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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현실, 그리고 서사에 나타나고 있는 디아스포라 지형의 변화

손정수

▲ ⓒ iStock 1. 디아스포라 개념의 역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1)를 통해 기사를 검색해 보면, 한국의 신문에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70년이다. 그때 이 용어는 “다시 로마에 점령되어 2천여 년의 디아스포라(離散)에서 차별, 학대, 추방, 학살로 3분의 1이나 되는 종족을 살해당하면서 싹튼 2세기의 엑소더스, 시온 귀환주의 운동에서 맨 처음 입식(入植)한 곳도 공교롭게 이곳 사해변(死海邊)의 예리코 계곡이었다”2)에서 보듯 유대인의 이산 상황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에 가까운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로도 이런 맥락에 한정되어 간헐적으로 등장하다가 1990년대에 접어들면 그와 유사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보통명사의 용법이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국 내에는 플로리다를 비롯해서 도처에 쿠바 사람들의 ‘디아스포라’(해외 집단 이주지)가 있고 이들이 쿠바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3)와 같은 대목이나 “올 12월 촬영 예정으로 기획 중인 극영화 (감독 김관영). 이 영화는 스탈린에 의해 타슈켄트로 강제 이주한 뒤 ‘디아스포라’(고국을 멀리 떠난 정착민)의 상태에서 겪어야 했던 고난의 역사를……”4), 혹은 “『내 고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일제 치하의 고난에 찬 항일 운동,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온 강 씨의 5대에 걸친 가족사로서, 미국 내 한국계 디아스포라(이민 집단)의 역사라 할 만하다”5) 같은 대목에서 디아스포라 개념이 유대인, 이스라엘 등에 연관되어 사용되던 상황을 벗어나 모국을 떠나 이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확장된 용례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빅카인즈 6)의 1990년 이후의 기사 검색을 통해 디아스포라 개념의 빈도를 살펴보면, 1990년대에는 한 자릿수 정도로 등장하던 이 개념이 2000년대로 들어서면 두 자리로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에는 세 자릿수의 빈도로 급증하는 현상을 다음 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빅카인즈 검색 연도별 디아스포라 개념 빈도(1990-2023).    이 무렵에 이르면 디아스포라 개념이 성립된 애초의 맥락보다 현대적 이산의 상황을 지칭하는 전용된 개념이 오히려 중심이 되는 일종의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가운데 개념적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    디아스포라=이산인·이방인 등으로 풀이되는 디아스포라(diaspora)에 관심이 집중된 한 해였다. 문화적·학술적 접근이 주를 이뤘다. 디아스포라는 나라 민족 인종들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리듯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다. 올해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연해주 지역에 살던 한민족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 안팎에서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제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잇달았다. 학술대회의 분야도 다양해 경제 문화 역사 등의 영역에 고루 걸쳤다. 국제신문은 ‘이방인-디아스포라의 안과 밖’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이제 시작하는 단계이며 앞으로 더욱 깊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다. 7) ”    위의 인용에서 2007년에 이르면 디아스포라 개념이 문화, 학술 영역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렵 디아스포라라는 용어가 해외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한인들(‘한민족’)을 지시하는 상황과 매우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는 상황도 확인할 수 있다. 2. 디아스포라에 대한 비평적 논의의 과정    여러 문예지에서 디아스포라 혹은 다문화주의를 주제로 한 특집을 기획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고, 필자의 「디아스포라에 의한, 디아스포라를 위한,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문학들》, 2006년 가을호) 역시 그와 같은 흐름에서 ‘경계, 경계에 선, 경계를 넘는 문학’이라는 특집의 일부로서 발표된 것이었다. 그 글을 쓰던 당시의 시점에서 재외 한인은 664만 명(외교통상부, 『2005 외교백서』, 2005. 9, 2004년 12월 31일 기준)으로 그 숫자는 그 시점의 남한 인구 4728만 명(통계청, 「2005 인구 주택 총조사 전수(인구 부문) 집계 결과」, 2006. 5 참조)의 7분의 1에 해당됐다. 한편 국내 거주 외국인 수는 53만 7천 명(행정자치부, 「국내거주 외국인 실태조사 결과」, 2006. 5 참조)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통계 수치는 우리 역시 민족이나 국민국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의 한국 문학에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게 된 배경 또한 그와 같은 현실적 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글의 제목은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소설을 주체, 대상, 의식의 측면에서 정리하는 구도를 드러내고 있다. 8) 우선 (1) ‘디아스포라에 의한 글쓰기’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 이주한 한인들, 그러니까 스스로가 디아스포라인 주체에 의해 추구된 소설적 시도를 지칭하는 범주였다.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들과 그들의 글쓰기의 존재는 ‘디아스포라’ 개념과 함께 새롭게 발견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의해 강용흘, 김용익, 김은국, 김난영, 캐시 송, 노라 옥자 켈러, 이창래, 차학경, 수잔 최, 수키 김(재미 한인 문학), 김사량, 장혁주, 김달수, 김석범, 이회성, 김학영, 양석일, 이기승, 이양지, 유미리, 현월(재일 조선인 문학), 김창걸, 김학철(재만 조선족 문학), 율리 김, 아나톨리 김(재러 고려인 문학) 등의 존재와 그들의 작품 세계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2) ‘디아스포라를 위한 글쓰기’에서는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인식, 실천을 목적으로 삼았던 한국 소설의 양상을 ‘역사 속의 디아스포라’와 ‘현실 속의 디아스포라’로 나눠 살폈다. (2-1) 한국 소설에서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수립 이전에는 주로 유이민들, 징용자들, 강제 이주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국민국가의 수립 과정에서 한반도 바깥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들로 그 초기에는 멕시코에 이주한 노동자들이 등장하는 김영하의 『검은 꽃』(2003), 프랑스 공사와 결혼하여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한반도 바깥을 경험한 궁중 무희 출신 여성을 모티프로 한 김탁환의 『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2006), 신경숙의 『리진』(2007) 등이 논의되었고, 식민지 시기를 배경으로 한 김연수의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2003)와 『밤은 노래한다』(2005)가 그 뒤에 놓였다. 한편 그렇게 시작된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남긴 현실을 다룬 김연수의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2004)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2007), 구효서의 「승경」(2006), 허혜란의 「내 아버지는 서울에 계십니다」(2004)와 「아냐」(2004),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2005), 전성태의 『여자 이발사』(2005) 등이 이 부분에서 함께 다뤄졌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국가 정책이나 망명, 이민, 입양 등의 동기에 의한 이주가 우세한 양상으로 변화했다. 국민국가의 장벽이 어느 때보다 높았던 그 시절 국외로의 이주는 1960년대 정책적으로 독일에 파견된 광부, 간호사들, 1970년대 중동으로 파견된 건설 노동자들, 역시 저개발의 소산인 해외입양아들, 그리고 망명객들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김원일의 「오마니별」(2005)의 입양아, 공지영의 『별들의 들판』(2004)과 구효서의 「자유 시베리아」(2004)에 등장하는 망명객들, 조선희의 「햇빛 찬란한 나날」(2005), 신경숙의 「성문 앞 보리수」(2005)의 유학생들, 박완서의 「후남아, 밥 먹어라」(2003), 전성태의 「늑대」(2006), 김서령의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2006) 등에 등장하는 이민자들, 김숨의 「트럭」(2006)에 나오는 중동 파견 노동자들이 그 사례로서 언급되었다.    (2-2) 한편 ‘현실 속의 디아스포라’에서는 이주의 동기에서 이념성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소설의 시선이 망명객으로부터 이민자 디아스포라로 옮겨가기 시작하는 동시대 소설의 상황에 주목했다. 이방에서의 삶을 대상으로 하지만 이념성을 동기로 갖지 않은 다른 질감의 소설들이 이 시점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영선의 「휘바, 휘바」(2002)와 「고등어 통조림」(2004), 김윤영의 「집 없는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2004), 「타잔」(2005), 「세라」(2005), 「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2006), 정영문의 「브라운 부인」(2006), 해이수의 「우리 전통 무용단」(2003), 「어느 서늘한 하오의 빈집털이」(2005), 김서령의 「무화과잼 한 숟갈」(2006), 박정석의 「캐롤라이나 드림」(2006) 등에는 각국에 이주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들이,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2001)와 「정육점 여자」(2001),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2000) 등에는 프랑스와 미국 등 해외에 입양된 인물들이, 은희경의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2005)에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일시적인 이산 상태에 놓인 가족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민자 디아스포라와 입양, 혼혈인 디아스포라 등이 ‘타자 안의 우리’를 이루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우리 안의 타자’들이 있다. 고종석의 「피터 버갓 씨의 한국일기」(2001)와 「고요한 밤 거룩한 밤」(2004), 구효서의 「저녁이 아름다운 집」(2006), 이순원의 「미안해요, 호 아저씨」(2003), 박정윤의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2006), 이신조의 「거울 여자」(2000), 김재영의 「아홉 개의 푸른 쏘냐」(2005) 등에 등장하는 국제결혼 이주자들, 그리고 전성태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2005), 정도상의 「소소, 눈사람이 되다」(2006)와 「함흥·2001·안개」(2006)에 등장하는 탈북자들과 김원일의 「카타콤」(2006)에 등장하는 입북자, 이명랑의 『나의 이복형제들』(2004), 김재영의 「코끼리」(2004), 손홍규의 「이무기 사냥꾼」(2005), 공선옥의 『유랑가족』(2005)과 「명랑한 밤길」(2005), 이혜경의 「물 한 모금」(2003), 강영숙의 「갈색 눈물방울」(2004) 등에 등장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3) ‘디아스포라의 글쓰기’에서는 디아스포라 의식에 기반하여 소설적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로 전성태(월경자의 시선), 배수아(이방인의 시선), 오수연(연대자의 시선), 김연수(방랑자의 시선) 등의 소설을 좀 더 집중적으로 살폈다.    이처럼 2000년대 중반 한국 소설에서 디아스포라와 연관된 글쓰기가 급증하면서, 그 뒤에는 데리다, 레비나스, 바디우 등의 논의를 바탕으로 ‘타자’, ‘윤리’, ‘환대’ 등의 개념을 중심에 둔 좀 더 복잡하고 심층적인 비평의 맥락이 형성되었다. 대체로 이 논의들은 그와 같은 경향의 소설들이 한국에서의 이주민들의 삶의 현실과 그 문제점을 일깨우고 타자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를 환기시킨다는 점을 의미화하면서 디아스포라 글쓰기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그 논의들 가운데에는 소설에 나타난 다문화주의의 양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고, 다문화주의 자체의 한계를 밝히는 지젝(『까다로운 주체』), 웬디 브라운(『관용』) 등의 저작이 번역, 소개되면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다문화주의에 내포된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이런 입장은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둘러싸고 결코 단순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될 이후의 현실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3. 현실, 그리고 서사에 나타나고 있는 디아스포라 지형의 변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재외 한인은 7,493,587명(외교부, 『2021 외교백서』, 2019년 기준)으로 그 비중은 더 늘어났다. 국내 거주 외국인 또한 한때 2,216,612명(행정안전부, 「2019 지방자치단체 외국인주민 현황」, 2019. 11. 1 기준)으로 총인구 대비 4.3퍼센트에 이르렀다가, 코로나19 여파를 통과하면서 현재는 1,752,346명(통계청, 「2022년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 전수조사결과(전국편)」, 2023. 10. 31 발행, 2022. 11. 1 기준)으로 집계되는 상황이다. 2000년대 중반에 비해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의 수도,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의 수도 각각 백만 명가량 증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디아스포라의 존재 상황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에서는 이전에 발표한 글의 구도를 이어 그동안 현실과 서사에서 일어난 디아스포라 지형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디아스포라의 글쓰기    우선 디아스포라 주체의 글쓰기 영역은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측면에 대해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2015)가 2016년 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는 사건을 계기로 한국 소설의 번역 현황과 현지 수용의 문제를 살피는 글을 앞서 쓴 바 있다. 