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2호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역사적 이해와 창조적 소통의 모색
홍용희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적응과 극복의 명제를 생래적인 과제로 안고 있다. 현지의 주류 문학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주류 문학의 한계를 충격하고 극복하는 것이 주변 문학인 재외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궁극적인 지향성이다. 다시 말해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현지의 단순한 주변 문학이 아니라 창조적 소수자 문학으로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이 현지의 주류 문학을 충격하고 극복하는 창조적 소수자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한민족의 문화 예술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을 설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재외 한인 문인 및 문학 단체와 국내 문인 및 문화예술 단체의 적극적인 소통과 교류가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창조적 발전과 현지에서의 능동적인 기여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편, 이러한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이중적 과제는 한국 문단의 영향력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시 말해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한국의 주류 문단에 대해서도 적응과 극복의 과제를 추구해야 한다.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현지의 주류 문학의 자산과 미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한국 문단의 세계적 보편화를 향한 신선한 활력과 성찰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재외 한인 문학이 현지 문화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혼종성, 이중성, 경계성, 통문화성(cross-cultural)은 세계적인 한국문학을 위한 문화적 자산으로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이 이러한 이중 과제를 동시에 감당해 낼 때 현지는 물론 한국 문단에서도 종속적인 하위 주체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상위 주체로서 창조적인 소수자 문학의 역할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스럽게 한민족 문학은 탈중심의 중심, 즉 서울 중심을 벗어나서 전 세계 각지가 모두 제각기 중심이 되는 수평적인 소통의 관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문학이 이러한 수평적인 다중심의 열린 시각을 추구할 때 문학적 자산은 물론 비약적 발전의 가능성도 새롭게 열릴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미래 지향적 의미와 가치를 염두에 두면서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역사적 이해와 한민족 문학의 자산으로서 발굴과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20세기 한반도는 물론 격동의 세계사적 비극을 함축하는 축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을 통해 세계사적 문제를 다양한 국면에서 성찰적으로 재인식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가치 규범을 모색하는 것은 21세기 지구 사회의 문학을 구현하는 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고려인 디아스포라에는 구한말 사회적 혼란과 절대 가난 속에서 연해주로 이주한 유이민의 삶, 국권 상실기 독립운동 전진기지로서 겪은 부침,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한 희생, 독소전쟁, 소련 와해와 독립국가 탄생 등이 복합적으로 중첩해 있다. 또 한반도의 분단 이후 북한 출신 유학생 망명자들1) 이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단의 중심에 가세하면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삶과 문학은 해방 이전은 물론 해방 이후 분단 시대까지 이어지는 비극적인 한국 근대사를 가로지른다.2) 고려인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초반인데, 주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소수의 생계형 농업 이주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러일전쟁, 조선 강점 등이 전개되면서 연해주는 정치적 망명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자리 잡는다. 이때부터 이주민이 급증하여 연해주 고려인 공동체가 체계화한다.
1910년 1월 13일 한국주차헌병대의 노령 여행 복명 보고에 따르면 연해주와 흑룡주의 이주 한인을 약 10만 명으로 추정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고려인촌, 개척리)였다. 개척리에는 ‘카레이스키 스카야’, 즉 고려인 거리라는 공식 도로명도 생겼다. 그러나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하자 제정러시아 당국은 개척리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한인 전체를 블라디보스토크 북부 변두리로 이주시켰다. 이곳은 구 개척리에서 북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비탈로 높고 건조하며 아무르 만을 굽어보는 곳이었다. 한인들은 이곳에 피땀을 흘려 신 개척리를 건설했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을 부흥한다는 의미로 ‘신한촌’이라 명명했다.3)
신한촌에서 한인 사회의 자치는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들을 모두 규합하고자 1911년 결성된 해삼위거류민회(海蔘威居留民會)가 1912년 6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신한촌민회가 결성되면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여기에서는 한민학교의 운영과 유지 문제, 신한촌 내의 한인의 권리 보호, 시 당국과 벌이는 행정 타협 문제 등을 중점 사안으로 실천했다. 특히 민족 교육과 자치 기구가 정비된 한인 마을 신한촌은 항일 민족 지사들의 집결지가 되면서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 기지로 발전했다. 러시아 지역의 한인 민족운동은 1905년부터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까지 외부에서 들어온 독립지사들, 즉 국내 망명 인사들과 만주와 미국에서 온 인물들이 주도했다. 당시 이곳으로 망명하여 활동한 인물로는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이진룡 등의 의병장을 필두로 하여 그동안 국내외에서 애국계몽 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망라되었다.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이위종을 비롯하여, 북간도 용정촌과 서간도 삼원포에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던 이동녕·정순만, 미주에서 공립협회와 국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정재관·이강·김성무 등이 일차적으로 집결했다. 또 국내에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활동하던 안창호를 비롯해 이종호·이갑·조성환·유동열 등도 이곳으로 집결했다. 그 밖에도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신채호도 합세했으며, 기독교계의 이동휘와 대종교의 백순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 운동가들이 연이어 집결했다. 이곳에 모인 항일민족운동가들은 이곳 한인 사회의 지도급 인물들인 최재형·최봉준·문창범·김학만 등과 합력해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러시아 지역의 한인 민족운동은 의병 투쟁과 애국계몽 운동을 동시에 진행했다. 