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호
글쓰기 아파트먼트
강영숙
재영은 일주일에 한 번 문화센터에서 글쓰기를 강의한다. 그녀는 자신을 강의 노동자로 분류한다. 코로나19 확산세가 꺾이면서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주말 강의인데도 불구하고 수강생 수는 꾸준히 유지되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2년간은 대부분의 강의가 화상 수업으로 이루어졌다. 재영은 오히려 비대면으로 강의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감정에 휩쓸려 의도하지도 않았던 얘기를 하거나, 불필요한 신변잡기 같은 얘기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어서 오히려 강의를 부담 없이 할 수 있었다. 또 헤어나 화장 등 꾸밈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것도 좋았다. 입고 간 옷의 소매 끝이 닳아져 있거나 음식물이나 음료를 흘려 지저분한 상태임을 알아차렸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수강생들에게 들키지 않아도 되어서 그것도 편했다.
모처럼 재개된 오프라인 강의 2주째 날, 재영은 늘어난 뱃살로 인해 잠그기 어려워진 청바지를 힘겹게 꿰어 입고 마포구 공덕역 인근에 있는 문화센터로 출발했다. 강의는 4시부터였지만 재영은 20분 전에 강의실에 도착했다. 창을 열어 환기하고 손소독제와 프린트한 강의 자료를 강의실 출입문 옆 탁자 위에 놓고 수강생들을 기다렸다. 재영이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는 십 년 전이었고 그때는 삼십 대 후반이었다. 강사가 나이가 많으면 수강생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온다. 재영은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특별하게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차별을 해서도 안 되는데, 이유도 없이 그런 바람을 가졌다. 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이 텀블러를 들고 띄엄띄엄 자리를 찾아 앉고 재영은 강의를 시작했다.
수강생 B씨는 최소 칠십 대 초반은 돼 보였다. 이십 대 후반의 취업 준비생이 첫 수업만 참여하고 수강 취소를 한 후 B씨는 유일한 남성 수강생이었다. 얼굴색이 땅 색이면서 좀 검기도 한 편이었는데 옷차림은 깔끔하고 매너가 좋았다. 그는 수업 내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구두를 벗고 두 발을 구두 위에 올린 채 발가락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양말을 벗지만 않는다면 재영은 수업 시간에 수강생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다 참을 수 있었다. 그는 재영이 하는 말을 끝까지 경청했으며 필요할 때마다 신중한 몸짓으로 메모했다. 어쩌면 강의실에서 재영의 강의에 백 퍼센트 집중하는 건 B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재영의 가장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재영은 B씨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3주차 수업이 열린 주말에는 아침부터 조금씩 비가 내렸다. 재영의 집은 1980년대에 지은 오래된 아파트다. 비만 오면 외벽과 맞닿아 있는 수납장으로 빗물이 새어 들고 창틀로 비가 들이쳤다. 수납장 문을 열자마자 곰팡내가 났다. 재영은 수납장에 든 양념통이며 밀가루 등 모든 물건을 앞쪽부터 차례로 꺼내 거실 한쪽에 놓고 수납장을 비웠다. 창틀에는 플라스틱 통을 받쳐놓고 창틀로 떨어지는 물을 받았다. 빗줄기가 더 거세진다면 벽이며 수납장 안이 물천지가 될 터였다.