「『The Vegetarian』 이후 한국소설의 번역과 현지 수용의 현황과 문제들」(《문학사상》, 2017년 9월호)의 한 대목에서는 특히 그 당시 재미 한인 작가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었다. “    2016년 3월에는 한국계 미국인 가정의 갈등을 그린 정 윤(Jung Yun)의 Shelter, 8월에는 탈북자가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크리스 리(Krys Lee)의 How I Became a North Korean이 출간되었고, 2017년에 들어서는 2월에 식민지 조선과 해방 이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민진(Min Jin Lee)의 『파친코(Pachinko)』와 1970년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유진 그레이스 부에르츠(Yoojin Grace Wuertz)의 Everything Belongs to Us가, 5월에는 1985년 서울과 필라델피아를 배경으로 한 지민 한(Jimin Han)의 A Small Revolution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그리고 조만간 출간을 앞두고 있는 크리스틴 형옥 리(Christine Hyung-Oak Lee)의 The Golem of Seoul 또한 제목을 두고 생각해 보건대 작가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문화적인 충돌과 융합의 경험을 서사화한 이 한국계 미국인 소설들의 계열에 속하리라 짐작된다. 9) ”    이때 이미 새로운 세대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등장이 하나의 현상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이민진의 『파친코』는 OTT 매체를 통해 드라마로 각색되어 전 세계에 상영되면서 국내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이후 “예술가가 된 딸의 시선으로 1세대 이민자인 어머니의 삶을 되짚는 이야기” 10)로 말해질 수 있는 미셸 자우너의 에세이가 《뉴요커(The New Yorker)》에 연재되고 또 단행본 『H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2021)로 출간되어 큰 반향을 얻었던 일을 비롯하여 재미 한인 작가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진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디아스포라에 의한 글쓰기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기사에서는 “심청전 같은 고전을 각색하거나 조선․일제강점기 등을 배경으로 작품을 쓰는 추세가 생겼다” 11)면서 한국계 미국인, 캐나다인 작가의 소설에 한국의 고전과 역사가 모티프로 차용되고 있는 최근의 사례를 다뤘다. 심청전을 다시 쓴 로맨스 판타지인 악시 오의 『바다에 빠진 소녀(The Girl Who Fell Beneath the Sea)』(2022),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허주은(June Hur)의 『뼈의 침묵(The Silence of Bones)』(2020), 『사라진 소녀들의 숲(The Forest of Stolen Girls)』(2021), 『붉은 궁(Red Palace)』(2022),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2021) 등이 그와 같은 대표적 사례로 소개되었다.    소설뿐만 아니라 동화와 SF 등의 장르에서도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한국의 설화가 모티프로 차용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태 켈러(Tae Keller)의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When You Trap a Tiger)』(2020)과 이윤하의 『호랑이가 눈뜰 때(Rick Riordan Presents Tiger Honor a Thousand Worlds Novel)』(2022) 두 작품에는 공교롭게도 공통적으로 호랑이가 등장한다. 한국 할머니의 이야기 속 호랑이가 손녀 릴리 앞에 나타나거나(『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천 개의 세계’ 우주군 군인 세빈이 호랑이로 변신하는 종족의 후예로 설정되어 있다(『호랑이가 눈뜰 때』). 재미 한인 2세대 작가로 『종군 위안부(Comfort Woman)』(1997)를 쓴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의 딸이기도 한 태 켈러는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의 「작가의 말」에서 “할머니의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백인과 아시아인, 그리고 4분의 1의 한국인이 섞인 사람이 아니었다(When I listened to Halmoni, I wasn't part white, part Asian, one-quarter Korean, mixed)”12)고 적은 바 있다. 이 대목에서 (앞서 『H마트에서 울다』에서의 음식과 더불어) 이야기가 정체성의 중요한 매개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태 켈러는 4분의 1의 한국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창래의 『타국에서의 일 년(My Year Abroad)』(2021)의 주인공 틸러 바드먼은 한국인의 피가 8분의 1 섞여 있는 인물이다. 이런 비율에 따라 이야기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층은 점차 엷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되지만, 이런 상황은 다른 한편으로 주인공의 하와이, 마카오, 선전 등 ‘타국에서의 일 년’의 경험과 귀국 후 중국인 혼혈 밸과의 관계를 통해 디아스포라 문제의 외연을 민족적 경계 너머로 확장시키면서 보편적 지평을 도입하는 조건을 제공한다.    다른 기사에서는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주변인으로서의 소외감 등에 집중했던 소설은 이제 성장, 가족뿐만 아니라 사랑·성공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13)면서 디아스포라에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 보편적인 이야기로 넓어져 가는 해외 한인 문학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이 기사는 그 사례로 H. K. 초이(최현경)의 소설 『요크(Yolk)』(2021), 니콜 정의 『내가 알게 된 모든 것(All You Can Ever Know)』(2018),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2021) 등의 회고록 등을 소개하고 있다. 14) 미국 내의 한국계 이민자 가족으로부터 입양된 저자의 삶의 경험을 담고 있는 『내가 알게 된 모든 것』은 “인종이 다른 가족에 입양되어 자란 입양인의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게 증언함으로써, 그간 간과되어 온 인종적 차이라는 해외 입양의 본질적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15)는 「옮긴이의 말」의 한 대목에서 보듯 입양의 문제에 내포된 민족적 층위 이면의 지대를 드러내 보인다.    대학에서 사회학, 인류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가 한국전쟁 후 가족을 잃고 부산의 기지촌에서 미국 선원을 만나 미국으로 이주한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고하는 『전쟁 같은 맛』 또한 이민자 서사의 민족적 레퍼토리의 경계 너머의 보다 심층적인 문제와 대면하고 있는데, 그 동력을 “글을 쓰는 내내 어머니를 피해자로만 보길, 내 학문 분야의 규칙을 따르길, 이민자들이 미국에 빚을 지고 있으니 이에 감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또 가장 중요하게는, 다른 가족들이 수치스럽게 여겨 말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침묵을 지키길 거부했다. 나는 어머니를 한국 밖으로 몰아내 은둔생활을 하게 한 세력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16)라고 표명된 저자의 의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크』에서도 보편적인 이야기를 지향해 나가는 경향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리 이민자의 자식들은 항상 ‘내가 우리 위 세대의 가장 큰 꿈이라는 걸 생각해야 하잖아. 우리 부모님이 희생한 건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 분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나와 누나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삶의 터전을 바꾼 거 말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폭력적인 형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있거든. 자아도취 사이코패스인데 그저 장남인지 뭔지 하는 이유로 우린 눈감아 줘야 하지. 자기를 우선시하지 않고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집단주의 사고방식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가끔은 그만 좀 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 한 번씩은 선을 긋고 패턴을 깼으면 좋겠어.”    나는 그와 함께 등을 기댄다. 내 어깨에 그의 어깨가 닿아 온기가 전해진다. 17) ”    『요크』에서 한국인 부모를 둔 패트릭과 ‘나’(제인)의 대화이다. 주로 ‘나’와 언니(준)를 비롯한 같은 세대의 인물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성장담의 질감은 이전 세대 한국계 미국인 소설과는 다소 다르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처럼 디아스포라로서의 소외 의식이라는 기존의 전형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되는 경향 가운데에서도 작가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 밑바탕에 흔적을 드리우고 있다. 위의 인용에서도 그 점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개브리얼 제빈의 『내일 또 내일 또 내일(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2022)에서는 그것이 다소 다른 형태로 드러나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임 개발자 샘에게는 어머니 안나,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피자 가게(그곳에서 샘은 ‘동키콩’ 게임을 마음대로 했다)를 운영하는 할아버지 동현, 할머니 봉자가 있다. “    한인타운에서는 아무도 샘을 한국인으로 보지 않았다. 맨해튼에서는 아무도 샘을 백인으로 보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샘은 ‘백인 사촌’이었다. 뉴욕에서는 ‘중국인 꼬마’였다. 그래도 K타운에서 샘은 난생처음 자신이 한국인임을 실감했다. 아니 좀더 콕 집어 애기하자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게 꼭 부정적이거나 심지어 중립적인 사실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 깨달음이 샘에게 진지한 자의식을 심어주었다. 웃기게 생긴 혼혈 꼬마는 세상의 언저리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 존재할 수도 있었다. 18) ”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소설에서 샘이 한인타운에서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경험하는 일은 그의 정체성에 중요한 사건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작가의 이전 소설들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요소였다.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A Little Life)』(2015)에는 뉴욕을 배경으로 네 명의 게이가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지만, 그 인물들이 만나는 장소로 한국 바비큐 식당도 나오고 그들의 지인 가운데에는 “레즈비언 삼인조의 세 번째 멤버로,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오가며 늘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준비하는, 건장하고 감정적인 한국계 미국인” 19)인 이디 김(남성으로의 성전환을 계획 중이다)과 같은 인물도 있다. 이런 소설 속 상황은 저자에게 한국인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사회의 현실에 대응되는 이야기의 표면 아래에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디아스포라 의식이 그런 방식으로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처럼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양적으로 확대되면서 전형적인 디아스포라 서사로부터 벗어나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다층적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었거니와, 다른 한편에서는 디아스포라 의식의 심화라고 할 만한 경향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A Cruelty Special to Our Species)』(2018)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시를 중심으로 “‘나’의 지리적, 문화적, 개인적, 그리고 언어적으로 특수한 맥락과 현재적 경험에 대한 시들을 포함하며, 넓게는 유해한 남성성, 군국주의, 제국주의, 전쟁, 인종차별, 언어에 의한 고통을 다루고 있” 20)는 시집이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2020)에서 저자는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몸 안에 살면서 느끼는 나 자신의 상반된 감정을 가능하면 투명하게 풀어놓고자 한다”21)는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그 ‘상반된 감정’은 그녀가 모범 소수자에 대한 백인의 선입견과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 사이에 놓여 있는 미국 한인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양면으로부터의 압력을 받아내면서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는 한 아시안 미국인 여성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깊이 성찰하고 있다. “    나는 두순자가 사회봉사명령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난 것이 부끄럽다. 가게 직원들이 흑인이 물건을 훔칠 것으로 생각해서 그들을 따라다니고, 개업한 동네에서 주민들과 더 열심히 교류하려고 애쓰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 한인 사회에 존재하는 흑인에 대한 반감이 부끄럽다. 바로 그래서 아시아인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피해와 가해라는 표현도 실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22) ”    캐시 박 홍의 이와 같은 의식이 허구 형식으로 전환된 결과가 스테프 차(Steph Cha)의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Your House Will Pay)』(2019)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1991년 두순자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소설에서는 한정자 사건으로 치환되어 있으나 “소설이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이라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라타샤 할린스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23)라고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 사건에 28년에 걸쳐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 사이에서 해소되지 않고 이어진 갈등의 역사를 허구를 통해 제시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사이에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인종적 갈등의 관계를 탐색한 소설이다.    