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5호
손톱 밑의 가시처럼
이현숙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산다. 바로 치료했다면 좋았을걸, 그 시기를 놓쳤다. 뿌리가 깊게 파고 들어가 자극을 받으면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건드렸을 때처럼 온몸의 신경 세포가 경련을 일으킨다. 나와 작은아들에게는 그런 아픔이 있다.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다. 오전 내내 TV에서는 정규 방송을 멈추고 총격 사건을 보도했다. LA에 있는 중학교에서 학생 두 명이 총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경찰은 오발 사고라 발표했다. 한 여학생이 학교에 와서 보니 자신의 가방에 총이 있었다. 놀라서 바닥에 떨어트렸는데 총알이 발사된 것이다. 실수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발 빠른 한 방송국 리포터는 가해자로 판명된 학생의 할머니와 전화로 인터뷰를 했는데 최근 손녀가 학교에서 왕따(bullying)를 당해 힘들어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왕따. 그 단어는 나의 상처를 덧나게 했다. 작은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 떠올랐다. 상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아들이 절도죄로 현장에서 잡혔다는 것이다. 내 귀를 의심했다. ‘사기 전화인지도 몰라. 아닐 거야, 뭔가 잘못됐겠지’ 하는 마음으로 거듭 확인을 하고 경찰서로 갔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길인데 천릿길보다 멀게 느껴졌다. 경찰서 문이 왜 그리 무거운지 양손으로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담당 경찰은 아들이 백화점에서 여성용 향수를 백팩에 넣고 나오다 걸렸는데 경범죄이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아들은 축 처진 어깨로 경찰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설마 하며 붙잡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릎에 힘이 빠지며 주저앉으려는 걸 참고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일단 집으로 왔다. 아들을 붙잡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입을 꾹 다문 그는 말이 없었다.
“남의 물건을 훔쳤다는 말이 정말이니? 내가 너를 그렇게 잘못 가르쳤어? 엄마가 장사하며 좀도둑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알면서 네가 그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는 아들이 미웠다. 하루 16시간 힘들게 일하는 게 다 자식을 위한 것인데 몰라주고 말썽을 피우냐며 내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그의 등을 펑펑 때렸다. 쉬는 날 없이 일하느라 쌓인 짜증과 원만하지 못한 부부 관계에 대한 분풀이를 그에게 쏟아부었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화는 점점 타오르며 그 열을 더해 갔다. 고개 숙인 아들의 정수리를 맴도는 가지런한 머리카락들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내 감정을 비웃는 듯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더 타오를 수 없을 지경이 된 화는 눈물이라는 돌파구를 찾아 분출되었다.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수업이 끝났으면 바로 집으로 오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을 하든지. 아니, 형이 데리고 가면 되는데 왜 친구들과 가서 문제를 만드냐.
내 설움에 겨워서였다. 녹록지 않은 이민 생활은 여자에게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들어가나 나가나 일에 치여 지치고 힘들었다. 아내, 엄마, 며느리, 딸, 상점 주인…… 한 몸으로 다섯 역할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다. 능력 부족이었는데 내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적된 과로 속에서도 자식들 커가는 모습에 희망을 걸고 살았는데 생각지도 않던 일을 겪고 나니 지난 시간이 허무해졌다. 자식 앞에 구걸하다시피 앉아 있는 내 처지가 처량하기도 했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계속 흘러내렸다. 무심한 듯 꼼짝하지 않던 아들에게 나의 흐느낌이 진동으로 전해졌는지, 슬쩍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그의 눈길도 물기로 가득 찼다. 마침 집에 돌아온 큰아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엄마가 바쁘면 형이 동생을 챙겨야지 그동안 뭐 했냐고 소리를 질렀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문에 부딪혔다. 그날 밤, 양쪽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밤새.
아들은 학교에서 5일 정학을 받았다. 학교에 못 가고 집에 있는데 잔뜩 움츠린 등이 보기 싫었다. 내 아들이 도둑질을 하다니……. 가족들에게는 말을 안 했다. 시부모님이 아시면 걱정하며 아이들 교육에 소홀한 나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아들과 같은 또래의 조카도 있는데 그와 비교된다면 또 다른 상처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이 일 이후로 작은아들은 말이 줄었다. 별 감정이 없는 듯 보이는 아들을 아침에 학교에 내려주고 일터로 가면서 부모 노릇을 하기 힘들다며 한숨이 나왔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뜨면 몸이 진저리를 치며 경계했다. ‘혹시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설마 또 말썽을 부렸나?’ 두 마음이 서로 엎치락뒤치락 씨름했다. 작은아들은 저녁 식사 시간에도 숙제가 남았다는 이유로 같은 식탁에 앉지 않았다. 서로 마음을 닫았다.
