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호
라이프코치
임재희
릭이 지난 3년 동안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진이 말했다. 릭이 전화를 안 받은 이유를 상상하며 조바심치던 안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해 보였던 릭의 연애를 지켜보던 참이라 차라리 잘됐다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건조하고 무심한 진의 목소리는 끝내 서운하게 들렸다.
“연희…… 릭…… 집으로 초대했……데…….”
보이스톡 너머 진의 목소리가 끊어지다 이어졌다. 와이파이 문제 때문인지 가끔 있는 일이었다. 안나는 이럴 때마다 진과 릭의 얼굴이 뒤로 멀어지다 다시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들이 사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했다.
“오는 길에 치즈를 사달라고 부탁했나 봐. 두 번이나. 릭이 또 깜박하고 왔대.” 안나가 묻지도 않은 결별의 이유를 진이 주절거렸다.
“그게 결별 이유야?” 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는 작은 거로도 전부를 볼 줄 알아, 엄마.” 진도 지지 않았다.
“그런 성숙한 눈으로 엄마를 좀 봐.”
“엄마는 왜 갑자기 딴 얘기를…….” 자신의 의도가 금방 들킨 게 무안한 사람처럼 진이 뒷말을 삼켰다. 안나는 이 순간이 몹시 불편한 듯 다시 치즈 얘기를 꺼냈다.
“치즈만도 못한 대접 받느니,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지.”
안나는 릭이 사는 시애틀에서 연희를 처음 만났다. 대학가 근처 한인 교포가 운영하는 중국 식당이었다. 벽난로는 은은하게 타오르고 테이블보는 온통 빨간색이어서 크리스마스 같았다. 릭과 연희가 웃으며 들어섰다. 안나는 계절이 갑자기 봄으로 바뀐 것만 같아서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연희는 영어와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붉은 장미 넝쿨과 검정별 문신이 새겨진 목덜미가 먼저 떠오를 때면 안나는 저도 모르게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작은 문제라도 한두 번이 아니면 심각해, 엄마.” 둘의 연애사를 꿰뚫고 있는 듯 단호하게 진이 말했다.
“바쁘니까 그렇겠지.”
“엄마는 알면서…….” 진이 뒷말을 삼켰다. 릭에 관한 문제는 늘 비슷한 지점에서 대화가 멈췄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래서 내가 일대일 라이프코치 만나 보라고 말했어.” 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듯 진이 빠르게 말했다.
“코치?” 안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형이나 누나처럼 상담도 해주고 중요한 일의 방향성을 잡아주고. 생활계획표, 연애 상담, 진로 상담, 심리까지…….”
“릭이 원하는 건 배려와 이해야.” 뭐든 분석적이고 이론만 앞세우는 진의 태도가 안나는 여전히 못마땅했다.
“배려나 이해도 잘 배워야 할 수 있어. 혼자 힘으로 안 되는 지점이 있다고요. 릭에게 쉽지 않은 일이야, 엄마.”
안나는 진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릭은 어릴 때부터 소지품을 자주 잃어버리거나 한두 가지 일 이상은 동시에 처리하지 못했다. 그룹 프로젝트를 할 때면 늘 끝에 선택받아서 점점 소심해졌다. 시험 때나 중요한 약속을 앞두면 심한 스트레스를 겪느라 미리 지쳤다. 처음엔 영어 소통 문제가 원인인 줄 알았는데 상담 결과는 심각했다. 안나는 가슴이 무너졌다. 친절한 의사의 설명도 귓가에 윙윙거리듯 들렸다. 특수학교 입학은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말에 참았던 숨을 토해 내듯 눈물을 쏟았다. 몇 번의 상담 후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고 보통의 아이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안나는 내심 이민 초기 아이들이 흔히 겪는 정서적 변화였을 거라고 결론지으며 안심했으나 마음의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릭이 집을 떠나 대학에 가면서 예전의 행동들이 다시 보였다. 자주 전화를 받지 않거나 오래 잠에 빠지거나 작은 약속을 놓치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첫 직장은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가족 중 가장 힘들었던 사람이 열다섯 살의 릭이었다고 진이 말할 때마다 안나는 묵직한 것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4인 가족 중 릭이 심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나이였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가족 중 가장 여리고 섬세한 사람이 먼저 다치죠. 의사의 말을 떠올릴 때면 이혼보다 더 나은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골똘해지곤 했었다.