연추 등 국경에 가까운 농촌 지역에서는 의병 투쟁이 활발했고, 블라디보스토크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해조신문》(1908.2.26.~1908.5.26.), 《대동공보》(1908.11.18.~1910.8.24.) 등을 간행하는 등 애국계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편, 한인의 교육은 러시아의 이민족 동화 정책에 따라 많은 통제와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한인의 민족주의 교육은 면면히 지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한민학교를 들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민회에서 주민들의 의연금으로 설립한 계동학교, 세동학교, 신동학교가 1909년 10월 합병을 통해 한민학교로 개교하면서 민족 교육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12년 3월에는 2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교사를 양옥으로 신축하여 연해주 민족주의 교육의 본산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한민학교는 <보국가>, <대한혼>, <애국가>, <국가의 노래> 등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창가를 교육하기도 했다. 또 한국의 독립과 민족의식의 함양을 위한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안창호, 박용갑, 이종호, 김익용 등의 연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리고 신한촌 외곽에는 조선사범대학, 원동종합대학 등이 있어 한인 자제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 고려인 사회는 소비에트 정부의 박해 속에서도 《선봉》(1923~1937)4)이라는 최초의 우리말 신문을 간행하고 이를 중심으로 각 방면의 주체적인 문화 운동과 문학 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부터 고려인들의 문학작품을 게재하기 시작하다가 1932년부터는 독자적인 ‘문에페-지’란을 신설하여 고려인들이 정기적으로 문학작품을 실을 수 있도록 하여 고려인 문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문학을 선도해 나간 인물로서 조명희의 업적은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지칭될 만큼 단연 주목된다. 그는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에 소설 쓰기에 주력하기보다는 시 창작에 몰두하면서 사회주의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을 갖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시론을 주창했다. 그의 이러한 시 창작론은 소비에트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비에트화에 충실해야 함을 역설하는 한편 미래 조선을 무산자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바람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조명희의 시 「짓밟힌 고려」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무산계급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강한 신념이 드러난다. 또 시 「아우 채옥에게」는 소련에 망명한 언니 영옥이 조선에서 동맹파업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동생 채옥을 위로하는 편지 형식을 띤다. 중심 내용은 언니 영옥이 소련에서 능력을 키워 앞날의 무산자 국가가 될 조선을 위해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조명희는 조선을 되찾기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선택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조선을 떠난 것이다. 소비에트에 동화하여 조선을 무산자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그의 이념은 후학 양성으로 이어졌다. 그는 10년 가까이 수많은 현지의 한인 청년들에게 한글문학을 지도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작가 강태수·김기철·김증손과 시인 김준·김광현·한 아나톨리·조기천·김두칠·전동혁, 희곡 작가 연성룡·태장춘 등이 조명희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초기 고려인 문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후에도 고려인 문학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명희는 조선의 무산자 혁명과 해방을 위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지 못한 채, 1937년 일본을 위해 간첩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이듬해인 1938년 5월 11일 사형에 처해진다. 조명희 등 한인 지도자들은 하바롭스크에서 처형되어 시립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상에서 살펴보듯이 구한말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는 처음에는 경제적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일제의 강점으로 인해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동기가 가세했다. 연해주에 이주한 한인들은 제정러시아와 소비에트 체제의 정책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신한촌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제도를 수립하며 독자적인 역량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가혹한 분리·차별 정책에 휘말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된다. 이주 이전에 지도급 인사 2,500여 명은 이미 숙청당했다.5)스탈린의 소련은 극동 지역에서 자치적 민족 공동체를 이룬 한인들을 분산하려는 국가주의 폭력을 일본 정보원들의 침투를 차단해야 한다는 명목6)으로 일방적으로 단행한 것이다.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른 스탈린의 지시로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 약 17만 2,000여 명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당한다. 한인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비좁은 공간에 갇힌 채 어떤 이유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한 달여나 실려 가야 했다. 강제 이주가 진행되면서 고려인들이 살던 원동의 444개 마을은 폐쇄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고려인들은 ‘민족절멸(絶滅)’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시베리아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던져졌다.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한인들은 생소한 중앙아시아 자연환경과 기후 조건에서 현지의 아무런 정책적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통의 인내만을 강요당했다. 한인 이주자들은 연해주 지역에 두고 온 건물, 농기구, 농산물 등의 재산을 미처 챙기지도 못했지만 이후에도 이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강제이주 직후 카자흐스탄공화국 내에서 가장 많은 고려인이 이주된 곳은 남카자흐스탄 주인데, 전체의 43.4%에 해당하는 8,693가구, 41,425명이 이곳으로 갔다. 이외에도 카라간다 주(12,327명), 북카자흐스탄 주(12,301명), 서카자흐스탄 주(8,986명), 악추빈스크 주(8,847명), 알마아타 주(7,622명), 쿠스타나이(3,919명) 순으로 이주했으며, 전체 숫자는 20,141가구, 95,427명이었다.7)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배치된 고려인들 중 500가구에 이르는 사람들이 당국의 명령으로 러시아공화국의 스탈린 주 아스트라한 군으로 재이주되었다. 아스트라한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다시 당국의 명령으로 카자흐스탄공화국의 구리예프(현 아티라우)와 아크몰라로 이주되었다.