이처럼 시간적 추이에 따른 한국계 미국인 소설의 양적 증가는 보편화와 심층화의 경향을 교직하면서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소설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변화에 대응되는 한국계 일본인 소설의 사례를 가네시로 가즈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연구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에 접근하는 그의 태도에 대해 “이전 세대들이 재일 한국인의 입장에서 차별을 나타낸 반면 가네시로 가즈키는 그 범위를 벗어나서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차별’을 다루고 있다” 24)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런 태도는 일본 사회의 소수자 집단이 민족적으로 다양화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재일 한국인이 취할 수 있는 새로운 공존의 윤리를 모색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계 중국인 소설에서도 유사한 맥락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작품을 발표하여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2015)과 장편 『천진 시절』(2020)을 출간한 금희의 소설에 대해 “디아스포라 주체를 무의식적으로 타자나 이웃으로 상정하던 한국 문학에서 벗어나 그들을 현실 세계 속 주체로 그려낸다” 25)는 분석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금희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활과 그 속에서의 고민은 디아스포라라는 관념보다 부분적으로 한국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의 일상에 밀착되어 있어 이전의 전통적인 재만 조선족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실감을 준다.    한국계 러시아인 소설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한 논문에서는 소비에트 해체 이후 젊은 고려인 작가와 시인들의 창작 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고려인의 정체성에 거점을 두는 ‘고려인 문학’이 아닌, ‘문학하는 고려인’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 26)는 점에서 찾고 있다. 이런 특징을 보여 주는 사례로 박미하일의 『예올리』(원제는 ‘강을 따라가는 가벼운 여행(Лëгкое путешествие по реке)’으로 2007년 러시아 카타예프 문학상 수상작이다)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안드로이드 로봇 예올리가 등장하는 SF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박미하일의 다른 소설처럼 정체성에 대한 서사로서 집단 기억과 역사의 회복, 개인의 서사와 낭만적 꿈의 탐색, 되기(becoming)의 여정에 집중하는 점은 유사” 27) 하다는 분석에서 보듯 디아스포라의 존재 조건에 대한 탐색의 새로운 형태로 볼 수 있다. ‘나’와 예올리가 한국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소설의 결말 또한 이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입양을 매개로 주로 유럽 지역에서 성장한 세대에 의한 창작 활동도 확대된 상황이다. 한 논문은 이 상황에 대해 “그동안 미국이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입양된 한국 출신 작가들에 의해서 이미 다수의 소설과 시, 희곡이 발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8)면서 그 대표적 작가로 이미 우리에게 번역, 소개되어 있는 제인 정 트렌카(Jane Jeong Trenka)와 아스트리드 트롯찌(Astrid Trotzig), 그리고 브륀율프 융 티옌(Brynjulf Jung Tjønn, 정서수), 마야 리 랑그바드(Maja Lee Langvad) 등을 들고 있다.    이렇듯 디아스포라에 의한 글쓰기의 영역에서는 그 양적인 확대의 양상과 함께 다양성, 보편성의 경향을 띠는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향은 주제 의식의 심화와 맞물리면서 디아스포라 서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디아스포라의 주체, 그러니까 재외 한인 사회의 변화한 위상과 그 새로운 세대의 특성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디아스포라를 위한 글쓰기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한 한국 소설들의 최근 양상 역시 이전 글의 구도에 입각하여 ‘역사 속의 디아스포라’와 ‘현실 속의 디아스포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1) 역사 속의 디아스포라    새로운 세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역사적 사건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관점의 전환이 눈에 띈다. 가령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2016)는 옛 동독 지역의 도시에서 만난 한국과 베트남의 이주민 가정의 관계를 통해 그동안 피해자의 관점에서만 재현되던 베트남 전쟁에 가해자의 문제를 도입하고 있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2020)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하와이에서 노동자로, 또 이후 독일로 이주해서는 아시안 여성 예술가로 살았던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삶이 여성적 관점, 그리고 그 기대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도되어 있다.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2023)는 1960-197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파독 간호사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다. 그동안 연구의 영역에서는 “파독 간호여성에게는, 당시 한국의 일반적인 젊은 여성과도 차별화되는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가 덧씌워” 29)져 국가 주도의 개발담론에 의해 왜곡된 사실이 비판적으로 지적되면서, 개발 시기에 이주한 한인 여성들이 새로운 삶의 기회를 개척하고 생존을 책임지는 “주체로 살아간 이야기들, ‘민족’과 ‘성공’의 프레임 안에서는 포착될 수 없는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재조명” 30)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던 터였다. 이 소설은 그와 같은 기대에 대한 응답처럼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파독 간호사들의 삶을 소설화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런 의식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한 가지는 소설 속 “도서관에 틀어박혀 읽은 많은 자료 속에서 가장 빈번히 발견한 단어는 아마도 오래전 ‘윤리’가 강조했던 것처럼 ‘가난’이나 ‘희생’ ‘애국’ 같은 말일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소설을 써나가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과장해서 쓰긴 했지만, 독일로 이주했던 한인 간호 여성들을 ‘희생’이나 ‘애국’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해서 바라보지 않으려 한 최신 연구 자료들을 장편소설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발견했다. 31) ”    한 대담에서 작가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파독 간호 노동자들에 대한 전시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불쌍하고 희생적인 ‘누이들’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자성을 강조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보여주는 전시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70년대에 독일로 자발적으로 떠난 여성들은 대체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하는 생각” 32)에서 출발하여 소설을 구상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기초하여 이전 시기 정도상의 『푸른 방』(2000), 조정래의 『한강』(2001), 공지영의 『별들의 벌판』(2004) 등의 소설에서 희생과 헌신이라는 관점에 의해 파독 간호사들이 재현되었던 시대적 한계에 대한 대안적 서사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최근 한국 소설에서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새로운 관점에 의해 전유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명』(2016) 이후 지속적으로 ‘위안부’의 문제를 서사화해 온 김숨의 『잃어버린 사람』(2023) 또한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노동자로, 그리고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 부산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려 내면서 그들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갖춘 존재로서 형상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의 관점으로 전유될 수 없는 역사도 있다. 1945년 8월 20일 오키나와 제도에 속하는 구메지마(久米島)에서 일본군들에 의한 조선인 일가 몰살 사건을 취재하여 소설화한 「구메지마」(《너머》 3호, 2023. 6)와 오키나와 전쟁 중 1945년 4월 중순부터 일본 육군이 야전 병원으로 사용한 인공 동굴을 배경으로 한 조선인 병사의 죽음을 그려 낸 「20호 동굴」(《쓺》, 2023년 하반기호) 등을 통해 김숨은 지금까지 묻혀 있던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기록과 탐사에 의해 다시 마주하고 있다. 2-2) 현실 속의 디아스포라    국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의 비중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009년 12월 당시 국내 체류 외국인은 모두 1,168,477명으로 늘어났다. 그 가운데 근로자는 565,898명으로 48.4퍼센트, 결혼 이민자는 125,087명으로 10.7퍼센트, 유학생은 80,985명으로 6.9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통계」, 2010년 1월 8일 발표 참조). 필자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현실 속의 디아스포라를 등장시킨 한국 소설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에 주목하여 한 편의 글을 쓴 바 있는데, 그 글(「현장의 고통으로부터 상호관계 속의 일상으로—최근 소설에 나타난 다문화적 현실의 새로운 층위」,《문장웹진》, 2010년 5월호)에서는 정한아의 「천막에서」(2008),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2009), 김미월의 「중국어 수업」(2009), 한지수의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2010) 등을 대상으로 그 변화의 양상과 특징을 살폈다.    다문화 현상을 소재로 한 그 시기의 소설들에서 나타나고 있던 새로운 점은 우선 다른 문화에 대한 동정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인물들 사이의 대등성, 수평성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앞선 시기 다문화주의 소설들이 이주민들의 불행을 부각시켰다면, 이 신진 작가들의 소설에서는 그들의 일상과 삶이 담담하게 펼쳐져 있다. 그 속에서 서로 다른 국적인 인물들은 상호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다문화주의와 관련된 당시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갈등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성급하게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 방향으로 이끌고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그 소설들은 그와 같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일상을 견디며 오히려 자신의 삶에 대해 뚜렷이 인식하게 되고 더욱 긍정적인 의지를 품는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전망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결혼 이주민 여성의 현실을 그린 서성란의 『쓰엉』(2016)과 강희진의 『카니발』(2019), 33) 이주노동자의 삶을 소재로 취한 김민정의 「안젤라가 있던 자리」(2012), 민정아의 「죽은 개의 식사 시간」(2013), 강화길의 「굴 말리크가 잃어버린 것」(2013), 유현산의 『두 번째 날』(2014), 탈북자를 모티프로 하여 서사화된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2011), 강희진의 『유령』(2011), 이경자의 『세 번째 집』(2013), 정이현의 「영영, 여름」(2014) 등이 발표되었다. 34)    그렇지만 해외 한인들의 문학적 활동이 확장, 심화되고 또 그 성과가 번역 등의 과정을 통해 국내로 더 원활하게 전달되는 현상에 비해, 국내에서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은 그와 대칭적이지 않다. 현실의 상황이 디아스포라를 둘러싼 문제의 지형을 이전에 비해 훨씬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2018년 6월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의 수용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내부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한 논문에서는 “500여 명의 난민 신청자들을 두고 70여만 명이 수용 반대 청원에 서명한 상황,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700여 명의 국민이 모여 ‘국민, 먼저’와 ‘혐오가 아닌 안전’을 외치는 상황, 그중 많은 이들이 청년이며 여성이라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35)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독재정권 시절까지/탄압을 피해 이 나라를 떠난 한국인들과/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 글로벌 시대에/내전을 피해 이 나라를 찾아온 예멘인들은/속사정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36)는 발언이 시적 형식을 빌려 제시되기도 했었지만, 그에 비해 ‘반다문화적 정동’이 훨씬 거셌다. 다문화 담론을 지탱하고 있던 타자성에 관련한 이론적 논의의 영향력은 가라앉았다. 