곳으로 쫓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다시 냉대를 받고,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그때 홍규가 태극기를 건네주면서 어디에서든 가족이 함께 살라고 격려하자 조준식은 태극기를 받고 보니 정말로 조선에 돌아온 것 같고 분명히 조선인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주에서 일본인으로 행세했던 조선인이 해방을 맞아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를 탈각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자기를 손쉽게 재정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 처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일본적에 입적해 일본인으로서 만주에서 살았던 그가 조선(인)으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인이었다가 일본인이 되었지만, 해방을 맞아 다시금 조선인이 되고자 하는 그는 전후 일본에서도 해방 조선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태극기를 통한 민족의식의 각성이라는 제의를 거친다고 해서 그가 남한 사회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요원한 일이다.
해방이라는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로 하여금 민족국가 경계 내부로의 이동 가능성을 마련하지만, 기실 그러한 민족국가는 바로 그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을 배제하는 것을 통해 성립 가능한 것이었다. 제국의 패전과 식민지의 해방, 제국-식민지 체제의 붕괴는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에게 조국과 고향에 대한 강한 동경과 귀향 의식을 낳았지만, 해방 조선에 그들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전과 해방이라는 사건이 역설적으로 다시금 그들의 유동성을 강화하고, 제국-식민지 체제기 간난신고 끝에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던 그들은 지속적으로 뿌리뽑힌 존재로서 정처 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탈식민-냉전 체제 형성기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경계 구획이 포섭/배제의 생명 정치를 작동하면서 그들을 기민으로 전락시키는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해방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거쳐 한국전쟁을 지나오면서 남한 사회에서는 냉전-분단 체제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켰고, 대략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사독재 정권의 통치 질서 속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을 망각해 왔다. 그들은 남한의 정치·경제·문화의 각 영역에서 비가시적 상태 속에 은폐되면서 존재성 그 자체를 부인당해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남북한 체제 경쟁 과정에서 북조선 귀국 사업에 대항하기 위해 재일 조선인들을 ‘재일 교포’로 호명하여 모국 방문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도구로서 그들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군사독재 정권이 간첩 조작 사건을 획책할 때 재일 조선인 유학생을 대표적인 타깃으로 삼았던 것을 상기한다면, 당시 남한 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이 어떻게 인식되고 위치 지어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재만 조선인의 후예 격에 해당하는 ‘조선족’에 대한 인식 속에서도 일정 부분 반복되고 있다. 경제적 우월감에 빠져 그들을 천대하는 태도는 속물주의의 전형을 보여 줄 따름이다.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에 대한 인식과 감각은 대체로 민족주의에 기초해 왔다. 그때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통치성의 일환으로 작동한 반공주의와 결합한 폐쇄적 민족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방 이후 남한 사회로 돌아오지 않고, 국외에 잔류하여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반민족적 존재들로 멸시되면서 민족적 주체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타자로서 위치 지어졌다. 그렇지 않다면, 동일한 논리 아래 시혜적 행위자의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인을 위한 대상으로 위치 지어졌다. 천대/환대를 불문하고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은 남한 사회의 국민(민족)들의 자기 정체성 구축 과정에서 다시금 배제되고 소외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동포’로서 환대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시민으로서의 윤리성을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하고자 하는 자의 권력에 대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줄 뿐이다.
따라서 디아스포라는 환대와 천대의 ‘대상’이 아니다. 나아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그것이 탈냉전-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민족적 주체의 자기 확장의 욕망에 다름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와야 한다. 제국-식민지 체제기 이래 무수히 많은 경계를 넘고, 체제의 질서와 문법으로부터 미끄러져 갔으며, 단일하고 통합된 사회와 문화 속에서도 혼종적인 상태 속에 놓여 있었던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을 통해 근대 이후 한국인들이 ‘우리’라는 경계 속에 안착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배제해 왔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21세기 세계 시민의 윤리적 감각을 내세우면서도 여전히 디아스포라들을 마이너리티로 규정해 메이저리티의 입장에 서고자 하는 우리 자신을 내파하기 위해서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해야 한다. 요컨대 디아스포라를 보는 위치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보이는 위치에 우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당연시했던 근대 이후 한국(남한 사회)을 둘러싼/관통한 경계들이 의심과 회의의 대상이 되고,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의 월경이 ‘빛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같은 대학 다르마칼리지 조교수를 거쳐 현재 WISE캠퍼스 웹문예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에 『오이디푸스의 눈: 식민지 조선문학과 동아시아의 지리적 상상』, 『팰럼시스트 위의 흔적들: 식민지 조선문학과 해방기 민족문학의 지층들』, 『잔여와 잉여: 근현대소설의 공간 재편과 이동』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해방과 혁명의 사이, 경계 구획과 월경의 상상력」, 「탈북 청년의 월경과 유럽 난민의 연대」, 「한국전쟁과 여성 포로 표상의 젠더 정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