1937년 강제이주와 이를 전후해 얼마나 많은 고려인이 죽어갔는지는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숙청, 기근, 질병 등으로 2만 5,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 ‘1937년’이나 ‘이주’라는 말은 금기어였다.8) 스탈린 시대(1928~1953)에 강제이주의 참상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소련 체제에 대한 불만과 항거로 오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체제에서 고려인들은 일방적으로 체제에 적응하고 동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인 문인들은 소련 체제에 반대하는 적성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
고려인들의 창작 활동은 1938년 5월 1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창간된 한글 신문 《레닌기치》9)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레닌기치》는 원동 지역에서 간행되던 《선봉》의 후신에 해당한다. 《레닌기치》가 비록 1938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지역 공산당 기관지로 출발했지만, 1990년 말 폐간될 때까지 한글 발행이 유지되면서 고려인 공동체 소개, 국제 정세와 한반도 정세 소개, 문예 창작 등을 다룰 수 있었다. 특히 1939년 5월 25일 ‘문예페이지’가 만들어진 이후 1941년부터는 신문사 주관으로 각본 현상 모집을 시행하기도 했다. 또 이와 더불어 193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있던 ‘원동변강 조선극장’의 후신으로 1937년 크즐오르다에 고려극장을 세워 공연 예술 문화를 선도했다. 고려극장은 국내외를 통틀어 역사가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서 한민족 문화 예술을 계승하는 데 기여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남다른 근면성으로 현지에 적응했다. 땅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지어 연해주에 버금가는 삶의 기반을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또다시 제2차 대전인 독소전쟁10)을 겪게 된다. 비록 강제이주를 당했지만 고려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조국이라 여기는 소련이 독일에 침략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젊은 고려인들이 자발적으로 입대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군인으로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려인들은 소련 시민의 공민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직접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형태로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전선의 후방 지역에서 탄광이나 무기 생산 공장, 군복 제작 공장, 식량 수송 등을 담당하는 노동군으로 참여하거나 후방에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독소전쟁을 소재로 한 고려인들의 한글 문학작품은 당시 직접 전선에 참여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여 주로 후방의 노동군으로 참여한 고려인들의 현실적 모습을 다룬 작품이 많다. 이 작품 창작들의 내적 의도에는 강제이주를 당한 자신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강제로 이주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소련의 시민이지만 직접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불만이 깔려 있었다. 주가이 알렉쎄이의 「순회 붉은긔」, 「우수한 분조장」, 남해룡의 「최세르게이 비행기」, 리 와실리의 「광부의 길」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11)이다.
한편, 1953년 3월 5일 연해주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명령을 내린 스탈린이 사망했다. 새로운 지도자로 니키타 흐루쇼프가 등장했다. 소련에서는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체제에 대한 흐루쇼프의 비판을 계기로 전면적인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2차 대전 시기에 강제이주를 당한 체첸 민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을 그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고려인들 중 극히 일부가 1956년에 연해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공민증을 받지 못해 거주지 이동 제한을 받던 고려인들은 스탈린 사망 이후 드디어 공민증을 발급받고 소련 전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스탈린 이후부터 소비에트 체제가 와해할 때까지 고려인 사회는 일종의 ‘황금기’를 맞았다. 체제 억압이 느슨해지고 잘 살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 맺는 시기였다. 주류 사회 편입과 출세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 고려인들이 많아지면서 고려인들은 소련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중앙아시아의 농촌에 남은 고려인들은 콜호스에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했다. 흐루쇼프의 황무지 개간 정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농사지을 땅을 넓혀나갔다. 이제 고려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해졌다. 그래서 2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노동 영웅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는 소련의 소수민족 인구 대비 가장 높은 비율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인 공동체는 민족적 특징을 서서히 상실해 가고 있었다. 우리말을 잊어버리고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고려인들이 늘어났다. 민족 간의 결혼이 증가했고 세대 간 갈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고려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 문학작품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먼저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뿌리 찾기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투쟁한 고려인 찾기와 관련된 작업이었다. 이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 김세일이 《레닌기치》에 연재한 「홍범도」12)와 김준의 『십오만 원 사건』13) 등이 있다. 김준의 『십오만 원 사건』은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작가의 최초의 단행본 장편소설인데, 만주에서 일본은행 돈 15만 원을 강탈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은 철혈광복단 소속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다짐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기지와 용기로 독립군의 무기를 마련할 돈 15만 원을 강탈한다. 이 사건은 일본 돈을 강탈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무기를 구하는 과정에서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검거되어 가담자들이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죽임을 당한 비극적 사건이다. 그러나 소설은 비극적 어조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긍정적인 여운을 남긴다. 김준의 소설은 대부분 연해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로 독립군 활동이나 지주 계급을 타파한 사회주의를 중심 내용으로 다룬다. 『십오만 원 사건』 외에도 「지홍련」(1962.7.22.), 「나그네」(『시월의 해빛』, 1971) 등이 있다.