이런 추세는 단지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일본의 한 평론가는 “2017년 현재 전 세계 사람들은 ‘타자와 함께하는 데 지쳤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더는 누구도 타자가 소중하다는 진보적 주장에 귀담아듣지 않는다” 37)면서 ‘타자론’으로부터 ‘관광객론’으로의 이론적 선회를 선언한 바 있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프랑스로 입양된 여성과 기지촌 출신 여인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있는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2019), 그리고 해외 입양된 인물을 기존의 피해자 자리에서 꺼내어 새로운 시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박민정의 「신세이다이 가옥」(2019)과 「백년해로외전」(2022-2023) 등이 발표되었다. 국내 거주 해외 이주민들의 인권 상황을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르포 형식으로 취재한 『당신은 나를 이방인이라 부르네—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의 생존 보고서』(2023)와 같은 노력 또한 한편에서는 이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공현진의 「녹」(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에서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며 이혼 후 육아의 곤경에 처한 화자와 수업 교실의 학생이면서 아이를 돌봐주던 이주민 여성 녹과의 관계를 통해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 문제를 둘러싼 관계가 한층 복잡해진 상황이 드러나 있다. 손병현의 「맹랑한 월남댁」(《너머》 4호, 2023. 9)에서는 결혼 이주민 여성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적극적인 의욕과 행동을 펼치는 상황이 세태적 관점에서 재현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소설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젠더를 비롯한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쓰는 한편 여전히 미지의 지대로 남았던 역사적 사건을 서사화하는 시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를 둘러싼 문제의 지형은 한층 복잡해졌고 소설 또한 그에 따라 더 구체적인 문제와 의식을 천착하고 있다. 3) 디아스포라의 글쓰기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은 어디에도 온전하게 소속되지 못한 불안정한 것이지만, 글쓰기의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 경계의 자리는 내부 혹은 중심을 반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처럼 경계인의 의식에 기반하여 수행된 글쓰기의 사례들을 얼마든지 떠올려볼 수 있다. 멀리는 제임스 조이스나 사무엘 베케트(아일랜드와 프랑스)를, 가까이는 G. W. 제발트(독일과 영국), 밀란 쿤데라(체코와 프랑스), 다와다 요코(일본과 독일)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우리의 경우에도 손창섭(일본), 박상륭(캐나다), 마종기(미국), 허수경(독일) 등의 사례들이 있다.    이민자로 살아가지만 한국 문단에 등단하여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도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독 한인들의 삶을 소설화한 변소영의 『거의 맞음』(2013), 캐나다에서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의 삶을 그려낸 반수연의 『통영』(2021), 호주 이민자의 일과 생활의 다양한 양상을 순차적으로 서사화하고 있는 서수진의 『코리안 티처』(2020), 『유진과 데이브』(2022), 『올리앤더』(2022) 등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해외 체류의 경험을 토대로 문화적 경계를 창작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지속, 확장되고 있다. 박형서의 『새벽의 나나』(2010)에서의 태국, 윤고은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2014)에서의 호주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나 소읍을 주유하는 『바셀린 붓다』(2010),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어떤 작위의 세계』(2011), 텍사스에서 겪는 일들로 채워진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2018) 등의 정영문 소설 또한 이런 맥락에서 되돌아볼 수 있다.    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2022), 백수린의 「빛이 다가올 때」(2023)에서 뉴욕이라는 공간 또한 이들의 이야기에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뉴욕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비정규직 노동자 지혁의 이야기인 문지혁의 『초급 한국어』(2020)와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비정규직 대학 강사 생활을 하며 겪는 이야기인 『중급 한국어』(2023) 연작에서 뉴욕과 서울이라는 공간은 서사의 기본 구도를 이루고 있다. 김사과의 『천국에서』(2013)의 서사 공간 역시 뉴욕에서의 케이와 그녀가 서울로 돌아온 이후로 분할되어 있다. 김사과의 경우 뉴욕과 서울 사이의 경계 의식은 산문의 형태로 추구되어 『바깥은 불타는 늪/정신병원에 갇힘』(2020)에 담겼다.    김솔의 『유럽식 독서법』(2020)은 영국,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그리스, 알바니아, 러시아 등을 배경으로 이민자, 불법체류자, 난민들의 모습을 통해 유럽의 민낯을 보여 주고 있다. 배수아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2023)에서 그녀가 베를린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수행하는 사유는 머물지 않는다는 조건 위에서 얻어진 것이다. “은둔할 수 없다면, 집이 아니다. 38)는 글 속의 구절이 그 점을 말하고 있다.    한편 황모과의 「스위트 솔티」(2020)에서 디아스포라 의식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발생한다. “    목소리는 말했다. 부산에서 새로 가족이 된 고향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우리는 모두 먼바다에서 외롭게 떠돌다 결국 만나게 된 형제들이라고. 바다 위에 살든 육지 위에 살든, 우리는 모두 그저 망망대해 위를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고. 목소리는 우리를 부산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전 세계 곳곳 항구마다 난민들이 들어와 선주민들과 난민들이 섞여 살며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세상을 계획했다.    예지몽처럼 가까운 미래가 눈앞에 보였다. 인류가 새로운 별로 떠나야 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빙하가 모두 녹은 뒤 풍랑은 더욱 거세어졌다. 부산항은 절반 이상 수몰되었다. 바다에 잠겨 얼마 남지 않은 지상은 지진이 계속되어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어지럼증을 안겼다. 인류 전체가 곧 난민이 될 예정이었다. 39) ”    ‘나’는 여러 국가로부터 탑승한 인물들이 모인 배 위에서 태어났다. 그 자체가 ‘선상에 부유하던 연합국’인 배 안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배에서 내려 도착했던 나라들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경험을 통해 어머니의 나라 ‘바다거품’의 언어로 진주라는 뜻의 ‘무티아라’로부터 시작한 ‘나’의 이름은 타스만에서의 ‘스위티 솔티’를 거쳐 마침내 도착한 부산에서는 ‘김진주’가 된다. 그렇지만 그녀가 예지몽처럼 바라보는 가까운 미래에서 지구는 종말의 상황을 맞아 인류 전체가 난민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되고, 우주를 향해 새롭게 떠나야 하는 또 다른 디아스포라의 상황이 다시 시작된다.    이처럼 한국 소설에서 디아스포라 의식은 다양한 공간 위에 파편적으로 산재(散在)하면서 글쓰기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의 범위는 세계 각지의 국가와 도시를 거쳐 가상의 세계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전개되어 온 디아스포라에 의한, 디아스포라를 위한,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는 그 진전의 과정에서 각 범주의 구획을 넘어 연결되면서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4. 디아스포라 글쓰기의 미래    이상에서 앞서 발표했던 필자의 글들 이후에 전개된 디아스포라의 지형을 살펴보았다. 우선 디아스포라에 의한 글쓰기의 영역에서는 해외 한인 작가들의 저작이 양적으로도 증가하고 내용의 측면에서도 다양해지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외부에서의 디아스포라 영역의 확장과 다양화는 역설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의미가 희석되면서 보편성의 방향으로 전환되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한편 해외에서 한인 작가들의 성공은 그들 작품의 국내 번역과 소개를 활성화했는데, 그 반대편에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의 해외 소개도 이전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2017년 9월 당시까지 해외에 번역, 출간된 한국소설이 1,828편이었던 데 비해, 2023년 11월 현재 한국문학번역원 홈페이지의 ‘Digital Library of Korean Literature’에서는 6,695편의 번역 소설이 확인된다. 불과 6년 사이에 거의 네 배 가까이 급증한 것이다. 한 기사에서는 한국 문학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는 높아진 반면 국내에서의 독자들의 반응은 옅어지고 있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는데, 40) 어떻게 보면 그런 방향으로 문학의 리그도 세계 문학과 국민 문학의 연결 구도로 재편되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편 국내외의 현실 속에서 디아스포라를 둘러싼 지형은 이전에 비해 복잡해지고 다층적이 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역사적 사건이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아카이브로 통합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건들은 새로운 관점에 의해 전유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쓰이고 있었다. 현실 속에서는 디아스포라의 문제가 더 이상 일면적이지 않고 서로의 이해와 관점에 따라 복잡하고 다양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한 소설적 진단 또한 어떤 관념에 의거할 것이 아니라 움직여 나가는 구체적인 상태에 대응하여 이루어질 필요가 있겠다.    디아스포라 의식은 글쓰기와 관련하여 더욱 넓어진 입지를 갖게 된 듯 보였다. 이동이 더 수월해지고 뉴미디어의 접속이 활발해지는 현실 상황이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듯했다. 작가들은 그와 같은 경계의 지점에서 기존의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고유한 소설적 시선을 마련하려는 의지를 가다듬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의지로부터 새로운 디아스포라 글쓰기의 미래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참고자료 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1999년까지의 기사를 검색할 수 있다. 검색 결과 디아스포라의 연도별 출현 빈도는 다음 표와 같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 연도별 디아스포라 개념 빈도(1970-1999). 2) 「전란(戰亂) 속의 성지순례 2—예리코 계곡」, 《조선일보》, 1970년 9월 27일 자. 3) 「탈냉전…종교…—불(佛) 국제관계전문가 급변 세계 진단 대담」, 《경향신문》, 1991년 10월 21일 자. 4) 「효과음 귀재 김벌래 비디오 제작」, 《동아일보》, 1993년 9월 27일 자. 5) 「한국문화 오해 풀렸으면—미국서 가족이민사 펴낸 코니 강」, 《한겨레》, 1995년 9월 20일 자. 6) 빅카인즈(www.bigkinds.or.kr)에서는 1990년 이후의 기사를 검색하고 그 결과를 분석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7) 「올해의 발견—디아스포라」, 《국제신문》, 2007년 12월 21일 자. 8) 이 제목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의 한 대목인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전용한 것이다. 원래는 국민의(주체), 국민에 의한(수단, 말하자면 총 같은 것이 아닌 법률과 선거에 의해 선출된 ‘민중’에 의한), 국민을 위한(목적)이라는 순서와 내용을 글의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사용했다. 9) 손정수, 「『The Vegetarian』 이후 한국소설의 번역과 현지 수용의 현황과 문제들」, 《문학사상》539, 2017, 37-38쪽. 10) 정혜윤, 「옮긴이의 말」, 「H마트에서 울다」, 문학동네, 2022, 402쪽. 11) 「K고전․역사로 무장… 한국계 美 소설가 속속 등장—‘K컬처’ 위상 높아지며 한국 배경 소설 美서 잇달아」, 《조선일보》, 2023년 7월 20일 자. 12) “Author's Note”, When You Trap a Tiger, Penguin Random House, 2020. 13) 「한국계 MZ 작가, ‘히스토리’ 넘어 ‘마이 스토리’를 풀다」, 《문화일보》, 2023년 8월 23일 자. 14) 한편 이 기사는 한국계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하되 평범한 10대 소녀가 할 만한 일상을 보여주며 재기발랄한 하이틴 로맨스를 선보인 제니 한의 하이틴 로맨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가 드라마로 시즌 3까지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이 시리즈의 주인공 라라진의 동생 키티를 주연으로 하는 스핀오프 드라마 (2023)는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아직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지 않은 미국 내 한인 작가들의 주목되는 작품으로 성형 수술·룸살롱 문화 등 한국 사회의 민낯을 다룬 프랜시스 차의 「너의 얼굴을 갖고 싶어(If I Had Your Face)」(2020), 엄마·가족에 관한 이야기인 E. J. Koh(고은지)의 「마법 같은 언어(The Magical Language of Others)」(2020), 한국인 가족을 둘러싼 비밀을 다룬 지민 한의 「사죄(The Apology)」(2023) 등을 소개하고 있다. 15) 니콜 정, 정혜윤 옮김, 「내가 알게 된 모든 것—기억하지 못하는 상실, 그리고 회복에 관한 이야기」, 원더박스, 2023, 352쪽. 16) 그레이스 M. 