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호
뷰잉
문지혁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뷰잉에서였습니다.
찬양대 연습이 끝나고 교회 주차장에서 저를 집까지 라이드 해주시는 집사님 차에 막 타려고 할 때였어요. 운전대를 잡은 집사님이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물었습니다.
잠깐 ○○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미국에 건너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선 상태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도 못했죠. 뭔지 모르니 뭐냐고 되묻지도 못했고요. 그 두 동그라미 속에 들어갈 말이 뷰잉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십여 분을 달려 또 다른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저는 겨우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딘가요? 집사님은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습니다. 일종의 장례식장이에요. 한국으로 치면 빈소죠. 거북하면 내가 다녀올 동안 여기 차에서 기다려도 돼요.
잠깐 주저하던 저는 남아 있기보다 집사님을 따라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은 지금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들에는 큰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잖아요. 아마 그래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글로 써놓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경험한 것들은 전후 관계를 바꾸고, 디테일을 추가하고, 있던 사실을 없애거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야만 겨우 이야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전히 저는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그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선생이지만, 그 순간 제가 집사님을 따라 내린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이라고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조명이 켜진 공간이 있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뭘 기다리고 있었고 집사님은 가운데 서 있는 이를 가리키며 속삭였습니다. 저분이 고인의 부인입니다. 맹미자 권사님. 전 아직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집사님과 함께 줄의 맨 끝으로 가서 섰지요. 저만 초록색 풀업 니트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장례식장에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미리 알았더라면 검은색 정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두운 셔츠라도 입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줄이 줄어드는 동안 저는 줄곧 제 옷차림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있던 사람들은 조문을 마치고 아까 집사님이 맹미자 권사님이라고 소개한 분과 인사를 나누었지요. 손을 붙잡기도 하고 포옹을 하기도 하고 먼저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을 보며 저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순간 저는 무엇을 깨달았고, 그러자 옷 색깔이나 다른 사람이나 제 리액션 같은 부차적인 생각들은 모두 한번에 싹 사라져 버렸습니다.
관.
저 앞에 놓인 것은 관이었어요. 그리고 거기엔 고인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다 시체에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건가? 자세히 보니 그들은 인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고인의 손을 만졌고 누구는 이마를 쓰다듬었고 심지어 어떤 이는 고인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오래전 영화에서 본 낯선 장면들이 겹쳐졌습니다. 한 번도 나에게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바로 그 장면이.
저는 그전까지 시체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대개 가족의 시신은 보게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저는 그분들의 시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염을 할 때 들어가지 않은 거지요. 물론 그건 저를 사랑해 주지 않은, 더 정확히는 없는 사람 취급한 그분들이 미워서였지만요. 하지만 낯선 이국의 방에서 영문도 모른 채 시체로 향하는 줄에 서 있던 그 순간에는 문득 그런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나에게 아무런 관심과 애정이 없는 분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때 들어가 보았다면 지금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지는 않았을 텐데.
마침내 저는 시체 앞에 다다랐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있는 힘껏 눈을 감고 망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귀에서는 은은하게 틀어놓은 찬송가 소리와(“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먼저 조문을 마친 라이드 집사님과 선생님의 대화 소리가 들려(“저분은 누구세요?” “새 신자예요. 뉴욕에 유학생으로 오신 분인데……”) 기도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눈을 뜨고 옆으로 이동하자 선생님이 저를 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저는 선생님의 얼굴을 처음 제대로 보게 되었죠. 금테 안경 속에 가느다란 눈, 얇고 기다란 코, 나이를 증명하는 주름과 단정한 입술. 한국식 상복이 아니라 깔끔한 검정 투피스 정장을 입은 선생님의 표정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아 보였습니다. 라이드 집사님이 저를 소개하자 선생님은 눈을 반짝이며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국어를 전공하신다고요?”
일주일 후 교회 지하 1층 한글학교 사무실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선생님을 권사님이나 미세스 맹, 혹은 아주머니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 건 다 그 학교 때문이지요. 뷰잉을 했던 장례식장에서 선생님은 저에게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일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선생님은 덧붙였지요.