문화센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재영은 강의실로 들어가기 전에 한쪽 끈이 떨어져 버린 마스크를 새것으로 갈아 착용했다. 재영이 강의실로 막 들어섰을 때 먼저 와 있던 B씨가 앞으로 나와 재영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주말인데 수업하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B씨는 닥스 시그니처 가디건에 검게 염색한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손에는 프린트한 종이를 들고 있었다. 잠깐 남성용 헤어오일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재영도 입꼬리를 부러 끌어올리며 밝게 인사했다. “제가 전부터 선생님 강의를 듣고 싶어 별렀는데, 이번에 이렇게 선생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네요. 듣던 대로 강의가 정말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는 느릿느릿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재영의 강의를 칭찬했다. 그리고 또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바람에 재영도 따라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감사하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재영은 이것으로 덕담을 끝내고 싶었고, 곧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 시각이었다. 그때 B씨가 손에 든 종이를 재영에게 내밀었다. “선생님께서도 책을 많이 읽으셨겠지만 제가 평소에 즐겨보는 작법서들이랑 좋은 책들을 여기에 적어왔습니다.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서요.” A4 두 장이었다. 재영은 종이를 받아 들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6시 정각,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던 재영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동화 작가이자 동료 강사인 주희를 만났다. 주희와는 우연히 마주치면 차 한 잔씩 마시며 강의 노동자들의 신세 한탄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주희가 재영을 보고 엄청나게 반가워했다. “언니, 요즘은 어떠세요? 저는 요즘 밤마다 술을 마셔서, 저 살쪘죠? 이번 학기엔 어때요? 수강생 많이 들어왔어요?” 엘리베이터는 3층을 지나 2층으로 내려가는 사이, 늘 한 번씩 쿵쾅 하고 좌우로 흔들리는 소리를 내곤 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소리가 났다. “그냥 그렇지 뭐. 그런데 역시 나이 든 분들이 한두 분은 꼭 있네. 선생님 반은 어때?” 재영이 물었다. “언니 반엔 그래요? 저희 반은 아직.” 재영은 오늘도 주희가 쓰는 언니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근하다가 갑자기 무례해지는 때도 없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고 주희는 뒤편 주차장 쪽으로 나가고 재영은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오늘은 꼭 로또를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로터리에 있는 복권 판매점엔 벌써 줄이 길었다.
저녁 식사 후 재영은 B씨가 건네준 자료를 살펴보았다. B씨가 건네준 자료들은 수준이 높아서 한 번쯤은 꼭 찾아 읽어보고 싶었다. 노트북을 켜고 책을 검색하려고 할 즈음,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뛰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 아파트 진짜.” 재영은 소음에 민감했다. “유끼짱, 유끼짱!” 쾌활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경쾌한 하이톤인 이 목소리는 재영을 자주 깜짝깜짝 놀라게 했지만 아직 그 목소리의 주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오늘 급기야 벨이 울렸다. 재영은 씩씩하게 걸어 나가 걸쇠를 단번에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상대는 여전히 경쾌했다. “문이 열린 사이에 고양이가 나가버렸어요. 똑똑한 녀석이라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것 좀 드리고 갈게요. 혹시 보시면 꼭 알려주세요.” 전단을 주고 여자는 또 유끼짱을 부르며 복도를 지나갔다. 강의를 하고 온 날은 금세 후줄근해져서 저녁을 먹고 나면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재영은 읽던 책을 가슴에 펴 얹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져 오고, 아파트 바깥에서는 그때까지도 고양이를 찾고 있는, 아까 왔던 그 여자의 목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4주차 수업이 있던 날, 수업을 마치고 남은 여섯 명 정도 되는 수강생 모두가 센터 앞 커피숍으로 가 차를 함께 마셨다.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제안이 나온 순간 재영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B씨가 재영을 따라 출입문을 나왔다. “선생님 혹시 전철 타시면, 전철역까지만 같이 걸어가도 될까요?” B씨가 물었다. 문화센터에서 전철역까지는 느리게 걸어도 십 분 이내의 거리였다. 재영은 B씨를 편하게 걷게 해주기 위해 가방을 반대편으로 바꿔 들었다. 주말이라 와인 숍, 약국 등이 모두 문을 닫아 길이 어두웠다. 지하철역에 도착해 재영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먼저 내려왔다.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B씨는 그때까지도 가지 않고 재영의 에스컬레이터가 다 내려가기까지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지하철역 입구가 바투 보이는 제과점 앞에서 B씨가 재영에게 자신이 출판하고 싶은 자서전 원고를 정리 중인데, 한번 읽어봐 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다음 주 수업에 B씨는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 재영은 다른 수강생들이 강의실 바깥으로 나가는 걸 확인하고 B씨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선생님, 저도 제 글을 써야 하고, 이건 강의와는 별도의 일이고 해서 최소한의 리딩 피를 주셨으면 해요.” 