조, 주해연 옮김, 「한국어판 서문」, 「전쟁 같은 맛」, 글항아리, 2023, 10쪽. 17) 최현경, 박아람 옮김, 「요크」, 책읽는수요일, 2023, 291-292쪽. 18) 개브리얼 제빈, 엄일녀 옮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문학동네, 2023, 134-135쪽. 19) 한야 야나기하라, 권진아 옮김, 「리틀 라이프」, 시공사, 2016, 315쪽. 20) 에밀리 정민 윤, 「‘찾은 시’를 통해 들여다본 우리 종족의 잔인함—한국어판 서문」,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한유주 옮김, 열림원, 2020, 19쪽. 21) 캐시 박 홍, 노시내 옮김, 「한국 독자들에게」, 「마이너 필링스」, 마티, 2021, 14쪽. 22) 같은 책, 90쪽. 23) 스테프 차, 이나경 옮김, 「작가의 말」,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황금가지, 2021, 397쪽. 24) 박죽심, 「재일 신세대 작가의 새로운 방향 모색—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문화콘텐츠연구」 12, 2012, 50쪽. 25) 황지선, 「디아스포라 주체의 모빌리티와 행복의 젠더화—금희의 소설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86, 2021, 245-246쪽. 26) 홍용희,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역사적 이해와 창조적 소통의 모색」, 《비교한국학》 30(3), 2022, 198쪽. 27) 노대원, 「길 위의 포스트휴먼—박미하일 소설 「예올리」의 포스트휴먼 디아스포라」, 《현대문학이론연구》 87, 2021, 266쪽. 28) 박정준, 「한국 출신 국외입양인 문학에 나타난 자아 재구성의 문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4, 5-6쪽. 29) 김민정, 「‘조국’에 대한 공헌과 ‘재외한인’으로의 인정」, 「경계를 넘는 한인들—이주, 젠더, 세대와 귀속의 정치」, 한울, 2021, 127쪽. 30) 황정미, 「개발 시대의 해외이주와 젠더—‘국위선양’에 가려진 여성의 해외이주 다시 보기」, 같은 책, 82쪽. 31) 백수린, 「작가의 말」, 「눈부신 안부」, 문학동네, 2023, 314쪽. 32) 백수린․신수정, 「안녕, 선자 이모(들)에게, 그리고 어렸던 나에게」, 《문학동네》 117, 2023, 429쪽. 33) 결혼 이주민 여성의 문제를 소재로 한 소설에 대한 연구도 지속되어 구재진의 「‘사물’로서의 이웃과 결혼이주여성의 목소리—「쓰엉」과 「카니발」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연구」 68, 2022 등의 최근 연구까지 이어지고 있다. 34) 이경재의 「다문화 시대의 한국소설읽기」(소명출판, 2015)에는 이 국면에서의 다문화 문제 관련 소설들이 정리, 분석되어 있다. 35) 전의령, 「타자의 본질화 안에서의 우연한 연대—한국의 반다문화와 난민 반대의 젠더정치」, 《경제와 사회》125, 2020, 362쪽. 이런 문제 제기와 병행하여 그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성찰이 김선혜 외 36명의 글을 모은 「경계 없는 페미니즘—제주 예맨 난민과 페미니즘의 응답」(와온, 2019)에 담긴 바 있다. 36) 하종오, 「찬반 집회」, 「제주 예멘」, 도서출판b, 2019, 52-53쪽. 37) 아즈마 히로키, 안천 옮김, 「관광객의 철학」, 리시올, 2020, 15쪽. 38)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문학동네, 2023, 22쪽. 39) 황모과, 「스위트 솔티」, 《오늘의 SF》 2, 2020, 196-197쪽. 40) 「세계가 주목하는 K문학…정작 한국에서 “그게 누군데요?”」, 《매일경제》, 2023년 11월 17일 자.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경계 넘기

오태영 한국

▲ ⓒ 연합뉴스 1. 제국-식민지 체제와 디아스포라    21세기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개념은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화’라고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다채롭게 쓰이고 있다. 특히 세계화에 이은 전 지구화 흐름 속에서 근대 세계 체제의 성립 이후 발생한 인구의 이동과 정착, 그들의 문화적 실천을 포착하고 설명하기 위해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자가 증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의 추방과 이산을 가리키는 특수하고 제한된 용법으로 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희생자(victim) 디아스포라에 노동(labour), 제국(imperial), 무역(trade), 탈영토화(deterritorialized) 등 디아스포라의 하위 범주가 추가되면서 디아스포라는 시기적으로는 기원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국민국가와 지역 질서, 세계 체제가 연동하는 가운데 공간 질서의 재편과 이동, 주체의 정체성 구축과 사회적 연대, 그리고 문화적 실천들을 설명하기 위한 술어로서 디아스포라가 쓰이는 것은 이제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아르준 아파두라이가 「고삐 풀린 현대성」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넘어 “지구 전체에 퍼져 있는 사람들과 집단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으로 상황 지어진 상상력들에 의해 구성된 복수의 세계들을 구성”하기 위해 ‘-스케이프(-scapes)’ 개념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설명한 전 지구화 이후 세계를 포착하고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제시되었지만, 디아스포라 개념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개념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아스포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로서의 지금-여기의 글로컬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다. 로빈 코헨이 「글로벌 디아스포라」에서 제시한 바에 따르면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본래의 고향으로부터의 이산, 종종 트라우마에서 비롯. (2) 일자리, 사업, 식민주의 야망의 확장. (3) 본국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신화. (4) 조국의 이상화. (5) 귀환 운동 혹은 본국과의 지속적인 유대 관계. (6) 오랫동안 지속되는 민족성에 대한 강한 의식. (7) 거주국과의 불편한 관계. (8)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동족과 책임 의식 공유. (9) 거주국이 관용적일 경우 창의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가능성. 물론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의 공통된 특성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 개인과 집단, 그들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으로 분기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통된 특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디아스포라가 이산(離散) 이후의 정체성 구축 및 삶의 조건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디아스포라 개념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에서 1945년 해방 이전까지의 제국-식민지 체제기 체제 변동과 사회 구조의 재편 과정에서 그 위상에 심대한 변화를 겪은 한국(인, 문화)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 디아스포라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선취한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의 길을 걸으면서 동아시아 각 지역과 국가를 식민지로 개척·경영했고, 그를 통해 기존의 한자 문화권과 조공-책봉 체제에 묶여 있었던 동아시아 지역 질서가 재편되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때를 같이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진출 및 후발 제국으로서 일본의 지리적·문화적 팽창 과정에서 근대 한국(인, 문화)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상에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제국-식민지 체제기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상호 연루되어 있으면서도 구조적인 차별이 발생한 가운데 한반도를 살아가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제국 일본의 국민이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체제 변동과 사회 구조의 재편 과정에 조응해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이동은 범박하게 말해 제국주의적 질서 속에서 마련된 이동의 문법과 장치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위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구축된 제국주의적 통치 질서에 의해 한반도를 둘러싼/관통한 정치적·경제적 경계들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삶의 조건들로 작동하면서 탈향과 상경, 이주와 정착을 추동했고, ‘뿌리 뽑힌 자’들의 이산과 이후 벌거벗은 신체들로서의 삶을 낳았다. 따라서 근대 한국인과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디아스포라 개념을 적용한다고 했을 때, 무엇보다 그것은 제국-식민지 체제의 지배/피지배, 경영/수탈, 이주/정착, 억압/저항의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2. 디아스포라의 표상: 재일 조선인과 재만 조선인    제국-식민지 체제기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발생과 관련해서는 여러 정치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대체로 그것은 제국 일본의 식민화의 결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국의 식민지 개척의 역사가 그러하듯, 20세기 초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조선총독부를 통해 이원화된 통치 체제를 구축했고, 내지/외지의 이원화된 통치성을 발현하기 위한 각종 정책과 제도의 시행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과 조선의 자원들이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동을 수탈이나 동원 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지배/피지배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근대 한국(인)을 위치시키는 것인데, 무엇보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통치 권력이 작동하는 데에는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제국적 주체’들의 움직임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염상섭의 「만세전」이다.    염상섭의 「만세전」은 전근대적 질서와 가치로부터 벗어나 근대적 개인으로서 자기를 구축해 가는 식민지 조선인 청년이 문명/야만=제국/식민지의 위계화된 위상이 구축되어 가는 가운데 야만의 식민지에서 문명의 제국으로 향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동 과정 중 식민지인으로서의 자기와 조우하고 식민지적 현실에 대해 자각하는 장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 목욕탕에 들어간 이인화는 일본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면서 식민지 조선인들이 내지 일본의 곳곳으로 팔려가는 상황을 알게 된다. 일본인 브로커가 순사나 헌병의 지원 속에 조선의 농촌으로 들어가 가난한 식민지 조선인들을 일본 내지의 공장이나 광산 노동자로 모집하고, 그들의 취업을 알선해 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상황을 들은 이인화는 식민지 조선인의 인신매매의 참상을 알게 된다. “가련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으로 몸이 팔려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인화는 애써 외면해 왔던 식민지 조선인의 현실을 목도하는 것이다.    「만세전」의 이 장면을 통해 제국-식민지 체제기 식민지 조선인들이 동아시아 각 지역으로 이산하는 데 있어 제국주의적 통치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고 있었던 각종 브로커들의 교활한 술책이 만연하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내지 일본을 비롯해 동아시아 곳곳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장밋빛 전망이 좌절되고 척박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생존 그 자체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신체들로 전락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세전」의 서사에 나타난 것처럼, 제국 일본인 브로커들에게 식민지 조선인들은 타이완의 생번(生蕃)과 마찬가지로 야만적인 존재로 멸시되고, 공장과 광산의 하층민 노동자인 ‘조선 쿠리(苦力)’로서 위치 지어졌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재일 조선인 노동자와 재만 조선인 개척 농민으로 표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사량의 「무궁일가」는 일본 도쿄의 빈민촌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서사화하고 있다. 이 소설은 각각 꿈과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했던 조선인들이 자신들만의 생활 공간에 안착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유리걸식하는 과정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시 통제 경제 정책이라는 제국주의적 권력뿐만 아니라 재일 조선인 사회 내부에서 같은 조선인들을 착취하는 조선인의 존재를 상기시키면서 이중의 소외 상태 속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조선인 하층민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로서 그들은 “발돋움을 해서라도 뛰어오르려고 뛰어오르려고 할 때, 적어도 자신들은 그렇게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깊이 진창 속으로 발을 딛기만 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사량의 「무궁일가」는 재일 조선인 하층민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서사화하면서 그들이 정착·안주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떠돌게 될 것임을, 자신들의 극빈한 처지를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안수길의 「새벽」은 만주 이주 개척 농민의 척박한 삶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소설은 만주 이주 조선인 농민들이 식민지 조선의 지주-소작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빚을 갚지 못해 몰락해 가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 준다. 마름 격에 해당하는 지팡주는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로 젊은 여성을 요구하고, 이에 무기력한 가부장은 아내나 딸을 교환 가치의 대상으로 거래한다. 