청소년 법원 가는 날이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옷을 다리며 내 마음에 생긴 주름도 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정하게 하고 차리고 가면 판사가 잘 봐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서 차에 오르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좋은 일로 성장을 하고 나들이를 하는 길이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큰아들이 함께 가자고 하는 걸 등 떠밀어 학교로 보냈다. 형제지간이라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다는 것을 칠 남매 속에서 자라며 깨달았다.
패서디나에 있는 청소년 법원은 무뚝뚝하게 문을 반만 열고 서 있었다. 8시 30분까지 오라는 지시에 서둘러 7시 40분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려는 사람이 많이 밀려 있었다. 이들은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 왔을까. 나와 같은 심정일까.
안내원의 지시대로 일 층 구석진 문 앞으로 가 줄을 섰다. 앞에서 세 번째. 이 순서대로라면 일찍 끝내고 돌아갈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다. 8시 30분에 문이 열리고 뱀 꼬리처럼 늘어섰던 사람들이 작은 방을 꽉 채웠다.
칸막이 처진 창구 안에서 직원이 이름을 불렀다. 도착한 순서대로 일이 처리될 거로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사건이 접수된 대로 하는 것 같았다. 일 처리가 느리게 진행되어 기다림의 시간이 늘어지기에 지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갖 인종들이 모여 사는 LA라서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언어들이 소곤거림 속에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복장도 자유롭게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 헝클어진 머리로 마치 옆집에 마실 나온 사람들 같은 차림인 이들도 있었다. 깔끔히 차려입은 우리와 비교가 되었다. ‘법과 관’에 약해 겁부터 먹는 우리네와는 다른 관습에서 오는 의식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얼굴은 굳은 채 근심의 그늘이 내렸다.
옆을 보니 아들의 입술이 바짝 말라 하얗게 갈라졌다. 어느새 여드름이 돋아나고 코밑에 자리 잡은 꺼뭇한 수염이 더는 내 손 안의 자식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까칠해진 얼굴에서 그동안 남모르게 겪은 아들의 속앓이가 느껴졌다. 자신을 철석같이 믿어 준 부모를 실망하게 한 데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은 어느새 11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예약이 생활화된 미국, 줄서기에 익숙한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시키고, 세 번째였던 우리의 순서를 제치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빠져나가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이 시간에 가게를 닫아 손해를 보고 며칠째 뺏긴 아들의 학과 진도는 어떻게 메우는가 말이다.
딱딱한 의자에서 벌서는 심정으로 앉아 있자니 엉덩이가 배겨왔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데 드디어 아들을 호명했고, ‘Room A’ 하며 간단히 지시를 내렸다. 옆문을 지나 진찰실처럼 쭉 늘어선 방들 사이에서 ‘A’를 찾았다. 큰 숨을 몰아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슬쩍 잡아 보았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두드린 내가 더 놀랐다. 살짝 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TV에서 보던 큰 법정이 아니었고, 책상 뒤로 권위적인 가운을 입은 판사가 앉아 있었다. 피곤함에 지친 얼굴에 감정을 읽을 수 없이 메마른 쉰 살은 넘은 듯 보이는 백인 남성이다.
부모는 대기용 의자에, 아들은 앞쪽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개인 신상명세서를 확인하고 경찰이 올린 보고서 내용을 읽었다. 가만히 수긍하는 아들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식에 대한 어미의 보호 본능이리라. “내 아들은 나쁜 아이가 아닙니다.” 조용히 하라는 판사의 면박에 스르르 자리에 앉았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들이 애처로웠다. 내가 아는 단어들을 모두 나열해도 이 순간에 아들을 변호할 수 없음을 안다.
판사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죄라 했다. 거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벌금 450불을 내고 사회봉사 40시간을 해라. 벌금을 어떻게 낼 것인지 물었다. 부모가 하는 가게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교회에서 봉사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판사는 땅, 땅, 땅 나무망치를 두드렸다. 우리가 두 달을 서로 간에 내색도 못하고 마음 졸였던 고통과 3시간 넘게 1초, 1초 세어 가며 기다렸던 조바심을 단 10분 만에 끝내 버린 것이다.