“저는 절대로 빈말은 하지 않아요.”
자세히는 몰랐지만 미국에 오기 전에도 한국인 2세들을 위한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출석하기 시작한 교회에도 한글학교가 있다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요.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한글학교는 근방의 여러 비슷한 학교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내실이 있는 학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제가 정보를 문의한 사람들이 대부분 서로 별다른 공통분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 맹 선생님 계신 그곳이요?
선생님은 저에게 학교와 수업을 소개했습니다. 제가 유학생이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보수를 드릴 수는 없지만, 대신 식사와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이야기도요. 사실 저는 그 이야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명패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앞에 놓인, 양 끝에 은빛 봉황이 그려졌고 바이스 프린시펄이라는 알파벳과 맹미자라는 한글이 부조화를 이룬 채 새겨진 검은 명패를요.
이야기를 마친 선생님은 제 시선을 알아본 듯 덧붙였습니다.
“저는 원래 심씨예요. 맹은 우리 남편 성. 어떻게, 시간을 더 드릴까요?”
뷰잉을 하러 들어가기 전처럼 저는 다시 망설였습니다. 망설이는 것은 제 오래된 장기이자 특기니까요. 하지만 미국에 와서는 저의 이 특별한 능력이 잘 발휘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자극, 새로운 선택지 속에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전처럼 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뇨, 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요, 고맙습니다 하고 답했고 저는 그때부터 제가 해보겠다고 말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냥일 수는 없으니까요. 선생님이 궁금해서라고 하면 조금 나을까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어차피 토요일 오전에 나와서 아이들에게 한두 시간 동안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것인데, 여기에도 꼭 확실한 개연성과 단단한 내적 필연성이 있어야만 할까요?
이유를 찾던 저에게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저와 바비 하실까요?”
선생님이 말한 ‘바비’가 실은 ‘바비스 버거 팰리스(Bobby’s Burger Palace)’라는 햄버거 가게를 의미한다는 걸, 저는 이번에도 음식점이 있는 몰 주차장에 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햄버거를 좋아하는 60대 한인 여성이라니, 안 될 것은 없었지만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제 편견이란 아직도 이렇게나 좁고 완고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저는 선생님이 사주시는 버거와 감자튀김, 어니언링을 먹었습니다. 이름을 내건 음식점답게 바비스 버거의 햄버거는 정말 훌륭했어요. 한국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처럼 미국에서 햄버거는 실패하기 힘든 메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지요. 식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에는 오래 계실 건가요?”
어려운 질문이었어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가 길게 대답을 했다는 것만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공부를 마친 이후에도 자리를 잡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영주권을 받고 잡을 얻어서 평생 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다……,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 제 이야기를 듣다가 덧붙였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미국에 있고 싶어 하죠. 오신 지 얼마 안 될수록 더욱요. 그런데 미국에서 한 삼십 년 이상 살다 보면 한국에 가고 싶어져요.”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마음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지만 저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마지막 하나 남은 어니언링을 입에 넣었어요. 바삭한 튀김을 씹을 때마다 그 속에 든 양파의 달고 쌉쌀한 맛이 입안에서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열 시가 되면 제가 세 들어 살던 에지워터의 집 앞으로 선생님 차가 도착했어요. 은색 메르세데스 벤츠. 고급이지만 어딘지 오래되어 보이는 차. 선생님은 제 라이드를 자청하셨죠. 처음에는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귀한 분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지요.”
선생님은 제가 감사하다고 말할 때마다 거의 똑같은 대답을 하셨어요. 마치 AI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떤 대답에는 어떤 답변이 반드시 나오는 분이었지요.
제가 수업을 맡게 된 아이들은 한글학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6학년 학생들이었어요. 원래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남편의 회사 이동을 따라 LA로 이사 가시는 바람에 급작스럽게 결원이 생긴 거였죠.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처음에는 조금 낯을 가리는 듯했지만 곧 마음을 열어주었습니다. 한국어를 집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사용하는 아이들이 대다수라 생각보다 꽤 수준 높은 한국어를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노아를 잘 지켜봐 주세요.”
