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호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황모과
스물여덟, 만화가가 되겠다는 막연하고도 무모한 결심을 안고 도쿄에 도착했다. 해외에서 빈곤하게 사는 일이 어떤 절벽에 서는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몰랐기에 감행할 수 있었지만. 내 딴엔 멋있게 각오했다. 똑같이 추락하더라도 아현동 골방에서 마주하는 절벽보다 이국적인 절벽이 나을 거라고 말이다.
내가 살게 된 도심 서쪽 에이후쿠쵸라는 동네는 가이드북 속 화려하고 현대적인 도쿄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어릴 때 살던 달동네가 떠올라 이국적이긴커녕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집들이 다닥다닥 비좁게 늘어선 탓에 일조량 적은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유서 깊어 보이는 그늘이 동네 트레이드마크인 듯했다. 좌식 변기 위에 양변기를 붙인 이상한 퓨전 설비도 이 동네 집들이 품은 특색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작고 제일 어두운 이층집 한구석에 짐을 풀었다. 월세는 서울보다 비쌌고 삶의 질은 서울보다 한층 더 낮아졌다. 직전까지 살았던 아현동 철거 예정지에서의 삶의 질이 에이후쿠쵸보다 높았을 리도 없지만. 맘만 먹으면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낮은 담벼락 탓에 출국 직전 좀도둑이 들었던 아현동 월세방. 가난한 이가 가난한 이의 얄팍한 지갑을 털다 한숨을 쉬던 동네. 그 형편을 삶의 질이라는 범위 안에서 논할 수도 없겠지만 그때보다 나아 보이지도 않았다.
가이드북과는 확연히 다른 이 동네를 걷다 보면 전쟁 전부터 건재했을 오래된 집이 눈에 띄었다. 그런 집을 보면 ‘용케 남았네?’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1945년 도쿄 대공습 때 대규모 궤멸로 끔찍했다던데 어째 35년간 수탈로 초토화된 조선 땅보다는 잔존물이 있어 보였다. 평소에 딱히 애국심이 투철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도쿄 풍경을 보는 내 시선이 지극히 한국적인 것은 분명했다. 해외에서 살게 됐다고 곧장 애국자가 되어가는 건 아닐 테고. 단지 이전에 살면서 가졌던 평범한 시점과 관점이 꽤 속지주의적이었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첫해 봄날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거리를 걸을 때면 이국 풍경을 감상할 새도 없이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느라 마음이 다급했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이국의 허상을 확인하는 일도 잦았다. 벚꽃 시즌에 들른 우에노 공원 같은 곳이 그랬다. 벚꽃은 예뻤고 서울보다 한층 일찍 체감하는 따듯한 시절은 좋았다. 벚꽃이 만개하는 날, 4차선 도로 폭만큼 넓은 공원길이 사람으로 가득 찬 풍경 속에 오도 가도 못했다. 벚꽃 봉오리 수만큼 많은 인간의 검은 머리통이 시야를 가득 채웠을 때 헉, 소리가 터졌고, 크게 실망했다. 벚꽃 나무 아래 여기저기에 커다란 시트를 펼치고 하릴없이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 이 해 입사한 신입 사원들이며 이게 이들의 중요한 사회생활 첫 업무라고 했다. 이 풍경이 상징하는 노동 환경도 암담해 보였다. 어딜 가나 거리마다 가득하구나. 시절에 맞춰 시의적절한 정례 행사를 하면서 옛 습관을 이어가는 지극히 평균적인 일상이. 애써 벗어나고 싶었던 한국 풍경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도망친 곳에서 이전과 같은 평균값을 마주하자니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봐 온 일본 문화, 일본 창작물에는 다양성이 있었다. 그런데 문화적 미덕과 일본인의 일상 사이에 상호 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소소하게 마이너한 문화적 다양성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한국보다는 나은 점이 있겠지? 꾸역꾸역 찾아내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오해로 시작했을지언정 나의 새 출발을 응원해야 했다.
첫 달은 초저가 관광객처럼 돌아다녔다. 하지만 ‘도쿄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한다’는 여행 책자나 블로그의 추천 알고리즘은 서울 사람에겐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다이바의 인공 해안은 너무 번잡했고 유명하다는 모 온천은 코스프레가 가능한 유료 포토존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방에서 한국어밖에 들리지 않아 블로거나 인플루언서의 파워만큼은 절감했다.