재영은 분명하게 의사를 표했다. 그 과정에서 B씨가 한쪽 귀에 손을 올리고 재영 쪽으로 귀를 바짝 댄 채 말했다. “리딩 피요? 그럼요. 드려야죠, 선생님, 당연히 드려야죠.” 그는 보청기를 착용한 모양이었다. 부연 설명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재영은 저녁 식사를 한 후 봉투 안에 든 원고를 꺼내 식탁에서 읽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 읽었는데, 왠지 모를 감동을 주는 글이었다. 너무 빨리 읽었다고 하면 성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한 주 정도를 기다렸다 다음 주 수업 때 읽은 소감을 말하고 싶었다. 시골에서 자란 한 소년이 새어머니의 학대를 피해 집에서 가출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주인공 소년은 집에서 나오면서 아주 먼 곳으로, 먼 나라로 가서 살겠다는 꿈을 꾸었고, 그것을 실현했다. 서울로 온 소년은 낮에는 일을 해야 해서 야학에서 공부했고 대학 입학 전까지 모두 다 검정고시를 통해서 학업을 이어갔다. 소년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대기업에서 일했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 상사 직원으로 주로 외국에서 살았고 기업이나 협회에서 주는 표창장도 받았다. 그는 아내와 몇 년 전에 사별했는데 사별을 한 날에도 출근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글에서 드러난 정보를 가지고 나이를 계산해 보니 이미 돌아가신 재영의 아버지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다. 평생을 회사원으로 살던 사람이 왜 글을 쓸까. 우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저런 비주얼이겠군! 재영은 어느새 이 글을 쓴 B씨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돌아오는 주말까지 참지 못하고 재영은 일요일 저녁 무렵 B씨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출판을 하신다니 뜻깊은 일이라 좋을 것 같고, 감동적인 부분이 없지 않다고, 열심히 살아온 선생님의 조용한 분투가 느껴진다고. 그리고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20만 원을 적었다.
종강 주인 6주까지 수업이 이어지는 동안 B씨는 성실하게 수업에 임했다. 결석도 하지 않았고, 맥락에 닿지 않는 질문도, 자기 자랑도, 백세시대 타령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 수업에서 과제로 부과한 짧을 글을 써 가지고 와서 재영과 수강생들의 피드백을 진지하게 들었다. 재영이 코멘트할 때는 지나치게 몰입한 듯 재영의 입엣말 모양을 자기 입으로 따라 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순서로 한 명씩 수업에 대한 평가와 감상을 말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긴장했는지 B씨는 편안한 목소리와 달리 마이크를 잡은 손을 심하게 떨었다.
여름이 서서히 물러갔다. 재영은 아직 코로나19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B씨가 자서전이 책으로 출간됐다면서, 만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재영은 나중에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답장을 했다. 그런데 B씨가 꼭 만나고 싶다고 다시 메일을 보내왔다. 수업이 있는 토요일 저녁 문화센터가 있는 공덕역 근처의 태국 음식점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 식사 후 커피는 재영이 사기로 하고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서류 봉투에 든 책을 꺼내 주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 책을 출판할 수 있었어요.” 그는 곧 직접 일어나 주문한 커피를 가지러 갔고 재영은 그사이 책을 펴보았다. 책 제목은 재영이 제안한 제목이었던 ‘탈출한 소년’이 아닌 ‘고향에서 다시 돌아보는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B씨는 이 책을 인쇄해 가족들에게 주고 싶어서 자비로 출판했다. 아무리 자비 출판이어도 디자인이 이것밖에 안 되나, 재영은 책의 앞뒷면을 여러 번 뒤집어 보다가 B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책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재영이 B씨를 만난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강의실에서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B씨는 커피숍에서 재영과 앉아 있는 동안 여러 번 마스크를 끌어 올렸고, 그때마다 재영은 B씨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황달기를 보았다. 집에 돌아와 봉투에서 책을 꺼냈는데 봉투에 널찍한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선생님 글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선생님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그러니 너무 우울해하지 마시고, 대성하실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B 배상.’ 그 글을 읽었을 때 재영은 혼자 웃었다. 지나치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게 왠지 좀 불편했다고 할까, 문화센터에서 강의하는 내가 뭐 대단하다고,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재영은 편지를 책에 다시 끼워, 여러 책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 메모에 큰 위로를 받았다.
