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호
이별의 역사
반수연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서 남편은 한숨도 잠을 자지 않았다. 거의 12시간 동안 그의 각성은 계속되었다. 문자 그대로 머리만 닿으면 자는 남편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25년 전 이민 오는 비행기에서도 그는 잠들지 못했다. 시골 공항에서 부모 형제와 눈물로 이별하고 비행기를 탄 참이었다. 비행시간이 길어질수록 남편의 얼굴은 검게 변했다. 고뇌하는 남편은 낯설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남편은 그날 정말 무섭고 괴로웠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고작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에 아내와 어린아이를 데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땅으로 이주를 하자니 왜 아니었겠는가.
결혼 30주년 기념 여행이라는 걸 하자고 했을 때, 남편은 리스본의 언덕길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서울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남편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난 이삼 년 책 작업 때문에 나는 꽤 오래 서울에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서울의 궁들의 단풍이 얼마나 찬란한지, 산들이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말하며 설득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리운 것도 보고픈 것도 없다던 사람이 한국에 갈 날이 다가오자 밤잠을 설쳤다. 닿을 수 없는 것에 그리움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것도 고통이니까. 그러다가 싹을 자르고 스스로 속인 거겠지. 막상 아무런 책무 없이 나랑 손잡고 서울 구경이나 하고 오자고 하니 그리 좋았나.
“한국에 가면 뭘 하고 싶어?”
나는 여행을 준비하며 누차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뭐, 그다지, 하고 소극적인 대답만 내어놓았다. 이민을 떠난 지 25년 만에 우리 둘만 비행기를 탄 건 처음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나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창에 얼굴을 대고 밖을 보느라 바빴다. 지하철을 탈 때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지하철 노란 티켓을 찾기도 했다. 복잡해진 지하철 노선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촌티를 냈다. 하지만 표정은 내내 싱글벙글 소풍 나온 어린아이의 그것 같았다.
서울 거리를 오래 걸었다. 마침 단풍이 절정이라 인왕산도 북한산도 일 년 중 제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궁은 고즈넉했고 새로 단장한 거리의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눈길을 붙잡았다. 그는 일없이 가게 상호들을 소리 내서 읽고, 음악이 나오면 길거리에서 몸을 흔들기도 했다. 30년 전 신혼여행지이던 제주의 호텔에도 갔다. 호텔은 쓸쓸한 폐허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때 그 자세로 기둥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다.
“불심을 가진 것도 아닌데 나는 절집이 그리 좋다.”
구례 화엄사는 어디서든 늘 아련하게 기억되는 곳이지만 막상 가보니 기억보다 더 좋았다. 촌스럽게 반짝이지 않아 더 위엄이 있었다. 단풍이 끝물이라 간혹 애절하게 붉고, 또 쓸쓸하게 말랐는데, 절집으로 들어가는 네쌍둥이 같은 수녀님들 덕에 마음이 참 따뜻해지기도 했다. 절 밑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으면서, 왠지 산채비빔밥 먹기 참 좋은 나이구나 싶었다.
“더 나이 들면 이마저도 씹기가 부담스러울 거야.”
지리산 성삼재로 향하며 내가 말했다. 고도 때문인지 그곳은 이미 나뭇잎이 떨어져 버려 겨울 산 같았다. 둘이 손을 잡고 산길을 걸었다. 겨울 산도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해 질 녘이 가까워 돌아갈 시간이 왔다. 주차장 출구에는 주차비 자동정산기가 있었는데 기계 옆에는 ‘카드 전용’이라는 글자가 크게 붙어 있었다. 내 차 앞, 막 출구로 나가려는 자그마한 자동차에는 뒷모습만 보아도 초로의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일인지 기계 앞에 차를 멈추고 꼼짝 않고 있었다. 카드가 없나? 불륜이면 카드 못 쓴다던데. 나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조수석에서 아주머니가 내렸다. 아주머니는 카드만 된다는 주차 정산기에 천 원짜리 지폐를 넣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내 전화기 뒤편에 꽂힌 한국 카드를 들고 뛰어 내려갔다. 뭐해? 왜 내려? 나는 또 오지랖을 떨고 있는 남편에게 소리쳤다. 남편은 어느새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내 카드(!)를 흔들며 “제가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소리쳤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남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한국 카드에 서투르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운전 중이던 내가 내려 결제를 도왔다. 내 뒤로도 줄줄이 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는 남편 손에 끝까지 천백 원을 쥐여 주었다. 차를 타고 떠나면서 열 번쯤 고맙다고 인사했다. 마음이 정말 이상했다. 오랜만에 가을 산에 나들이를 나온 노부부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지 못해 쩔쩔매는 상황은 나도 마음이 좀 아팠다. 돈이 있어도 결제가 안 되고, 뒤로 차가 줄줄이 서 있어 차를 뺄 수도 지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그들이 느꼈을 난감함이 손에 잡힐 듯했으니까.