첫 여름을 어학원 기숙사에서 맞았다. 따듯한 나라 출신 룸메이트 때문에 냉방병에 걸리고 말았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살던 곳에서 숨 쉬던 공기와 습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어떤 식으로든 협의가 필요했다. 밤새 에어컨을 틀면 아침에 특히 저체온인 나는 난방을 틀어야 할 지경이 됐고 불필요한 냉방으로 인한 광열비에도 손이 떨렸다. 냉방 문제로 룸메이트와는 사이가 냉랭했고 나는 기숙사를 떠나기로 했다. 기숙사 비용도 비쌌기 때문에 딱히 손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어컨 온도 때문에 룸메이트와 친구가 되지 못한 건 아쉬웠다.
에이후쿠쵸에 살기 시작하자 비로소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체감됐다. 블로그는 픽업하지 않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 공원이라고 불리는 손바닥만 한 동네 쉼터, 공원에 딱 한 그루 있는 나무 아래서 수다를 떠는 두 여성이 보였다. 각자 가져온 도시락을 천천히 먹으며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적절한 시기에 딱 좋은 풍경 속에 있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비로소 긍정했다. 동네에 흐르는 칸다가와(神田川) 강을 따라 걸으며 자전거 앞뒤에 매단 좌석에 아이 둘을 싣고 출근길을 재촉하는 젊은 엄마를 보는 일도 좋았다. 인공 낚시터에서 아빠의 낚시 실력에 감탄하는 어린이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주말이면 동네 사람들이 집에서 먹던 음식을 들고 나와 바비큐를 구워 먹는 동네 주민용 캠핑장 풍경도 보기 좋았다. 단기 관광객에게는 전혀 매력 없는 곳일 테지만. 이런 풍경을 볼 때면 내가 심리적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입장인 것도 좋았다.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려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으며 하루를 시작할 일이 없는 나, 실내에서든 실외에서든 평생 낚시는 할 것 같지 않은 나, 그리고 바비큐 파티를 함께 할 친구도 없는 나……. 나는 이곳 사람들에 비해 자유롭다. 하지만 풍경 밖에서 하는 관찰과 부감(俯瞰)은 그저 부유(浮遊)하는 일이다. 낙엽이나 먼지 같다.
에이후쿠쵸에 살기 시작하자 윗집, 아랫집, 옆집에 노인과 더 연로한 그들의 부모들에 둘러싸였다. 한국도 단기간에 엄청난 초고령화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서울 아현동에서 체감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사투리를 하나도 모르는 채로 갑자기 어느 시골 마을 청년회장에 임명된 기분이었다.
청년회장으로서 유일하게 친해진 상대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였다. 고양이와 몇 번 마주친 길목에 간식을 놓아두었다. 만날 때마다 나는 한국식으로 나비라고 불렀는데 고양이는 여기저기서 간식을 얻어먹고 다니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듯했다. 앞 골목에선 쿠로, 뒷동네에선 초코, 그리고 우리 집 뒤편에선 미오라고 불렸다. 어느 날 미오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검은 고양이가 달려갔다. 아랫집 할머니였다. 할머니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듯했다. 검은 고양이는 나비로 불릴 때보다 미오로 불릴 때 훨씬 더 편안해 보였다. 고양이 때문에 할머니와 처음으로 눈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고양이에겐 친절했지만 나한텐 별로 친절하지 않았다. 내겐 간식을 나눠주지 않을 것 같았다.
적응력이 좋은 나는 빠르게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어학원을 다니면서 두 달 만에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도 구했다. 사실 첫 달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정도로 무일푼이었기 때문에 첫 달은 말 그대로 배를 곯았다. 그래도 두 달째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 어학원의 다른 학생들에게 대단하단 말을 들었다. 석 달째엔 만화가 사무실에도 채용됐다. 어시스턴트 구인 구직 사이트에 올렸던 일러스트를 좋게 봐준 일본인 선생님 덕분이었다.
