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2호
디아스포라 한글 문학장과 문예지의 역할
이승하
외교부에서 발간한 2021년 판 『외교백서』를 보면 2019년에 조사한 해외 교민의 수가 나와 있다. 총 749만 3,587명이다. 조사에서 빠진 사람들이 있음을 감안하면 대략 ‘800만 교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 가장 많은 255만 명이 살고 있고 중국에 246만 명이, 일본에 80만 5,000명이 살고 있다. 유럽에 69만 명이, 호주와 뉴질랜드 포함 태평양 지역에 59만 명이, 중남미에 10만 명이, 중동에 2만 5,000명이, 아프리카에 1만 명이 살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통계에서 빠져 있다. 고려인들은 5세대를 내려오는 동안 구소련의 철저한 현지 복속 정책 때문에 교민으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어서일까? 확인해 봐야 할 사항이다.
작가는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다. 어떤 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유목민처럼 끊임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외 교민 문학을 거론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故土) 찾기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종종 쓴다. 떠나온 고국과 이어진 끈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디아스포라이다. 그 끈, 즉 연결 고리는 언어이다. 모국어를 잊지 않고자 하는 노력이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해외 교민 문학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해외로 이주한 교민들이 창작한 작품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된 정보통신의 관계망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게 하는 것이 문학이다. 냉전은 세기말로 끝났지만 미국, 중국, 러시아 3국의 힘겨루기와 중동의 도전, EU의 결속 등 국가권력의 부침 사이에서 해외에 있는 교민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꿈꾸고 생활하고 있는가. 그것을 알아보려면 그들이 쓴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
한반도의 남쪽, 이 비좁은 대한민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삶의 둥지를 튼 교민들과 그 후손들은 우리 사회나 그들이 속한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배제한 가치들을 누구보다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단테의 『신곡』은 조국에 돌아갈 수 없는 자의 원한이 서린 작품이다. 알베르 카뮈가 해외 이주민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방인』 같은 작품이 탄생했을까. 프랑스 지배하인 알제리에서 태어나 부모의 조국인 프랑스에 맞서 알제리가 독립 전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주변인의 아픔을 작품에 육화하지 못했다면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다.
한국 문단은 오랫동안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 해외 교민들이 쓴 작품에 관심을 기울여 활발히 연구하고 평가하고 있다. 국제PEN 한국 본부는 1955년부터 세계작가대회에 꾸준히 참가하면서 우리 문학의 해외 소개에 힘을 써왔다. 2022년에 제8회 대회를 치른 세계한글작가대회에서는 국제PEN 한국 본부가 계속해서 해외 교민 문인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했다. 한국문학번역원도 2001년에 문을 연 이래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제한인문학회는 2003년에 출범한 이래 국내 연구자들의 해외 교민 문학 관련 논문을 주로 싣고 있다. 교민 문학인들의 작품이 국내 문예지에도 자주 실려야 하고, 자주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해외에 나가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절절한 사연이 있을진대, 그리고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남다를진대, 그들의 문학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일에 이제 우리 모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모국어로든 자국어로든 글을 쓰는 교포 1.5세대, 2세대, 3세대를 발굴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연구자는 해외 교민 문인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문예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활동 상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미국 이주의 역사는 120년이 되었다. 하와이 이민은 구한말에 정책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손이 딸리자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이 조선인 고용을 주선했고, 그 결과 조정에서는 1902년 12월 22일부터 1905년까지 무려 65차례에 걸쳐 조선인 총 7,226명을 하와이에 보냈다. 시간이 흘러 일하러 온 남자들이 30~40대로 접어들자 조선에서 모아 보낸 처녀들의 사진을 보고 배필을 정하는 이른바 ‘사진결혼’을 하여 이민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1904년 3월 2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창간된 《신조신문》에 몇 사람의 가사(歌辭)가 발표되면서 교민 문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역사를 다 찾아내어 교민 문단의 역사를 밝히자면 방대한 자료집이 될 것이다.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미주 쪽의 문예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소설가 송상옥이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퇴직하고 1981년 미국 이민 대열에 올라 LA에 있는 《한국일보》 미주 본사에 입사했다. 미국에 와보니 문학이 거의 불모지였다. 그래서 협회 창립을 주선해 1982년 9월 2일에 미주한국문인협회를 창립했고, 문예지 발간을 주선해 1982년 겨울에 《미주문학》 창간호를 냈다. 2022년 가을호로 100호를 내게 되는 《미주문학》은 미국 내 교민이 가장 많이 사는 LA를 중심으로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문학 단체의 계간 문예지다.