“요즘 산만하지 않은 젊은 애가 어딨어? 이 복잡한 세상에. 존재에 대한 불안이야.”
“엄마는 뭐든 심각하고 진지하게 부풀려.”
“세상이 복잡하니까 혼란을 겪는 거야. 걔가 워낙 섬세…….”
“그래도 그걸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친이 요즘 어딨어? 엔젤도 아니고. 메이드도 아닌데.” 진은 계속 투덜거렸다. 릭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을 터였다.
“릭이 전화 안 받는다고 걱정하지 마, 엄마. 걔도 성인이야.” 진이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먼저 끊으며 말했다.
일대일 라이프코치라니.
안나는 축구 운동장처럼 변한 세상에 서 있는 기분이다. 어디에선가 코치의 함성이 들리고 호각 소리가 이어지는 것만 같았다. 날렵하고 유능한 ‘선수’들이 미친 듯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안나는 빈자리가 보이자 바로 앉았다. 카톡 창을 먼저 열었다. 릭에게 보낸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여전히 ‘1’이 버티고 있다. 소통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다. 가끔 이런 일이 있긴 했었다. 그래도 사흘 동안 연락 두절 상태는 처음이다. 보이스톡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았다. 릭은 이제 성인이야, 엄마. 얘기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진의 말이 옳을 거였다. 그러다 말겠지. 안나는 잠깐 창밖을 바라보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핸드폰에 저장된 파일을 열었다. 오늘 있을 인터뷰 질문들을 눈으로 훑었다.
안나는 K대학 산하 ‘중년여성 정신건강연구소’의 연구보조원으로 ‘리터니(Returnee): 돌아온 사람들’이란 가제로 진행하는 연구에 참여했다. 오랜 미국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취득한 학위 덕분에 얻은 3년 계약직이다. 연구 주제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 학위 논문을 이력서와 함께 자기소개서에 언급했는데 결과가 좋았다. 초기 연구는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한 20-30대 여성도 포함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이들 그룹은 제외되었다. ‘중년’이라는 키워드가 어떻게 역이민 결정에 작용하는지 밝혀내는 게 연구 목적이었으므로 연구 대상자는 여성, 45세 이상, 15년 이상 외국 거주 후 한국으로 돌아온 자들로 한정되었다.
한국으로 역이민 온 사람들을 위한 인터넷 카페가 있다는 걸 안나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한국 정착 ’가이드북’이라고 불릴 만큼의 생생한 정보들을 서로 교환하는 곳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회원 가입을 했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출신 교포들이 회원의 다수를 차지했다. ‘마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포스팅을 자주 눈여겨보았다. 실용적인 정보들을 주고받는 카페에서 한탄 같고 농담 같은 그녀의 글은 누가 봐도 튀었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마음 붙이고 살지 못하는 심정을 담은 짧은 글이었는데, 주로 밤이나 새벽에 올라왔다. “한번 떠난 사람은 되돌아와도 떠난 사람으로 취급하는 한국!” “재미교포=중산층? 난 아님!” “영어는 미숙, 한국어는 만숙. 자발적 언어 빈민자냐?” 그리고 ‘크크크’가 꼭 한 줄의 자조적인 문장처럼 따라붙었다. 마리가 시댁 제사까지 챙기며 노스캐롤라이나에 살다 혼자 한국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연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나는 힘들었지만, 애들은 꼬리와 머리도 자르지 않은 커다란 조기가 놓여 있는 상을 향해 절하는 걸 몹시 흥미롭게 생각하는 듯. 남편과 시부모는 미국까지 와서 전통적인 한국인의 삶을 이어 나가는 걸 인생의 대단한 가치로 여기는 듯. 그러다 보니 20년 훌쩍!” 그녀의 포스팅에 ‘응원파’와 ‘원성파’로 나뉜 여자 회원들의 댓글이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안나는 마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에 흥미를 느꼈다.