한편, 고려인 문인들의 강제이주의 문학적 재현은 스탈린이 사망하고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가능했다. 1971년 발표된 여성룡의 「카사흐쓰딴아, 나의 절을 받으라」, 1975년에 발표된 전동혁의 장편서사시 「박령감」 등이 강제이주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초기 작품이다. 그러나 아직 이 작품들에서는 강제이주가 고통스러웠지만 소련 당국의 배려와 보살핌 속에 “새 당 일궈 / 새 살림” 꾸릴 수 있었다는 고마움을 강조한다.14) 오랫동안 고려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1937년 강제이주의 사건이 어느 정도 회자하기 시작한 것은 고르바초프의 대내적 페레스토이카(개혁)와 대외적 글라스노스트(개방)가 실시된 1980년대 후반이다. 고르바초프는 집권하면서부터 소련 내의 개별 민족들의 민족의식과 자율성을 허용했다.
김광현의 「호두나무」는 콜호스의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전면에서 다루나 소비에트 주권이 성립된 1925년을 작중 배경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를 불러낸다. 황유리의 「나의 할머니」(1987)는 할머니의 머리가 회색으로 변화하는 것을 고통스운 강제이주의 체험과 연관하여 은유적으로 그린다. 강제이주의 민족적 참화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가족사적 정체성의 연원으로 언급하는 면모를 보인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유학생 출신인 한진이 1989년 5월 23일부터 31일까지 《레닌기치》에 연재한 「공포」이다. 여기에서 그는 강제이주의 상황과 그 후의 검거 과정에서 나온 민족의 배신자들까지 함께 다룬다. “어데로 무엇 때문에 실려가는지도 몰랐다. 남녀노소 한 사람도 고향에 남지 못하고 다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는 길도 멀었다. 수만 리 수십만 리…… 차에서 태여나는 애도 있었다. 그것들은 인차 귀신들이 물어갔다” 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그동안 금기시되던 1937년 강제이주 사건을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한진은 이외에도 「그곳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통해 현지의 삶에서 세대 간의 소통 부재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고향 상실과 조국에 대한 짙은 향수를 그리고 있다.
김기철이 1990년 4월 11일부터 6월 6일까지 《레닌기치》에 발표한 중편소설 「이주초해: 두만강-씨르다리야강」은 한진의 「공포」와 더불어 강제이주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김두만이라는 콜호스 지도자 가족과 그 일행이 체험한 강제이주의 시작부터 중앙아시아 정착의 온갖 역경을 중심으로 하여 스탈린의 폭거를 구체적인 생활 정서로 고발하면서 살아남은 고려인 후예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성공해야 하는 당위적 과제를 다룬다. 고려인들이 콜호스에서 성공하는 것은 “조선사람들의 일솜씨와 근면성을 시위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 조건을 정치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이 온갖 차별을 견디며 어느 민족보다 근면하게 일해서 콜호스의 노력 영웅이 되어야 하던 염원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르 강은 「놀음의 법」(1990)을 통해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살아남은 고려인들의 삶의 과정을 강제이주의 원체험과 연관하여 알레고리화하는 새로운 창작 방법론을 보인다. 강제이주라는 고려인의 집단 기억을 일상적 삶의 구체 속에서 환영처럼 불러낸다. 1937년 강제이주의 체험이 고려인들의 삶에서는 운명의 근원으로서 가시적 영역뿐 아니라 비가시적 영역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미체험 세대의 관조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연성용이 《레닌기치》에 1995년 2월 4일부터 3월 4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한 「피로 물든 강제이주」에서는 수기의 형식을 통해 강제이주 이전 연해주에서 김 아파나시, 조명희, 박내창 등 이른바 지도자급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정희는 「희망은 마지막에 떠난다」(2002)에서 고려인들을 일본인 간첩으로 의심한 소련 당국에 대해 비판하면서 강제이주의 원인을 고려인에게서도 찾고 있어 특기할 만하다.
