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2호
재일 조선인 우리말 문학의 역사와 과제
하상일
지금까지 재일 조선인 문학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국문학과 일문학 분야에서 모두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그 대상과 범주 설정에 있어서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재일 조선인들이 창작한 문학작품을 명명하는 용어에서부터 많은 논란이 거듭되었고, 일본어와 우리말이 함께 사용되는 이중 언어 현실에 대한 견해차도 아주 컸다. 따라서 재일 조선인 문학 전체를 일관적이고 통일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현재까지도 쉽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국적, 이념을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가 재일 조선인의 현실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던 상황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한 재일 조선인 각 세대 간의 정체성 차이로 인해 재일 조선인 사회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도 더욱 심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재일 조선인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재일 조선인 문학을 이해하는 가장 큰 쟁점은 언어이다. 물론 언어는 민족이나 국가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지만, 문학의 대상과 범주를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핵심적인 사항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동안 재일 조선인 문학의 대상과 범주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국문학과 일문학의 입장이 확연하게 달랐다. 대체로 일문학에서는 재일 조선인 문학을 재일 동포가 일본어로 창작한 문학으로 그 범주를 제한한 반면, 국문학에서는 재일 동포의 일본어 작품뿐 아니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산하 재일조선인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출신 문인들을 중심으로 창작된 우리말 작품까지 모두 포함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사실 재일 조선인 문학 연구는 일문학에서 소수자 문학 연구의 한 분야로 시작되었다가 국문학 연구로 그 대상과 범주가 확대되었다. 따라서 일문학의 경우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 등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거나 식민과 분단 문제에 천착하여 한반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일본어 소설이 주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재일 조선인 문학의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일본 내에서 창작되고 있는 재일 조선인 문학의 전체적 실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협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1)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들에게 언어의 문제는 그들의 삶을 재구성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해방 이전에는 일본어의 사용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타율적 선택일 수 있었다 하더라도, 해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민족을 배반하는 식민주의적 태도로 낙인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들에게 일본어의 사용은 가장 먼저 청산해야 할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 당시 우리 민족 구성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기 때문에 우리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해방 조국의 사정이 이런 정도였으니 당시 재일 조선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재일 조선인들에게 해방은 곧 일본어의 폐기를 의미했으므로 한동안 이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의 언어로 살아가는 또 다른 억압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해방의 결과로 생활 언어인 일본어를 송두리째 버리고 조국의 언어라는 민족적 당위성만을 붙잡고 더듬더듬 우리말을 구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 이런 점에서 당시 재일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본어와 우리말의 이중 언어 현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러한 언어적 갈등과 모순은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문학의 형성 과정에도 첨예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재일 조선인의 이중 언어 현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로 이루어진 문학만을 재일 조선인 문학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이 있다. 이는 비록 소수이지만 여전히 우리말로 글을 쓰고 일문학의 평가에서 사실상 소외된 총련계 작품을 제외하는 결정적 문제를 드러낸다. 일본어로 된 문학이 주류이고 우리말로 된 문학은 비주류라는 관점이나 일본어로 된 문학은 질적 수준이 높지만 우리말로 된 문학은 질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관점도 있는데, 이러한 이분법적인 판단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재일 조선인 문학을 주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왜곡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말 쓰기만을 고집하는 총련의 입장 역시 민족과 국가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종속한 나머지 재일 조선인의 변화된 현실을 맹목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완고한 태도가 오히려 일본 내에서 재일 조선인의 자유로운 활동과 위상을 제약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재일 조선인 문학의 미래조차 협소하게 만들어버리는 한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재일 조선인 문학은 특정한 언어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재일’의 실존성에 뿌리내린 새로운 위상 정립이 시급하다. 