안나는 며칠 후 마리에게 ‘쪽지’를 보냈다.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취지와 목적을 밝힌 뒤 인터뷰에 응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도 남겼다.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시간이 한참 흘렀다. 연구에 집중하느라 카페 방문도 자주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 문자가 날아들었다. 마리가 아닌 지영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전화나 서면 인터뷰 요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면 인터뷰도 좋다고 했다. 날짜는 안나가 정했고 장소는 지영이 골랐다. 안나의 연구소에서 멀지 않은 카페였다.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다.
상담은 몇 번 받았지만, 우울증 약은 처방만 받고 먹지 않았다고 지영이 말했다. “그럼 정말 환자가 될 것만 같아서요.” 이유를 궁금해하는 안나의 눈빛을 읽은 듯 지영이 덧붙였다. 지난 인터뷰가 미국 생활 환경과 경제적 여건, 주변인들과의 관계 맺기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늘은 한국 정착기에 관한 대화였다. 리터니 당사자인 지영이 자연스럽게 심리적 고충을 먼저 털어놓았다.
“우울감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하지 않았거든요.” 지영이 안나를 바라보며 약을 안 먹는 진짜 이유라고 말했다.
“우울감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심각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러면 다행이고요.” 안나는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자신이 맞닥트렸던 혼돈의 시간을 떠올렸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낯설던 느낌이 지문처럼 남았다.
“사실 자신에게 지극히 몰입한 채 침잠해 있는 것도 썩 괜찮았어요. 침몰당하지만 않는다면요. 질문에 대한 답이 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영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살다 리턴한 교포라는 말은 의사에게 안 했어요. 왠지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모든 걸 그거랑 연결 지어 생각할까 봐서요. 그리고 그 자체를 실패한 인생처럼…… 아니, 제가 뭐 꼭 성공하려고 그곳에 살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실 실패 맞네요. 부적응자였으니까. 미리 밝혔다면 상담 내용이 달라졌을까요? 그게 가끔 궁금해요.”
상담이 큰 효과를 얻지 못한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다 드러내야 도움을 받지 않을까요? 비슷한 상황을 겪은 환자들을 통해 미리 경험하거나 학습한 전문가의 말을 따르기 위해 상담을…….” 안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라이프코치의 역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냥 나니까……. 내가 어디에서 살다 온 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었어요. 모두 다른 정류장을 거쳐서 종점에 도착하는 버스들처럼요.”
안나는 지영의 웅얼거림을 들으며 얼음이 잔뜩 남은 유리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지역을 돌다 저마다의 종점에 도착하는 버스들의 긴 행렬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라이프코치가 종점에 이르는 안전하고 정확한 길을 알려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손님들이 우우 몰려들어서 대화를 멈췄다. 지영이 우리 좀 걸을까요? 물었을 때 안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혹시 라이프코치라는 직업 들어보셨어요?” 지영에게 릭과 비슷한 나이의 아들이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안나가 물었다.
“작년에 나도 그 코칭 받은 적 있어요.”
“한국에도 그런 서비스가 있어요?” 안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지영을 바라보았다.
“없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지영은 안나의 반응이 더 놀랍다는 듯 말했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코칭 티켓을 줘서 상담받았어요. 그런데 새터민과 다문화 가정을 위해 특화된 프로그램처럼 느껴졌어요. 왜 내게 이런 선물을 했을까. 골똘해지더라고요. 미국에서도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부적응자로 사는 모습을 친구에게 들킨 기분이었어요. 일몰 때마다 불안한 것 말고는 사실 그런대로 다 괜찮은데…….”
“일몰이요?”
“어두워지기 전, 이유 없는 불안감이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휘몰아쳐요.” 지영이 한쪽 어깨로 흘러내린 가방끈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남긴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겨우 일몰에 무너지다니. 안나의 귀에 그런 주절거림으로 들렸다.
“어둠이 무섭나요?” 안나는 지영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걸으며 물었다. 붉은 칠을 한 철제 의자와 동그란 테이블이 테라스에 놓여 있는 어느 카페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너 명의 긴 머리 여자들이 우우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발랄해 보였다.
“아뇨. 차라리 완벽하게 어두워지면 몹시 편안해져요.”
“그렇다면 저처럼 어떤 중간 지점을 못 견디는 걸까요?”