재영은 계속해서 문화센터에 출강했다. 기초 생활비를 버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가을 태풍이 지나가고 기온이 뚝 떨어진 어느 날 아침, 재영은 침대 위에서 머리를 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아침이면 마시곤 하던 코코아도 없고 커피마저 떨어진 날이었다. 재영은 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왠지 이번 가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함이 번졌다. 바로 그때 재영은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것은 B씨가 보낸 자기 자신의 부고였다. 재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노트북을 켰다. 문화센터 수강생들의 글을 저장해 둔 드라이브에 접속해 B씨의 글을 찾았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자 재영은 맨발에 스웨터를 껴입고 아파트에서 나와 시장통을 걸었다. 그러고는 슈퍼마켓에 왜 갔는지도 까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B씨가 준 책을 찾기 시작했다. B씨는 작가의 말에 세계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본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 역사 등을 세세히 적어두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가를 애써 강조하는 문장을 많이 썼다. 해외 근무가 끝나고 말년에는 한국에 정착해 자기 얘기를 글로 써서 출판하고 싶었는데 최재영 선생님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먼저 떠난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는데, 사랑한다고, 죽어서 만나자고도 했다. 그는 아직도 어린 시절 깊은 산골에서 도망쳐 나오던 한밤중의 산길을 잊지 못한다고도 적었다. 그 공포를 살면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그때를 생각하면 다른 모든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재영은 순간 B씨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다른 수강생들의 얼굴도 한 명씩 떠올려보았다.
B씨 일 때문은 아니지만, 재영은 지난봄에 이미 완성했어야 하는 에세이도, 생계를 위해 하던 구술 인터뷰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에세이는 아직 출판사를 섭외하지도 않은데다가 적절한 인터뷰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핑계로 인터뷰 작업도 지지부진했다. 재영은 강의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름 동안에는 강의를 쉬고 싶다고 문화센터에 양해를 구했다. 어떡하든 작품을 끝내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여름 무렵부터 수면 질이 떨어지면서 한껏 예민해져 있었는데 폭발성 머리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폭발성 머리증후군이라는 진단명이 나오기까지 1차, 3차 의료기관 다섯 곳을 찾아갔고 반복적으로, 길게 현재의 상태를 설명해야 했다. 병원에서 MRI까지 했는데, 재영이 받는 한 달 강사료의 80퍼센트가 병원비로 나갔다. 게다가 뱃고동 소리 같은 소음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귀에서 들려 재영은 MRI 촬영이 끝나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린애처럼 울었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지만 나중에는 병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폭발성 머리증후군은 남성보다는 중년 이후 여성들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며 잠이 들려고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큰 소리가 들려 잠을 잘 수 없는 병으로 규정된다. 재영은 잘 준비를 마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얼마 뒤,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는 번쩍거리는 섬광이 비치기도 해서 도저히 수면 보조제를 먹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치료는 간단했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밤마다 잠들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일찍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과격한 운동도 하지 않고 티브이도 피한 채, 잠이 오는 데 도움이 되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셨다. 또 심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라벤더 오일을 머리맡에 두고 눈가리개를 하고 잠을 청했다. 폭발성 머리증후군은 잠이 들려고 집중하면 할수록, 집중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머릿속에서 뭔가 폭발하는 것처럼 큰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 소리를 묘사하기가 쉽지 않은데, 무게가 꽤 나가는 여러 개의 원통형 철근이 한꺼번에 땅 위에 내동댕이쳐질 때 나는 듯한 차갑고 둔탁한 소리다. 그 소리가 난 다음에는 마치 기차가 머릿속을 통과해 지나간 것 같은 불쾌한 두통이 동반되었다. 잠은 늘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온몸을 둥글게 만 채 다가오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막느라 얼굴을 쥐어뜯다가 초주검이 되곤 했다. 그럴 때는 당장 죽어버리고 싶어졌고 그렇게 밤을 꼬박 지새웠다.
