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title_text

2호

더는 낯설지 않은 이름들

김이향

   “긴 리카.”

   모깃소리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옆 친구한테도 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녹음기에는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내가 내 이름을 말한 순간, 내 입 앞에 녹음기를 들이대던 도리야마 선생님은 잠깐 날 응시했다가 내 옆 친구 쪽으로 녹음기를 옮겼다. 녹음기가 내 앞에서 떠난 순간 나는 극심한 긴장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렸다. 그날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기억이 안 난다.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이었다. 담임이던 도리야마 선생님은 어느 날 녹음기를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전학 갈 카나 짱과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 반 학생들이 자기 이름을 한 명씩 녹음기에 담아 카나 짱한테 건네자고 한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도리야마 선생님 앞에서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선생님뿐 아니라 반 친구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은 적 없었다. 처음에 도리야마 선생님은 내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그런 거라고 별 신경 안 썼지만,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웃지도, 울지도 않고 과묵하게 있으니 나중에는 나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내 어머니한테 나를 병원으로 데려갈 걸 제안했다(반대로 어머니는 집에서 내가 활발하게 지내는 걸 아니 선생님의 말을 안 믿었다).

   그런 내가 카나 짱이 학교를 떠나는 그날, 어쩔 수 없이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카나 짱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지 녹음기라는 냉정한 기계 앞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리야마 선생님은 감동했는지, 그해 설날에 나에게 보내 온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나 짱 송별회 때 목소리 들려줘서 고마워. 선생님은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

   나는 어릴 때부터 내 이름이 싫었다. 미카 짱은 ‘오하라’, 사오리 짱은 ‘다카야나기’, 나오 짱은 ‘야마자키’…… 다 성이 긴데 나만 왜 ‘긴’이라는 짧은 성일까, 어린이집을 다녔을 때부터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어머니한테 물어보면 무슨 무서운 이유를 알게 될 것 같아서 물어볼 용기도 없었다. 언젠가는 나와 같은 성의 친구를 만나겠지, 희망을 품으면서 지냈지만, 결국 나와 비슷한 성을 가진 친구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 혼자만 이질적인 존재라는 걸 어릴 때부터 느끼곤 했다. 어린이집 시절 아무도 내 성을 가지고 뭐라 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언제 나한테 물어볼까 봐 긴장한 상태였고, 그러다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안 사귀게 되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표정도 없이 지내는 게 자기방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친구들 앞에서 처음 자유롭게 소리 내서 웃은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내 옆자리 친구가 개그를 해서 빵 터졌다는 사소한 계기였지만, 한 번 친구들 앞에서 입을 벌려 웃고 나니 긴장의 끈이 확 풀린 듯 해방감을 느꼈다. 그 뒤부터 나에겐 매일 통학을 함께 하는 단짝이 생겼고, 그 애와 싸우다 또 다른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내 이름 한글로 어떻게 써?”