“그럼, 안나 님도?” 지영이 걸음을 멈추고 안나를 바라보았다. ‘중간 지점’이라는 말이 매우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밤도 아니고 더군다나 낮도 아닌 그 어중간한 지점의 멜랑콜리가 있죠. 여기에서도 정착하지 못한다면 내게 다른 선택은 있는 건가. 모든 종점의 중간 지점에서 마냥 서성이는 기분이요.”
“에잇, 정착 좀 안 하고 살면 어때요?” 지영은 안나까지 그런 심정이라면 정말 견딜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동안 자신이 쏟아놓은 말은 다 잊은 듯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면 좀 좋아요? 우리 같은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밤도 보고 낮도 보고, 미국도 보고 한국도 보고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잖아요.” 지영은 자신을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날.” 안나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날을 생각했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영종대교를 지나는데 서쪽 하늘이 일몰로 새빨갛더라고요. 완벽하게 낯선 곳에 혼자 내린 기분이었어요.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온 거라고 믿었는데 떠밀려 온 것만 같은 감정이 밀려왔어요. 나는 도대체 뭐로부터 밀려온 걸까요? 그 질문이 떠나지 않아요.” 안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영은 “그 심정 알아요, 알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건널목에 멈춰 섰을 때 지영은 동네에서 산 수제 빵이라며 작은 쇼핑백을 안나에게 건넸다. 자신은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제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안나 샘.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편해졌어요.”
안나는 빠르게 인파 속으로 사라진 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자연스럽게 뒤바뀐 순간 정작 고마워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릭이 다니던 학교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수녀들이 동화책을 읽어 주고 의욕이 넘치는 젊은 선생들도 많았던, 꽤 오래된 성당 부속 초등학교였다. 릭은 그곳에서 유일한 동양인 학생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에 머리카락은 칠흑처럼 검고 윤기가 흘러서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다. 안나는 릭의 목덜미를 쓰다듬을 때마다, 백설기처럼 하얗네, 말하곤 했다. 릭이 뜻을 물었고 눈처럼 흰 쌀로 빚은 떡이라고 안나가 말했을 때 눈을 반짝거렸다. 릭이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귓불 뒤에 작은 글씨로 ‘mochi’라고 문신을 새겼다. 안나는 의아했었다. ‘떡’은 몰라도 ‘모찌’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릴 때 들려주었던 그 단어가 머릿속에 그토록 오래 각인되었다는 사실에 안나는 적이 놀랐었다.
릭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은 언제나 안나의 몫이었다. 출장이 잦았던 남편의 일정 때문이기도 했다. 안나는 수업이 끝날 무렵부터 문밖에서 릭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지, 영어가 서툴러 선생에게 야단을 맞는 건 아닌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모든 게 궁금했다. 릭은 친구들과 노는 대신 혼자 그림을 그리며 안나를 기다리곤 했다.
그날도 릭은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창가에 있는 책상에 혼자 앉아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검정 벨벳 모자를 쓰고 설국에서 온 소년처럼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부모가 데려갔는지 교실이 조용했다. 릭은 안나가 가까이 다가가도 모를 정도로 그림에만 빠져 있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있던 미술 선생이 인사를 건네며 안나에게 다가왔다. 나이가 지긋한 수녀였다.
수녀는 릭이 그린 그림 몇 장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많은 빨강과 많은 녹색 그리고 많은 노랑과 많은 파랑이 흰 면을 가득 채운 것들이었다.
“저는 그림 전문가는 아니에요. 그래도 걱정이 되어요.” 유난히 동부 억양이 심한 수녀가 안나가 이민자라는 걸 의식해서 그런지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빨강과 녹색을 유난히 많이 쓰고 있어요. 건물도 빨강, 길도 빨강. 근데 같은 장소를 그린 다른 그림에서는 길이 녹색, 건물도 녹색이죠.”
“그게……. 왜 이상하죠?”
“빨강과 녹색을 구별 못 하는 색맹일 수 있다는 거죠.”
“네?” 안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이 잘 못 알아들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아이의 눈에는 이런 색깔들이 다 회색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이에요. 건물과 아스팔트 길을 다른 학생들은 보통 회색으로 쓰는데, 릭은 늘 강렬한 색깔만 쓰…….”
“개성이겠죠!”
“물론 그러길 바라죠.”