물론 이는 극빈한 상황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가족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새벽」에서도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지팡주 박치만이 공권력을 악용해 가난한 농부의 딸을 빼앗아 가려 하고, 그러한 박치만의 첩이 될 수 없었던 딸이 자살하는 것으로 서사가 종결된다. “이런 되놈 땅에 끄을구 와서 죽을 고상 다아 시키다가 나중에는 딸까지 팔아먹겠소”라며 절규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 일가가 만주 이주 이후 경제적 착취의 굴레 속에서 삶을 이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김사량의 「무궁일가」에 나타난 재일 조선인 노동자와 안수길의 「새벽」에 나타난 재만 조선인 농민들의 모습을 가지고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표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식민지 조선의 고향을 떠나 일본과 만주로 이주했고, 이주 이후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극심한 노동 앞에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생존을 위한 척박한 삶이 결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제국-식민지 체제기 배제되고 소외된 조선인 하층민이 어떻게 유민으로서 전락해 제국의 권역을 떠돌고 있는가, 거기에 식민주의적 착취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만세전」에서의 ‘조선 쿠리’를 떠올리게 한다.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표상은 이처럼 재일 조선인 하층민 노동자와 재만 조선인 개척 농민의 처절한 삶과 그 현장으로 대표되었던 것이다. 3. 해방과 (미)귀환자들: 디아스포라의 확장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의 패전과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기존 제국-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낳았다. 제국의 해체와 식민지의 해방은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재구축을 추동했고, 식민지 조선 또한 한반도의 경계를 재구획하면서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미소군의 38선 분할과 남/북한 진주 및 점령, 군정 체제에 의한 신탁통치, 그리고 1948년 단독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통일 민족국가 건설은 좌절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민족국가 건설의 담론이 넘쳐나고 각종 정치 세력이 등장하여 헤게모니 쟁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과거 식민의 체험과 기억을 청산하기 위한 탈식민화의 움직임이 전개되었지만, 군정 체제에 뒤이은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 남한 사회의 좌/우익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충돌 과정 속에서 새로운 경계들이 만들어지고 중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계들은 다시금 사람들을 포섭/배제하는 생명 정치의 테크놀로지를 작동시켰다.    해방을 맞아 과거 제국-식민지 체제기 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이산되었던 식민지 조선인들은 귀환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해방 조선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주체로서 새롭게 자기를 정립하기 위해 지리적·심리적 귀환을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귀환의 과정에서 허준의 「잔등」 속의 인물들처럼 과거 식민의 체험과 기억을 청산하는 제의의 과정을 수행했다. 해방 조선의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과거의 자기와 기꺼이 결별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의의 과정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식민지 체제기 식민지 조선을 떠나 내지 일본이나 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이산했던 조선인들은 제국의 통치역(統治域) 속에서는 신민으로서의 책무를 강제받았지만, 개별 삶의 장소에서는 제국의 신민이자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동요를 겪으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제국-식민지 체제기 동아시아 각 지역으로 산포한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은 해방이라는 사건을 통해 단일하고 통합된 조선인으로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해방을 맞아 한반도로 귀환한 자들 못지않게 소위 조국과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자들, 즉 잔류를 선택한 자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 조선의 입장에서 그들은 민족국가 경계 내부로 들어오지 않은 자들로 배제되어 비가시적 존재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관통한 체제 변동과 사회 구조의 재편 과정에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자들, 간난신고 끝에 이주지에 정착하고 새로운 삶의 토대를 마련해 결코 떠나올 수 없는 자들, 죽음을 무릅쓰고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재민’으로 낙인찍혀 한반도 내부에서 또다시 배제되고 소외된 상태 속에 놓인 자들을 떠올렸을 때, 미귀환자들은 민족의 배반자나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비-국민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해방 이후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회성의 「백년 동안의 나그네」는 1947년 사할린을 탈출한 조선인들이 하리오 섬 수용소를 거쳐 부산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오르는 과정을 서사화하고 있다. 1921년 함경남도 고향 마을을 떠나 일본 곳곳을 전전하다 사할린에 흘러든 박봉석과 16세 때 정신대로 징집되어 오사카 공장과 사할인 탄광촌 포주집을 거친 김춘선, 20여 년 전 먹고살기 위해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고 일본에 도착해 떠돌다 마쓰코를 만나 가정을 꾸린 유근재, 탄광 노무반장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학대하던 이재길 등 그들은 대체로 “먹고살 수가 없으니까 거기까지 흘러 들어간” 자들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무국적자가 된 그들은 전후 일본 사회의 책임 회피와 해방 조선의 망각, 그리고 냉전적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이용한 소련과 미국으로부터 내버려진 존재들이었다. 하리오 섬 수용소에 도착한 그들은 해방 조선의 상황에 대해 듣게 되는데, 그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38선 봉쇄와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주택난과 물가 앙등 등 해방 조선의 정치경제적 혼란은 그들의 귀향 열망을 좌절시켰는데, 무엇보다 거기에는 귀환 이후 또다시 조선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자로서 해방 조선의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해서 전후 일본 사회에 그들의 자리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 어느 곳에서도 자기만의 자리를 점유하고 정착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귀환을 멈추고 잔류를 선택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일본인 처와 사할린 태생의 조선인 2세들이 배제되고 소외된 상태에 놓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대로 일본에 남아야 하는가 이 일본 어디가 좋아서 이 땅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는가. 또다시 이 객지에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쳐도, 이 나라는 우리의 고뇌를 얼마나 이해해줄 것인가. (……) 또다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앞으로는 재일(在日) 조선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박봉석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재일’은 제국의 해체와 식민지의 해방, 동아시아 냉전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새롭게 창출된 인간 존재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흘러가는 삶을 증거한다.    한편, 염상섭의 「해방의 아들」은 해방 이후 재만 조선인의 귀환 과정을 서사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조준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적(日本籍)인 외조부의 민적에 이름을 올려 일본인 마쓰노로 행세해 오고 있었다. 일본인 처와 결혼해 만주 안동에서 해방을 맞았던 그는 그동안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생활을 영위해 오고 있었는데, 해방을 맞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성을 되찾고자 한다. 또한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어머니에게 가고자 하지만 원자탄 피폭 이후 상황을 알 수 없어 조선에 정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일본인 마쓰노로 행세했던 그는 조선인회로부터 국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해방과 동시에 그는 “조선 사람 편에서 미워할 것은 물론이요 일본인 측에서 탐탁히 여겨주지 않고 만인(滿人)도 좋아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홍규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지만, 신의주에서 처자식과 재회한 뒤 일본인들이 집단생활을 하던 곳으로 쫓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다시 냉대를 받고,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그때 홍규가 태극기를 건네주면서 어디에서든 가족이 함께 살라고 격려하자 조준식은 태극기를 받고 보니 정말로 조선에 돌아온 것 같고 분명히 조선인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주에서 일본인으로 행세했던 조선인이 해방을 맞아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를 탈각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자기를 손쉽게 재정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 처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일본적에 입적해 일본인으로서 만주에서 살았던 그가 조선(인)으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인이었다가 일본인이 되었지만, 해방을 맞아 다시금 조선인이 되고자 하는 그는 전후 일본에서도 해방 조선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태극기를 통한 민족의식의 각성이라는 제의를 거친다고 해서 그가 남한 사회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요원한 일이다.    해방이라는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로 하여금 민족국가 경계 내부로의 이동 가능성을 마련하지만, 기실 그러한 민족국가는 바로 그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을 배제하는 것을 통해 성립 가능한 것이었다. 제국의 패전과 식민지의 해방, 제국-식민지 체제의 붕괴는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에게 조국과 고향에 대한 강한 동경과 귀향 의식을 낳았지만, 해방 조선에 그들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전과 해방이라는 사건이 역설적으로 다시금 그들의 유동성을 강화하고, 제국-식민지 체제기 간난신고 끝에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던 그들은 지속적으로 뿌리뽑힌 존재로서 정처 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탈식민-냉전 체제 형성기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경계 구획이 포섭/배제의 생명 정치를 작동하면서 그들을 기민으로 전락시키는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4. 경계 위의 디아스포라: 환대와 천대를 넘어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해방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거쳐 한국전쟁을 지나오면서 남한 사회에서는 냉전-분단 체제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켰고, 대략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군사독재 정권의 통치 질서 속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을 망각해 왔다. 그들은 남한의 정치·경제·문화의 각 영역에서 비가시적 상태 속에 은폐되면서 존재성 그 자체를 부인당해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남북한 체제 경쟁 과정에서 북조선 귀국 사업에 대항하기 위해 재일 조선인들을 ‘재일 교포’로 호명하여 모국 방문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도구로서 그들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군사독재 정권이 간첩 조작 사건을 획책할 때 재일 조선인 유학생을 대표적인 타깃으로 삼았던 것을 상기한다면, 당시 남한 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이 어떻게 인식되고 위치 지어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재만 조선인의 후예 격에 해당하는 ‘조선족’에 대한 인식 속에서도 일정 부분 반복되고 있다. 경제적 우월감에 빠져 그들을 천대하는 태도는 속물주의의 전형을 보여 줄 따름이다.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에 대한 인식과 감각은 대체로 민족주의에 기초해 왔다. 그때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통치성의 일환으로 작동한 반공주의와 결합한 폐쇄적 민족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방 이후 남한 사회로 돌아오지 않고, 국외에 잔류하여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반민족적 존재들로 멸시되면서 민족적 주체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타자로서 위치 지어졌다. 그렇지 않다면, 동일한 논리 아래 시혜적 행위자의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확인을 위한 대상으로 위치 지어졌다. 천대/환대를 불문하고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은 남한 사회의 국민(민족)들의 자기 정체성 구축 과정에서 다시금 배제되고 소외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동포’로서 환대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시민으로서의 윤리성을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하고자 하는 자의 권력에 대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줄 뿐이다.    따라서 디아스포라는 환대와 천대의 ‘대상’이 아니다. 나아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그것이 탈냉전-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민족적 주체의 자기 확장의 욕망에 다름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와야 한다. 제국-식민지 체제기 이래 무수히 많은 경계를 넘고, 체제의 질서와 문법으로부터 미끄러져 갔으며, 단일하고 통합된 사회와 문화 속에서도 혼종적인 상태 속에 놓여 있었던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을 통해 근대 이후 한국인들이 ‘우리’라는 경계 속에 안착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배제해 왔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21세기 세계 시민의 윤리적 감각을 내세우면서도 여전히 디아스포라들을 마이너리티로 규정해 메이저리티의 입장에 서고자 하는 우리 자신을 내파하기 위해서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와 그 후예들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해야 한다. 요컨대 디아스포라를 보는 위치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보이는 위치에 우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당연시했던 근대 이후 한국(남한 사회)을 둘러싼/관통한 경계들이 의심과 회의의 대상이 되고, 식민지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의 월경이 ‘빛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뛰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정재훈 한국