고향으로 온 며칠 후, 우리는 통영의 용화사에 올랐다. 단풍 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정말 예뻤다. 작은 산이지만 초입이 매우 가팔라 늘 입구에서 숨을 헐떡이게 되는데, 그날은 산 아래서 손두부에 막걸리를 한잔한 참이라 더 씩씩거리며 올랐다.
한 시간쯤 산책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70대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우리 쪽으로 떠밀려왔다. 남편은 뛰어가 그분을 부축하고 등산용 막대기를 쥐여 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이쪽으로 걸으세요. 여기가 경사가 덜해요.” 간섭하며 그분 옆으로 걸었다.
“한 차를 타고 왔는데 죽을 둥 살 둥 기어올라 절에 가서 절하고 오니 아무도 없네.”
그분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남편은 부축할 수 있는 거리에서 할머니와 함께 걸었다. 평지에 도착했을 때, “여기 있었소?” 하며 두 노인이 앉아 있는 벤치로 갔다.
“여기 앉으소.”
노인들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일행을 만나 다행이라며 남편은 막대기를 돌려받았다. 잠시 후에 할머니는 그 노인들은 일행이 아니더라며 우리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행도 아니면서 그리 정겨운 대화들을 나누는 할머니들을 보며 남편과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를 썼다.
제주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남편은 온갖 사람들의 짐을 선반에 올려주고 내려줬다. 그렇게 오지랖을 떨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나는 그의 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렸다. 다, 어머니들이신데 도와야지, 남편은 대답했다. 남편이 도운 분들이 자기 또래라는 걸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서른이 갓 넘은, 이민 갈 때의 그 청년인 줄 아는 듯했다.
다니는 곳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것도 모르고 간섭하는 남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소소한 마음들을 나누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사람 사는 맛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국에서 오랫동안 그걸 못하고 살아 참 쓸쓸했겠다고.
누가 아파서 온 것도 아니고 부고를 듣고 달려온 것도 아니고 그냥 놀러 나온 남편은 그렇게 4주를 보내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나는 산문집 출간을 앞두고 한국에 남았다.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살짝 포옹하고 헤어졌는데, 왠지 애인 군대 보낼 때와 비슷한 슬픔이 느껴졌다. 그가 가기 싫어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텅 빈 집으로 돌아가 비로소 혼자 남게 되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식구 넷이 언제나 붙어 다니던 시절이 오래 있었다. 캐나다 밴쿠버의 하늘 아래 우리 넷뿐이었으니까. 넷 중의 하나가 머리를 자를 때도, 우유 하나를 사러 마트에 갈 때도, 어디든 갈 수만 있으면 소풍 가듯 네 명이 함께 갔다. 고작 오 분을 함께 차를 타고 가도 여행인 듯 즐거웠다. 지금 남편은 밴쿠버로, 나는 한국에, 딸아이는 샌프란시스코에, 아들은 뉴욕에 있다. 다들 자랐고 뜻한 일을 하기 위해서 흩어져 있다. 어쩌면 아이들을 양육하며 이런 날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하다. 어떤 상실감이 자꾸 뭉긋하게 가슴을 누른다.
이젠 사 주씩이나 나오지 말아야겠다. 남편은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내게 문자를 보냈다. 너무 정들어 버리니까 가기 싫다고도 했다. 어쩌면 남편은 이번 비행기 속에서도 한숨도 자지 못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고국의 대지에서 익숙하고 정겨운 사람들과 웃고, 먹고, 사랑하며 지낸 이 가을이 또 한동안 그를 지탱해 줄 것이다. 이별을 견디게 해줄 것이다.
통영에서 태어났다. 1998년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 공장지대에 식당을 열었다.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힘겨워 카운터에 앉아 내내 책을 읽었다. 2002년 식당이 망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05년 「메모리얼 가든」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데뷔했다. 청탁도 없고 기억하는 이도 없이 서서히 잊혔다. 2014년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14, 2015, 2018년 재외동포 문학상을 받았다. 2020년 「혜선의 집」으로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2021년, 등단 16년 만에 단편소설집 『통영』을 펴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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