어떻게 수녀와의 대화를 끝냈는지 안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수녀의 말은 릭이 세상을 흑백 사진처럼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릭의 손을 잡고 학교를 나서는 안나의 손끝이 후들거렸고 손가락은 냉기로 굳었다. 집까지 가는 길에 마주친 모든 사물의 색깔을 아이에게 당장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저 꽃 참 예쁘다.” 안나는 붉게 핀 히비스커스 꽃을 가리키며 가슴을 졸였다.
“응.”
릭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안나가 좋아하는 색깔을 물었을 때 릭은 하늘을 가리키며, 파랑, 했다. 그리고 파란 하늘과 구름의 흰색도 구별했다. 건널목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빨간색 불빛이라고 말했다. 안나는 릭의 손을 꼭 잡았다. 수녀가 미쳤군. 신의 은총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 있다니.
릭의 그림 실력이 빛을 발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가족〉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지역 신문에 ‘한국에서 이민 온……’ 수식어를 달고 소개되었다. 꼭 그런 수식이 필요할까. 안나의 불만은 잠시였고 그림에 눈과 마음을 빼앗겼다. 고래 두 마리가 수면 위로 비행하듯 날아오르고 다른 한 마리는 몸이 반쯤 물에 잠긴 채 고개를 내밀었다. 두 마리의 고래는 엄마와 누나라고 했다.
“엄마가 내게만 신경 쓰니까, 그림 속에서라도 누나랑 같이 시간 보내라고.”
“혼자 있는 이건 누구?” 수면에서 고개만 내민 고래도 궁금해 안나가 물었다.
“아빠.” 릭은 아빠가 ‘그냥’ 물속에 혼자 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럼 너는 어디에 있어?”
“나는 보는 사람.”
남편은 릭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처럼 잘 뛰지 않는다는 건 안나도 알고 있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안나는 왠지 릭이 막 뛰는 모습이 더 이상할 것만 같았다. 남편은 주말이면 릭을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를 챙겼고 공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아이의 얼굴을 붉게 달궜다. 남편은 아이와 점점 거리를 벌려가며 공을 주고받았다. 열 개를 던지면 아이는 겨우 한두 개 받아쳤다. 남편은 부러 공을 멀리까지 던지고 집어 오라고 시켰다. 릭은 뛰고 받고 던지며 헐떡거렸다. 속도를 내려다 두 다리가 꼬여 제풀에 넘어졌다. 사내자식이, 약해 빠져서 어디 쓰겠어! 이 바닥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아?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남편은 주변의 시선은 안중에 없다는 듯 한국말로 소리쳤다. 그가 겪은 모든 허접한 대접은 자기 세대로 족하다고 소리치는 사람으로 보였다.
릭이 방과 후 야구팀에 들어갔다. 학부모 바자회에서 안나와 함께 부스를 지키다 서로 알게 된 친구 엄마 덕분이었다. 제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먼 곳에서 이민을 온 사람이에요. 파란 눈의 여자가 이민자인 안나에게 건넨 첫인사는 다정했다. 야구는 전문가에게 배워야 해요.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릭과 남편을 몇 번 봤다고 말했다.
주말이면 그림을 뒤로하고 릭은 야구장으로 갔다. 한 번도 등판하지 못하고 벤치에만 앉아 있다 돌아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남편은 경기가 끝난 뒤 흙 하나 묻지 않은 상태로 돌아온 릭을 다시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환하게 불 밝힌 운동장에서 남편은 계속 공을 던졌고 릭은 거의 모든 공을 놓쳤다.
“안 보여? 저쪽으로 빠따를 쳐야지. 집중해! 여기 애들 사귀려면 야구 아니면 풋볼인데, 야구가 더 쉬워.”
남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밤하늘을 찢었다. 운동장 너머 누군가가 “퍽큐! 고 백 투 유어 컨트리” 외침이 안나 귀에만 들리는 듯했다.
릭은 샤워를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안나는 릭이 벗어 놓은 유니폼을 들고 세탁실로 갔다. 구르고 넘어지고 헛디디느라 유니폼 바지가 흙투성이였다. 바지에 손을 넣어 팬티를 꺼내려던 안나가 멈칫했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릭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둥글게 말려 있는 몸이 종일 쳐내지 못한 야구공처럼 단단해 보였다. 경진아. 안나는 오랜만에 한국 이름으로 아이를 불렀다. 경진아! 아이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는 듯 눈을 뜨지 않았다. 안나는 손에 들고 있던 젖은 팬티를 손에 쥐었다. 땀일 거야. 오줌을 지릴 만큼 두렵지는 않았을 거야. 안나는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자신의 믿음을 의심했다. 팬티를 코에 가져다 댔다. 비릿한 지린내였다.