만화가 사무실에서 원고에 먹을 칠하고 톤을 붙이면서 일본어도 급격히 향상했다. 작업실에선 24시간 라디오를 틀어놓는 바람에 세대를 아우르는 콘텐츠도 두루두루 섭렵했다. 얼마 후엔 칸다가와를 산책하면서 ‘아나타와 모오오~~ 와스레타 카시라’ 하며 시작하는 1970년대 포크송 <칸다가와>를 흥얼거릴 정도가 됐다. 일본어를 무조건 암기하던 때 아이돌 그룹이 커버한 노래를 기억했던 것뿐인데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자 일본인 동료가 놀라워했다. 학생 운동이 저물어 가던 시절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이라는 거였다. 한국에 유학을 온 외국 학생이 한국어 공부 중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흥얼거리는 걸 보는 것과 비슷했을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도 매일 한국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뉴스 헤드라인을 훑었다. 분노한 사람들의 댓글과 싸늘한 사람들의 댓글까지 전부 읽었다. 댓글을 지켜보며 헷갈렸다. 나는 앞으로도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살든지 이걸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걸까? 언젠가 이 나라 풍경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노래 <칸다가와>를 흥얼거리는 걸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한국에서 펼쳐지는 실시간 키워드들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근데 10년 20년을 더 살더라도 언제까지고 일본인들은 <칸다가와>를 흥얼거리는 외국인에게 놀랄 것 같은데?
습하고 눅눅한 여름, 가만히 놓아둔 컵 안에서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컵 안에 곰팡이가 피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검은색 텀블러를 대충 씻어 물을 마시다 한동안 항생제를 달고 살았다. 한 시절 시원하고 따끈한 물에 온갖 곰팡이를 잘 저어 마시고 있었다니. 늦게라도 알아채 천만다행이었다. 항생제를 먹으며 생각했다. 대충 살아도 된다는 기준은 언제 어디서나 균일하진 않다.
늘 이도 저도 아닌 상황 속에 놓였다고 생각했는데 본격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친구는 많지 않았지만 일본에 오니 정말 하나도 없었다. 한국도 싫었는데 생활할수록 일본도 좋아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외로운 마음에 이런 고민을 유학생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 올렸더니 ‘당신은 어디 가나 세상을 푸념하며 다닐 인간’이라는 악담이 달렸다. 안분지족을 권고하며 위로를 가장했지만 그냥 악플이었다. 저런 애들은 왜 굳이 커뮤니티에 상주하며 고고한 현자를 자청하는 것일까? 굳이 커뮤니티에 상주하며 어딜 가나 세상이 싫다고 한탄하는 나만큼이나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이었다.
8월 초가 되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자를 추도하는 평화 기념 위령제가 열렸다. 티브이에 흐르는 경건한 풍경은 기묘하고 낯설었다. 만약 NHK가 방영하는 추도식에 원폭 희생자 중 징용 온 식민지 사람들을 언급했다면 나도 함께 추도할 마음이 생겼을까? 언급되지 않은 이름 때문에 추도식은 반쪽으로 보였다. 나도 당시 전범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무고한 사람만 골라서 추도하고 싶다는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아픈 현실을 아프게 느끼면서도 선별된 추도에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없었다.
며칠 후 아랫집 할머니가 비명을 질러 놀라서 뛰어나갔다. 미오의 친구이자 나비의 친구인 그 할머니였다. 할머니와 제대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어학원에서 배운 현대 비즈니스 표현과는 사뭇 다른 말을 외치고 있었다. 말투가 고풍스러워 시대극 속 한 장면 같았고 자막이나 통역이 필요할 정도였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무선 전화기를 들고 있었고 뛰어나온 나를 보더니 ‘보쿠고! 보쿠고!’라고 외쳤다. 보쿠고가 뭔지 몰라 허둥대자 할머니가 수화기를 건넸다. 엉겁결에 수화기를 받아든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저는 2층에 사는 학생입니다. 할머니가 뭔가 곤란해하십니다.”
그러자 먼 곳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사람을 보내겠다고 답했다. 어학원에서 연습했던 실전 지문에는 없는 대화였다. 전화를 끊고 일어로 문제를 한 건 해결했다는 사실에 나는 몹시 기뻤다. 하지만 할머니의 문제가 해결된 기색은 없었다.
곧 방문 케어 센터 차량이 1층 현관문을 두드렸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는 센터의 주기적 생존 확인만을 이웃 삼아 홀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상태가 더 심해지면 시설로 보내질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방에 돌아와 사전을 펼쳤다. 보쿠고, 방공호(防空壕)를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나이를 대략 가늠해 보았다. 1945년에 할머니는 10대 소녀였을까? 가까운 일을 잊고 먼 시절의 일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알츠하이머의 시계는 어떤 작동 방식을 가진 걸까? 그 시계는 환자의 일생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제일 또렷하게 가리키는 걸까?