화가이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 5세 박미하일(1949~)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인식의 과정에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정착한 고조부와 강제이주를 당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가족사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소설 『천사들의 기슭』은 주인공인 화가 아르까지의 방랑의 연원을 강제이주자의 아픔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의 방랑은 자신의 기억 속에 상실된 고향의 풍경을 채우기 위한 반복적인 도정으로 이해된다. 소설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 역시 러시아 극동 지역, 연해주를 정신적 고향으로 그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삶의 원형으로 존재하는 극동 지역, 연해주가 상상력의 근저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라브렌띠 송(1941~)의 희곡 「기억」(1997)은 고려인들의 카자흐스탄 정착 체험을 통해 강제이주의 의미를 현지의 고려말로 형상화하고 있다. 전체 2막 10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1937년부터 1942년에 이르는 강제이주와 정착 초기의 상황이 배경이다. 지주 계층 김영진 가족, 무산 계층 박뾰트르 가족, 카자크 양모리군 오르바이 가족, 리자 등이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의 비극적인 삶과 민족 정서를 표현한다. 연극이라는 행위 예술을 통해 고려인의 민족적 정체성과 비극의 역사를 극적으로 환기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고 평가된다.
한편, 시 장르에서도 1937년 강제이주의 민족적 참상이 전면화하기 시작했다. 스탈린 사후 개별 민족의 정체성 회복이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고려인의 연해주에 대한 기억과 강제이주의 체험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 시인과 작품을 들면 다음과 같다. 김준의 「나는 조선사람이다」(1962), 김세일의 「고향 원동을 자랑하노라」(1962) 등은 러시아혁명의 역사 속에 살아남은 조선사람의 자부심과 원동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김두칠의 「잃어버린 친구」(1971), 「송림동사람들」(1974) 등은 유년기의 원동의 풍경을 회상하면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과정을 시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연성용은 장편서사시 「오, 수남촌」을 《레닌기치》 1989년 7월 5일자에 발표한다. 여기에서 강제이주의 과정은 “생지옥”으로 그려지고 있다. “어디로, 무엇 때문에, / 사람들을 잡아가는지?……무시무시한 세월 / 그 죄악의 세월은 / 계속되었으며 / 잡혀간 사람들은 / 죽었는지, 살았는지…… / 종적을 감춰버렸다 / 조선학교, 조선대학 / 모두 닫아버렸고 / 다음엔 차츰 / 조선말도 못하게 / 입을 막아치웠다” 하며 고려인의 민족적 수난과 문화 말살에 대해 직접적으로 고발한다. 박현 역시 《고려일보》 1989년 12월 26일자에 발표한 「무심한 세월이 남긴」에서 강제이주의 현실을 비탄의 어조로 노래한다. “허줄한 짐짝처럼 내던진 / 화물차에 실려 왔다 / 어디로 가는지. / 방향도 모르고…… / 어째서 가는지 / 알길이 없었다.” 이외에도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정체성의 기원에 대한 시적 인식을 다룬 작품으로 김기철의 「이주초해」(《레닌기치》 1990.4.11., 4.13., 4.19.), 오병숙의 「바둑개」(《레닌기치》 1990.7.12.), 알렉산드르 강의 「도라지 까페」(《레닌기치》 1990.9.14.), 한진의 「그 고장 이름은?」(《레닌기치》 1991.7.30.), 최영근의 시나리오 「벼랑길」,(《레닌기치》, 1993.10.8.~1993.11.19.) 등이 주목된다.
1991년 말 소련이 해체되었다. 소련을 구성하던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15개 국가들은 각각 독립국가가 되었다. 소련의 시민이던 고려인들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국가가 된 나라들, 특히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민족주의의 대두와 다수 민족 언어의 국어화 정책이었다. 학교에서도 러시아어 수업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고, 자국어 비중이 늘어갔다. 러시아어만을 구사할 수 있는 소수민족들은 일자리를 잃고 사회적 지위도 하락했다. 고려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인들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소련 시기에는 모두 소비에트 고려인이었다가 서로 국적이 달라지면서 러시아 고려인,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카자흐스탄 고려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이전의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고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고려인’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사회주의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들에게는 유의미하지만 1990년대 이후 세대의 고려인들에게는 낯선 용어이다.
소비에트 해체 이후 젊은 고려인 작가와 시인들의 창작 활동의 특징은 첫째, 모든 작품이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전문적인 작가나 시인으로 활동하기보다는 비전문가로서 문예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 작가들은 순수하게 작품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셋째, 이전 소비에트 고려인들과 달리 이들은 잃어버린 조국이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선전, 고려인 집단농장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건설 참여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현재 고려인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듯이 문학 활동도 현지인으로서 생각과 고민을 담아낼 뿐 고려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러시아어와 현지어 교육을 받고 성장했을 뿐 아니라 관습과 사고 체계 역시 현지화하고 있다. ‘고려인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하는 고려인’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 하는 고려인으로서 주목되는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아나톨리 김(1939~)은 일찍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러시아에서 유명한 작가이다. 「묘코의 들장미」(1973), 「수채화」(1973) 등을 통해 동양적 신비로움과 새로움으로 많은 독자에게 존재를 알린 뒤 『다람쥐(Белка)』(1984), 『켄타우로스 마을(Посёлок кентавров)』(1992), 『아리나(Арина)』(2006) 등 현실과 환상이 무한히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관심은 철저히 ‘개인’을 향한다. 그것이 개인의 구원이든 심리적 고찰이든 기존의 문학에서 그려지는 ‘전형성’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독특한 내면을 탐구하고 드러내 보이는 데 집중한다.