일본어로 쓰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첨예한 논란은 일단 접어두고, 일본어와 우리말로 동시에 창작되는 재일 조선인 문학의 현실을 그 자체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모어(일본어의 현실)와 모국어(우리말의 당위) 사이의 긴장을 뛰어넘어 재일 조선인의 실존적 조건인 이중 언어 현실을 편견 없이 수용하는 ‘재일’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사회는 남과 북의 분단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두 조직 사이에서 극심한 대립과 분열을 드러냈다. 재일 조선인 문학 역시 이 두 조직이 이루는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이원화한 모습을 보였는데, 1959년 총련 산하에 결성된 문예동이 문학 창작에 있어서 일본어 쓰기를 금지하고 우리말 쓰기를 공식화함에 따라 총련 내부의 갈등과 분열까지 초래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즉 당시 총련의 지도 노선에 반발해 김달수, 김시종, 양석일 등이 총련과 문예동을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후 재일 조선인 문학의 양상은 문예동의 작품 활동과 문예동 외의 작품 활동으로 양분되면서, 재일 조선인 우리말 문학과 재일 조선인 일본어 문학으로 이원화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이러한 재일 조선인 문학의 상황을 해방 이후 발간된 주요 매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예동에서 발간한 매체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문학예술》, 《겨레문학》, 《종소리》 등이 있다. 《문학예술》은 문예동의 기관지로 1960년 1월 창간되어 1999년 6월까지 총 109호가 발간되었는데, 문예동의 이념과 성격을 가장 충실히 반영한 우리말 잡지이다. 김일성의 교시를 바탕으로 총련의 지향성과 문예동의 창작 방향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여 사실상 북한의 문예 이론에 입각한 총련계 재일 조선인들의 문학 활동 지침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창간 당시에는 김석범이 편집을 맡았고, 이후 홍윤표, 소영호, 정화흠 등이 편집을 맡아 ‘공산주의적 전형’ 창조와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혁명적 작품 창작에 주력했다. 《겨레문학》은 《문학예술》 휴간 이후 문예동 기관지로 새로 창간된 순수 문예 잡지로, 2000년 5월 여름호를 창간호로 하여 2002년 8월 제7호까지 발간되고 종간되었다. 시와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게재했는데, 특이한 사항은 재일 조선인 문학사를 정리하는 두 가지 기획물을 실었다는 점과 매호 ‘신인 작품’란을 두어 시와 단편소설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2000년대 들어서부터 지금까지 문예동의 활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시 전문지 《종소리》이다. 문예동이 주장하는 재일 조선인 문학의 정체성과 지향성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빼앗긴 아름다운 우리말을 되찾아 민족어에 담긴 민족정신을 회복하는 것, 식민지 노예 상태를 거절하고 일본의 동화 정책에 맞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재일 동포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것, 통일 민족과 통일 문학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종소리》는 이러한 문예동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함으로써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변화와 갱신을 선도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문예동의 노선에 반기를 들고 조직에서 이탈했거나 처음부터 문예동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발간된 잡지로는 《한양》, 《삼천리》, 《청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천리》, 《청구》는 일본어 잡지이므로 본고에서는 일단 논외로 하고, 1962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되어 1984년 3·4월호(통권 177호)로 종간된 우리말 종합 문예지 《한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양》은 1960년대 한국 사회와도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4·19 혁명 이후 한국문학의 변화와 혁신에 크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한양》은 재일 조선인 문학으로서뿐 아니라 한국문학사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매체이다. 《한양》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창간되었는데, 첫째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들이 그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발표할 만한 매체가 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재일 동포로서 남한과 이루는 문화적 교류와 비판적 연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는 점이다. 특히 1960년대 남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서 조국의 역사적 현실에 비판적으로 대응하는 실천적 성격을 분명하게 견지했다.
이상의 주요 매체 가운데 현재 재일 조선인 우리말 문학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매체가 《종소리》이다. 《종소리》는 2000년 1월 창간되어 2022년 4월 통권 90호까지 발간된 시 전문지이다. 정화수, 김학렬, 홍윤표, 정화흠, 김두권, 김윤호 등 재일 1세대와 2세대들이 주축이었는데, 현재 이들은 대부분 타계하고 다음 세대인 오홍심이 맡아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2004년 11월에는 《종소리》 20호 발간을 기념하여 시선집 『종소리시인집』을 출간했고, 2008년 2월에는 대표 시선집 『치마저고리』를 국내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
재일 동포들에게 있어서 오늘날처럼 시가 요구되는 시기는 없다고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가 발전하자면 민족의 량심, 시대의 선구인 시문학이 필요했고 그 사명과 역할을 다해야 했습니다.