방공호를 찾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외할머니를 함께 떠올렸다. 군산항에서 전국의 쌀이 모두 실려 일본으로 떠나는 걸 보면서 배를 곯았을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히로시마로 강제 동원되어 갔다. 원폭 투하를 목격한 바로 그 순간 근처 강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게 위험을 피한 행동인지 피폭량을 늘린 오판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 가족과 직결된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히로시마 복구 작업에 동원되었다. 복구라는 말이 끔찍했다. 식민지 사람들이 피폭을 입으며 전범국의 도시를 ‘복구’했다니. 우리 할아버지가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죽지 않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뒤 할아버지는 딸을 얻었다. 그가 우리 엄마였다. 그러니까 나는 피폭 3세다. 엄마 형제들의 암 발병률이 높다는 사실이 히로시마와 우리 가족을 최근까지 끈질기게 묶어두고 있었다. 정작 히로시마와 일본은 보상은커녕 한 번도 우리 가족과 관련이 있다는 얼굴을 보인 적 없지만. 나는 도쿄에서 내가 조금 삐딱하게 굴어도 될 충분한 이유라도 되듯 피폭 3세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아랫집 할머니가 전범들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아닐 테지만 나의 조부모를 생각하면 일본의 전쟁 피해자들을 눈앞에 본대도, 적어도 나는 그들을 ‘우선적으로’ 연민할 순 없었다. 에이후쿠쵸 그늘에 자리 잡은 누군가의 고독한 일상은 연민하는 마음에도 순서와 차등이 있다.
이곳의 유서 깊은 그늘 속에 들어오려면 어깨를 앞뒤로 비스듬히 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을 작게 만들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비좁은 골목에는 이끼가 가득했다. 현관 앞에는 사람 발자국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작은 도마뱀들이 활보해 마치 작은 밀림 같았다. 치매 노인과 외국인과 도마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며 서로 연민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밀림이었다.
할머니는 어디 출신일까? 막연하게 히로시마나 나가사키가 먼저 떠올랐다. 전쟁 때 대공습 피해를 입은 나고야, 고베, 도쿄일 수도 있고 오키나와일 수도 있다. 할머니의 출신 고향은 얼마 후 알았다. 자려고 옆으로 누우면 바닥에 귀를 대는 형국이라 아랫집에서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박혔다.
“어머니 오메라로 돌아갑시다.”
아들 부부인지 딸 부부인 듯한 사람들이 할머니를 고향으로 모시고 가려 설득했다. 할머니 고향과 앞으로 여생을 보낼 장소까지 알게 된 것은 엿들으려던 게 아니고 방음이 불가한 얇은 벽 때문이었다. 고급 맨션 이외, 일본식 목조 건물은 바깥의 환경을 거의 차단하지 않았다. 아랫집 할머니가 방귀 뀌는 횟수를 들으며 요즘 식습관이 불규칙하신가, 의도치 않게 짐작해 볼 정도였다. 일본의 건축 환경 및 내진 방식을 몽땅 바꿀 수 없으면 잠잘 때 자세라도 고쳐야 했다.
“안 가! 싫어! 싫다고!”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싫다고 외쳤다. 일본어 학교에서 배운 거절 표현이 생각났다. 완곡하고 예의 바르게 거절하는 것이 비즈니스 매너의 기본이다. 단호한 표현 대신 어려울 듯합니다(できかねません) 혹은 가능하기 힘듭니다(いたしかねます) 같은, 쓱 외워질 이유를 찾기 힘들 정도로 몹시 긴 표현을 배웠다. ‘できかねない’ 이 표현은 진짜 헷갈렸는데 데키루(가능하다)와 카네루(어렵다, 겸하다)가 조합된 말에 부정을 뜻하는 말 ‘ない’ 또는 ‘~ません’이 붙어 직역이 안 됐다. ‘가능하기 어렵지 않다’는 뜻이면 너끈히 가능하단 얘기 같기도 한데 신기하게도 데키카네루처럼 뒤에 부정이 붙지 않는 말도 그냥 안 된다는 뜻이었다. 외국어 완곡 화법을 머릿속에 구겨 넣고 있으면 그냥 예스나 노로 말하면 안 되나, 의문이 일었다. 영어권 사람도 비즈니스 어법으로 거절을 표할 때 엄청나게 완곡하게 돌려 말한다고 하니. 상대를 상처 주지 않는 인류애 어법이려니, 여겼다. 근데 아무리 정중하게 ‘데키카네나이’라는 표현을 들어도 상처받더구먼. 나 같은 외국인에게 지나치게 정중한 화법을 쓰는 일본인을 만나면 ‘네가 이 말을 알아들으려나’ 같은 의도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아 더 기분 나빠졌다. 아무튼 할머니는 데키카네루, 데키카네나이 같은 완곡어법을 쓰지 않고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싫어! 싫다고! 절대로 싫어!(いやだ!いやだってば!絶対いやだ!)”