선생님은 매주 수업 후 열리는 교사 회의에서 저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복장을 단정히 해라, 영어를 쓰지 마라, 수업할 땐 꼭 일어서서 가르쳐라, 맞춤법에 주의해라’처럼 항상 반복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죠. 노아는 또래보다 키가 조금 작은 남자아이였는데, 수업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편이었어요. 서먹할 때는 오히려 잘 그러지 않았는데, 조금 익숙해지고 난 후부터는 수업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거나 과자를 먹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심지어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하곤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니 제가 좋은 말로 타이르면 노아는 항상 똑같은 대답을 했어요.
“아이 해브 에이, 디, 에이치, 디.”
노아는 마치 제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염려하기라도 하듯 ADHD를 알파벳 하나씩 끊어서 뱉어내듯이 발음했습니다. 저도 그게 어떤 병이고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노이가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었어요. 어떤 날은 아주 얌전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오히려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노아를 대하는 어려움을 제외하면 나머지 아이들은 대체로 귀엽고 착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란 그런 존재잖아요. 옆에 있는 어른을 정화해 주는 것만 같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의심 때문에 저는 점점 괴로워졌습니다. 저 아이는 정말로 ADHD를 앓는 걸까?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걸까?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이기 때문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노아의 문제 행동을 다루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그 아이의 속내를 넘겨짚고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도 노아와 씨름하다가 화를 참기 어려운 순간에 도달했어요. ㅎ을 자꾸 11과 ㅇ으로 쓰는 어떤 아이의 한글 쓰기를 봐주고 있는 사이, 노아와 옆 친구가 다투기 시작한 거죠. 친구의 지우개 가루가 자신에게 튀었다는 이유로요. 아이는 자신이 먹고 있던 스위트칠리 맛 도리토스를 교실 바닥에 뿌려버리고 목이 터져라 똑같은 말, “아이 해브 에이, 디, 에이치, 디!”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아이들을 교실 한쪽으로 모이게 하고, 마치 맹수에게 다가가듯 노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아이는 목에 핏대가 서고 눈물이 고일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러댔어요. 저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갔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제 얼굴에 과자 봉지를 던지더니 괴성을 지르며 교실 출구로 뛰어갔어요. 가슴이 철렁했지요.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 아닐까? 문밖을 나가면 어떤 돌발 행동을 할까? 온 힘을 다해 아이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제가 아이를 쫓아 몸을 움직이는 순간, 노아가 문 앞에서 멈춰 섰어요.
거기엔 선생님이 서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노아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건강하시지?”
방금 전까지 한 마리 짐승처럼 날뛰던 아이가 잠잠했습니다. 선생님은 이어서 노아의 몸을 뒤로 돌리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 줍자.”
그날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말없이 저를 차에 태워 어디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향하던 바비와는 다른 곳이었어요. 구불구불한 산길로 들어가 이십 분쯤 달리다 보니 숲 사이에서 음식점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오크힐이라는 이름이 한글로 적힌, 그러나 일식을 메뉴로 하는 음식점이었어요. 차에서 내리면서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난 매운 걸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더라고요.”
우리는 회덮밥 둘을 주문했습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이 노아 이야기를 먼저 꺼냈어요.
“다루기 힘드시죠?”
“오늘은 좀 유난했네요.”
“그 아이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본 아이예요. 부모도 잘 알죠. 아이 아빠가 세탁소를 하다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동업자를 만나게 됐는데, 동업이 불륜이 되었거든요. 그렇게만 끝났으면 차라리 다행이었겠지만 동업자 여자가 노아 아빠의 사업 자금까지 어디에 다 끌어다 쓰고 사라져버렸어요. 이혼을 하긴 했는데 엄마에게도 노아에게도 큰 충격이었겠지. 그게 아이가 여덟 살 때였으니까요. 그 후로는 엄마와 외할머니가 키웠지요.”
“ADHD라는 말은 사실인가요?”