재일 동포들의 애국애족 운동의 경우에도 역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조국의 통일이 지연되어 동포들의 세대가 몇 차례나 바뀌고 민족성이 희박해져가는 지점에서는 이제 그 어떤 위구를 느낄 만큼 민족성 문제는 림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문학예술 운동이 한몫을 단단히 해야 함은 물론이요 더욱이 문학이 앞장서는 것이 자못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시대를 앞질러가는 시는 한시도 늦출 수 없는 초미의 문제이며 초보적인 문제입니다.
《종소리》에 참여한 우리들은 작은 힘이나마 한데 묶어 우리 민족문화와 민족성을 지키고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는 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저 이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3)
《종소리》 창간의 취지와 의의에 대한 편집위원들의 생각을 담은 「편집후기」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종소리》는 “재일 동포들의 애국애족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시인들의 노력을 담은 동인지이다. 지금 재일 조선인 사회는 교포 3세 이후의 세대가 주축을 이룸에 따라 ‘민족성’을 내면화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즉 민족적 정체성(identity)의 부재가 당연시되는 교포 사회에서 재일 조선인 문학의 특수성을 지켜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혼란과 혼동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흩어져 있는 것이 현재 재일 조선인 문학이 직면한 위기 상황이라는 점에서, 《종소리》는 이러한 위기를 넘어서 문학예술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모색하는 의지를 담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족의 량심, 시대의 선구인 시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시대를 앞질러가는 시”의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한 데서 《종소리》 창간의 시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2000년대 이전까지 재일 조선인 문학의 발전 과정은 재일 조선인의 사회운동 발전 단계와 특성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공화국 창건 이후 총련이 결성되기 이전의 시기(1948.9∼1955.4), 둘째, 총련 결성 이후 김일성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창작의 기치를 드높이던 시기(1955.5∼1973), 셋째, 재일 조선인의 조국 방문을 시작으로 사상 예술성의 강화가 이루어진 시기(1974∼1990년대)로 구분된다.4) 이러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흐름에서 《종소리》의 창간은 네 번째 시기의 출현을 의미할 만큼 급격한 변화와 경계의 지점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시 창작에서 사상성을 강조하던 이전의 경향과 완전히 결별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상성과 예술성의 조화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예운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종소리》는 “시문학의 사상은 서정화된 사상이지 결코 개연적 론리의 그것이 아니”고, “시의 사상감정은 시인의 직설적인 주장에서보다 주로 작품에 표현된 생활적인 표상이 자아낸 정감(서정)에 기초하여 비로소 독자들에게 감명 깊게 감동적으로 전달되는 법”5)이라고 하여 창작 방법론의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즉 《종소리》 이전의 재일 조선인 시문학이 수령에 대한 우상화와 남한의 변혁 운동에 대한 추동에 초점을 두었다면, 《종소리》에서부터는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의 권익에 대한 문제와 조국에 대한 향수 등을 강조하여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의 변화는 재일 조선인의 시 의식이 정치와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일본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로서 겪는 시련과 고통에 초점을 둔 ‘재일’의 문제에 더욱 천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6)
재일 조선인 우리말 시문학은 허남기, 강순, 남시우를 시작으로 김윤, 김학렬, 정화수 등으로 이어져 왔다. 특히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허남기, 강순, 남시우 3인의 시대8)라고 할 만큼 세 시인이 재일 조선인 우리말 시문학의 초석을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일 조선인 우리말 시문학은 식민과 분단의 상처를 경험한 조국의 현실을 재일 조선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비판적인 관점에 있었으므로, 작품의 성격이나 주제가 개인의 정서나 내면에 집중하기보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양상은 대체로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 민족 공동체의 역사성과 상징성의 구현, 둘째, 분단 조국의 통일과 저항적 주체의 형성, 셋째, 재일의 실존성 인식과 디아스포라적 사유의 확대가 그것이다. 