▲ 유미리 『8월의 저편』 연재 당시 일러스트 #7 [ⓒ井筒啓之(Izutsu Hiroyuki)] 1. 불규칙한 감정으로 어디에도 정주할 수 없는 글쓰기    유미리의 장편 『8월의 저편』을 다시 읽었다. 완독을 했던 뒤로 10년 만이었다. 읽을 때의 느낌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상하권으로 길게 전개되는 서사를 따라 경주하다 보면 독자인 나도 모르게 어느새 “큐큐 파파”1) 하면서 감정의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다. 압도적인 정주의 감각에서 벗어나 한발 한발 낯선 코스에 진입하는 심정이었던 그때를 떠올리기도 했으나, 어떤 구간은 다시 읽어봐도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부분은 이른바 난코스라 하겠는데 특히, 작중 인물 김영희가 ‘나미코’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 위안소(“낙원”, 하 141쪽)에서 살아가는 장면에 진입하면 감정의 호흡이 급격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다.    『8월의 저편』은 한일 언론 사상 처음으로 한국의 《동아일보》와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 공동으로 연재된 장편소설이다.2) 그리고 유미리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의 출발점이 바로 마라토너였던 외할아버지3)의 삶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제가 소설가로 데뷔할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소재입니다. 먼 길을 돌아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이에요.” 4)그렇게 작가는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수차례 한국을 찾았고, 여러 사전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 과정 하나하나가 작가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마라톤이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집필하는 순간에는 더욱 그러했을 테다. “    내 기억에 할배는 우리 집에 열 번쯤 자러 왔습니다. 아침,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올림픽 출전 선수로 뽑혔을 만큼 빨랐다고 합니다.(하, 408-409쪽)    나는 쓰기 위해서 뛰고 있다 주행 속도 성별 성격 나이 경험의 차만 해도 큐큐 파파 비슷한 부분보다 비슷하지 않은 부분이 큐큐 파파 하지만 뛰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 속도로 달릴 수는 없어도 그 거리를 달릴 수는 있다 큐큐 파파(상, 51쪽)    큐큐 파파 큐큐 파파 할아버지의 현역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그렇게 반듯한 폼으로 달리는 선수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큐큐 파파 키가 180센티미터나 되고 다리도 길어서 양복을 입으면 무척 잘 어울렸다고도 180센티미터라면 1912년에 태어난 사람치고는 상당히 크다(상, 53쪽)    할아버지는 도쿄 올림픽이 무산된 1940년부터 손기정 씨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큐큐 파파 할아버지는 도망쳤다 징병 조국 가족 큐큐 파파(상, 69쪽) ”    유미리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먼 길을 돌아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이라 함은 어쩌면 소설가가 되기 이전부터가 아니라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경로에서 다시 출발선에 섰다는 것은 결국 외할아버지의 삶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을 테다. 작가가 내세운 작중 인물 ‘유미리’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재생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작가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라토너로서 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뛰었을 할아버지를 좇아 작가 자신도 ‘글쓰기’로 달리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미지의 영역으로 향하고자 하는 행위이며, 이는 곧 “뛰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재일 3세대 작가라고 평가되는 유미리의 작품 세계는 이전 세대의 작가들이 보여준 민족적 색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다. 부모님의 이혼을 비롯하여 청소년 시절에 했던 가출과 비행 등 작가 개인의 경험을 작품에 형상화했다는 점도 그러하지만, 스스로도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계적 자의식이 돋보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8월의 저편』은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자신의 뿌리라고도 볼 수 있는 ‘밀양’을 무대로 씻김굿을 비롯해 밀양아리랑과 같은 전통적인 색채들이 짙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 세계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것은 뛰어보지 않고서는(쓰고자 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기에 당장에는 무엇 하나 가늠조차 할 수 없었을 테고, 따라서 정주의 감각이라는 익숙함도 무용했을 것이다.    “징병 조국 가족”으로부터 도망을 친 할아버지의 행적도 그러하지 않을까. 이것이 과연 ‘도망’인지, 아니면 ‘탈출’인지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기 어렵다. 할아버지가 지나간 행적을 좇아가려는 유미리의 입장에서 당시 그의 심정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으로 도망가 파친코를 해서 성공했다는 소문”(하, 372쪽)처럼 그렇게 고향에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혼자서만 전쟁의 그늘(‘징병’)에서 벗어났다는 비난 뒤에는 또 어떤 모습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여전히 고향을 잊지 못해 갓 태어난 손녀의 이름을 “미리”라 짓고, 자신의 운명이 행여 손녀에게도 이어질까 봐 “자신의 불안이 스미지 않게 조심조심” 말하는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하는 자’의 굴곡진 어둠을 보여 준다. 2. 전쟁의 어둠과 제국주의의 쇠사슬에 묶인 자들의 이야기    재일조선인 문학에서 ‘전쟁’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작품들에서 엿보이는 전쟁의 이미지는 대부분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재일 2세대 작가인 이회성의 단편 「증인 없는 광경」에서처럼 황국 신민 사상에 경도된 소년(작중 화자의 과거 어린 시절)이라든가, 또는 백골로 발견된 일본 병사의 시체를 들 수 있다. 비록 전쟁의 이미지가 포탄이라든가, 총성으로써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제하에 조선인 신분으로 살아가는 상황 자체가 가히 전쟁에 버금가는 것이지 않았을까. 당시, 재일 조선인에게는 조선보다 앞서 1942년 10월 국민징용령이 적용되어 일본 국내는 물론, 남방 등의 점령지에 군속으로 보내지기도 했다.5)    『8월의 저편』에서는 일제가 총동원령을 내리고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분위기를 볼 수 있는데, 전쟁으로 인해 도쿄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형을 본 “우곤”(춘식, 우근, 할아버지의 동생)의 뇌리 속에는 “큐큐 파파 나는 몇 살에 죽을까 큐큐 파파 어디서 죽을까 큐큐 파파 가다르카날 섬? 솔로몬 섬? 미얀마? 뉴기니? 호주? 큐큐 파파 중국?”이라는 일말의 두려움이 스친다. 그가 떠올린 지명들은 모두 당시 일제가 전쟁을 치르던 곳이었다. 고향인 ‘밀양’과는 너무나 먼 타지로 끌려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과연 어떤 이미지로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가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응결된 어둠”(하, 183쪽)처럼 그 끝을 짐작조차 하기 힘든 절망의 밑바닥까지 그의 영혼을 끌고 갈 “제국주의의 쇠사슬”이지는 않았을까. “    큐큐 파파 큐큐 파파 할배! 찾을 수 있을까요? 시체가 묻힌 곳을 찾아 땅냄새를 맡는 개처럼 큐큐 파파 나는 이을 수가 있을까요? 산산이 부서진 뼈를 큐큐 파파 나는 들을 수가 있을까요? 재갈을 물린 채 살해당한 사람들의 언어를 큐큐 파파 큐큐 파파 할배! 나는 할 수 있을까요? 땅을 뒤흔드는 전쟁의 굉음을 전할 수가 추궁당하기 전에 대답할 수가 불타오르는 거리를 끝까지 달릴 수가 한을 품고 가라앉은 혼을 아침처럼 환하게 웃게 할 수가 큐큐 파파 큐큐 파파 할배! 나는 당신의 발소리가 메아리치는 터널을 더듬더듬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상, 76쪽) ”    “시체가 묻힌 곳을 찾아 땅냄새를 맡는 개처럼” 쉼 없이 뛰어야만 하는 지금의 ‘나’(유미리)는 ‘제국주의의 쇠사슬’에 묶여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부서진 뼈”들을 잇고, 산산이 흩어진 사람들의 “언어”를 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해방을 맞아 더는 먼 타국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이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데올로기의 광풍은 “우근”의 몸에 총상을 입혔고, 결국 사찰계 일원에게 사로잡힌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소리”(하, 310쪽)였다. 해방이 되었음에도 같은 또래의 청년들이 상대(“빨갱이”)를 죽이기 위해, 또는 살기 위해 도망치면서 숨을 헐떡거리는 광경은 지축을 흔들 “전쟁의 굉음”보다 더 참혹했고, 혈기 왕성했던 젊은 영혼들은 땅 밑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제국주의의 쇠사슬’에 묶인 채 전쟁터에 끌려와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심지어는 시신조차 찾을 길이 없는 비참한 운명이 과연 조선인에게만 있었을까. 서두에서 언급했듯 『8월의 저편』에서 가장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난코스(하권 22장 「낙원에서」), 즉 김영희가 ‘나미코’라는 가짜 이름으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 끔찍하게 고통받는 장면에서 가해자로 등장하는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 또한 ‘제국주의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들이다. 위안소는 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그들의 인간성이 여과 없이 발설되는 고해소(告解所)이다. 천황의 군대라는 엄격한 군율에 의해 억제되었던 불안과 상실감이 격렬하게 표출된다. 이로써 허황된 전쟁 논리의 민낯이 드러난다. 특히, 나미코의 단골인 “가토 중사”는 기울어져 가는 전세(戰勢)를 그녀에게 전하며, 자신이 목격했던 장면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6) “    “서로 나라를 빼앗고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고 빼앗기고.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여서 대일본제국을 승리로 이끌어야 동양에 평화가 오는 거야. 죽으면 안 되지, 살아서, 죽이고,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지.    고향에 돌아가면 전부 잊어버릴 거야. 나미코도 이곳에서 있었던 일 다 잊어버리고, 나하고 같이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구. 입영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 한 번 때린 적 없고 맞아본 적도 없었어. 늙어서 얻은 아들이라고, 어머니나 아버지, 애지중지 나를 키웠는데…… 어서 돌아가서 효도를 해야지…… 손자도 안겨드리고…….”    (……)    웃으면서 돌아서는 가토 중사의 얼굴을 보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죽을상이다. 낙원에 끌려온 지 1년 3개월, 저런 얼굴의 병사를 몇 명이나 배웅했었다. 그들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다……. (하, 196쪽) ”    가토 중사를 비롯한 일본 군인들을 바라보는 나미코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군인들의 폭력으로 자신의 몸과 영혼을 짓밟힌 여성으로서 느끼는 분노도 있겠으나, 가토 중사의 경우처럼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자’라는 비극적 운명을 예감하기도 한다. 물론,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군인들이고 심지어 조선인 여성들을 강간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용서받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 또한 당시 군부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온 자들이다.7)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고, ‘제국주의의 쇠사슬’에 묶여 전쟁터로 끌려오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럼 이들의 죽음은 어떻게 기록되고 구원받을 수 있을까. 작품 말미에 이우근과 김영희의 영혼결혼식과 같은 화해적 구원이 과연 이들에게도 내려질 것인가. 3. 재일 조선인과 같은 이름이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재조 일본인의 시선    『8월의 저편』에서 “이나모리 키와”는 작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유미리의 할아버지 이우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 할 수 있는 동생 이우근의 출산(당시, 난산이었던 상황이었다)을 도왔던 산파(産婆)인 그녀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십수 년 전에 남편을 따라 조선에 이주하여 정착한 인물이다. 