“정확히 진단을 받은 건 아니에요. 내가 알기론 그래요. 로컬 의사가 ADHD일 수도 있으니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했는데, 아이가 그걸 밖에서 엿들은 거죠. 그 녀석, 얼마나 명민한지 몰라요. 병명이라는 좋은 핑계를 얻은 거지. 아주 전가의 보도처럼 그걸 휘두르고 있잖아요. 지 엄마나 할머니, 친구들, 심지어는 선생님한테까지도. 자기 자식이지만 엄마는 이제 건드리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보면 늘 휘둘리고 있어.”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조용히 회덮밥을 비벼 먹기 시작했습니다. 첫입을 넣자 초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눈물이 날 것처럼 알싸했습니다. 저는 왜 일본 사람이 하는 일식집에는 회덮밥이 없는지를 궁금해하며 연거푸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밥을 먹는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노아 아버지와 그의 사업과 가정을 망쳐버린 어느 위험한 동업자와 자신이 ADHD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의견을 엿듣고 있는 노아의 뒷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습니다.
“커피 하실까요?”
식사를 마치자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또 숲속 어디의 근사한 카페로 가게 될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화장실에 가려는 듯 잠시 일어났던 선생님은 주방 쪽에서 뭘 받아 들고 금세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익숙한 냄새를 풍기며 종이컵 속에서 출렁이는 황금빛 음료. 믹스 커피였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커피를 먹어도, 난 이것만 못하더라고요.”
선생님은 약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종이컵을 입에 가져다 댔습니다. 선생님 컵에 붉은색 립스틱 자국이 묻었습니다. 저는 오늘 들은 이야기 중에 그 말이 가장 진실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에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습니다. 미국에 오래 산 사람은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던. 이번에는 물어볼 용기가 생겼습니다.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으세요?”
선생님은 대답 대신 잠시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인지 몰라 속으로 당황했습니다.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을까요?
“네, 그다지.”
선생님은 다시 종이컵을 입술 끝에 가져다 댔습니다. 저도 말없이 종이컵 속 뜨끈한 갈색 액체를 입술 사이로 흘려 넣었습니다. 달콤쌉싸름한 믹스 커피의 익숙한 맛이 저에게는 마치 멀리 떨어진 고국처럼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은 1976년에 미국에 건너왔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고요. 왜 건너왔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저는 캐묻지 않았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홀로 낯선 땅에 도착한 선생님은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음식점 서빙, 베이비시팅, 운전과 배달, 행정과 잡무, 비서 일에 이르기까지. 지금보다 훨씬 더 터프한 시대였고 그래서 자리 잡기도 어려웠다고요.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 일한 비서직을 하면서 회계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커뮤니티 칼리지에 들어가 원래 전공과는 거리가 먼 어카운팅을 전공하고 석사까지 따면서 회계 전문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주로 통신사와 IT 기업들을 옮겨 다니며 경력을 쌓았고, 마지막은 지역 케이블 인터넷 회사에서 커리어를 마감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받은 퇴직 패키지와 연금으로 아직은 돈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부분을 말할 때 선생님은 어색하게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이직과 이직 사이에 만난 남편과 늦은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지만 성실하거나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업을 자주 벌였고, 돈을 빌리거나 꿔주는 일이 잦았으며,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정확하게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남편이 폐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선생님은 남편이 자신의 육체적 상황 역시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중환자실에 찾아온 낯선 여자 덕분에 정서적 상황 역시 공유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혹시…… 자제분은 없으셨나요?”
다른 가족이 보이지 않던 뷰잉을 떠올리며 내가 묻자 선생님은 한 번 더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무례한 질문만을 반복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습니다.
“있었으면 했지요. 그 사람이나 저나. 아주 오랫동안.”
죄송합니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녜요. 당연히 궁금하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여러 번 그럴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아이를 임신하기도 했어요. 낳았다면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였을지도 모릅니다.”
“언제였나요?”
저는 한 번 더 질문했고 선생님은 답을 주었습니다.
“1986년.”