송상옥에 앞서 미국에 와서 교민 문단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 있다. 소설가 최태응(1917~1998), 시인 박남수(1918~1994), 시인 고원(1925~2008), 시인 전달문(1938~2017), 시인 마종기(1939~) 등이다. 모국어로 시를 쓴 이민 1세대인 이들은 문예지 창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교민 문인들을 격려했다.
1983년에 창립된 미주크리스찬문인협회는 1984년에 《크리스찬문예》를 창간해 연간지로 내다가 제호를 《미주크리스찬문학》으로 바꾸고 계간지로 내고 있다. 2019년에 창립 36주년을 맞아 제30집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미동부한국문인협회에서 1991년에 창간호를 낸 《뉴욕문학》도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에서는 2007년에 《시애틀문학》을 창간, 15집을 냈다. 미국의 행정 수도인 워싱턴DC를 중심으로 한 워싱턴문인회가 1990년에 결성되어 《워싱턴문학》을 창간하여 지금까지 내고 있다. 1982년에 소설가 최태응의 주도로 샌프란시스코문인협회가 결성되어 동호인 모임을 하다가 1996년에 《샌프란시스코문학》을 창간했다.
1987년에 결성된 재미시인협회에서는 연간 작품집 《外地》와 연간 문예지 《미주시세계》를 발간했고 해변문학제도 다년간 개최했다. 2016년 협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재미시인협회 회원 대표 시선집』을 내기도 했다.
조지아의 주도인 애틀랜타 지역의 한인들이 1989년 애틀랜타한인문학회를 결성해 1991년에 《한돌문학》을 창간했고 《애틀랜타 시문학》을 따로 발간하고 있다. 1999년에 결성된 재미수필문학가협회에서는 《재미수필》을 내고 있다.
2002년 10월에는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이하여 미주 문학 단체 연합회에서 『한국문학 대사전』이라는 변형 국배판 1,170쪽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2022년 미주한국소설가협회의 《미주한국소설》 제12호가, 미주시인회의의 《미주시학》 제12호가, 오렌지글사랑의 《오렌지문학》 제7호가 나왔다.
미국 각 지역에서 이와 같이 엄청난 수의 문예지가 계간지나 연간지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꾸준한 작품 활동이 국내 문단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수준이 낮기 때문일까? 물론 미국 교민 문단에서 한글로 작품을 쓰는 이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갖춘 스타급 문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한국 국내 문단에서 교민들이 한글로 쓴 작품을 제대로 연구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민 1세대건 1.5세대건 재미 교포의 한글 작품이 작품성이나 문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 대상의 첫 번째 요건이다. 미국의 교민 문인들은 한국 문단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문학적 담론을 끌어내고 도전 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즉, 미국에서 나오는 문예지의 대부분이 실상은 동인지다. 또 이민을 간 시점의 문학성에서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해 정체하고 마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 각 지역에서 나오는 문예지의 특징은 작품을 모아서 싣는 것이다. 문예지들이 발표 지면을 제공하는 역할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국내의 문학평론가와 연구자들을 끌어들여 쟁점을 제기하고 개선점을 찾아내고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재미 소설가 박경숙이 국내 문단에서 주는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통영문학상(김용익 소설문학상), 미주에서 주는 가산문학상, 연변소설가협회에서 주는 두만강문학상 같은 상을 받아 재미 한글 문단의 수준을 높인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주 교민의 한글 작품의 수준이 많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한국 평단의 관심을 촉구하는 바이다.
한국은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한국 근대문학 초기에는 대다수 문인이 일본에서 유학했다. 당시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필수 코스가 일본 유학이었다. 즉, 일본 문학의 막강한 영향 아래 한국의 근대문학이 전개되었다. 일본어로 쓴 한국 작가들의 작품 수도 엄청나게 많다. 『近代朝鮮文學 日本語作品集』이 일본 녹음서방(綠陰書房)에서 9권짜리 전집으로 발간되었는데, 방대한 분량이다. 이 전집을 보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이 땅의 수많은 문인들이 일본어로 작품을 썼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를 들면 이효석의 일본어 작품집이 『은빛 송어』라는 제목으로 한글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 5편, 수필 9편이 실려 있다. 이 작품집의 가장 큰 주제는 ‘내선일체’다.
