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5호
거북이베리
임윤정
지금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므로 당연히 그때의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그래도 그중 유일하게 이래저래 가끔 연락이 닿았던 친구가 있었다. 코로나 전부터 점심을 한번 먹자고 서로 벼르다가 몇 년을 훌쩍 넘겨 버린 연초 어느 날, 점심은 잊어버렸냐, 살아는 있냐, 문자를 보냈더니 돌아온 황당한 답. 좀 바빴어. 죽느라고. 헉, 뭔 소리? 무려 사십 센티미터나 되는 지렁이형 암이 소장에서부터 올라와 폐에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고. 희망과 순응 사이 그 어느 지점에서 이반(Ivan)은 육 개월 전부터 브라질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새로운 암 치료법을 수화기를 통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잘하면 환갑잔치는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결국 네다섯 명이 모여 조촐한 파티를 가졌다. 와인, 치즈, 블루베리 잼, 생햄.
마지막 생일 파티가 될 수도 있는 이반에게 어떤 선물을 줄 수 있을까 ……. 나는 노래를 하나 선사하기로 했다. 십 대부터 지금까지 만든 노래를 다 세어 봤자 통틀어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나의 야무진 발상. 나 자신을 말려보려고도 했지만 그 어떤 다른 마땅한 선물이 떠오르지 않아 대책 없이 옛날 물건 상자를 꺼내 보았다. 이미 누레진 종이에 타자기로 친―그래, 시를 타자기로 타이핑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던 시절이 있었지―이반의 시 몇 편 중, 한국어로 직역하자면 「거북이베리」라는 시가 눈에 띄었다. 브라질 말을 영어로 반 위트 반 장난으로 직역해 놓은 말장난, 거북이베리는 지명이었다.
어느 방학,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쓴 시였는데 거기에서 보낸 순간들을 기억하며 그 여행을 하나의 통과 의례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거다. 거북이베리에 갔다 오는 통과 의례와 이 세상에 육십 년 머물다 가는 또 하나의 통과 의례…… 그런 영감이 떠오르자 우습게도 노래는 십여 분 만에 만들어졌다. 뮤지션을 동원하고 스튜디오를 잡아 녹음하고 믹싱하고…… 초대받은 파티 한 시간 전에 MP3파일을 간신히 받는 데 성공했다. 이반은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맞아, 이 시 제목은 거북이베리였어”라고 끄덕끄덕했다. 그것이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다른 화학과 친구들하고는 달리 이반과의 연락이 아슬아슬 끊기지 않았던 것은 그가 시를 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아버지라는 연결고리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문자로 병 소식을 알게 되고 곧바로 병문안을 갔을 때 병실 문을 여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물론 수년간 만나지 못했던 이유도 이유였겠지만 거기에 앉아 있는 모습은 머리도 수염도 하얘진, 이반이 아닌 영락없는 그의 아버지 아롤도 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생일 파티에서의 그의 몰골은 이미 죽음의 망토를 쓴 모습이었지만, 그날 병실에서 새로운 암 치료법을 열심히 설명하는 초롱초롱한 눈은 자기 아버지와 똑같았다.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캠퍼스 앞에 전철역이 없었고 화학과는 종일반이어서 아침에 가서 저녁에 돌아오던 나는 이반 차를 얻어 타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사실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살고 있었기에 기름값을 분담하자고 그가 먼저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나를 그의 아버지 아롤도에게 데려다 주었고, 나를 화학도에서 문학도로,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브라질 말로 표현하자면 나의 모든 것이 “물에서 포도주로” 변하는 계기였다.