재영은 폭발성 머리증후군 임상 실험 참여자를 구한다는 병원 의료진의 안내를 듣고 수면개선재단 프로그램에도 참여 중이었다. 하지만 수면개선재단 연구원과의 몇 차례 상담에도 불구하고, 좋은 수면 환경 만들기를 아무리 실천해도 크고 무거운 소리는 매일 밤 들려왔다. 재영은 사실 상담에도 지쳤다. 새로운 얘기는 더 이상 없었다. 수면개선재단 연구원은 친절하게 천천히 말하는 편이어서 그 말에 비중을 두고 경각심을 갖게 되지도 않았다. “저는 이제 아예 그 폭발음 같은 소리가 익숙할 지경이라니까요. 저는 어쩌면 좋죠. 안 들리면 오히려 불안해요.” 재영의 심정이 그랬다. “낮에는 무조건 적절하게 움직이셔야 합니다. 낮에 노동하지 않으면 잠은 오지 않아요.” 어떤 종류의 노동을 말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 말은 마치 노동하지 않는 게으른 인간은 잠을 잘 권리도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제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온갖 기이한 자세의 체조로 도배를 하던 시간과도 결별하고, 잠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연구원과 상담하고 돌아와 잠들기를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였다. 재영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벽 4시 17분경 노트북 이메일의 알람 소리를 들었다. 한 전기 작가가 보낸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메일을 쓰는 스타일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전개 방식도 새로웠다. 불필요한 설명도 거의 없고 마치 한 회사의 대표가 부하 직원에게 일감을 부여하듯, 거두절미하고 할 일을 지시했다.
“18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에른스트 키쉬(Ernst Kisch) 1)
박사의 일생을 소설로 써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의견을 전하는 것은 당신이라면 이런 얘기를 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기도 하니까요. 그에 관한 정보는 구글에서 검색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의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독자가 보낸 편지를 받은 적도 있고, 책 내용이 재미없어 환불받고 싶으니 책값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은 적은 있지만, 이런 이메일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재영은 냉장고에서 콜라병을 꺼내 입에 대고 마셨다.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하고는 소파로 가 앉아 이쪽저쪽으로 어깨를 틀며 몸을 움직였다. 왜 나한테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걸까,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재영은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현미 과자를 입 속에 넣으며 전기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보내온 첨부파일을 열었다. 전기 작가는 야구 모자를 쓰고 폴로 셔츠를 입은 채 박물관 같은 곳에 있었다. 그는 마스크를 착용한 채 유리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 박물관 직원의 상반신이 보였다. 사실 마스크를 쓴 모습이라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메일을 보낸 전기 작가가 맞는지도 불분명했다. 재영은 사진 픽셀을 최대한 키워 아는 사람인지 한참을 들여다봤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뜬 재영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전기 작가가 보내온 이메일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에른스트 키쉬를 검색했다. 재영은 유대인에 대해 잘 모른다. 유대인을 직접 만난 적이 있나, 없다. 그리고 사실 모른다기보다는 너무 복잡해서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재영이 아는 사람 중에는 팔레스타인 친구가 있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에른스트 키쉬는 유대인이다. 그는 중유럽과 동유럽에 퍼져 살았던 아슈케나지의 후손일 것이다. 재영은 그에 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대학생인 조카 이령이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재영을 찾아왔다. “고모 혼자 산다고 약속도 없이 아무 때나 오니?” 재영은 은근히 이령을 야단치려고 했다. “고모 어차피 맨날 집에 있잖아. 아빠가 고모 굶어 죽었나 가보라고 했어. 매일 책만 읽고 있는 여동생이 있어 신경 쓰인다면서.” 이령의 몸에서 연한 나무향이 났다. 이령은 취직이 잘된다는 공대를 때려치우고 조형예술과로 재입학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재영은 이령이 마음에 들었다. “고모 요즘 수면 장애 때문에 괴롭고 너랑 놀고 싶은 생각 일도 없어, 돌아가 줄래? 