장기간 식민 지배 아래에 있으면서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도 많고 일본에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된(징용) 조선인도 많아서 1944년의 통계를 보면 조선인 193만 6,843명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광복이 되어서도 일본에 많이 남아서 재일 동포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일
본의 패전 이후 재일 조선인들이 만든 잡지로 《민주조선》(1946~1957), 《조선평론》(1952~1954)이 있었고, 김시종 시인을 중심으로 한 잡지 《진달래》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총 20호가 발행되었다. 이 잡지들은 조총련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보인다. 1975년 2월에 《계간 삼천리》가 창간되어 1987년까지 총 50호가 발간되었다. 모두 종합지여서 문예지의 기능을 하지는 못했다. 일본에 이미 나오는 여러 문예지에 재일 조선인 작가와 시인들의 작품이 일찍부터 실리기 시작해 따로 문예지를 발간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본다. 1962년에 창간된 종합지 《한양》도 재일 조선인 문단이 형성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만 《창작과 비평》 창간 이전 참여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의 이념이 국내에 소개되는 데에는 일정한 역할을 했다.
재일 동포 작가 중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탄 이는 이회성, 이양지, 유미리, 현월이다. 이회성이 1972년에, 이양지가 1988년에, 유미리가 1996년에, 현월이 1999년에 이 상을 받았다. 일본에 귀화했다면 일본 이름으로 수상했겠지만 이들은 당당하게 ‘재일 조선인’ 이씨, 유씨, 현씨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일본에서 주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동경제국대학 독일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사량이 1939년 《문예수도》에 발표한 「빛 속에」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처음 오른 이후, 김석범·정승박·이기승·김학영 등이 후보에 올랐다. 김학영은 네 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는 못했고, 이회성은 후보에 다섯 번째로 오른 작품이 수상작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을 한국문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번역이 되지 않으면 일본어로 발표한 것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한국인 가운데 이들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독자는 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한글로 쓴 작품만이 한국문학이라는 지역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작품을 우리 문학의 ‘외연’ 내지는 ‘변방’으로 다룰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에 살면서 한글로 작품 활동을 한 사람은 대표적으로 수필가 김소운, 소설가 손창섭, 시인 김시종이 있다. 김소운(1907~1981)은 우리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한 공을 무시할 수 없다. 1927년 『조선의 농민가요』를 일역하면서 시작된 그의 한국문학 번역 작업은 민요·동요·동화·현대시 등 여러 부분에 걸쳐 폭넓게 이루어졌다. 특히 3년여의 편집과 번역 끝에 완수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출판한 『한국현대문학선집』(1976, 전5권)은 이 방면에서 그의 업적을 총결산한 것이다. 일본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의 형식으로 쓴 장편 수필 「목근통신」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중앙공론》에 번역, 소개하여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손창섭(1922~2010)은 전후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인데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에 간 이후 한국 문단과는 소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안양 근처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하다가 1972년에 작가 활동을 중단하고 아내를 따라 일본에 건너간 그는 일본에서 거의 25년 동안 한국 국적을 유지하다가 1998년 일본의 외국인 등록법 때문에 번거로워서 귀화했다. 귀화 이름이 우에노 마사루(上野昌涉)인데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한국에서 살았을 때처럼 도쿄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1976년까지는 국내 신문에 「유맹」과 「봉술랑」을 연재하기도 했고, 1988년에는 동인문학상 시상식에 오라는 김동리의 요청을 받고 잠시 한국에 오기도 했다. 2010년 지병인 폐 질환이 악화되어 도쿄의 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김시종(1929~)은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랐다. 제주 4·3항쟁에 참여했다가 1949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민족운동과 시 쓰기에 나섰다. 재일 외국인 최초의 공립학교 교사가 되어 15년간 조선어를 가르쳤고 이후로도 강연과 저술,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201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 다카미준상을 수상했다. 시집 외에 평론집 『‘재일’의 틈에서』(1986), 대담집 『왜 계속 써왔는가, 왜 침묵해왔는가』(2001), 강연록 『나의 생과 시』(2004)를 펴냈으며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시』(2004), 『재역(再譯) 조선시집』(2007)도 펴냈다. 오랫동안 행보를 같이하던 조총련을 탈퇴하고 200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양석일 같은 작가가 일본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도 모두 일본어로 쓴 것이다. 양석일의 장편소설 『밤을 걸고』는 북송의 실상, 북송 당시 북한 당국과 조총련의 회유와 선전의 실상, 북한에 간 재일 교포들이 겪은 북한의 실상 등을 사실적으로 그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의 소설 중 『피와 뼈』, 『달은 어디에 떠 있나』, 『어둠의 아이들』은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의 문학은 대부분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국어를 모른 채 재일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룬다. 그런데 이런 일문으로 된 소설조차도 근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떤 통계를 보면 재일 교포들이 어느 해에는 1만 명 가까이 일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재일 교포 사회에서 그만큼 민족의식이 약화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중국 조선족은 200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이들이 취업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옴으로써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언어 소통에 별 지장이 없다. 그래서 2002년 이후 ‘연변 아줌마’를 식당 같은 데서 만나는 일이 아주 예사로워졌다.