보리스 박(Борис Сенсуевич Пак, 1932~)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어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는 1968년 첫 시집 『그대는 별을 따라 가네(Ты по звездам идешь)』를 비롯하여 「밤은 빗물로 세수하고 나서(Ночь умылась дождями)」(1970), 「탄생(Рождение)」(1970), 「어머니(Мать)」(1972), 「4월의 새벽(Апрельские рассветы)」(1974), 「로씨야여, 그대는(Россия, ты……)」(1976) 등과 같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왜 미샤는 혼자서 꿀을 먹을까?(Почему Мишка мед ест один)」라는 동화시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교과과정에 수록되기도 했다.
율리 김(Юли Черсанович Ким,1936~)은 「척탄병들」과 함께 또 다른 노래인 「환상이야, 낭만이야(ФАНТАСТИКА-РОМАНТИКА)」(1963)를 직접 부르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하고 있다. 중독성 짙은 쾌활한 음률의 그 노래는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많이 불렸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영화와 연극 100여 편에 삽입되었으며, 그의 시는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많은 학생에게 읽히고 있다.
뱌체슬라프 리(Вячеслав Борисович Ли, 1944~)는 이영광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시 100여 편을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강제이주(Насильственная депортация)」(2007)는 37장으로 구성된 장시다. 이 시는 ‘화물칸에 실려(Мчится товарняк)’라는 소제목이 붙은 1장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37장 ‘재(пепел)’로 끝난다. 2000년에 발표한 「세월의 꽃잎(Лепестки времени)」에서는 치열하게 살아온 부모 세대를 다독이는 시인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따스한 위로의 손길이 느껴진다.
세르게이 양(양수복, Сергей Дмитриевич Ян, 1949~)은 사할린에서 태어나 『평온한 행복(Тихое счастье)』(2014), 『비의 노래를 들으며(Слушая песни дождя)』(2011), 『꽃그늘(Тени цветов)』(2006) 등의 작품집을 발간한 바 있다. 그의 작품 『외로운 구름의 꿈(Сон одинокого облака)』(2000)에는 사할린에서 한스럽게 살다가 사망한 부친의 꿈이 담겨 있기도 하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1959년에 태어난 스타니슬라프 리(Станислав Чандинович Ли, 1959~)는 ‘2010년 러시아 황금펜’ 작가로 선정되기도 한 시인이다. ‘황금펜(Золотое перо)’은 러시아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전 세계 우수 작가 마흔 명에게 러시아작가동맹이 부여하는 칭호이다. 그가 우리나라 독자에게 알려진 것은 1997년 『재 속에서는 간혹 별들이 노란색을 띤다』15)라는 작품집을 서울에서 발행했을 때이다.
이외에도 1987년에 「게임 규칙(Правила игры)」을 발표한 알렉산드르 강(Александр Кан, 1960~), 『이주(Переселение)』를 발표한 블라디미르 김(Владимир Ким(Ёнг Тхек), 1946~), 『사과가 있는 풍경(Натюрморт с яблоками)』(상상, 2018)과 『개미도시(Мравьиный город)』(맵씨터, 2015), 『밤은 태양이다(Ночь-это тоже солнце)』(상상, 2019) 등을 간행한 미하일 박(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Пак, 1949~), 『다양한 세상(Разные миры)』(1994)과 『메아리(Эхо)』(1996), 『대보름(Полнолуние)』(1998), 『장미바람(Роза ветров)』(2001), 『윤회(Круговерть)』(2006), 『쓰디쓴 쑥(Горечь полыни)』(2007), 『일곱 번째 하늘(Седьмое небо)』(2008), 『선택받은 자(Избранное)』(2009), 『섬들(Острова)』(2010) 등 시집 10여 권을 발간한 마르타 김(Марта Борисовна Ким, 1949~), 2009년 그림 동화 『노래하는 무지개(Поющая Радуга)』를 발표한 이리나 채(Сорокина Ирина Викторовна, 1970~) 등이 주목된다.