어학원 선생님 기준으로는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할 나쁜 표현 중 하나였다. 중년 여성 선생님은 외국인인 우리에게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서 본 표현을 그대로 쓰지 말라고 여러 번 조언했다. 어린아이 어법으로 들려 상대에게 존중을 끌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리 세련된 언어를 구사해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엔 어떡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선생님의 시간을 존중했다. 수업 중에 의문을 말하는 것은 일본 교실의 미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어가 초급이라 긴 질문을 포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바닥에 붙인 귀를 통해 확성기처럼 들려오는 할머니의 절규와 함께 오메라시라는 이름이 또렷이 남았다. 오메라시(青梅等市)라고 검색해 보니 오키나와의 남쪽 끄트머리 지역이 지도에 보였다. 그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선연하고 아름다운 절경도 보였다.
오키나와에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겨울에도 따뜻하다지. 근데 할머니는 왜 고향으로 돌아가길 거부할까? 나 역시 한국을 떠난 사람으로서, 언제 돌아갈지 기약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할머니의 마음을 상상해 봤다. 어학원 코스 1년이 지나자 학생들 대부분은 일본을 떠났다. 더 머물고 싶어도 비자를 연장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자 발급이 가능한 비교적 안정적인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1년 어학원에서 취득한 경험만으로 이 관문에 통과한 사람은 적어도 내가 다닌 어학원에선 단 한 명도 없었다. 본국에서 보내주는 돈이 많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도 비싸고 배울 것 없는 어학원 비용을 계속 지출할 수 있는 사람, 또는 눈 돌아갈 정도로 비싼 사립 대학 학비를 지급할 만큼 부모의 재산이 월등한 사람만 남았다. 나는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지만 2년 차에도 도쿄에 남았다. 내가 생각해도 희귀한 케이스였다. 만화가 사무실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자는 발급해 주지 않아 2년 차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았다. ‘워홀’은 아무나 가는 줄 알았는데 수속을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다는 걸 체감했다. 일본어능력시험(JLPT)에서 한 문제만 더 틀렸어도 떨어졌을 뻔했다. 그 정도로 까다로웠다. 비자를 발급받은 것은 감격스러웠지만 결국 에이후쿠쵸의 그늘진 방에서 다시 하루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비싼 월세를 계속 납입할 자격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실속 없는 생활이었지만 한국의 지인들은 나를 대단하다고 했고 부럽다고도 했다. 살기만 해도 느는 어학 실력, 간편한 비자 취득과 갱신, 원했던 만화가 어시스턴트 업무, 해외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찬사받았다. 내용은 초라할지언정 남들의 오해에 기반한 찬사가 있으니 조금 보상받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현실은 초라하지만 당장 귀국할 수도 없었다. 목표했던 성과를 낼 때까지 귀향을 거부할 참이었다. 그런데 워홀 기간 안에 과연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이곳에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두 번째 계절을 지켜보는 와중에 고양이 미오가 아랫집 현관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할머니는 얼마 후 결국 집을 떠났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도 없는 이웃, 심지어 나를 기억하거나 인지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치매 환자인 이웃이었다. 그런 이웃과 헤어질 때 전할 적절한 인사를 몰랐다. 그래서 할머니가 집을 떠나는 날 마침 골목에서 딱 마주쳤을 때 나는 평소처럼 ‘곤니치와’라고 인사했다. ‘도모’나 ‘웃스’ 같은 속칭 인사를 건네지 않았으니 예의 바른 말이었지만 지극히 교과서적이라 더욱 애매한 인사였다. 그날, 할머니는 나와도, 그리고 다른 이웃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방공호로 가야 한다고 외치던 순간이 기억났다. 할머니는 지금도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메라시로 돌아가길 그토록 거부했는데 포기한 걸까? 이제 모두가 귀찮아하는 존재가 되어 자포자기한 마음이 된 걸까? 가지 않겠다던 결심까지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할머니 눈은 매서웠다. 