남편은 야구 연습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선수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중단할 수 있지.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한 번 후퇴하면 영원히 낙오자로 살 수도 있어. 우리가 자식에게 물려줄 게 뭐 있니? 우리 죽으면 선조들도 없는 땅에서 누굴 의지하고 살겠어? 말도 안 돼. 그따위 야구 하나가 뭘 대수라고. 당신의 그 안일하고 유약한 성품이 아이를 망쳐. 안나는 남편의 마지막 말을 삼키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시력 검사를 권유한 건 릭의 담임 선생이었다. 릭이 다른 아이보다 필기 속도가 매우 늦다는 게 이유였다. 야구복 바지 섶이 젖었던 일화를 안나가 털어놨을 때였다. 담임은 후덕해 보이는 중년의 백인 여자였다. 할머니, 엄마, 그리고 자신에게 이어지는 ‘선생’이란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따뜻한 표정으로 안나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야구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약시일 수도 있어요. 담임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유가 튀어나왔을 때 안나는 그녀의 말을 신뢰하면서도 한편 의아하게 받아들였다. 릭이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말 안 했어?”
“뭘?”
“잘 안 보인다고.”
“잘 안 보이는 게 뭔지 몰랐으니까.”
안나는 아이의 말이 너무도 정확한 이유라는 생각에 더 묻지 않았다.
릭이 안경을 쓰고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때?”
“이상해.”
릭이 얼굴을 찡그리며 못마땅해했다.
“벗어도 돼?”
차가 주차된 곳까지 걸어가면서 릭은 계속 어지럽다고 말했다. 땅을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벗지 마. 적응이 필요할 뿐이야.”
“야구공이 나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올 때 너무 무서웠어.” 릭은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연습하면 좋아질 줄 알았어.”
“어떤 것은 아무리 연습해도 좋아지지 않는 게 있어.”
릭이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어른들의 세계겠지, 그런 눈빛이었다.
릭은 밤이면 악몽을 자주 꾸었다. 흐릿하던 야구공이 어느 순간 바로 눈앞에서 선명하게 다가오는 꿈이라고 했다. 안경을 끼면 괜찮아질 거야. 릭은 안경이 점점 불편하다고 말했다. 세상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무섭다고.
“잘 보이니까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몰라.”
“뭘?”
“안경 쓰니까 야구공이 더 무서워.”
“왜?”
“알이 깨져서 유리 조각이 눈으로 들어가는 상상까지 자꾸 하게 돼.”
안나가 남편에게 릭의 말을 전했다.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운동 따위 시키지 않겠다고. 걱정이 아니라 체념에 가까운 선언이었다.
릭에게 보낸 문자 앞에 여전히 ‘1’이 버티고 서 있다.
고집스러운 자식.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자식. 오만이야, 이건.
안나는 치즈를 기다리는 동안 문밖을 기웃거렸을 연희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릭의 첫 번째 연애도 엉망이었다. 릭의 여자친구가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한 포스팅을 진이 단톡방에 옮겼다. 여자와 짙은 포옹을 나누는 사진은 불필요하게 선정적이었다. 릭은 자기도 몰랐던 여자친구의 성 정체성을 세상이 먼저 알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안나가 뭐라고 답글을 달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을 때, 릭이 머리를 긁적이는 이모티콘과 함께 자신의 성 정체성도 고민해 봐야겠다는 농담을 남겼다. 모두 웃고 그냥 넘겼으나 릭에게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은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연희는 애써 무심한 목소리로 릭에게 전화를 걸어 치즈를 부탁하고 기다림은 이어졌을 것이었다. 릭의 빈손. 그 빈손이 건넨 실망감. 늘 지저분한 릭의 방과, 히터 작동도 잘 안 되는 차와, ‘프리랜서’라는 불분명한 소득원의 직업까지 모두 이별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진이 전화를 받았을 때 안나는 조바심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고 룸메이트에게 연락이 왔어.”