재중국 조선족 문단의 소설가 김학철, 시인 리욱, 김철, 리상각, 석화 등은 국내에도 꽤 알려져 있다. 재중국 조선족은 한글로 작품을 쓰는 이점이 있는데,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다. 분단 이후 북한과는 계속 교류를 했지만 남한과는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0세기 말까지 재중국 조선족의 중학교(초급중학교)와 고등학교(고급중학교) 교과서 『조선어문』에는 조기천(1913~1951)의 시가 4편이나 실려 있었는데 2004년에 시작되어 2008년에 개편이 완료된 교과서에는 북한 시인들의 작품이 한 편도 실리지 않았다. 당성과 인민성을 주장한 작품은 일절 배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재중국 조선족 문단의 대표적인 소설가로는 김학철(1916~2001)이 있다. 원산에서 태어나 서울 보성고보 재학 중 중국으로 가 항일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일본군에 체포되어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에 석방되었다. 1946년 월북하여 《로동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1952년부터 중국 연길에 정착하여 소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 그의 소설에 마오쩌둥을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어서 문화대혁명 기간에 반혁명 분자로 몰려 10년간 옥고를 치렀다. 1985년 중국 국적을 취득한 후에는 중국작가협회 연변 분회에서 활동했다. 장편소설 『격정시대』, 『20세기의 신화』, 『해란강아 말하라』, 소설집 『무명소졸』,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산문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 등 그의 작품 대다수가 국내에서 간행되었다.
연변 조선족 문학이 북한의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것은 북한이 주체사상을 당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한 1967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1967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했다. 연변에서는 북한으로부터 문학적 자양분을 흡수하던 과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몇 가지 시도를 하는데, 그 시도의 일면을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나온 우수 작품을 모은 『연변우수작품선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족은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공군으로 참전하여 적지 않은 희생자를 냈는데, 그들은 ‘항미원조(抗美援助)’라는 말로 이 전쟁을 표현했다. 전쟁의 명분은 미국에 대항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중국을 도와 희생을 감수하자는 뜻이다. 조국에 대한 개념도 ‘떠나온 조선’이 조국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조국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류원무, 림원춘의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고통을 겪은 조선족이 많았음을 김학철, 류원무, 김창석 등이 이야기했다.
도시의 삶과 농촌의 삶의 질이 다른 것도 연변 조선족 사회의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연변인 진호진의 기고문을 보면 “이 10여 년간 도시 인구가 60여만 명이 증가된 반면 농촌 인구는 48만 명에서 12만 명으로 격감되어 무려 36만 명이나 줄어들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10여 년간이란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를 가리킨다. 한중 수교 이후에는 한국으로 노동 인력이 대거 옮겨감으로써 연변의 농촌 인구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 문제에 김창석, 김관웅 같은 소설가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연변 조선족 소설의 또 한 가지 특성은 실화문학이다. 리성권의 「허물어진 꿈」은 차광춘이란 실존 인물을, 차룡순의 「남방에서 만난 사람들」은 조선족 가운데 저장성에서 성공한 두 사람을 취재하여 쓴 르포다. 이런 취재물이나 르포를 한국에서는 문학의 범주에 넣지 않는데 연변에서는 문예지에 실어줌으로써 문학작품으로 인정한다. 실화문학의 목적은 사회주의 건설의 원동력인 ‘바람직한 인민’의 형상화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바람직한 인민은 노동 현장의 영웅이다. 현대의 영웅이 노동생산성을 향상하고 인민의 복지를 증진하게끔 솔선수범한다는 것이 이 장르의 큰 이념이고 목표이다. 연변 조선족 소설가들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따르지 않는 대신 이런 문학작품을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국적의 연변 조선족 문인들은 중국에 정치적 변동이 있으면 직격탄을 맞기도 했다.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던 조룡남 시인은 1957년 반우파 투쟁에 연루되어 20년 동안 오지로 쫓겨나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국내에 나와 있는 중국 조선족 문학에 대한 연구서는 확인된 것만 열 권에 달한다. 소재영 등의 『연변지역 조선족 문학연구』(숭실대학교 출판부, 1992), 황송문의 『중국조선족 시문학의 변화 양상 연구』(국학자료원, 2003), 김승찬 등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전통과 변혁』(부산대학교 출판부, 1997), 윤윤진의 「중국조선족문학」(신동욱 편, 『한국 현대문학사』, 집문당, 2004), 정덕준 등의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푸른사상, 2006), 오정혜의 『중국조선족 시문학 연구』(인터북스, 2008), 김장선의 『만주문학연구』(역락, 2009), 고순희의 『만주망명과 가사문학연구』(박문사, 2014)가 있다.