더 나쁜 판결을 받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심보다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드는 내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을 지옥에 밀어 넣었던 그 일이 경고로 끝나는 정도의 사건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뭐가 뭔지 내 마음을 모르겠다.
아들이 주말이면 가게에 나와서 일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벌금은 내가 먼저 내주었다. 나는 아들과 눈도 맞추지 않았다. 주위 사람은 자식 자랑이 넘치는데 나만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것에 화가 났다. 자존심이 상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누가 알게 될까 봐 쉬쉬했다. 나중에라도 ‘그렇고 그런 애’로 아들이 낙인찍힐까 봐 그럴 수 없었다. 혹시 아는 사람과 마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차로 향했다.
한동안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둥둥 떠다녔다. 형제가 자주 어울려 다니고 교회에 나가면서 그 일은 잊힌 듯, 아니 입에 담지 않는 불문율이 되었다. 작은아들이 그럭저럭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 탄성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듯 우리도 그랬다. 그 후로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아 안심했고 사는 일에 바빴다. 어느새 서로 편안해졌다.
6-7년 지난 어느 날이다. 친구와 한인 타운의 청소년 센터에서 주최하는 교육 세미나에 참석했다. 주제는 ‘한인 청소년 왕따 실태 연구’였다. LA 한인 가정의 아이 중에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는 학생이 40퍼센트고, 그중 75퍼센트는 목격했지만 선생님께 알리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봤다. 외모나 피부색이 달라서, 성격이 소심하거나 왜소한 체격이거나, 혹은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표적이다.
강사는 이민자 가정은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 내용이다.
아이들이 방과 후 희생양이 될 아이를 백화점에 강제로 데려간다. 시끌벅적 떠들다 일행 중 한 명이 그 아이의 백팩을 열고 몰래 물건을 넣는다. 모른 척하며 문을 나서는 순간 물건에 부착된 알람이 울리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숨는다. 경비가 와서 그 아이의 몸을 수색한 후 경찰이 와서 수갑을 채운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곤욕을 당하는 모습을 숨어서 보며 즐긴다. 가해 아이들은 그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학교에서 돌려보며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을 부모나 교사에게 알리면 고자질했다고 더 심한 따돌림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폭행을 당해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례도 많다.
아, 이럴 수가. 강사의 실례를 들으니 당시 작은아들의 상황에 톱니가 맞추어졌다. 아들은 왕따를 당했다. 그때는 왜 생각을 못했을까. 그를 믿어주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했다. 학교에서는 또래들에게 왕따를, 집에서는 엄마에게 무시당하며 이중으로 고통을 겪었을 아들이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을까.
혼자서 당하며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맞지는 않았는지. 점심값을 빼앗기고 굶지는 않았는지. 4년을 어떻게 이겨냈을지, 견뎠는지 상상이 안 됐다. 체격이 또래에 비해 작고 연약해 보여 표적이 될 것일까?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아시아인이기 때문인가. 혹시 내가 자주 끓이는 된장찌개와 김치 냄새가 옷에 배어 따돌림은 당한 것은 아닌가. 일하느라 바빠서 학부모 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내 탓인지도 몰라.
이런저런 취미 활동을 키워주지 못하고 저절로 하겠지 하고 내버려둔 잘못이다.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생일잔치도 해주었어야 했는데 부족한 영어로 버벅대는 것이 부끄러워 아니 피곤하다는 핑계가 먼저였지, 아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 내 정성이 부족했다.
왜 아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게임기나 신발이 아니고 여자 향수였는데 왜 한 번쯤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못했을까.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억울해도 말 한 마디 못했던 그 애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엄마가 도둑으로 몰아갈 때, 왕따를 시킨 아이들보다 엄마가 더 미웠을 것이다. 엄마에 대한 아들의 믿음이 깨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등을 때렸던 손이 미웠다.