   초등학교 4학년 때 제일 친했던 아사에 짱이 갑자기 물었다. 그때쯤 되면 나도 내가 한국 사람이고, ‘긴’이라는 짧은 성은 한국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사에 짱은 몇 번 내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 어머니가 아사에 짱한테 ‘한국 음식’이라며 흰 밥이 들어간 된장국을 대접하곤 했기 때문에 아사에 짱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사에 짱이 자기 이름을 한글로 어떻게 쓰는지 알고 싶다고 나한테 말한 것이다.
   다음 날 아사에 짱한테 한글로 ‘고지마 아사에’라고 적힌 쪽지를 건넸다. 나는 한국어를 몰랐으니 어머니가 대신 써준 거였다. 아사에 짱은 고마워하면서 “이게 어떻게 아사에라고 읽는 거지?”라며 신기해했다. 반대로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신기한 모양의 언어를 읽지 못했고, 내 언어 같지 않았다. 어머니가 왜 한글을 쓸 수 있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주변 친구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 혼자 특유한 존재가 되기 싫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친구 중에서 내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나한테 묻곤 했다. 그들한테서 “리카 짱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잠시 굳었다가 모른다고 답하거나 일본 사람이라고 거짓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답해도 친구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별로 들지 않았다. 물론 아사에 짱처럼 친한 친구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았기에 이 거짓말이 얼마나 그들에게 통했는지 이제 알 수 없지만 말이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 이름은 ‘기노시타’였다. 기노시타 선생님은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가르쳤는데,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오늘은 교과서에 안 나오지만 중요한 역사를 가르치겠다” 하며 흑판에 그림을 그렸다. 한반도 지도였다.
   선생님은 “식민지 역사에 대해서 아는 사람?” 하고 우리에게 물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지만 그걸 예상한 듯이 선생님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왔다는 것, 그 후손들이 지금도 일본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때 기노시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게 정답이었을까. 모범적인 동포 아이라면 자신의 조국 역사를 알게 돼 감명되거나 중요한 역사를 알려줬다며 선생님한테 고마워했을까? 하지만 적어도 당시 나는 그 교실에서 뛰어나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지금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나는 과거 일본인한테 끌려온 불쌍한 조선인의 후손이었구나”, “나의 이런 수치스러운 정체를 이제 친구들도 다 알아버렸구나”……. 너무 창피해서 귀를 막고 싶었다. 학생들이 평소 수업 시간보다 선생님 이야기를 더 진지하게 듣는 것 같아 보여 더 싫었다. 그렇게 기노시타 선생님의 ‘특별한’ 수업은 한 시간밖에 안 되었는데도 반나절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고 아사에 짱이 나한테 다가왔다. 내 옆에서 짐을 정리하면서 아사에 짱은 “아까 수업, 리카 짱은 어떤 생각이 들었어?” 하고 물었다. 아사에 짱이 어떤 의도로 그렇게 물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때 나는 아사에 짱한테 “……안 듣고 있었어” 하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선생님한테 분노하고 있었다. 친구들한테도 한국인이라는 걸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내 정체성을 기노시타 선생님이 너무나 쉽게 폭로했다고 생각했다. 그저 선생님이 미웠다.

   내가 일본에 재일 조선인들이 다니는 조선학교가 있다는 것, 또 일본 학교 중에서도 한반도에 뿌리가 있는 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방과 후 수업인 ‘민족학교’가 있다는 걸 안 건 그로부터 약 10년 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였다. 그전까지 나는 일본 내 한 학교의 너무나 작은 세계에서 혼자 소외된 감정만 느꼈고, 내 뿌리를 부정하고 싶고 일본 사람이 되고 싶기만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같은 반에 있던 미키 짱이 전학 때문에 먼저 학교를 떠났다. 성이 ‘가네코’인 미키 짱은 송별회 때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에게 사과를 했다.

   “사실 나는 재일 한국인이에요. 그동안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당시 나는 충격을 받은 것과 동시에 그 친구한테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긴’이라는 이름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걸 어쩔 수 없이 드러내면서 살아왔는데, 미키 짱은 잘 숨겨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키 짱처럼 일본 이름을 쓰는 재일 한인에게도 고충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하지 못했다. 오히려 미키 짱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 친척들이 생각났다. 친척들 모두 ‘金海(가나우미)’라는 일본 성을 썼다. 한참 정체성 고민이 많던 나는 늘 친척이 부러웠다. 그리고 나도 하루빨리 ‘긴 리카’가 아니라 ‘가나우미 리카’가 되고 싶었다.
   그 욕망은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터져버렸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고 싶다고 부모한테 말했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다면 이 정체성의 고민이 모두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나우미 리카’로 완전한 일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듣자 어머니는 쓰러져 울었고, 나중에는 격분했다. 나 역시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워 울기만 했다. 어머니는 내가 왜 귀화하고 싶은지, 나는 어머니가 왜 귀화에 반대하는지 서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네가 일본 국적으로 바꿀 거면 너와 인연을 끊겠다”고까지 했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힘들게 살게 해서 미안하다 하면서 날 안고 울었다. 그러면서 어머니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며 귀화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라고 했다.