여기에 오양호의 『한국문학과 간도』(1995), 『일제 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1996), 『만주이민문학연구』(2007)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정덕준이 편한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은 각 시기 중국 사회의 정치 상황과 시대정신이 조선족 문학의 형성에 어떤 변동 요인으로 작용했는지 살피고 있다. 저자들은 망명기·이주기·정착기·광복기를 거쳐 계몽기·암흑기·부흥기·성숙기로 구분해 대표 작가와 대표작을 거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암흑기’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마오쩌둥이 추진한 대격변인 문화혁명은 자유로운 문학적 상상을 심하게 위축시켜 좋은 작품을 거의 생산해 내지 못하게 했다. 오양호는 한반도 내에서 친일 문학이 극성을 부릴 때인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망명 문인들의 활동과 『재만조선인 시인집』의 의의를 크게 다루었다. 이 시기 중요한 시인으로 리욱·함형주·김조규·송철리·조학래 등을 꼽았다. 광복 후에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사회주의 개혁과 건설에 대한 낙관적 전망, 중국 혁명전쟁의 승리를 위한 영웅적 투쟁을 고무하는 데 집중된다. 특히 토지개혁과 인민정권 건설을 다룬 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론에 입각해 썼다.
중국작가협회 조선 분회에서 기관지 월간 《연변문예》를 창간한 것은 1951년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 연변작가협회로 협회의 이름도 바꾸었고 문예지도 《연변문학》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2022년 6월호가 통권 735호니 대단한 역사가 있는 연변 문단의 대표적인 문예지다.
이밖에 《장백산》은 월간으로 장춘시 지부에서, 《도라지》는 격월간으로 길림시 지부에서 발행하고 있다. 한글 시집도 지금까지 100권 이상 간행하여 문학의 인적 자원은 풍부한 편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동북 3성의 조선인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예지들의 앞날도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재중국 조선인들은 조상의 고향은 조선이고 자신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문학 창작의 근간이 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젊은 세대들이 중국 본토로 이주함으로써 재중국 조선족 문단의 약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사는 한민족을 가리켜 고려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1860년경부터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우리 조상의 후손이다. 연해주 위쪽이 있는 사할린섬은 러일전쟁 때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가 소련이 되찾은 곳이다.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에 위협을 느낀 스탈린은 연해주 쪽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그 지역에 살던 조선인 18만 명을 몽땅 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 쪽으로 강제이주를 시킨다. 1937년경이었는데 수송 열차가 90회 이상 동원되었다. 허허벌판에 이주를 시킨 이후 소련 당국은 고려인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폈다. 한글을 배워도 아무 소용이 없게끔 언어 정책을 펴자 이주를 한 1세대는 한글을 쓸 수 있었지만 2세대는 글을 쓸 줄 몰랐고 3세대는 말까지 잃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인 중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소설가 아나톨리 김, 러시아 국내의 각종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겸 화가인 박미하일,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각종 문예지에 시가 실리는 스타니슬라프 리 같은 실력 있는 문인이 나왔지만, 이들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문인은 사실 조명희다. 카프의 일원이었으며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 활동하다가 1938년 하바롭스크 감옥에서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될 때까지 러시아어로도 작품을 쓴 조명희에 대해 근년에 들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1988년 중앙아시아 한인 거주 지역인 타슈켄트에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세워졌다.
중앙아시아에서 움튼 문학의 중심에 1938년 5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창간되어 1978년 8월 알마티로 이전하여 발행된 신문 《레닌기치》가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한글 일간신문으로, 전 소련에서 구독할 수 있는 전국 신문이었다. 한때 4만 부가 발행되기도 했으며, 1982년부터 사진식자를 도입하여 모든 신문을 한글로만 제작했다. 제4면에는 매달 두세 번 정도 문예면을 실어 재소 한인들의 유일한 문예 작품 발표장이 되었다. 1980년 이후 여기에 발표된 재소 한인들의 단편소설은 강대수의 「우정」을 포함하여 10여 명의 20여 편이나 된다. 이 단편소설들은 재소 한인들에 의해 순수 한글로 쓰였으며, 재소 한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연성용·강태수·김두철·우제국·이은영·정장길 같은 시인들이 등장했다. 《레닌기치》는 구소련이 붕괴하기 바로 1년 전인 1990년 12월 31일 폐간되었다. 한편 《고려일보》가 1991년 1월 1일자로 소련 중앙정부에서 정기간행물 발간 허가를 얻어 발행되었다.