오늘날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단은 점차 퇴색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고려인들의 현지 동화, 한반도에서 너무 먼 물리적 거리, 한국과의 교류의 사각지대 등이 작용하면서 고려인 문학의 명맥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고려인 문학’은 ‘문학 하는 고려인’으로 재편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인 문학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미래 지향적인 소통 방법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구소련 지역의 고려인 디아스포라와 한국의 미래 지향적인 바람직한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삶과 문학은 단순히 과거형만이 아니라 현재형이며 미래형으로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소비에트연방과 중앙아시아의 국민이라는 이중성을 띤다. 이들의 모국에 대한 향수는 물론 한글에 대한 인식 역시 세대가 변하면서 현저히 약화하고 있다. 한민족 문화 내지 문학의 규정력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 이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한민족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응집하면서 동시에 현지에서 경쟁력 있는 적응력을 갖도록 지원할 것인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가능성을 찾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국내의 문화 콘텐츠의 개발과 정책 수립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우리의 비극적인 근대사는 물론 소련을 중심으로 한 지난 20세기의 세계사적 모순을 안고 있다. 따라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삶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지난 세기의 세계사적 문제를 가로지르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앞으로 재외 한인 문학은 현지어로 창작되는 빈도가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재외 한인 디아스포라의 성격은 오늘날 지구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전환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는 더 이상 추방, 망명, 이산의 유랑자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이 자발적인 이주자로서 현대 노마드의 한 유형에 속한다. 자크 아탈리가 규정한 현대의 노마디즘은 단순한 공간적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는 창조적인 행위를 위한 이주이다. 현대 노마드 문명에서는 주변과 중심, 피부색과 언어, 모국과 국적국 간의 위계적인 정체성 갈등과 문화적 혼란도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지역적으로 생활하고 세계적으로 사유하는 세계시민의 사고가 일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은 교통 통신이나 매체의 비약적 발전은 물론 호모 모빌리안(모바일이 신체의 일부가 된 인종)의 등장으로 인해 시공을 초월한 세계의 일상성이 현실화하고 있다. 그래서 한순간에 K팝 가수가 수억 명이 환호하는 지구 사회의 스타로 떠오르기도 한다. 지구 사회에 상응하는 지구 문화가 도처에서 한순간에 떠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지구 사회의 도래에 대응하는 한국문학의 성격과 지향성도 새롭게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 중심의 문단을 내세워 지역과 해외 한인 문단을 서열화, 주변화하는 것은 한국문학을 폐쇄적인 ‘우리식 문학주의’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한국의 문학과 문단 역시 세계적인 한국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탈중심의 중심, 즉 서울 중심을 벗어나서 전 세계 각지가 모두 제각기 중심이 되는 문단을 구축해 나갈 때 가능할 것이다. 우리 문학이 이러한 수평적인 다중심의 열린 시각을 추구할 때 문학적 자산은 풍부해지고 비약적 발전의 가능성도 열릴 것이다.
세계 220개국 중 194개국에 분포하는 재외 한인 7,430,688명(2017 외교부 재외 동포 현황)은 현지화, 세계화의 전략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실현할 세계적인 한국의 주역으로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지구 사회에서 재외 한인들이 현지 문화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종성, 이중성, 경계성, 통문화성(cross-cultural)은 한민족 문학의 매우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서 작용할 것이다. 지구 사회에 대응하는 미래 지향적인 지구 문화는 개별과 보편, 주변과 중심이 혼융하면서 새롭게 열어나가는 차원 변화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종과 혼융의 이중적 교섭을 재외 한인 문학에 적용하면 적응과 극복의 방법론으로 확장·해석하여 응용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지 주류 문학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주류 문학의 한계와 결핍의 지점을 극복하는 창조적 소수자의 길을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 이르면 한민족적 정체성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첫째, 세계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문단을 만들어 활동하는 재외 한인 작가들은 인터넷과 모바일의 생활화를 통해 한국 사회와 시공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 지구 어느 구석에 있어도 한국 사회의 지적 활동과 문화 현상과 밀접하게 상호 교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민족 문학의 창작 공간을 국민국가(nation-state)의 단위로 제한하여 논의하는 속지주의는 큰 의미가 없어졌다고 할 것이다. 둘째는 첫 번째의 연장선에서 장거리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설정해 볼 수 있다. 노마드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지역적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초국가적 장거리 민족주의가 대두하게 된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말했듯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이다. 16) 장거리 민족주의 역시 상상의 공동체의 새로운 범주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지구화 시대의 한인 문학의 새로운 인식과 가능성에 대해 앞으로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단순히 한국문학의 부가가치의 상승이 아니라 지구 사회 발전을 위한 가치 창조의 기여에 궁극적 목표가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역사적 이해와 창조적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한반도를 넘어선 세계사적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1) 북한의 소련 유학생 망명은 이른바 ‘허웅배 사건’이 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웅배 사건’이란 소련 모스크바 영화대학교에 유학 중이던 북한 유학생 허웅배가 1956년 영화대학교 대강당에서 진행된 전연맹북한유학생 총회에서 단상에 올라가 김일성 개인 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유학생 내부에서 심한 동요가 있었던바, 허웅배(허진), 이경진(이진), 한대용(한진), 양원식, 김종훈, 최국인, 정추, 정린구, 이진황, 맹동욱, 최선옥 등 유학생 10여 명이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 김병학,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 인터북스, 2009, 112쪽 참조.