“제발 그런 말 좀 너무 쉽게 하지 마.”
“엄마 눈엔 릭이 비정상으로 안 보여요? 걔는 지극히 비정상이야, 정상인들 눈엔.”
“정상인들이 정한 기준으로 보자면 그렇겠지.”
“엄마! 걔 이번 렌트도 안 냈대. 룸메이트가 대신 이번 달 거 다 내겠다고. 다음 달 렌트는 릭이 알아서 하라고. 지금 이게 말이 돼요? 지 속상하다고 모든 연락 다 끊고. 연희니까 지금까지 버텨온 거야.”
계속 이어지는 진의 푸념이 안나의 귀에는 이게 모두 엄마 때문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난 릭이 예술이니 뭐니 다 접고 돈 많이 벌어서 예술 작품이나 그냥 사면서 여유롭고 즐겁게 살기 바래. 이런 나도 비정상 엄마니?”
“엄마, 진짜 완전 미국 엄마 스타일이다.”
“뭐?”
“미국과 이라크 전쟁 터졌을 때, 그때 미국 엄마들 같다고요.”
안나는 진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이기길 바라면서 자기 아들이 직접 참전하는 걸 원하는 부모는 없었잖아. 예술은 좋은데, 예술가의 가난한 삶은 남의 자식들이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거랑 뭐가 달라요? 자식이 좋은 세상에 살기 원하면서, 그 자식이 그런 세상에 밑거름되는 건 원하지 않는 마음. 엄마도 결국 다르지 않아.”
“그럼 그 나이에 라이프코치에 의지하면서 살라고 권해야 해?”
“왜 나이를 걱정해요? 필요할 때 받는 게 적정 나이죠.”
“뭘 언제까지 지도받고 안내받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사는 한 개인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어? 단체 인생이지.”
“엄마, 못하는 건 배워 사는 거지. 우리 학교는 왜 보냈어?” 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목표 세우기 코치, 관계성 이해하기 코치, 긍정 마인드 갖기 코치…….”
안나는 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수히 많은 ‘코치’에 질려 버렸다. 차라리 대신 살아 달라는 말처럼 들려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엄마가 라이프코치, 아니 전문 상담가에게 한 번이라도 상담받았다면 달라졌을 거야.”
진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게 들려서 안나는 숨을 죽이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대었다.
“한국말로 속 시원히 상담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어. 통역하는 사람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었고. 마음을 어떻게 완벽하게 통역해?”
수화기 건너편이 조용했다.
“이해해, 엄마. 그런데…… 난 오래 받아 봤어요, 상담.”
안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만 힘든 게 아니었어. 솔직히 난 더 힘들었는지도 몰라. 중간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마음. 이혼 당사자가 아닌데, 내 삶이 둘로 나뉘는 것처럼 아팠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어. 가족이 아닌, 나를 그냥 한 인간으로 봐줄 수 있는, 인생을 많이 산,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방법 좀 알려 달라고 했어. 그래서 바뀌었고 지금 이 자리야. 엄마도 아빠도 누군가에게 얼마나 많이 묻고 싶었을까.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 아닌지,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어. 그 혼돈의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엄마 아빠가 혼자 건너갔을까. 다 건너가긴 했을까. 요즘에야 그런 생각을 해. 언젠가 꼭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
진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 들었다.
“엄마. 여긴 자정이 넘었어. 나 잘게요.”
대화는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끝났다. 안나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현명한 누군가의 안내를 받았다면, 이혼과 한국행 결정이 바뀌었을까? 그렇다면 그건 내가 내린 내 인생의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어느 조언도 그때의 허방을 채워 주진 못했을 것만 같았고 가끔 밀려오는 후회도 자신이 내린 결정이라 삼킬 수 있었다.
검색창을 열었다.
Life Coach.
진의 말이 맞았다. 다양한 삶만큼 여러 종류의 라이프코치가 하나의 직업군을 이루고 있다. 6주 코스로 교육받으면 정식 라이프코치 강사 자격증을 받는 인터넷 강좌도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세계로 변한 세상. 안나는 아득함을 느끼며 창을 닫고 메일함을 열었다.