첫째의 경우 민족의 문제는 비록 관념적이고 당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재일 조선인들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신념이요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서 그들은 언어, 민속, 풍물, 자연, 노래, 놀이 등 다양한 제재를 활용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지켜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고향의 꽃과 풀, 토속적인 음식9), 지역의 특산물 등을 주요 제재로 삼아 민족 공동체의 역사성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데 집중했다. 둘째의 경우는 재일 조선인 문학이 분단 조국의 통일에 가장 중요한 목표를 두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남북한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 6·15 남북작가대회의 감격,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입장 등을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정치시의 양상을 전면화했다. 셋째의 경우는 교포 3세대 이후 민족과 국가에 구속된 혈연적 유대나 일본어와 우리말 사이의 이중 언어 현실에 크게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문학적 관심과 지향을 보이는 데서 나타난다. 즉 이 세대들에게 재일은 이념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생활의 문제이므로, 일본에서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불평등에 더욱 중요한 문제의식을 두었다.10)
본고는 재일 조선인 우리말 시문학의 주요 시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통해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우리말 시문학의 형성과 전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허남기는 191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제2상업학교(현재 부산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총련의 문화부장, 부의장, 문예동 위원장을 역임했고, 『허남기 시선』을 비롯해 시집 10여 권을 남기고 1988년 사망했다. 그는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문학 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된 《민주조선》, 《조선문예》 등의 잡지를 통해 김달수, 이은직 등의 소설가, 강순 시인 등과 교류하면서 재일 조선인 문학의 초석을 닦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생전에 『선물』, 『조선해협』, 『조선 겨울이야기』, 『화승총의 노래』, 『해바라기의 노래』, 『비수』, 『한 번 흐른 강물은 다시 막지 못한다』, 『길』 등 상당히 많은 시집을 남겼다. 북한 문학사에서는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시인으로 그를 높이 평가해 유고 시선집 『조국에 바치여』(평양출판사, 1992)를 발간하기도 했다. 남한 문학계에서도 그의 서사시 『화승총의 노래』가 민영 시인에 의해 번역·출판되어 “동포 시인 가운데 제일 문학적 성과가 뛰어난 분”11)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허남기의 시는 반제반봉건의 투쟁 의식과 서사 정신의 구현,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민중 의식의 실천, 민족 교육에 대한 신념과 총련의 선전 선동이라는 세 가지 양상으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1955년 총련 결성 전과 후 시의 양상이 급격하게 달라지는데, 이는 분단 조국의 상황과 결부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959년은 총련 산하 문예동이 결성된 해이고, 허남기가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총련의 지도 노선에 따른 목적문학을 이끌어가는 중책을 맡은 때이다. 따라서 그는 문예동의 대표로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방향성을 스스로 제시해야 했는데, 이념적으로 북한의 지도 노선에 충실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어 시 쓰기에서 조선어 시 쓰기로 전환을 하는 등 두드러진 변화를 선도했다. 이런 점에서 몇 편을 제외하고는 해방 직후부터 1959년까지 쓴 작품을 모은 『조국에 바치여』는 이념적으로 경직되기 이전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에 주목할 만하다. 원래는 일본어로 발표된 작품이 대부분인데, 생전에 그가 직접 조선어로 번역하여 우리말 시집으로 재구성했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조선 겨울 이야기」인데,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민주조선》에 일본어로 연재한 기행체 형식의 장시이다. 당시 남한 사회의 백과전서를 엮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전국을 편력하며 쓴 작품으로, 「경주」, 「부산」, 「대구」, 「부여」, 「목포항」, 「태백산맥」, 「서울」 등 총 13장 66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자유도 해방도 갈데로 가라 / 인도도 민주도 갈데로 가라 / 이 세상 만사는 돈이면 그만 / 대신도 박사도 돈이면 다 된다네- / 이러한 아리랑이 들려온다 / 이러한 양산도가 들려온다 // 국일관 / 명월관 / 대한관 / 봉래관 / 그밖에 온갖 애국적 풍류적 명치을 단 / 가지각색 온천려관들 줄지어 늘어섰고 / 료리집들 늘어서고 / 천원짜리 지폐로 다듬은 새 류행의 청년신사와 / 금강석과 여우목도리라 치장한 / 현대판 미녀들과 / 기생과 사환군과 반또오(고용원들의 우두머리)들과 / 신변호위역들 / 모두가 의좋게 / 노래를 부르는 것이 들린다 // 자 / 천민 제군은 썩 비켜라 / 나으리들의 취흥을 돋구기 위해 /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 개짖는 소리라도 하는놈은 좋으나 / 시인 나부랭이는 아예 필요치 않는다구나.