자신의 처지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나 같은 이웃을 원망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단출한 짐 옆에 짐처럼 놓여 할머니는 골목길에 오래 서 있었다. 나는 2층 작은 창문으로 할머니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 후 내 방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노크 소리가 조심성도 없이 쾅쾅 울렸다. 현관문 외시경으로 살짝 내다보니 아랫집 할머니였다.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가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할지도 몰랐다. 할머니를 한 번도 연민하지 않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비난이라도 하는 듯 마음까지 쿵쿵 울렸다. 대답하지 않고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낯선 사람이 다가와 할머니의 짐을 택시에 실었고 할머니는 그 길로 에이후쿠쵸 골목을 떠났다.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할머니에게 따듯한 작별 인사나 혹은 기약 없이 다시 보자는 발림 말을 전할 정도의 의무는 없었다. 솔직히 나는 이 사회의 일원도 아니고 할머니 역시 딱히 나를 이웃으로 반겨준 것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장유유서를 체화한 유교권 출신이긴 하지만, 내겐 일본의 경제 번영을 위해 애써준 윗세대를 부양할 부채감도 없었다. 이 사회는 내게 줄곧 비즈니스 매너를 체득하고 일본인에게 존중받을 자격만을 요구했다. 나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고 세금과 월세를 내며 살아갈 뿐이다. 타인을 연민하려 해도 필요한 조건과 맥락이란 게 있다. 히로시마 위령제처럼 당당하게 피해자를 선별하고 배제해 버리는 장면을 보며 피폭 3세로서 냉랭해도 된다고 허가받은 기분이었다. 피해자만 인류애를 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물타기 하는 논리로 쓰일 걸 안다면 내가 굳이 한국군의 베트남전 학살 참여 같은 일을 일본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일본어 검색에도 조금 익숙해져 일본어로 된 사이트나 트위터를 읽기 시작했다. 일본어로 오메라시를 검색해 봤다. 그러다 괴담 같은 이야기를 하나 접했다. 오키나와가 아닌 다른 지역, 어떤 도시 이름도 오메라시(御目羅市)라고 했다. 발음만 같고 표기는 다른 곳이었다.
그 도시를 개발할 때 지하에 커다란 터널이 있었다. 쓰지 않던 오래된 배수 터널, 방공호일지도 몰랐다. 그 터널을 메운 뒤 도시를 세웠는데 공사 중에 터널 속에 사람이 하나 남아 있는 걸 알았다. 사람의 절규가 들렸지만 공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매립용 시멘트를 부은 지 이미 수십 일이 지났고 굳어버린 시멘트를 모두 깨트린 후에 그 사람이 살아남았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가 곧 죽을 것을 확신했던 현장 책임자들의 마음은 아예 그가 조속히 죽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갔다. 도시는 아름답게 재건되었다. 이상한 일은 매립 터널이 있던 곳에서 밤마다 사람의 절규가 계속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일본식 괴담다운 결말이었다.
그곳에 대한 일본다운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아름답게 개발된 오메라시로 이사했고 날이 좋으면 오메라 신사에 들러 복을 빌었다. 터널 속 절규 이야기도 퍼졌다. 옛 터널 주변에서 사람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괴담 체험담도 많았다. 근처에 사는 너구리가 우는 소리라며 동물원 라쿤 울음소리와 비교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사람도 있었다. 새로운 정보가 추가될수록 원래 사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 고향 오메라시도 검색해 보았다. 따듯한 풍경을 배경으로 절경에서 사진을 찍어 올리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채광이 좋은 카페도 근처에 많은 듯했다. 그리고 백합(百合, 유리라고 읽음)을 하와이안 스타일로 디자인한 배지나, 전차를 운전하는 소녀 캐릭터들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굿즈도 연관 검색어처럼 따라왔다. 오키나와와 백합(유리)을 일본어로 검색하다 한 사건이 검색창에 떠올랐다. 오키나와 절경에서 벌어진 히메유리 학도대 사건. 종군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평범한 여학생 200여 명이 전쟁에 동원되었고 1945년 일본이 투항하기 사흘 전 격전지 한복판에서 해산 명령을 받았다. 포로가 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전방에 버려진 평범한 여학생들은 폭격과 집단 자살 종용으로 사망했다.
창밖에서 고양이가 우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검게 굳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로 맞는 여름, NHK의 추도 방송은 작년과 다름없었다. 나는 올해도 무심하게 추도 방송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아랫집 할머니를 떠올렸다.