   여기서 잠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보자. 어머니는 도쿄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 한인 2세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아버지는 가정 폭력이 심했다. 폭력의 주 대상인 아내, 그러니까 어머니의 어머니는 많이 맞아 매일 귀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1세 아버지는 딸한테는 신체적 폭력을 가하지 않았지만, 딸의 모든 걸 통제했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집에는 저녁 8시까지 들어와야 하는 게 규칙이었다. 연애도 물론 금지. 규칙을 어기면 아버지는 또 아내를 때리기 때문에 대학생 시절 어머니는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도, 하고 싶은 아르바이트도, 연애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세 아버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김일성 지도자에게 심취했다. 주말마다 자식들을 텔레비전 앞에 앉히고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북한 정부를 지지하는 재일 한인 조직)에서 만든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버지의 일상이었다. 재일 한인의 북한 귀국 운동(북송 사업이라고도 한다)이 시작된 지 20년 정도 지난 1970년대 후반에는 장남(어머니의 오빠)을 북한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장남이 일본 의과대학에 합격하여 무산되었다.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자랑스럽게 간직한 건 생전에 거액을 기부한 대가로 북한 정부에서 받은 김일성 훈장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학생 시절 재일본대한민국민단(대한민국 정부가 공인하는 재일 한인 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1980년대 지문 날인 거부 운동 등 재일 한인의 권리 획득을 위해 민단이 주관한 시위 사진을 보면 마이크를 들며 외치는 당시 어머니 얼굴이 나와 있다. 그런데 어떤 시위 사진을 봐도 어머니 표정은 시위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로 가득 찼다.

   “어떤 시위인지는 사실 잘 몰랐지만 나갔다. 그냥 친구들이랑 사귈 수 있는 게 좋아서…….”

   나중에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그러다 어머니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여생을 한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 준비를 위해 우선 한 달 동안 대구에 있는 아버지 친척 집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결국 일본에서 유복하게 살아온 어머니에게 1980년대 한국 시골 환경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달 내내 배탈로 시달리다 결국 현지 의사한테 당신은 한국에서 살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어머니는 한국에서 사는 걸 포기했지만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살아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선 집에서 혼자 빨간 수건을 머리에 쓰고 소리치면서 한국을 응원했다. 딸이 다니는 학교에 제출하는 가족 서류의 ‘종교’ 칸에는 ‘유교’라고 쓰고, 그 옆에 ‘한국의 종교’라는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실제로 어머니는 한국 역사도, 한국어도 모르고, 한국 음식도 맞지 않았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유일하게 증명해 주는 건 한국 국적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불편했다. 백보 양보해서 본인은 그렇게 ‘한국인’으로 살아도 되지만, 왜 자식에게도 강요하는가. 결국 그렇게 싫어하던 1세 아버지와 똑같이 자기 자식을 통제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고등학생이던 나에겐 격분하는 어머니를 진정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귀화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귀화하겠다고 이야기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만족한 듯 평소 나에게 하던 태도로 다시 돌아왔지만, 귀화를 둘러싼 충돌로 나는 어머니를 불신하게 되었다.

   2010년, 결국 주변 친구들에게 ‘재일 한인’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지도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는 일본에 한류가 들어와 있었지만, 케이팝을 좋아하는 친구가 적어도 내 주위에는 없었다. 오히려 역사 시간에 한국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친구들이 ‘나 한국 싫다’든가 ‘한국인들은 억척같다’ 하는 말을 너무나 쉽게 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그 ‘억척같은’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알려질 게 무서웠다. 재일 한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친구들한테 차별당한 적은 없었지만, 차별을 당하지 않으려고 내내 신경 쓰면서 지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이야기할 수 없는 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나는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한텐 자기소개 하는 단계에서 재일 한인이라고 밝히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처음 대학교 입학식에서 재일 한인라고 자기소개를 해보니 생각보다 주변 반응들이 ‘아무렇지 않았다.’ 재일 한인이라 해도 시선이 달라지거나 나를 피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내 정체를 알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 날 대하는 친구들이 내가 재일 한인이라는 걸 안다는 점에 안도감을 느꼈다.
   재일 한인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다가 어느새 나 스스로 ‘재일 한인’이라는 존재에 관심이 생겼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들을 만나게 된 것도 계기가 되었다. 유학생 친구들과 나는 같은 한국 국적이지만, 나는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고 한국 문화도 모른다는 게 스스로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맞다. 내가 재일 한인이라 자기소개 하는 게 어머니와 뭐가 다르냐.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나는 한국어를 배워야겠다.” 그때가 1학년 가을 학기. 대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이미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일단 서점에서 한국어 교재를 사서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부산대학교 어학연수에 참여했다. 그때 나처럼 일본에서 온 학생이 10명 정도 있었다. 한국어를 배운 지 6개월 정도 된 시점이었는데, 거의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변 학생들은 ‘긴’이라는 이름 때문에 내가 당연히 한국어를 잘할 줄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재일 한인이지만 가족도 한국어를 모르고 나도 모른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명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주 어렸을 때 친할아버지 고향인 제주도로 가본 적이 있지만, 기억 속에선 부산이 인생 처음으로 보는 한국 모습이었다. 비행기 창문에서 보이는 부산은 미세먼지 때문인지 생생하지 않았고, 높이 지은 아파트들이 다 똑같이 생겨서 구소련 시절 러시아로 온 것 같았다. 나의 ‘조국’에 왔다는 감동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생소하기만 했다.