「조선겨울이야기」의 ‘부산’ 시편 가운데 한 작품이다. 당시 ‘부산’의 모습은 해방이 되었지만 식민지 역사의 상처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혼란과 혼동의 장소였다.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돌아오는 재일 조선인들과 조국에서 가난을 견디지 못해 다시 식민의 땅 일본으로 돌아가는 민중의 애환이 교차하는 곳, 그래서 우리 민족의 희망과 절망이 고스란히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격동의 역사적 장소였다. 특히 왜색풍의 건물과 술집들, 음식점들이 도처에 즐비했고, 친미사대주의자인 친일 세력들에 의해 제국주의의 횡포가 계속해서 자행되었으며, “천민 제군은 썩 비켜라”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을 자신들의 안위와 유흥을 위한 존재로 비하하는 봉건적 권력의 횡포가 극심한 곳이 바로 “동래온천장”이었다. 이처럼 “1945년 8월 회복되었어야 할 그 자유”(「부산제2상업고등학교」)를 진정으로 되찾지 못한 ‘부산’은 “가지각색 온천 여관들”과 “요리집들”, “청년신사”와 “현대판 미녀들”의 모습에서처럼 여전히 식민의 땅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허남기는 외적 해방은 이루었으나 내적으로는 아직도 식민의 잔재 속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함석과 뺑끼와 / 다다미와 게다짝으로” “말쑥이 문명개화”(「경주시」)한, 즉 식민의 세월에 묻혀 어느새 몸도 마음도 땅도 건물도 모두 일본화돼 버린 조국을 향해 “여기가 대체 어느 나라입니까”라는 냉소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허남기의 초기 시가 친일 봉건 타파를 통한 진정한 민족 해방을 실천하는 데 가장 우선적인 목표를 두었다는 점에서, 문예동 결성 이전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방향성이 이념적 경직성과는 무관하게 민족 공동체의 회복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순12)은 1918년 강화 출생으로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을 다녔고, 김달수, 허남기 등과 함께 《조선문예》를 발간하는 데 참여했다. 생전에 『조선부락』(1953), 『불씨』(1956), 『강순시집』(1964), 『강바람』(1984) 등 우리말 시집 4권과 『날나리(なるなり)』(1970), 『단장(斷章)』(1986) 등 일본어 시집 2권을 출간했고, 『김지하전집』(1974), 신경림의 『농무』(1977),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1979),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1979), 조태일의 『국토』(1980),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1981), 양성우의 『겨울공화국』(1978) 등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시문학과 남한의 시문학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가장 대표적인 재일 조선인 시인이다. 그의 시집 가운데 『강순시집』과 『강바람』을 비교해서 그 차이에 주목해 보면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변화 양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강순시집』은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고려할 때 총련 결성 이전의 시와 이후의 시로 구분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총련 결성 이전의 경우에도 해방 직후부터 남북한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기까지 시의 양상과 그 뒤 총련이 결성되기 전까지 시의 모습은 일정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해방 이후에도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재일 조선인들의 근원적 향수와 민족의 정한을 드러내는 민족적 표상의 형상화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해방이 분단으로 고착화해 버린 현실에 대한 비판과 총련계 재일 지식인으로서 민족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모습의 형상화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리고 총련 결성 이후의 시 세계는 총련의 지도자로서 북한에 대한 찬양과 남한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는 선전 선동의 양상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강바람』은 남북의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종속하여 극단적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 재일 조선인 사회의 이원화에 대한 비판과,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오히려 조장하는 반통일 세력, 즉 미국, 일본과 같은 외세는 물론이거니와 민족보다 이념을 더 우선시하는 재일 조선인 내부의 조직적 폐쇄성에 대한 강한 부정을 담아냈다. 이러한 시의 경향은 그가 1964년 ‘조선신보사’를 그만두고 총련 조직을 떠난 가장 큰 이유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데, 디아스포라적 주체로서 그의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민족의 통일에 있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민족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어인 일본어와 모국어인 우리말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을 겪어온 이중 언어의 현실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이러한 이중 언어의 현실조차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으로 재일 조선인들의 실존을 규정하고 민족 정체성을 구현하는 언어의 실천적 가치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의 시가 이데올로기 중심의 『강순시집』의 경향에서 벗어나 재일 조선인의 생활상을 구체화하는 『강바람』의 세계로 변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남시우는 