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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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이회성,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의 틈이 만들어 낸 이야기의 화수분

고재봉


▲ 이회성 (ⓒ 북해도립문학관)

  소설가에게 있어, 한 개인의 인간적 불행이 작가로서는 오히려 행운이 되는 아이러니컬한 경우가 있다. 이는 그 작가 스스로가 마치 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그 사회나 시대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 줄 수 있는 ‘문제적 개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를 꼽는다면, 재일 2세대 소설가인 이회성도 응당 포함될 것이다.
  이회성(李恢成, 1935- )은 1935년 일본이 지배했던 남사할린 섬에서 태어났다. 1947년 그는 가족과 함께 소련령이 되어 버린 사할린 섬을 탈출하여 삿포로에 정착했으며,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1969년 「또다시 이 길을(またふたたびの道)」을 통해 군조 신인문학상(群像新人文学賞)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그가 사할린을 탈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훗날 한인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유역(流域へ)』(1992)이나 1994년 그에게 노마문예상(野間文芸賞)을 안겨 준 『백년 동안의 나그네(百年のづ旅人たち)』와 같은 장편은 이미 그의 데뷔작에서부터 예비되었던 셈이다.
  특히 그는 1971년 《계간 예술(季刊藝術)》에 게재한 「다듬이질하는 여인(砧をうつ女)」을 통해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한 바 있다. 1939년 어머니를 따라 방문한 한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른바 ‘한국적인 것’을 표방한 작품을 통해 재일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것인데, 까닭에 1세대 작가인 김사량과 3세대 작가인 이양지, 유미리, 현월의 재일 문학을 잇는 가교로서 평가받을 만하다. 재일 2세대 작가로서 이회성의 작품은 그러한 점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 있다. 유년기에 겪은 천황제 파시즘 교육과, 전후 일본 사회에서 버성기며 차별받았던 ‘조선인’으로서의 경험이 그의 작품에는 고스란히 녹아 있다. 데뷔 이래 1970년대 후반까지 창작한 「우리 청춘의 길목에서(われら青春の途上にて)」, 「청구의 집 (青丘の宿)」, 「가야코를 위하여(伽倻子のために)」, 「반쪽발이(半チョッパリ)」와 같은 작품에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닥뜨린 재일 2세대의 내면이 드러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경계’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그는 사할린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끊임없이 이주를 강요받았고, 한때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에서 일했으나, 끝내 그곳의 시스템을 견디지 못하고 조총련을 탈퇴한 바 있다. 또한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며, 한국도 북한도 아닌 ‘조선적(籍)’을 유지한 점 역시 그의 작가적 삶을 결정짓는 조건이었다. 즉 이회성이라는 작가는 재일 2세대라는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존재의 틈과 균열로부터 이야기를 꺼내 창작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규정될 수 없는 자들의 고통과 난처함이 묻어나 있다.
  한편 이러한 이회성의 소설적 경향은, 그의 작품에 자신의 체험을 강하게 투영하였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단순한 회고록이나 자서전류로 전락하지 않고 소설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그의 소설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기인한다.

이 세 편의 소설들은 자전적(自傳的)인 요소를 담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나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 그것이야말로 ‘재일(在日)’ 바로 그 사실이었다.1)


  작품의 인물이 소설가의 분신이면서도, 그것이 곧바로 작가 본인으로 치환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에 나오는 ‘재일(在日)’ 주인공이 “나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이라는 말을 통해 다시 확인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 의미를 함부로 규정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에서 재일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고 심문하기를 반복한다. 즉 경계인으로서 현재의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조정하고 그 의미를 물어 가며 발견해 가는 과정이 그의 작품이 지닌 소설적 개성인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소설이 성장소설이나 서구적 전통의 ‘교양소설’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매우 적확하다.2)
  하지만 또 하나 상기해야 할 점은, 재일 2세대가 겪어야 했던 모순이 근본적으로 (출신이라는) 자신의 내부적 문제이면서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외부로 남아 있는 조국에 의해 배태된 문제라는 사실이다. 까닭에 그는 조국의 통일 문제나, 한국의 민주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소설가이면서 활동가로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가령 1974년 시인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오에 겐자부로와 함께 도쿄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거나 1986년 황석영의 마당굿 「통일굿」의 일본 공연을 후원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덕분에 이회성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1971년 한국을 방문한 이후 한국 독재 정권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아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199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고, 1998년 마침내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그의 한국 국적 취득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중 재일 2세대 작가인 김석범과의 논쟁은 매우 유명한 일화로 꼽힌다. 미래의 통일된 조국을 상정하여 국적을 잠시 유보하고 ‘조선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김석범의 주장에, 이회성은 결국 재일 일본인으로 흡수되어 사라질 바에는 차라리 남한을 선택하여 실재적 의미를 찾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항변했다.
  요컨대 그가 소설에서 제기한 문제는 규정되지 못하는 존재들의 난처함이었던 까닭에 그의 행동이나 글쓰기는 자신의 ‘실체’ 혹은 사회적 ‘육신’을 획득하는 과정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초기작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재일 1세대였던 아버지의 폭력, 가난과 가출, 국적으로 인한 사랑의 실패 등―을 서정적 문체를 통하여 시적(詩的)으로 봉합한 반면, 후반기의 작품들이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며 매우 강한 역사성을 표방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남한 국적의 선택 역시 그의 이러한 작품 활동의 궤적과 포개어진다는 점에서 이회성이라는 한 개인의 작가적 삶은 재일 2세대의 삶이 공명하여 빚어진 반영물인 셈이다.

각주

1) 이회성, 김숙자 옮김, 『죽은 자가 남긴 것』, 소화, 1996, 7쪽.

2) 다케다 세이지, 재일조선인문화연구회 옮김, 『‘재일’이라는 근거』, 소명출판, 2016, 46쪽.

필자 약력

인하대 HK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식민지 말기 만주국에서 생산된 조선인 문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