어느덧 그녀의 집안은 삼대(三代)를 이루었고, 그간 그녀는 산파로서 많은 아이들의 탄생을 지켜봤다. 재조 일본인이자, “제국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소수자”8)이며 “당대의 역사가 단순히 제국과 식민지, 일제와 한국이라는 국가적, 민족적 요소로 치환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가 바로 이나모리 키와인 것이다.    민족적 요소로 쉽게 치환될 수 없다는, 그 경계성이 드러나는 대목은 이우철의 고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철은 친구 “우홍”이 관동대학살을 얘기하며 “왜놈”들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 것에 대해 “하지만 우홍아 큐큐 파파 도저히 큐큐 파파 이나모리 키와란 이름과 그 얼굴과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상, 129쪽)라며 독백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구축한다면, 자신도 이나모리 키와를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구축할 것인가를 자문한다. 동생의 탄생에 일조한 산파이고, 가족의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젠가 서로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비극적 예감은 앞서 언급한 ‘제국주의의 쇠사슬’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    이 땅에 일본 사람들이 사는 것 자체가 조선 사람들에게는 상처라고 한다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만, 서로 이해할 수 없다면 죽일 수밖에 없다는 사고는 올바르지 않다. (……)    지난 몇 년 동안 일본 사람보다 조선 사람의 아이를 받는 일이 많았다. 조선 여자들 사이에서, 난산일 때는 이나모리밖에 없다고 평판이 나 있는 모양이다. 기쁜 일이다. 조선의 가정에서는 아기의 첫 생일 잔치에 아기를 받아준 산파를 모셔 정중하게 대접하는 풍속이 있다는데, 이렇게 이 두 손으로 받은 아이가 서서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상, 218-219쪽) ”    또한, 이나모리 키와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죽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낸다. 전쟁터에 끌려가 누군가를 죽이는 일보다 탄생에 일조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생업이고, 이것은 곧 그녀의 윤리 의식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업신여기고 폭력을 휘두르지만, 조선인 여자들에게 산파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식민 지배 논리의 쇠사슬은 가볍게 끊어져 버린다. 낯선 풍속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보편적인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기쁨은 ‘탄생’이라는 존재적 사건 앞에서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인간다움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녀의 평온한 삶에도 마침내 ‘전쟁’의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    이나모리 키와는 인력거 위에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폭탄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살육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 속에서 모든 것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파란 윗도리를 입은 인력거꾼이 숨을 헉헉거리며, 이거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습니다, 헉 헉 헉 헉, 우리들도 일본 거리가 텅 비면 가게 문 닫고 떠나야지요, 헉 헉 헉 헉, 나는 여기서 태어나서, 아버지 고향인 야마구치에 대해서는 얘기밖에 들은 게 없어요, 헉 헉 헉 헉, 그래도 핏줄한테 의지하는 수밖에 없죠, 정말 큰일입니다, 하고 말을 걸었지만, 가슴이 메어 뭐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하, 225-226쪽) ”    폭탄이 떨어지거나 살육이 벌어지진 않았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터전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데에서 밀려오는 절망과 상실감은 어쩌면 ‘전쟁’이 주는 충격파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날벼락과도 같은 상황에서 피난민의 심정으로 그동안 일궈왔던 터전을 떠나야만 한다는 어수선함과 불안감 사이로 그녀는 텅 빈 일본인 마을 거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손수 받았던 우근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는 우근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할머니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없어졌어요”(하, 230쪽)였다. 키와는 “지금 잃어버리려는 것의 크기에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제국주의의 쇠사슬이 끊어지자,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조선에서의 평온했던 생활은 무너진다.    해방으로 불리든, 아니면 패전으로 기억되든 간에 이들 두 인물 사이에는 ‘탄생’의 순간으로써 이어진 끈이 있다. 이것은 차가운 ‘쇠사슬’과는 전혀 다른 ‘인간다운’ 온기를 지녔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그녀에게 유일한 걱정은 증손자인 “달우”가 밀양에 남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곳에 자신과의 인연의 끈이 유일하게 남은 우근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증손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해줄 수 있느냐고. 그녀의 입장에서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앞으로의 여생을 ‘잃어버린 것들을 추억하며 그곳에서의 행복했던 일상’을 반추해야 하지만, 증손자인 달우는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증조할머니와는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9) 4. 아직 말하지 못한 이야기의 저편을 상상하며 호흡하기    이번 글을 작업하면서, 자료를 읽다가 우연히 어떤 인물을 알게 됐다. 그의 이름은 ‘오가와 다케미츠’였다. 1969년 8월 15일 야스쿠니신사 사무소 옆에 홀로 ‘야스쿠니 법안 반대’라고 가슴에 쓴 조끼를 입고 서서, ‘유족이므로 반대한다! 전쟁은 위업이 아니다’라는 전단을 나눠주는 남자(당시 55세)가 있었다. 1942년 1월 입대해 다음 해인 1943년 3월부터 북지나군의 군의관으로 스자좡(石家莊) 병원에 배속, 같은 해 10월부터 패전까지 베이징 제1육군병원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다.10) 지금도 일본 우익 세력들이 성지처럼 여기며 해마다 광복절(패전일)에 맞춰 과거 제국주의의 허황된 이상을 기념하는 그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그것도 일본인이 야스쿠니 법안 반대 시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    그날 그는 힘겹게 홀로 서 있었다.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가운데, 생명을 걸고 야스쿠니신사 경내에 서 있었다. 그는 전범으로 처형된 장병들의 마지막 순간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남긴 유지를 짊어지고 홀로 서 있다. 그는 ‘전몰자(戰歿者)’를 ‘영령(英靈)’으로 바꿔치기하고 ‘전쟁’을 ‘위업’으로 치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이십여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치유되지 못하고 죽어간 병사들의 마음의 상처와 공명하고 있었다.(같은 쪽) ”    그는 분명 그때 당시 자기 앞에서 서서히 죽어갔던 병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유지”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이 전쟁터에 끌려오기 전에 누렸던 평범한 일상이라든가, 소중했던 가족들에 관한 추억도 함께 스며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마지막 순간”에 결국 조각조각으로 남은 이야기가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얕은 숨을 쉬었던 누군가가 있었음을 증언할 것이다. 죽은 병사들이 남겨둔 이야기의 여백 사이로 (아직 살아남은 자의) “마음의 상처”가 “공명”한다. 이것은 ‘역사적 책임’ 또는 ‘반성’이라는 익숙한 수사적 표현보다는 오히려 죽기 직전의 병사들과 그가 잠시나마 짧은 대화를 시도하고, 희미해지는 온기를 느꼈던 순간으로써 더욱 무겁게 각인될 것이다.    왜 갑자기 ‘가토 중사’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을까. 어느 늙은 부부의 소중한 외아들이자, 전쟁터에 오기 전에는 한 번도 누군가를 때리거나 맞아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정말로 전쟁터에서 죽게 되었을까, 아니면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귀환하여 다시 부모님도 만나고 이전의 일상을 돌아갔을까. 작가는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을 이나모리 키와는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또 전쟁이 끝났어도 위안소를 떠나지 않았던 “에미코”의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갔을지,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휩쓸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김원봉의 여동생”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작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의도한 바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무책임한 공백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비어 있는 페이지, 쉽게 읽어나갈 수 없는 여백, 규칙적인 호흡을 깨뜨리는 난코스와도 같은 구절. 이것은 우리를 위해 작가 남겨둔 또 다른 길목이다. 아직 우리가 다가가지 못한 지점이라면 이제 우리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움직여야 한다. 그 지점이 만약 누군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야만 이전과는 다른 길목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이야기들을 듣게 될 것이다. “뛰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 속도로 달릴 수는 없어도 그 거리를 달릴 수는 있다 큐큐 파파”. 참고자료 1) 유미리, 김난주 옮김, 『8월의 저편 上』(상), 동아일보사, 2004, 9쪽. 이하, 쪽수만 표기한다. 2) 윤송아, 『재일조선인 문학의 주체 서사 연구』, 인문사, 2012, 463쪽. 3) 유미리의 외할아버지 양임득(1912-1980)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썼던 손기정을 잇는 유력한 마라토너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미리의 디아스포라적 위치는 일제강점기 징병과 해방 후 이데올로기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던 양임득의 이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변화영, 「기억의 서사교육적 함의」, 『한일민족문제연구』 11, 한일민족문제학회, 2006, 5쪽. 4) 유윤종, 「유미리 장편소설 ‘8월의 저편’ 18일부터 연재 시작」, 《동아일보》, 2002년 4월 15일 자. 5) 정영환, 임경화 옮김,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푸른역사, 2019, 76쪽. 6) 그는 중대장의 명령으로 어느 소집병이 중국인 포로의 목을 베어버리는 과정, 전투 경험도 없는 철부지 소년병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부들부들 떠는 장면, 시체가 둥둥 떠 있는 강물로 밥을 지어 먹은 상황, 정신이상 증상을 보이며 군 병원으로 간 쓰카모토 중사의 모습을 나열하면서 마지막에 나미코(김영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기가 길어져서 미안하군. 부대에서 하면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고향에 돌아간다고 해도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겠어…… 나미코밖에 없어.”(하권, 188-196쪽) 7) 왜 이런 어리석은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지, 당시 전쟁터에 끌려간 이들은 의심했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에 징집되어 필리핀의 민도로 섬에서 경비를 맡다가 미국의 포로가 된 오오카 쇼헤이는 포로수용소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장편 『포로기』를 썼다. 그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군부를 향한 증오를 드러냈다. “나는 생물학적 감정에서 진지하게 군부를 증오했다. 전문가인 그들이 절망적인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또한 근대전에서 일억 옥쇄 따위가 실현될 리가 없다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면서도 여전히 항복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 자신이 전쟁 범죄자로 처형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이 전쟁을 시작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고, 상황이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은 알겠지만, 이러한 시점에서 아무런 대응책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들의 자기 보존이라는 생물학적 본능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생물학적으로 증오할 권리가 있다.” 오오카 쇼헤이, 허호 옮김, 『포로기』, 문학동네, 2010, 357쪽. 8) 손종업, 「유미리의 『8월의 저편』과 언어의 문제」, 『어문연구󰡕』 40,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2, 334쪽. 9) 우리의 탄생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지만 일종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행위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탄생으로 세계에 나타난 인간은 말과 행위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며 세계에 새로움을 형성한다. 김세원, 『진정성, 자기다움의 윤리』, 한국학술정보, 2019, 147쪽. 10) 노다 마사아키, 서혜영 옮김,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2023, 68-69쪽.

너머의 새 글

너머의 한 문장

아마도 그곳엔 내 꿈이 기다릴 거라고
누군가 말해 주었나
멀리멀리 가야만 만날 수 있다고

권영희 「 마포종점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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