1926년 7월 15일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망호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학적 전통이라는 구습에 젖은 안동에서는 민족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40년 친척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했다. 1948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러시아문학을 공부했고, 동경조선고급학교 교원을 거쳐 조선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과 조선어를 가르쳤으며, 1979년부터 2001년까지 조선대학교 학장을 역임하면서 재일 조선인 교육 사업을 주도했다. 2007년 3월 22일 생을 마감한 그가 남긴 시집으로는 『길』(1949), 『봄소식』(1953), 『조국의 품안에로』(1959), 『조국에 드리는 송가』(1982), 허남기, 강순과 함께 낸 3인 공동 시집으로 『조국에 드리는 노래』(1957)가 있고, 일본어 평론집 『주체적 예술론』(1983)이 있다.
남시우는 허남기, 강순과 더불어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시단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이다. 허남기, 강순의 시가 문학적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면, 상대적이긴 하지만 남시우의 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즉 그는 재일 조선인들에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시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초기 시가 동요나 동시 형식으로 우리말과 글을 모르는 재일 조선인들의 민족의식과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민족 교육의 심화를 통한 민족 주체의 형성 과정은 조국, 즉 북한에 대한 지향을 정당화하는 주체적 근거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그의 시는 남한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위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찬양으로 점점 더 획일화했다.
김윤은 1932년 경남 남해 출신으로 진주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을 중퇴했다. 1950년대 전시연합대학 시절 부산에 모인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신작품》의 동인(고석규, 천상병, 송영택, 김재섭, 김소파, 이동준, 김동일)으로 활동했는데, 2집에 「호수」, 3집에 「나무」, 4집에 「가을」을 발표했다. 5집부터는 동인 명단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는데, 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내에서는 본명인 김동일(金棟日)로 시를 발표했고, 이후 일본에서는 김윤이라는 필명으로 《한양》을 중심으로 시 창작 활동을 펼쳤다. 《현대문학》 도쿄 지사장을 맡은 인연으로 시집 두 권을 현대문학사에서 발간했는데, 『멍든 계절』(1968), 『바람과 구름과 태양』(1971)이다.
김윤의 시는 재일 조선인 시문학 연구에서 상당히 문제적인 위치에 있다. 김윤은 총련 소속이 아니면서도 지금까지 줄곧 우리말 시 창작을 해왔고, 민단 소속이면서도 남한의 보수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으로 총련 사람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민단과 총련의 이념과 우리말과 일본어의 경계에 휘둘리는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정체성 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통합적 면모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그의 시는 이념과 언어에 의해 이원화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공통분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이 지향해야 할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지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민단에 소속해 있었지만 처음부터 그의 시는 이와 같은 통일된 재일 조선인 사회를 지향했고, 통일 문학으로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가능성을 지향해 왔다. 이런 점에서 김윤의 시는 앞으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이 이념과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민족과 국가, 조직을 모두 통합하는 새로운 관점과 방향을 열어나가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김학렬은 1935년 교토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고, 1962년 조선신보사에 「일어서라, 한강 사나운 물결아!」가 당선되면서 시작 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삼지연』(1979), 『아, 조국은』(1990) 등을 상재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연구』(1996)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수 칭호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부터 조선대학 문학부 교수와 문예동 부위원장, 《문학예술》 편집장 등을 맡아서 재일 조선인들의 문학예술 교육과 문예 사업 전반을 활성화하는 데 평생 헌신했다. 또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이론적 토대 마련과 문학사의 정리 등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비평가로서도 중요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의 시는 김일성에 대한 찬양과 사회주의 조국 북한에 대한 지향성, 남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통일에 대한 염원, 재일 조선인의 생활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냈다.