무지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부모는 자녀의 왕따 피해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해 믿음을 심어 주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려 들지 못했다. 그 후부터 강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 안에서 혼자가 되자 가슴을 쳤다. 간혹 주위에 자식의 교육이나 장래를 위해 미국에 이민 왔다는 한인들을 만난다. 미국의 문화와 한국의 풍습 사이에서 적응하느라 힘들 자식의 고통을 아는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전공과는 상관없는 육체적인 노동을 하느라 피곤함에 찌든 부모가 한풀이를 자식들에게 돌려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서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서는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를 보는 자식의 마음은 어떨지. 진정 아이들을 위한 결정이었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에 돌아왔다. 작은아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인기척에 방문을 열고 나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니 어느새 어깨가 딱 벌어진 청년이다. “아, 아들!” 요즘 대형 상점에서 일하며 잘 지내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어를 잘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 나와는 한국 드라마도 함께 보고 한글로 문자를 보내는데, 가끔 받침이 틀리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준다. 딸 같은 아들이라고 가끔 말하면 질색하지만.
방문에 기대에 잠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의 내 감정을 들키기 싫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니 새삼스레 그 이야기를 꺼내 당시의 고통을 되살리기 싫었다. 사과하고 위로해 주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나만의 핑계로 또다시 묻어 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들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 미안해서 겁이 났다. 아니 지금이라도 얼마나 힘들었냐고 꼬옥 앉아줄까. 생각만 하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아들은 그때의 못난 엄마를 용서했을까. 모든 것을 품어 주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원망하고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 격인데.
당시에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함께 의논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흥분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어도 미숙하고 미국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해, 아니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돈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집이라도 한 채 지녀야 미국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이민 생활이 성공한 것이라는 잘못된 목표가 앞만 보고 달리게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나를 합리화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허튼 꿈이고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알기에 후회된다.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흔든다. 다시 TV에 집중했다. 오늘의 사건은 언론에 의해 총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교사들에게 소정의 교육을 받게 해 총기를 소지하게 해야 하고, 금속 탐지기를 정문에 설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학교에 총을 가져온 여학생이 왜 그랬을까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왕따로 괴로워하다 상대에게 겁을 줄 생각으로 총기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린 것일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 내 아들의 일과 겹치며 이 사건의 주인공이 이해됐다.
10대는 가치관이 빠르게 변하고 인성의 바탕이 쌓여 가는 시기다. 왕따를 당한 사람은 더욱 소통 없이 고립되어 소극적이고 자신감도 없어져서, 인간관계에서 악순환이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집단 따돌림 현상이 한 사람의 성격을 변질시키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게 한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놀이 삼아 했던 장난이라고 변명해도, 당하는 사람에게는 평생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왕따는 학교뿐 아니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큰 이슈로는 인종 차별을 받는다며 흑인이 ‘Black Lives Matter’를 표어로 내세운 흑인 민권 운동이 일어났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로 동양인이 ‘묻지 마 폭행’의 표적이 되자 ‘Brown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났지만, 곧 잠잠해졌다. 소소한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무시당한 일은 나부터도 다 적어 내려갈 수 없을 정도다. 다민족이 사는 LA에서는 다른 문화와 언어가 충돌하기에 더욱 심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인데 지켜나가기 힘든 세상이다.
나는 서른 살이 된 아들의 상처를 적절한 때에 다독여 주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처럼 왕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떨쳐내지 못한 아픔이 나를 힘들게 했다. 본질을 벗어난 토론이 답답해서 TV를 껐다. 용기를 내 아들에게 사과해야지. 고름이 깊게 박힌 상처를 도려내야겠다.
서울 출생. 1999년 《수필문학》를 통해 등단했다. 《미주 크리스천 문학》 시 부문과 수필 부문 신인상(1998)을 수상했다. 《미주한국일보》 여성 칼럼 필진. 《대구일보》(본국) 필진, 국제 펜 한국본부 미주 서부지역위원회 부회장, 재미수필문학가협회 부회장, 재미수필문학가협회 뉴스레터 계간 《퓨전수필》 편집인, 《펜문학》, 《재미수필》 편집인을 역임했다. 현재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장, 그린에세이 미주 지부장, 《미주중앙일보》 칼럼 필진으로 있고, 격월간 《GREEN》에 에세이 ‘이현숙의 명작의 현장을 가다’를 연재 중이다(2011~현재). 제1회 해외동포문학상 콩트 부문(1999), 미주 PEN 문학상, 해외 한국수필문학상, 국제 PEN 한국본부 해외 작가상, 재미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작품집 『사랑으로 채우는 항아리』, 『숲에 무지개가 내리다』, 『두 남자와 어울리기』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