8월 말이 되었고 도쿄의 밤하늘을 수놓는 거대한 불꽃놀이가 스미다 강(隅田川) 위에서 펼쳐졌다. 그날 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바쁘게 일했다. 가장 싼 메뉴인 프렌치프라이와 맥주를 미친 듯이 나르며 멀리서 울려 퍼지는 폭죽 소리만 들었다. 숨 막힐 정도로 덥고 습했던 여름 열기도 9월 중순쯤 되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풍경이 가을로 향하는 어느 날 동네 공원에서 센코 하나비(線香花火)에 불을 붙였다. 거대한 폭죽은 아니고 한 뼘 정도 되는 실타래를 따라 작은 불이 잠깐 타오르다 이내 꺼지는 내성적인 폭죽이었다. 타고 있는 것인지 꺼지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을 들여다보았다. 꺼져가는 걸 보면서도 타오르는 중이라고 여기는 건 일본식 허무주의 같았다. 그럼 타오르는 걸 보면서 어차피 꺼질 거라고 확신하는 건 한국식 냉소일까? 어두운 공원에 앉아 작은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끝까지 지켜봤다. 일본식 정서든 한국식 정서든 상관없었다. 무의미한 순간임을 알고도 꾸역꾸역 의미를 찾아내야 했다. 진즉 사라진 빛의 잔상을 나는 한참이나 노려봤다.
2년간 만화를 그려 출판사를 찾아다녔다. 나는 영업 일도 잘하는 모험가였지만 출판사가 찾는 인재는 아니었다. 열 작품쯤 그려서 열 군데쯤 출판사를 찾아갔는데 편집자들은 내 원고를 보며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일본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요.”
대사나 연출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동시에 의아했다. 생활하면서 직접 들었던 일본인의 말을 대사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 작품에 상업적 가치가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 외국인이 일본어로 쓴 작품은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편집자로서 조율 업무가 가중된다고. 손은 두 배로 가는데, 그 정도로 공을 들여야 할 정도로 팔릴 작품이라고 보진 않는다고 말이다. 내가 이해한 위와 같은 정황을 포함하는 뜻이었겠지만 만화 편집자들은 내 작품을 ‘부자연스럽다’고 표현했다. 일본인이 보기에 부자연스럽게만 보이는 사람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히는 상업 만화를 그려낼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나는 이질성이 개성이라고 자부했지만 솔직히 이를 열등함으로 여기는 상대 앞에서 당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체류 기한이 다가오면서 나는 어디서나 잔뜩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렸다. 혀를 차거나 투덜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길에서, 도서관에서, 편의점에서, 가게에서……, 매순간 무시당했고 차별받았다는 모멸감을 마주했다. 짜증을 잘 내서 무시당한 건지, 차별당했다고 느낀 순간 유효하게 맞받아치지 못해 짜증이 난 건지 선후 관계는 조금 애매했다. 그리고 애써 이 모든 게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어느 나라에 살았건 나란 인간은 이렇게 살고 있을 거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자기 현실 속에서 애매하게 산다.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인 말로 치환하며 안위했다. 그렇게 갑갑한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갇혔다는 사실을, 더구나 내가 선택한 감옥이라는 현실을 말이다.
빈손으로 귀국할 날짜만 다가오고 있었다. 가끔 새벽에 밖에 나가 철로를 걸었다. 적지 않은 나이를 떠올릴수록 꽤 비참했다. 일부러 음량을 높여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여기서 죽는대도 아무도 날 상관하지 않겠지? 아무리 모험가의 심장을 가졌대도, 앞으로 아무리 발버둥을 친대도,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일은 없으리라는 강렬한 예감이 이 밤을 감쌌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도 없는 처지였지만 인생을 계속 서성이기만 할 이유도 없다고 누군가에게 항의하고 싶었다. 좁고 굽이진 골목을 서성이다 길을 잃었다.
밤의 공기를 가르며 어딘가에서 정적 속에 짧은 비명이 들렸다. 취객이 깽판을 부리는 소리인지, 티브이 속 공포영화의 한 장면인지, 아기가 우는 소리인지, 고양이가 우는 소리인지, 아니면 누가 정말 울부짖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젊은 여성이, 아니면 늙은 여성이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곧 잦아든 소리에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내 안에서 폭발하는 절규와 오열에 비하면 연극 무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아 가짜 비명으로 들렸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지하에 갇힌 건 나다. 여기가 바로 오메라시로구나.
스스로 갇힌 순간에도 누군가가 동시에 나를 가뒀다. 결국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풍경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살아갈 조건 따위, 앞으로도 갖추지 못할 테니까. 담벼락이 공중에서 아무렇게나 쏟아부어 쌓인 시멘트처럼 보였고 산소가 부족한 듯 숨이 막혔다.