2) 홍용희, 「구소련 고려인 디아스포라 시 연구」,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2호, 2010.10, 489쪽 참조.
3) 이항준, 「제정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한인 이주」, 정옥자 편,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상), 국사편찬위원회, 2008, 1415쪽 참조.
4) 사회혁명의 선봉에 선다는 의미를 지닌 《선봉》은 1923년 3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해주 거주 한인들이 창간한 한글 신문이다. 편집자는 한반도의 지사 출신으로 출판업에 종사하던 이백초, 이성, 오성묵, 이괄, 김홍집 등이 돌아가며 맡았다. 발행 부수는 1926년 3,000부 정도였고 기자는 70여 명이었다. 강회진, 『아무다리야의 아리랑』, 문학들, 2010, 36쪽 참조.
5) 스탈린은 강제이주를 단행하기 전에 먼저 집단적 저항을 방지하기 위해 지도자급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시행한다. 김 아파나시, 박창내, 강병제, 송희, 최호림, 리종수 등을 비롯하여 2,500명에 달하는 교사, 공산당 간부, 군인 장교 등의 지식인을 연행했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연행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지칭되는 작가 조명희도 이때 연행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조 발렌티나, 「부친(조명희 작가)에 대한 추억담」, 《레닌기치》, 1990.1.16. 참조. 최 예카테리나, 「작가 조명희와 그에 대한 회상」, 《레닌기치》, 1990.1.16. 참조.
6) 블라지미르 김, 김현택 옮김, 『러시아 한인 강제 이주사』, 경당, 2002 참조. 이채문, 「스탈린의 대탄압과 한인의 강제이주」, 정옥자 편,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 국사편찬위원회, 2008, 189~191쪽 참조.
7) 주우즈베키스탄 대한민국대사관 엮음, 『우즈베키스탄』, 2007, 참조.
8) 박성훈, 「회상기-역사에 왜곡이 있을 수 없다」, 《레닌기치》, 1989.8.18.~1989.8.19. 참조.
9) 《레닌기치》는 강제이주 전 1932년에 극동에서 발간되던 《선봉》의 맥을 이었다. 창간호에 의하면 《레닌기치》는 카자흐스탄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크즐오르다주 조직국과 시르다리야 구역위원회가 발행 기관이며, 최초의 이름은 ‘레닌의 긔치’였다. 이후 ‘레닌의 기치’(1950.7.26.), ‘레닌기치’(1952.1.1.)로 개명되었다. 1940년 3월 크즐오르다주 단위의 신문으로 승격했고 1954년에는 카자흐스탄공화국 전체의 신문으로 격상했다. 알마티,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두산베에 신문사 지국을 설치할 정도로 발전한 《레닌기치》 신문사는 직원만 60명에 이르렀다. 《레닌기치》는 1961년에 소비에트연방 신문으로 격상했다. 《레닌기치》는 신문사 본사를 1978년 크즐오르다에서 알마티로 이전했다. 《레닌기치》는 구(舊) 소련이 붕괴하기 바로 1년 전인 1990년 12월 31일 폐간되었다. 『소련의 고려사람들』(신연자, 동아일보사, 1988),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삶과 문화―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소설 연구」(김필영, 《민족문화논총》 32, 2005) 참조.
10) 독소전쟁은 1941~1945년에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자 총력전이다. 이 전쟁은 인종과 이념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참혹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2차 대전 전체 인명 피해의 절반가량의 피해를 남겼다.
11) 독소전쟁에 관해 《레닌기치》에 발표된 주요 작품들은 종합 작품집 『씨르다리야의 곡조』(사쉬르출판사, 1975), 종합 작품집 『해바라기』(사쉬르출판사, 1982) 등에 실려 있다.
12) 김세일, 『홍범도』, 제3문학사, 1989. 김세일이 1959년 여름부터 1965년까지 7년여 동안 《레닌기치》에 연재한 작품 재수록.
13) 김준, 『십오만 원 사건』, 알마아따: 카스흐국영문학예술출판사, 1964.
14) 종합 작품집, 『씨르다리야의 곡조』, 사쉬르출판사, 1975 참조.
15) 스타니슬라프 리, 양원석 옮김, 『재 속에서는 간혹 별들이 노란색을 띤다』, 새터, 1997.
16) 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옮김, 『상상의 공동체』, 나남출판사, 2003 참조.
1966년 안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래문명원장,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을 통해 등단했다. 저서 『김지하 문학연구』, 『꽃과 어둠의 산조』,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현대시의 정신과 감각』, 『고요한 중심을 찾아서』 등을 출간했다. 젊은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시와시학상, 애지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계간 《시작》 주간, 《대산문화》 편집위원,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편집위원, 문화예술지 《쿨투라》 기획위원, 《K-Writer》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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