   “Kim Ri Hyang.”

   부산대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받은 이름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Rihyang’이라는 이름은 여권에서만 보던 이름이어서 낯설었다. 그렇기에 부산대학교 학생들과 교류할 때도 이름이 ‘Rihyang’이지만 재일 한인이기에 한국어를 잘 못하고, 일본에서 쓰는 이름은 ‘Rika’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보다 한국어를 잘하는 일본인 친구들은 한국 학생들과 한국어로 대화하는데, 나는 한국 이름인데 영어로밖에 한국인들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게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한 일본인 친구와 같이 당일치기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역에서 일단 헤어진 뒤 친구는 본인이 좋아하는 연예인 소속사 건물을 보러 갔고, 나는 서대문 형무소로 향했다.
   한국에 오기 전, 대학교에서 한국 역사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서대문 형무소를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에 저항한 운동가들이 투옥되었고, 해방 후에는 서울 구치소로 시국 사범들이 수감되던 곳. 그런데 나는 독립운동가들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어떤 식으로 전시되어 있는지 그저 궁금해서 서대문 형무소로 간 것이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본 경찰이 수감자에게 고문하는 모습을 실감 나게 재현한 모형이나 수감자들의 비명 소리 등 여러 연출로 일제의 만행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내 옆에는 초등학생 저학년 아이들이 지나치게 잔인해 보이는 그 전시물을 함께 보고 있었다. 그 애들을 보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기노시타 선생님이 ‘교과서에 없는 역사’라며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 수업을 한 날이 기억났다. 선생님은 그때 왜 우리한테 그 수업을 한 걸까. 어린아이들에게 자극적인 전시물로 일제 역사를 가르치는 한국과 식민 지배를 포함한 근현대사를 거의 안 가르치는 일본 사이에서 기노시타 선생님은 학생에게 무엇을 남기려고 한 것이었을까.
   부산에 돌아온 뒤 한국인 학생한테 서대문 형무소에 다녀왔다고 이야기했더니 한국 친구들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여주면서 “이향, You are Korean!” 하며 웃었다.

   “네가 한국어를 모르건 한국 문화를 모르건 서대문 형무소로 다녀오는 네 마인드가 진정한 한국 사람이지.”

   이런 논리가 통할 정도로 서대문 형무소가 한국인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장소였나 보다. 나는 그런 민족주의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형무소로 간 것이었기에 그들의 반응이 어색했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일본 사람이라고 일본 친구들에게 거짓말했듯이 한국에서 한국인들에게 내가 한국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3주 동안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일본에 온 뒤 더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학원도 주변에 없어 여러 교재를 사서 집에서 매일 하나씩 문법을 배웠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흐뭇해하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국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죽기 전에 귀화하려고 해.”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다.

   “갑자기 왜요?”