아나톨리 김은 고려인 3세로 카자흐스탄에서 출생했다. 사할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미술대학, 고리키 문학대학을 거쳐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73년 단편 「수채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이후 소설집을 여러 권 내면서 러시아 문단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특히 1984년에 발표한 장편 『다람쥐』는 러시아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 정부가 수여하는 모스크바예술상, 독일의 신학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국제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고, 주요 작품들은 세계 24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작가의 문학 세계를 연구한 박사 학위 논문도 여러 편에 달하며, 일부 작품은 러시아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문학 수업 필독서 목록에 들어 있다. 그의 소설의 특징은 환상성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배경이 된 카자흐스탄 등 아름다운 러시아의 시골 마을, 러시아인이 아닌 이민자의 현실적인 삶의 모습, 소비에트 시대의 군 생활과 소비에트 정치를 닮은 문학계의 뿌리박힌 권위주의까지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2009년 중앙대학교에서 4년간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지리산과 서해안 바다 풍경을 화폭에 담았으며, 이 작품들을 모아 『남원으로의 귀환』이라는 화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스타니슬라프 찬디노비츠 리는 국내에서 한글 번역 시집 2권이 나온 카자흐스탄 거주 고려인 시인이다. 시집 『재 속에서는 간혹 별들이 노란색을 띤다』가 1997년 9월 도서출판 새터에서 양원식 번역으로, 『모쁘르 마을에 대한 추억』이 2010년 3월 인터북스에서 김병학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카자흐스탄에는 러시아어 시집 『이랑』(1995)과 『한 줌의 빛』(2003)이 나와 있다. 『모쁘르 마을에 대한 추억』을 번역한 김병학의 해설을 보면 그의 시편들이 1980년대 말부터 러시아 유수의 문예지 《모스크바》, 《모스크바 소식》, 《유노스치(청춘)》, 《문학신문》 등과 카자흐스탄의 문예지 《쁘로스또르(광야)》, 신문 《카자흐스탄스카야 프라우다》, 《고려일보》 등에 실림으로써 시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는 2008년 『현대 러시아 해외』라는 20인 사화집에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서는 유일하게 들어갔고, 카자흐스탄 국정 문학 교과서에도 오래전부터 시가 실려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애송되고 있다면서 높이 평가한다.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한 한진은 한글로 희곡과 소설을 썼는데, 김병학은 그의 서간문까지 입수, 975쪽에 달하는 전집을 국내에서 발간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동방어문대학교의 김필영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작품을 수집, 1060쪽에 달하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1937~1991)』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에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의 이민 5세가 되는 박미하일은 국내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카자흐스탄 국적의 화가 겸 소설가이다. 현재 러시아 작가협회와 카자흐스탄 문학가연맹 회원, 러시아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국내에도 종종 체류한다. 1993년 인사동 그림 마당 ‘민’에서 첫 개인 전시회를 연 이래 1995년, 2000년, 2004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8년에 서울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2009년에 익산 보석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에서 그는 소설가보다는 화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에 번역된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 『발가벗은 사진작가』, 『밤, 그 또 다른 태양』 같은 소설은 고려인 소설가가 써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 러시아(혹은 구소련하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아간 조선인들의 애환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를 말해 주고 있어 중요하다. 그의 소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한 고려인의 후손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았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고, 이민 초기의 정착 과정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또 혼혈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미하일의 소설은 고려인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연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1909년에 태어난 강태수와 연해주에서 1910년에 태어난 전동혁은 운명이 완전히 다르다. 강태수는 살길을 찾아 연해주로 갔지만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를 당한다. 크즐오르다 사범대학의 벽보에 시를 한 편 써 붙였다가 어떤 이의 밀고로 20년 넘게 유형지에서 살게 된다. 1959년에 복권된 이후에 당의 눈치를 보며 체제를 옹호하는 작품 쓰기에 급급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서정성을 회복해 간다.
전동혁은 소련작가동맹 회원으로서 신문 《레닌기치》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40년대 중엽에 북한에 들어가 조선문화협회 부회장을 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문화인 부부장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북한 외무성 참사로 일하다 우즈베키스탄으로 귀환해 살았다. 서사시 「박 령감」의 박 영감은 1937년의 강제이주가 고려인들에게는 큰 혜택을 가져다주었다고 믿는다. 박 영감이기도 한 전동혁은 이주를 당한 고려인 전부가 소련공산당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마음을 이 시를 통해 드러낸다. 이 주제는 강제이주가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이 겪은 참혹한 사건이었다는 그간의 시각을 뒤흔드는 것이다.