그리고 나 술도 끊었어.” 이령은 재영의 침대에 벌렁 누워 베란다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밤하늘을 보았다. “고모, 고모네 집은 뷰가 좋으네. 아까 화장실에서 손 씻다가 바퀴벌레 한 마리 봤는데 잡으려고 했더니 도망쳤어. 바퀴벌레만 아니면 고모집 참 좋으네. 집이 조금만 넓었어도 내가 여기로 당장 이사할 텐데. 고모도 외롭지 않고.” 재영은 항상 이령을 ‘령’이라고 불렀다. “령, 빨리 할 말 하고 가. 고모 바쁘다. 아빠한테 가서 고모 살아 있다고 말하고. 내 걱정하지 말고 제 걱정이나 하라고 해.” 사실 바쁜 일은 별로 없었다. 이령이 식탁으로 와 앉았다. 옷이 온통 검은색이어서 검은 새처럼 보였다. 재영은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이령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과 작업실에서 어떤 애를 만났는데, 우리 과가 밤늦게까지 작업할 때가 많아. 그러다 같이 얘기를 좀 하게 됐어. 내가 장갑을 안 가져갔는데, 장갑을 빌려줬어. 근데 고모, 내 얘기 듣고 있어?” 재영은 사실 이령의 얘기에 몰입해 있었다. “그런데 애가 약간 이상해.” 이령이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을 재영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재영이 의자를 돌려놓고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왜 이상한데?” 이령은 입김으로 머리카락을 여러 차례 불어 날렸다. “이건 내 생각이야. 아직 물어본 적은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안 물어볼 건데. 북한에서 온 애 같아.” “그래서? 그게 왜?” 재영이 즉시 되물었다. “그냥 그렇다고. 고모한테 말하고 싶었어. 고모가 그런 책도 썼고.” 이령이 대답했다. 재영은 이전에 한 대학의 연구단에서 진행한 탈북 청소년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기록한 일을 한 적이 있다. 이령은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이 재영의 단독 저서라고 알고 있지만 공동 저자만 다섯 명이었다.
아침에 이령은 학교로 갔다. 지난밤 침대를 빼앗긴 재영은 그 핑계로 또 잠을 설쳐버려서 느지막이 일어났다. 이령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학기말 과제를 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없고 학교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불가능하니, 집에서 작업할 수 있게 옆방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학교 야간작업 신청 인원이 제한되어 있다면서. 재영의 엄마가 쓰던 옷장과 마트에서 싼값에 묶음으로 산 두루마리 휴지가 놓인 방에서 그 친구와 함께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고모 내가 작업실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재영은 이령의 말을 듣고 오랜만에 어깨를 흔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작업실을 가져본 적 없기는 재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 바로 이령과 그 친구가 들이닥쳤다. 재영은 이름도 묻지 않았다. 어쨌든 갑자기 집이 좁아지고 아파트가 좁게 느껴졌다. 둘은 바로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영은 이령이 데려온 친구의 말투를 잘 들어보았다. 재영은 그 말이 북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령은 그저 남한의 어느 지역 사투리의 하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억양이었다. 옷도 잘 갖추어 입었지만, 사실은 전체적으로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밤새 아이들이 아파트를 들락거렸다. 현관에 나가 달 옆에서 반짝이는 게 금성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얼마 후에는 컵라면 냄새가 났고, 또 얼마 후에는 맥주 냄새가 났다. 재영도 나가서 같이 어울릴까 갈등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나가지 않았다. 이령과 친구는 다이소 나무 걸상과 알라딘 책 박스를 뒤집어 놓고 양쪽 벽에 기대어 앉아 우드록과 스티로폼을 잔뜩 쌓아놓고는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재영은 안 보는 척 안 듣는 척하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별 얘기를 하지 않았다. 휴대전화에서 들리는 발라드 노래와 삭삭거리며 칼질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죽음을 앞둔 B씨조차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재영은 생산적인 활동을 멈춘 자신의 무기력이 싫었다. 폭발성 머리증후군을 핑계로 밤에도 낮에도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언가를 할, 해나갈 동력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영은 기운을 내 노트북을 켰다. 재영은 전기 작가의 존재를 믿어보기로 했다.