지영이 보내온 이메일을 먼저 열었다. 첨부파일뿐이었다. 단답형의 질문들이었는데 예상보다 상세하고 긴 분량의 답변이 적혀 있었다. 인터뷰할 때 들었던 얘기들도 언급되어 있었다. 마지막 질문의 답까지 눈으로 확인하고 막 파일을 닫으려는데, 마지막 답변 아래, 글이 더 있었다.
나는 좀 더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이런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기내 안전 수칙 안내를 떠올린다. 엄마와 아이. 사고 시 어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옆에 있는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것. 알고 있던 것인데, 실천하지 못했던 것. 내가 살아야지 너를 살릴 수 있다는 것.
설문지 작성을 위해 따로 문서 작업을 했던 곳에서 우연히 복사된 글 같았다. 지영의 마음을 담은 글인지 다른 사람의 글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 어떤 문항에도 어울리지 않는 글이었지만 지영의 마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안나는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서 잠에서 깼다. 사방이 고요했다. 슬픔에 잠긴 여자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았다. 연희일까? 시간을 보니 새벽 4시가 넘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다 카톡을 열었다. 릭에게 보낸 문자 앞에 ‘1’이 지워져 있었다. 조금 남은 잠이 달아났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라이프코치, 한 번 만나봐. 안나는 조금 망설이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바로 ‘1’이 지워졌다. 안나는 망설이지 않고 보이스 톡 버튼을 눌렀다.
“정신병원에 가둔다고 그러면 어떡해?”
릭이 가볍게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모르는 길은 물어서 가는 거래. 얼마나 좋은 세상이야.”
“싫어.”
“왜?”
“나를 더 믿어 보기로 했어.”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도 같았지만,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막연한 기대감이 다시 시작되는 지점일 뿐이었다.
“실은, 들었어.”
“뭘?”
“온라인으로. 라이프코치 강의. 두 번 들었어. 내가 거의 다 아는 거야. 실천하지 못했을 뿐. 내가 만나고 듣고 본 모든 게 다 라이프코치 같아, 엄마…….”
릭이 바퀴벌레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힘이 난다고.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안나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보이스톡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너무도 오랜만에 들려주는 바퀴벌레 얘기였다.
릭은 벌레를 보면 꼭 말하라는 할머니 말을 떠올리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영어가 서툰 할머니는 벌레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 릭은 다급한 마음에 무서워, 무서워 소리쳤다. 무슨 벌레? 이름을 말해 봐! 할머니가 다그쳐도 벌레 이름은 한국어로 떠오르지 않았다. 릭은 바닥에 벌러덩 누워 팔과 다리를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방금 보았던 벌레의 몸을 표현하려 애썼다. 몸짓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한 할머니가 바퀴벌레! 라고 외쳤을 때 릭은 대단한 성취감을 느끼며 환호했다. 서툰 몸짓으로 벌레 이름을 상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하하. 그 얘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아빠가 칭찬해 줬던 기억도 나.”
릭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일주일간 화보 촬영 프로젝트에 보조 작가로 합류하기로 했는데 선불을 조금 받았다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작별의 이유가 치즈 때문이라는 연인은 너와 연희뿐일 거야.”
릭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안나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창밖은 여전히 검푸른 빛이 감돌았다. 멀리 붉은 십자가 불빛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다시 잠들기 모호한 시각이다. 안나는 거실을 서성이다 유튜브를 켰다. 모닝 재즈를 고르고 볼륨을 최대한 낮췄다. 피아노 연주가 새벽안개처럼 거실에 차올랐다. 저녁이 부실했는지 때 이른 시장기가 몰려왔다. 커피를 내리고 지영이 준 단팥빵을 한 잎 베어 물었다. 잘 익은 팥 알갱이가 하나하나 혀끝에 닿았다가 번지는 맛이 일품이었다. 눈이 반짝 떠질 만한 맛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한 모금의 커피가 완벽하게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먼 곳의 하늘 끝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음악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맛이었다.
소설을 쓰며 번역 일을 한다. 둘 사이가 멀지 않은 일이다. 하와이주립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을 배웠다. 2013년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당신의 파라다이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장편 『비늘』,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가 있으며, 『라이프 리스트』, 『블라인드 라이터』, 『예루살렘 해변』, 『모호한 상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2023년 『세 개의 빛』으로 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