   “나는 어릴 때부터 ‘권혜숙’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는데 그 이름이 싫었어. 그게 다 아버지가 나에게 강요한 이념이었어. 그러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잊지 않기 위해 오히려 한국 국적을 고집하고 한국인이 되려고 했어.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이 의미 없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외할아버지가 죽은 날이 기억났다. 내가 네다섯 살 때쯤, 그날은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는 초록색 바닥이 차갑게 느껴진 병실에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편안하게 자는 것처럼 누워 있었고, 그 옆에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배를 치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머니가 왜 그때 그토록 눈물을 흘렸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머니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삶의 원동력이었는데, 정작 아버지는 사과 한마디 없이, 심지어 어떤 고통이나 대가도 치르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 원망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이 감정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누구한테 풀어야 할지도 몰랐다.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도 어머니는 이미 아버지의 감옥 속에 깊이 갇혀 있었고, 그 속에서 저항하는 것 외에는 살아갈 법을 몰랐다. 그래서 아버지가 강요한 ‘한국인’이라는 이념에 집착하는 것을 통해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귀화하겠다는 자기 딸과의 인연보다 집요하게 유지하고 싶었던 그 고집.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 딸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고집이 점점 사라져 갔다. 마침내 어머니는 아버지의 감옥에서 벗어난 것인가.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어머니와 닮았다. 한국어를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건 한국인이라고 하면서 정작 한국어를 모르는 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귀화 문제를 계기로 생긴 어머니에 대한 불신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혼자 모색하고 있던 것이다.
   어쩌면 국적이 한국이라든가 조국이 한국이라든가, 그런 이념은 재일 한인들의 고민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가족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독감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2015년 한국에 유학한 해, 친할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로 가 당숙을 만났다. 당숙은 명절 때마다 일본을 찾아왔기에 나한테도 친한 삼촌 같은 존재다. 제주도에서 당숙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당숙은 말했다.

   “친척 중에 네 아버지만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한국 이름으로 살고 있다. 그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일이다.”

   재일 한인 2세인 내 아버지는 일곱 형제 막내인데, 아버지를 빼고 모두 최근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귀화에 반대하던 그들 어머니(나에겐 친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다. 형제들이 줄줄이 한국 국적을 버렸는데, 아버지만은 어머니를 속이기 싫다며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아버지는 당숙이 말하는 것처럼 민족의식이나 애국심 때문에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게 아니다. 재일 한인 1세로 살아온 자기 어머니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살아갈 의미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이향.”

   지금 내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다. 2017년 한국에 있는 대학원을 졸업한 뒤 한국에서 5년째 일하고 있다. 한국 생활이 7년째에 접어들면서 처음에 어색하던 ‘이향’이라는 이름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일본에선 잘 없는, 하지만 한국에선 너무나도 흔한 성을 쓰는 평범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눈에 잘 안 띄는’ 존재가 되어보니 내가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 살던 기억이 한국 사회에서 망각되는 느낌이 들고, 한국에서도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이제야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갑자기 울면서 재일 한국인이라고 고백한 미키 짱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친구들에게 한국인이라고 고백할 수도 없었는데, 미키 짱에겐 적어도 그 용기가 있었다.
   그래도 그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던 미키 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우리가 이름이나 국적을 숨긴 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야. 우리의 정체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이 사회가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기 때문이야. 우리는 당당히 살 권리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어머니는 처음에 나한테 귀화를 하겠다고 한 뒤 10년 가까이 된 지금도 결국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가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딸이 사는 한국에 언제든 편하게 가기 위함이다. 그런 어머니가 가끔 미울 때도 있지만, 나 역시 한국어를 점점 잘하게 되면서 어머니에 대한 고집도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한반도 식민지 역사에 대한 수업을 한 기노시타 선생님에게. 저는 기노시타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감정이 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친구들이 저한테 자주 말합니다. “네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없어”, “너는 너야” 같은 말을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지만,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어떤 역사가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아픈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기노시타 선생님처럼 그들이 아픈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다음 세대에게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싶습니다.

필자 약력
김이향 작가 프로필 사진

1991년 일본 도쿄에서 재일 한인 3세로 태어났다. 만 25세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대학원 입학을 계기로 한국에 이주했다. 한국에 있는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배워 재한(在韓) 자이니치(在日) 2세 여성에 관한 연구를 했다. 석사학위를 딴 뒤에도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디아스포라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연구 및 저서로 「돌아온 조국과 그리운 고향 사이에서: 재한(在韓) 자이니치(在日) 2세 여성의 집」(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논문, 2017),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한국인류학총서 『재일한인의 인류학』(공저, 2021), 역서로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 일본 속 작은 제주』(공역, 2019)가 있다. YTN 다큐멘터리 〈재일동포 1세의 기록: 하나의 역사, 또다른 기억〉(2018), 〈이산의 섬, 사할린〉(2018), 〈코로나 시대의 이주민들〉(2020)을 연출했다.
* 사진제공_필자

공공누리로고

출처를 표시하시면 비상업적·비영리 목적으로만 이용 가능하고, 2차적 저작물 작성 등 변형도 금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