1980년대 말에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이민을 간 최석 시인은 《고려문화》라는 문예지를 내면서 양국 간의 문화와 문학 교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전남 신안 출신으로 1990년대에 이민을 간 김병학은 대부분 중앙아시아 광야에서 하늘과 지평선을 바라보며 시를 썼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광대한 정신이 시 세계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시간은 문명 시대를 넘어 빅뱅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뒤로는 지구 종말에까지 닿는다. 그는 고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1992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간 뒤 재소 고려인과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는 일에 뛰어들어 스타니슬라프 리의 시집을 한역하고 재소 고려인의 구전 가요를 집대성해 『재소고려인들의 노래를 찾아서』 같은 책을 펴내어 고려인 민중사를 복원하는 데 앞장서 왔다. 하지만 모국어를 잃어버린 고려인들이라 한글 문단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김병학은 우슈토베 광주한글학교 교사, 알마티 고려천산한글학교 교사와 교장, 알마티대 한국어과 강사, 《고려일보》 기자 등을 역임하고 10년 전에 한국에 귀국하여 지금은 광주 월곡고려인문화관 관장으로 있다.
고려인 문학의 취약점은 한글로 쓴 현지인의 문학작품이 애당초 많지 않았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한글문학 창작이 완전히 끊겨버렸다는 것이다. 러시아어나 우즈베키스탄어로 쓰인 문학작품이 한글로 번역이 된 경우, 가령 1급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 아나톨리 김이나 박미하일의 소설이 한글로 번역되어도 주목을 못 끌고 사장되고 말았다. 시간상의 거리와 물리적인 거리, 역사적인 거리가 중앙아시아 문학의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호주 교민 문학의 대표주자는 단연 돈오 김(Don’o Kim, 한국명 김동호)이다. 1936년 평양에서 출생해 1948년에 서울로 와서 배재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나왔다. 한국전쟁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어 형을 휴전 후 길거리에서 극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고교 교사와 KBS 방송작가 생활을 잠시 하다가 호주 정부의 콜롬보플랜 장학생으로 선발돼 시드니대학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비교언어학을 전공한 뒤 주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작가가 될 결심을 했다. 호주에 도착하기 전 일본ㆍ중국ㆍ소련ㆍ베트남 등을 방문한 그는 여행 체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 『내 이름은 티안』을 출간해 아시아 출신 작가로 호주에서 최초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은 서구사회에서 반전운동이 절정에 다다른 1969년이었다. 베트남 시골 소년의 눈으로 전쟁을 그린 이 소설은 호주연방 문학상을 받았다.
이어 중앙아시아의 가상 국가 타타리아를 배경으로 국제정치의 음모와 각축을 다룬 두 번째 장편소설 『암호』를 발표했다. 추리소설 기법을 가미한 이 작품은 상당히 난해하여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세 번째 장편소설 『차이나맨』은 출세작이라 할 수 있다. 퀸즐랜드 주의 대보초 해안을 배경으로 청정사회 호주의 미래를 생태학적 화두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소설이 시드니대학의 문학 교재로 채택된 이유는 호주의 백인들이 아시아인들을 바라보는 인종주의적 시각을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 덕분에 그는 호주 정부로부터 매년 4〜5만 달러에 이르는 창작 지원금을 받고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장편소설 『아리랑 크라이시스』와 『태극(The Grand Circle)』을 탈고한 뒤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고국을 찾기도 했고 그때 국내 문예지 《문학정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아리랑 크라이시스』는 북한의 생화학자가 주인공이고 『태극』은 남한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주인공으로, 모두 분단된 한반도 상황을 다룬 것이다. 여기에는 전작들에 담긴 독특한 정치사적 사유가 더해, 작가 개인의 고단한 이력이 녹아들어 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녔고 다시 호주로 유학 갔다 정착한 이민 1세대로서 자신의 뿌리 찾기가 곧 소설 쓰기였다. 이러한 작가의 꾸준한 노력과 작품성을 인정한 호주 정부는 1971년과 1973년 ‘호주연방 문학상’을, 2004년에는 호주 문예진흥원이 ‘명예상’을 수여했다. 돈오 김은 2013년 암으로 타계했다.