정화수는 1935년 부산 기장 출생으로 조선대학교 노문학과를 졸업했고, 도쿄조선학교 중급부 교원을 하다가 1961년부터 1983년까지 《조선신보》 기자를 거쳐 문예동 위원장을 역임했다. 총련의 문학 활동을 조직적으로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한 그가 남긴 시집으로는 북한에서 출간한 『영원한 사랑 조국의 품이여』(1980)가 있다. 그는 문예동 소속 재일 조선인 시인들의 모임인 ‘종소리 시인회’를 이끌면서 시 전문 동인지 《종소리》의 발행과 편집을 책임졌다. 이처럼 정화수는 2000년 이후 총련의 재일 조선인 시문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종소리》에 수록된 시를 모아서 남한에서 시집을 출간하겠다는 뜻을 품었으나 생전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여 유고로 두 번째 시집 『쑥은 쑥국이요』가 부산의 ‘삼아’라는 출판사에서 2010년 8월 발간되었다. 그의 시는 수령 형상 창조와 북한에 대한 찬양, 총련의 귀국 사업과 민족 교육에 대한 신념, 근원적 고향 의식과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담는 데 주력했다.
지금까지 재일 조선인 문학 연구는 ‘누가’, 어떤 ‘언어’로 ‘무엇’을 썼느냐 하는 문제가 주된 쟁점이었고, 문학사적 시대 구분과 서술 방법은 연구자마다 편의적인 방식을 드러냈기 때문에 일관성을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중 언어의 현실, 조직의 이원화 등과 같은 현실적·제도적 장벽과 국문학계와 일문학계의 연구 대상과 범주의 차이로 인해 모두 아우르는 종합적 체계를 세우지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물론 모든 문학사가 그러하듯이 문학사적 사실이나 결과물 자체를 전부 포괄하는 문학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언어, 이념, 세대 등과 같은 외적 문제로 인해 문학사의 편향성이 심화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2000년 이후 총련계 재일 조선인 시문학은 서정시의 본질에 충실한 경향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재일 조선인 문학 연구에 있어서 총련의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은 연구 태도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촉구한다. 시 작품의 질적 수준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금까지 지켜온 재일 조선인들의 민족적 신념만큼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말로 창작을 하는 총련계 재일 조선인 시인들 가운데 1세대, 2세대 시인들은 대부분 사망하여 이들의 민족의식과 주체 의식이 교포 3세대, 4세대 이후로 이어지지 못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사실 이들 이후의 문학 활동을 두고 과연 재일 조선인 문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훨씬 많다. 하지만 현재 재일 조선인의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지난 역사의 의미까지 지금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것은 더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재일 조선인의 현실에서 ‘재일’의 의미가 약화했다고 해서 재일 조선인의 역사가 결코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은 민족과 이데올로기, 언어와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역사적 과제임이 분명하다. 앞으로 총련계 재일 조선인 우리말 문학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이념적 경직성을 드러내고 언어미학의 수준이 부족한 작품이 많다고 하더라도 총련계 재일 조선인 문학 활동이 해방 이후 재일 조선인 문학의 분명한 실체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재일 조선인 문학 연구는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총체적인 연구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한인문학회, 한국문학번역원 공동 학술 대회 발표문(2022. 7. 29.)
1) 손혜원은 재일 조선인 문학사 서술과 결부하여 이러한 현실을 검토하면서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첫째, 재일 조선인 문학을 일본 문학의 특수한 장르나 아종으로 보고 일본어로 쓰인 작품군에 한정해서 논의했다는 점, 둘째, 일본어 작품에 편중해 조선어 작품에 대해 무관심하고 묵살했다는 점, 셋째, 일본에서 간행된 재일 조선인 문학 단행본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일본 매체에 게재되는 작품도 거의 없다는 점에서 작품에 접근하는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재일조선인 문학사’를 위하여』, 소명출판, 2019, 16-18쪽 참조.