호흡 곤란을 느끼고 주저앉은 그 순간 작고 검은 그림자가 담벼락 위에서 흔들렸다. 나무 그림자에 반쯤 가린 그림자였다. 올려다본 시야 안에서 살짝 움직이지 않았다면 못 볼뻔했다. 검은 고양이였다. 녀석은 내가 알아차린 것을 알았다는 듯 그때부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앞장서는 고양이를 천천히 따라갔다. 한참을 걸었다. 집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다. 자식, 관할 구역이 이렇게 넓었구나? 녀석은 길이 아닌 곳을 성큼성큼 자기 길로 만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잠깐 나타나는 검은 꼬리, 흔들리다 그림자 사이로 사라지는 움직임을 쫓으며 나는 큰길로 이어질 발걸음에만 집중했다. 통과할 수 있는 길을 골라 걸었다. 막힌 길을 만나면 다시 돌아 나왔다. 갈 수 있는 곳까지, 내가 걸을 수 있는 길로, 내 걸음으로……. 호흡이 천천히 균일해졌다.
이어폰 배터리가 끝나 배경음악은 진즉에 끊겼다. 도시 아래에 가라앉은 각종 소리가 오늘 밤 똑똑히 들려왔다.
줄곧 타자의 시선으로 도쿄를 관찰하고 있었다. 딱히 서울 한복판에서, 혹은 지방의 어디 골목에서 살았다고 해도 내 태도는 마찬가지였을 거였다. 여기선 오히려 핑계 대기 좋았다. 이곳은 내게 아무런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영원히 타자로 살기로 마음먹기는 쉬웠다. 오메라시의 터널이 에이후쿠쵸 지하에 존재한대도, 그 안에서 당장 오늘 밤 괴담인지 동물인지 진짜 사람인지 모를 목소리가 울려 퍼진대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길 거였다. 내겐 아무런 의무가 없으니까.
오메라시는 할머니의 트라우마 속에도, 내 현실 속에도, 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 같았다. 어디든 오메라시가 될 수 있다. 누군가 괴담 체험담 정도로 소비하는 일에 혀를 차곤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오메라시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며 관심도 없다는 사실까지 포함해. 터널의 이름은 평범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타자일 수 있다는 생각. 모두가 서로의 타자가 되어버리면 아무도 오메라시의 터널을 이야기하지 않을 거란 생각.
천천히 내가 모르던 곳에서 빠져나와 아는 풍경 속으로 들어왔고 곧 집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아랫집 현관 앞에 미오가 앉아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가 언제나 미오에게 사료를 주던 현관 반대편 자리에 가보았다. 작은 툇마루 아래 고양이용 사료가 두 자루쯤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혹시 사료 얘기를 하려고 마지막 순간에 2층 내 방문을 두드렸을까? 할머니가 준비해 둔 두 가지 사료를 섞어 미오에게 건넸다. 툇마루 옆 수도를 틀어 할머니가 언제나 깨끗이 씻어두는 그릇에 담았다. 언제까지 할머니의 일을 이어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내가 할 수 있다. 할머니의 일이자 내 친구의 일을.
“미오야, 나 간다. 잘 자.”
어느샌가 나도 녀석을 나비가 아니라 미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길을 잃은 날조차 언제고 이곳으로 돌아올 거다. 애초에 나의 도시가 아니었던 곳, 이 도시의 오메라시로, 돌아갈 도시, 도착하게 될 도시에서도 언제고 만나게 될 우리 모두의 오메라시로.
오늘 밤에도 차마 잠들지 못하는 이들의 옛 비명이 발밑 콘크리트 아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오메라시(青梅等市, 御目羅市)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 이름.
SF 작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소속. 「모멘트 아케이드」로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단편집 『밤의 얼굴들』, 중편 『클락워크 도깨비』, 『10초는 영원히』, 『노바디 인 더 미러』,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서브플롯』,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등을 출간했다. 「연고, 늦게라도 만납시다」로 2021년 SF어워드를 수상했으며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로 2022년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을 수상했다. 「모멘트 아케이드(モーメントアーケード)」가 일본어로,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再次重逢的世界)』가 중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2006년부터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 수년간 취재를 거친 1923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추념하는 SF 장편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출간했으며 가상의 분단 국가를 배경으로 이산 난민과 후손의 이야기를 다룬 SF 장편소설 『그린레터』를 다가오는 봄에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