40년 호주 이민사에서 획기적인 일은 2015년 12월 19일 호주 시드니의 한인회관에서 7인 교민 작가의 작품집 7권이 한꺼번에 나와 합동 출판기념회를 가진 일이다. 김미경ㆍ남홍숙ㆍ유금란ㆍ장미혜ㆍ장석재ㆍ최무길 작가가 수필집을, 공순복 시인이 시집을 출간했다. 이 작품집들은 그해 8월부터 12월까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발간되었다.수필집을 낸 교민들은 이들 외에도 이효정과 윤필립을 비롯해 박은경ㆍ최옥자ㆍ조재국ㆍ김화용ㆍ윤세순ㆍ윤교정 등 10명이 넘는다. 이렇듯 수필 분야는 지금 호주 문단에서 가장 많은 작가군을 형성하고 있다. 수필은 대체로 세 가지 주제를 지향한다. 하나는 이민을 간 이후 자리를 잡기까지의 고난과 인생 역정에 대한 기록이다. 또 하나는 호주 교민 사회와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고찰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추억담이다. 간혹 이민 1세대, 1.5세대, 2세대 사이의 세대차가 주제로 다뤄지기도 한다.
현재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호주 교민 시인은 김오다. 1956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출생, 1987년 호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으며 1993년 《호주동아일보》 신년문예에 당선되었다. 1994년 ‘시힘’ 동인 제8집에 3편의 시를 실으면서 한국 내 문단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캥거루의 집』과 『플레밍턴 고등어』를 펴냈다. 두 번째 시집 출판기념회 겸 사인회가 한국문예창작학회의 주관하에 2018년 6월 8일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렸다. 김오 시인의 뒤를 이어 강애나ㆍ공순복ㆍ김인옥ㆍ서엘리사벳ㆍ송운석ㆍ유영재ㆍ윤영이ㆍ윤희경ㆍ조소영 등이 몸은 호주에 있지만 국내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소설은 테리사 리가 대표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호주 뉴캐슬 전쟁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소설을 써 재외동포문학상, 동서커피문학상, 《호주동아일보》 신년문학상 당선으로 등단한 이후 『비단뱀 쿠니아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같은 소설집을 냈다. 테리사 리 소설의 특이점은 호주의 원주민인 에보리진의 침략자들의 학살에 의한 죽음, 영국의 호주 식민지화 과정, 범죄자들의 유배지였던 건국 무렵의 일들, 유명한 살인범들의 면면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와 교묘하게 겹치는 역사의식에 입각해서 쓴 그녀의 소설은 한국과 호주의 어제, 오늘, 내일이면서 두 나라의 외교사를 더듬는 주제가 깃들어 있어 의미심장하다. 아동문학은 역사동화를 쓰고 있는 이마리가 호주 문단을 지키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거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어린이들의 모험 여행기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 『버니입 호주 원정대』 『구다이 코돌이』 『코나의 여름』 등의 장편동화가 '세종도서'로 선정되었다.
호주의 이민문학은 이제 태동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돈오 김 같은 호주 주류문단의 인정을 받는 작가도 배출했고 이효정과 윤필립 같은 이가 많은 후학을 길러내어 자립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호주의 교민 문학이 일본, 미주, 중국, 중앙아시아 등에서 산출된 이민 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간 문예지가 여러 종 발간되었지만 재작년에 1호가, 작년에 2호가 나온 문예지 《문학과 시드니》는 호주 교민 문단의 구심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상식과 절대적인 정의, 흠 없는 순수만으로는 문학이 탄생하지 않는다. 비상식과 불의와 모순이 오히려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창작열을 북돋운다. 그런 지점을 직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교민 작가들이라고 생각한다. 경계인(境界人)의 시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고착화하는 것을 경계(警戒)한다. 양쪽 모두 그럴 법한 이유가 있음을 통찰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해외 이주 작가들이다. 우리의 편협한 사고와 좁은 시각이 놓친 지점을 포착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인식 세계로 이들의 영지가 확장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재미 문단의 경우 교포가 영어로 쓴 작품은 미국·영국과 한국에서 다 상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한글로 쓴 작품은 거의 평가가 안 되고 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개척자였던 김은국과 작품마다 주목을 받은 이창래는 물론 강용흘의 『초당』, 김용익의 『꽃신』, 차학경의 『딕테』, 김난영의 『토담』, 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 이혜리의 『벼가 있는 정물화』, 수잔 최의 『외국인 학생』과 『요주의인물』, 이민진의 『파친코』는 양국에서 다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가을호로 100호를 내는 계간 《미주문학》에 발표된 엄청난 양의 한글로 쓴 시와 소설은 양국에서 모두 외면을 받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해외 교민들의 한글 작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때로는 질책하고 때로는 상찬하면 작품의 질도 훨씬 좋아질 것이며, 해외에 나가 있는 교인들은 더욱 큰 의욕을 갖고 창작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자랐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폭력』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출간했다.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예창작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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