2) 실제로 재일 조선인은 해방 이후 우리말의 부활을 당연히 기대했지만, 일본 정부와 연합국최고사령부(GHQ)는 조선인들의 탈식민화를 공산주의 운동과 결부하여 우리말 교육을 탄압했다. 해방 이전 황민화 교육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우리말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는데, 해방 후에도 우리말 교육이 쉽지 않음에 따라 재일 조선인의 우리말 사용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손혜원, 위의 책, 22-23쪽 참조.
3) 「편집후기」, 《종소리》 창간호, 2000. 1.
4) 손지원, 「조국을 노래한 재일조선인시문학 연구(1)」, 《겨레문학》 창간호, 2000년 여름, 74-75쪽.
5) 김학렬, 「절절한 망향의 정감, 세련된 시적 형상 ― 정화흠 시집 『민들레꽃』을 두고」, 《종소리》 제4호, 2000. 10., 47쪽.
6) 필자는 2006년과 2007년 두 차례 일본 도쿄에 있는 정화수 시인의 집을 방문하여 재일 조선인 시문학을 주제로 여러 가지 논의를 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재일 조선인 문학의 성격에 대해 북한 문학의 일방적 영향을 벗어나 시의 본질에 충실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소리》를 이러한 변화를 선도하는 매체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종소리》에 수록된 시 작품 전반에 걸쳐 아주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는데, 2000년대 이후 이념적 경직성에서 벗어나 서정시의 본령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한 재일 조선인 시문학의 변화 양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7) 그동안 필자의 연구는 재일 조선인 시문학에 집중되어 있었고, 재일 조선인 우리말 소설 문학에 대한 이해는 아직 자료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과제로 남겨두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시문학을 중심으로 재일 조선인 우리말 시문학의 개요와 주요 시인을 정리하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재일 조선인 우리말 소설 문학에 대한 개괄적 이해는 지명현의 「재일 한민족 한글 소설 연구 ― 《문학예술》과 《한양》을 중심으로」(홍익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5)를 참고할 만하다.
8) 김학렬, 「재일 조선인 조선어 시문학 개요」, 와세다대학조선문화연구회·해외동포문학편찬사업추진회·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재일 조선인 조선어 문학의 현황과 과제 심포지엄 자료집』, 2004. 12. 11., 와세다대학교, 3-4쪽.
9) 북한의 평론가 류만은 “민속 음식과 관련한 여러 시 작품에서 풍기는 정서는 동포 시인들이 동포들의 생활을 노래한 데서 줄곧 주체성, 민족성을 놓치지 않고 생활 체험과 사색을 심화한 결과 이룩된 결실이다”라고 평가했다. 류만, 「민족의 넋이 높뛰는 애국의 《종소리》 ― 시잡지 《종소리》를 읽고」, 《종소리》 제27호, 2006 여름, 50쪽.
10) 재일 조선인 우리말 시문학에 한정하여 논의하는 원고의 특성상 재일 조선인 시인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대상인 김시종은 제외할 수밖에 없었는데, 김시종의 시가 강조하는 ‘재일한다(在日する)’의 의미는 재일 조선인의 생활에 천착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재일을 남과 북 어느 한쪽으로 귀속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계’와 ‘틈새’의 문제로 인식함으로써 디아스포라적 주체로서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의 실존적 상황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
11) 민영, 「허남기 선생에게 ― 역자로부터 저자에게」, 『화승총의 노래』, 동광출판사, 1988, 107쪽.
12) 강순의 본명은 강면성(姜冕星)이다. 이는 필자가 2009년 1월 일본 도쿄 외곽 가나가와현 사가미야영원에 있는 그의 묘소를 직접 참배하고 묘비명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그는 해방 직후 일본에서 발간된 《백민(白民)》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백민》의 동인이 1948년 결성된 재일조선문학회의 주축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재일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형성 과정에서 강순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오늘의 문예비평》 편집인 및 주간, 《신생》 편집위원, 한민족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재일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역사적 이해』, 『한국 근대문학과 동아시아적 시각』, 『한국문학과 역사의 그늘』 등을 출간했다. 평론집 『뒤를 돌아보는 시선』, 『리얼리즘‘들’의 혼란을 넘어서』, 『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 등, 인문여행서 『상하이 노스탤지어』 등이 있다. 고석규비평문학상, 애지문학상, 심훈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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