이반을 통해 만나긴 했지만 나와 아롤도의 만남을 주선한 실제 인물은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픽션의 인물은 그가 쓴 『율리시스』 작중에 나오는 몰리 블룸(Molly Bloom)이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나는 화학과를 다니면서도 책을 읽었고 누군가의 추천으로 그 책을 ‘소장’ ―첫 장을 읽다가 포기했으니 ‘소장’이 맞다―하고 있었다. 한국어 번역판 『율리시스』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반은 쪼르르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아롤도는 나를 무조건 데려오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불려 갔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롤도라는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율리시스』를 지참하고 불려 간 자리에서 아롤도는 책 말미에 나오는 몰리 블룸의 독백을 한국어로 읽어 달라고 했고, 당시 나로서는 무슨 뜻인지도 모를 여주인공의 독백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동그랗게 뜬 초롱초롱한 눈을 기억한다. 한국말은 종소리 같애. 이응 받침소리가 많은 우리말을 그렇게 그는 표현했다. 당시 그 독백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고 있던 아롤도는 저명한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브라질에서는 전무후무한 문학 번역가이자 문학 번역 이론가였다. 제임스 조이스, 괴테, 말라르메 등 유럽의 문호들로 시작된 그의 번역 여정은 일본의 하이쿠, 이태백, 구약성서로 이어졌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부족한 언어 실력에다 직감과 영감을 탑재하여 두더지처럼 파헤쳐 놓은 듯한 그의 번역서들은 브라질 번역학의 새로운 지평과 기준을 세우는 업적을 이루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방정식에서 벗어나 ‘번역(飜譯)은 창역(創譯)’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문학 번역의 철학과 이론, 방법론과 실천을 통틀어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업적을 남긴 그는 1997년,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열 살의 나이로 부모님을 따라 브라질로 이민 온 나는 그해, “아빠, 난 커서 작가가 될래요” 했을 때 “얘야, 춥고 배고픈 게 작가란다”라는 아버지의 답에 문학이란 금기의 영역으로 마음에 남게 되었기에 화학과를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뜻하지 않는 곳에서 지적(知的) 대부를 만난 나는 아주 먼 길을 돌아 번역의 이름으로 문학의 길을 다시 찾았고, 또 지구에서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있던 모국과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늘은 삐뚤어진 선으로 바른 말을 쓴다”라는 브라질 속담이 딱 맞는 말이다.
아롤도의 호기심을 만족해 주기 위해 김소월, 윤동주 등의 한국 시 몇 편을 번역해 준 것이 첫 번역 경험이 되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화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는 최초로 모국 역유학생으로 한국행을 택했고, 국문학과 석사학위 과정을 밟는 모험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만 해도 “국문학을 공부해서 앞으로 무슨 전망이 있다고……” 하며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지인들의 우려가 찬사로 바뀌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이 오히려 진정한 자신의 운명과 직면하게 된 오이디푸스처럼.
벽돌로 둘러싸인 문에 도달하면 식물에 둘러싸인 정원사가 너를 반겨준다./이제 그는 너를 밤길로 인도하고 별똥별이 행선을 가리켜 줄 것이다.
―「거북이베리」 중
지구에서 더 멀리 갈래야 갈 수 없는, 그야말로 조금만 더 멀리 가면 이미 돌아오는 길이 되어 버리는 한국과 브라질, 멀래야 더 멀 수 없는 화학과 문학, 나의 거북이베리로의 여행은 정원사와 별똥별이 되어 줬던 이반과 아롤도의 도움으로 문학 번역가로 거듭나기 위한 멀고 먼 통과 의례였던 것이다.
이상의 시를 각별히 사랑한 브라질 시인 파울로 레민스키(Paulo Leminski, 1944-1989)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쓰더라도 국제시장에서 주가(株價) 없는 언어로 쓴 것이라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법령을 포고하고 굿을 해봐라, 그런 역사적 족보는 시인 혼자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주변 언어의 운명으로 태어난 우리는 세계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한국 문학 번역가들이 한 줄 한 줄 번역해 내려갈 때마다 그가 말한 주변과 중심의 축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그 거대한 과제의 한 자락을 쥐고 있다니…… 새삼 놀란다.
포항에서 태어나 10세에 부모님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했다. 상파울루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어학부 한국어문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만화 『나쁜 친구』(2023), 『개』(2023), 『준이오빠』(2022) 외, 고전 『홍길동전』(2020), 『금오신화』(2017), 시집 『껌』(2018), 소설 『채식주의자』(2013)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번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