에른스트 키쉬는 18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전통적인 유대인 교육과 예술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의대에 진학했다. 의대 재학 중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부상을 입고 돌아왔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비교적 평탄해 보였다. 그러나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유럽에 유대인 대학살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는 1938년 5월 29일 동생 발터와 함께 독일 남부 뮌헨 북서쪽의 군수품 공장 대지에 세워진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그곳은 나치가 세운 첫 번째 수용소로 뒤에 세워지는 모든 수용소의 원형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유대인, 정치범, 집시 수용소인 바이마르 인근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다시 수용된다. 그러다 1938년에서 1939년 사이, 나치는 재력이 있고 받아 줄 나라가 있는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내보내주는 제도를 실시했다. 에른스트 키쉬는 이때 중국 비자를 얻어 수용소를 나왔고, 9년 동안 중국의 상하이와 푸젠성 장저우에 살면서 중국인들을 위한 의료 활동을 펼친다. 상하이에서 에른스트 키쉬는 가톨릭 계열의 병원에서 일했고, 얼마 안 가 장저우에 있는 감리교 스티븐슨 기념병원으로 옮겨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1948년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면서 다시 추방당한다. 그는 그때 잠시 자신을 선교 의사로 파견한 미국 감리교회가 있는 뉴욕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의 워싱턴 스퀘어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결국 미국 체류가 허락되지 않아 다시 오스트리아로 추방당할 상황이 된다. 이때 에른스트 키쉬는 중국 대신 한국을 선택한다. 에른스트 키쉬는 한국에서 죽는다. 그는 38선이 가까운 한국 개성의 아이비병원 의료 선교사로 근무를 자원한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중국에 가지 못하자 그나마 중국과 가까운 한국으로 왔던 것이다. 그것이 1950년 6월 초의 일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의 시작과 함께 그는 민간인 포로가 된다. 그는 1951년 6월 28일 중강진 남서쪽 가까이에 있는 안동에서 58세의 나이로 죽는다. 중강진은 압록강변이고 한국에서 가장 추운 곳이며, 그가 가기를 원했던 중국에서 4킬로미터도 안 떨어진 곳이었다.
재영은 에른스트 키쉬에 대해 읽고 중국인 ‘순’ 선생님을 떠올렸다. 코로나가 오기 전 재영은 일주일에 2회 중국어를 배우러 다녔다. 순 선생님은 아주 친절해서 수강생들이 어떤 질문을 해도 언제든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재영은 순 선생에게 연락했다. 에른스트 키쉬가 근무했던 상하이의 가톨릭 계통 병원과 정저우의 감리교 스티븐슨 기념병원이 혹시 남아 있는지, 남아 있지 않다면 병원의 흔적이 자료로라도 남아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순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게 지금 코로나 기운이 있어 컨디션이 안 좋지만, 집에 가서 검색을 한 뒤 메시지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오전 순 선생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상하이에 그 병원이 남아 있는지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고, 장저우의 병원도, 그러나 뭐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바퀴벌레는 결국 찾아냈다. 재영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실 모서리를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는 커다란 바퀴벌레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재영은 이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퀴벌레가 무서워 잠을 못 잘 것 같다고. 이령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며 12시까지는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재영은 아파트 앞에서 이령을 기다렸다. 조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고 바퀴벌레가 또 나타날까 봐 무서워서였다. 아파트 바로 옆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크게 웃자 재영은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을 사용하지도 못했다.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한참 만에 들어온 이령은 얼마 전에 함께 왔던 북한 친구 얘기를 했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고모, 걘 아니었나 봐. 연락이 없어. 연락해도 답이 없어.” 재영이 이령에게 질문했다. “네가 그 친구한테 관심 있는 이유가 그 친구가 탈북을 해서 그래?” 그러자 이령이 아작 소리를 내며 빈 캔맥주 병을 구부러뜨렸다. “고모, 그게 아니고, 내가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한테 말을 걸어준 친구여서 그래. 그런데 연락이 없는 걸 보니까, 내가 혼자서 친하다고 생각했나 싶어서. 난 친구가 없거든.” 재영은 친구를 사귀는 일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네가 잘해 줬는데 연락이 없으니까 섭섭하니?” 재영은 재차 물었다. “아니 고모 그게 아니고, 난 잘해 준 적 없고, 사실은 내 방이 작업하기가 좋아서 우리 집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아빠 엄마가 알아버려서 예솔이가 북한 애라는 걸.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예솔이한테 꼬치꼬치 묻더라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어.” 재영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희 아빠가, 그 인간은 원래 옛날에도 고루했지, 야, 너 빨리 자고 내일 아침에 바퀴벌레나 찾아봐. 말 좀 그만 시키고.”
모든 나쁜 일들은 동시에 찾아온다. 문화센터에서 강의의 모객과 홍보를 담당하던 직원의 이메일을 받았다. 9월 개강반의 수강생이 두 명이라 수업을 폐강할 수밖에 없다고, 울고 있는 이모티콘 두 개를 붙여서 보내 왔다. 순간 재영은 노트북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폭발성 머리증후군이라도 곁에 있어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다크하고 무겁고 커다란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했다. 강의도 날아가고 재영에게 남은 건 폭발성 머리증후군뿐이었다. 수면장애가 있어 깨어 있음을 증명하는 듯한 소리. 그 소리가 한차례 지나가면 재영은 부스스 일어나 자려고 노력하는 대신 글을 썼다. 약수동 시장통에 있는 5층짜리 한 동 아파트의 소음과 바퀴벌레에 대해서, B씨와 함께한 수업과 수강생들의 고민에 대해서, 이령의 친구인 탈북자 대학생에 대해서. 아파트 주민의 고양이 유끼짱의 실종에 대해서. 재영은 1980년대 지은 낡은 아파트에서 바퀴벌레를 피해 가며 가을 내내 글을 썼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사실 재영은 통장 잔고가 비어가고 있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식당 서빙 일이라도 알아봐야 할 상황이었다. 물론 서빙 일도 아무나 시켜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재영은 아직 그토록 가보고 싶은 러시아에 가지 못했다. 아직은 무명 작가지만 언젠가는 꼭 괜찮은 작품을 쓰겠다는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재영은 일단 에른스트 키쉬에 대해서 써보기로 했다. 자신에 대해 쓸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라도 쓰는 것이 쓰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10월의 주말 대낮, 재영은 이령의 연락을 받고 외출했다. 강남구의 한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탈북 청소년들이 부르는 북한 동요 2)라는 행사에 가게 되었다. 주말 강의가 없으니 주말에 하는 문화 행사 참여가 가능했다. 재영이 이런 식의 문화 행사에 참여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러 와 있었다. 재영은 남녀 함께 편성된 열 명 남짓한 합창단원 중에서 예솔을 찾았다. 행사가 끝나고 이령과 재영은 바깥에 서서 예솔을 기다렸다. 이령이 잠깐 화장실에 갔을 때 흰 후드티를 입은 예솔이 나왔다. 재영이 예솔에게 다가갔지만 처음엔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예솔이 솔로로 노래한 곡 제목을 또 까먹어 노래를 잘 들었다고 얘기하려던 것도 제대로 못 했다. 다른 북한 출신 친구들과 함께 부른 <연필>이란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좋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쨌든 예솔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그동안 잘 지냈니? 나 기억하지? 왜 이령한테 연락 안 했니?” 너무 많은 것을 질문한 것일까, 재영을 보는 예솔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듯했다. “아버지가 일하다가 사고가 나서 돌아가셨어요.” 예솔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재영은 그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더 질문하기가 어려웠다. “힘들었겠다. 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을 텐데.” 재영은 겨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색하게 서 있을 즈음 이령이 왔고 이령과 예솔은 먼저 공연장을 떠났다. 재영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솔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한마디만 더하면 어렸을 때 비밀을 이령에게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에른스트 키쉬의 삶과 그의 여정을 상상해 보았다. 어떤 구체적인 정서까지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을 걸며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재영은 기회가 된다면 전기 작가가 왜 에른스트 키쉬에 몰두하는지 그 이유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고 이메일을 썼다. 이 모든 다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당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영은 순간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폭발성 머리증후군 이후 처음으로 강력한 수면 욕구와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1)
에른스트 키쉬의 삶에 대해서는 래리 젤러스 지음, 임연철 편역의 『적의 손아귀에서』(밀알북스, 2023)의 48-50쪽과 356-358쪽에서 일부 인용했다. 또 아래 사이트와 위키백과도 참조했다
https://americangerman.institute/2019/01/a-doctors-mission-the-life-and-work-of-ernst-kisch/
2) 노래 제목 <연필>은 「탈북 청소년들이 부르는 어린 시절 노래 모음 1」(셋넷학교 기획, 2009, CD자료)의 아홉 번째 노래다.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8월의 식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아령 하는 밤』, 『회색문헌』, 『두고 온 것』, 장편소설로 『리나』, 『라이팅 클럽』, 『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 『부림지구 벙커X』를 펴냈다. 대산창작기금, 한국일보문학상, 백신애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가톨릭문학상을 수상했다.
* 사진 출처: © photographer Melmel Chung/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