저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저는 존재했을 수도 있는, 태어났다면 저와 같은 나이였을 선생님의 자녀를 잠시 상상했습니다.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종이컵을 내려놓았습니다. 컵 끝에 묻은 립스틱 자국은 아까보다 선명해졌고, 눈을 들어 바라본 선생님 입술에는 그만큼의 생기가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후 선생님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도 한동안 잠잠했습니다. 평소처럼 우리는 수업을 마치면 바비스 버거 팰리스에 가서 버거를 먹고 감자튀김과 어니언링을 먹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더 함께할 법도 했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버거를 다 먹고 나면 저를 집 앞에 내려주고 떠났습니다. 들어가세요. 늘 같은 인사였습니다. 멀어지는 구형 S클래스의 뒷모습에서 붉은빛이 들어오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사거리에서 차가 우회전을 하며 사라지면 근처 스타벅스까지 걸어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했습니다.
노아가 다시 한번 문제를 일으킨 것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즈음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데이라이트 세이빙 타임, 우리 말로는 서머타임이 끝나는 주말이었어요. 이번에는 친구의 연필을 빌려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하자 노아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한마디 했어요. 유 아 크레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노아의 모드가 바뀌었습니다. 갑자기 저주의 말을 퍼붓더니 주먹을 쥐고 친구를 때리려고 했어요. 저는 달려가 노아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6학년 아이, 그러니까 십 대에 접어든 아이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동물적인 본능이 작동한 것 같아요. 물론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하려는 아이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노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두 팔을 서로 붙잡은 채 서 있었습니다. 등 뒤로 누가 문밖으로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사진인지 동영상인지 모를 것들을 아이들이 찍는 것도 같았습니다. 노아의 눈빛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인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상처 입은 맹수 같았습니다. 팔을 붙잡힌 아이는 발로 저를 차기 시작했습니다.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하지만 쉽게 놓아주거나 움직일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바로 이곳이 유일한 기회이자 마지막 승부처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이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그냥 알게 된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저는 온 힘을 다해 아이의 두 팔을 잡고, 지난번처럼 선생님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요란하게 문이 열리고 어른 몇이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동료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노아를 떼어놓고, 분을 삭이지 못해 으르렁거리다 급기야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면서 교실을 뛰어다니는 아이를 붙잡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저에게 잠깐 밖에 나가 있는 편이 좋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교실을 빠져 나와 건물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자 정신이 들면서 등 뒤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불타는 것처럼 붉게 물든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은 너무 파랗고 높아서 마치 우주 공간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마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실로 돌아가자 노아는 없었고 저는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했습니다. 별일 없지요? 오늘 배우고 연습할 문장은 하필 그거였습니다. 별일 없지요? 아이들은 저를 따라, 정확히는 제 눈치를 보며 문장을 읽었습니다. 교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제 손가락이 떨리는 게 보여서 신경이 쓰였어요. 아이들이 볼까 봐서요.
교사 회의 시간에는 아까 나가 있는 게 좋겠다고 했던 선생님이 맹 선생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에게 가벼운 스트로크가 일어나서 병원에 가셨다고요. 교회 장로이기도 한 교장 선생님이 회의를 마치며 대표로 선생님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짧은 기도였지만 저는 제가 살아오면서 드린 어떤 기도보다도 진심으로 선생님의 회복과 평안을 빌었어요. 저는 다른 선생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햄버거를 먹지 못했고, 스타벅스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무척 걱정되었습니다.
문제는 나중에 더 커졌습니다. 다음 주에 노아가 오지 않은 대신 노아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항의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가리켜 교사 자질이 없는 사람을 교사 자리에 앉혔다며, 아이가 지난주 이후 불안과 우울, 심각한 공황 증상을 보이고 있으니 합당한 책임을 지라고 했습니다. 제가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F-1 비자를 지닌 유학생인 걸 다 안다면서, IRS에 불법 고용으로 고발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많은 말을 했지만 문 뒤에서 제가 들은 마지막 말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저런 사람을 교사로 써서 되겠어요!”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이런 방식으로 망가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이 떨어졌달까요. 무서웠달까요. 교장 선생님과 다른 교사들이 말렸지만 저는 결국 그해를 마지막으로 한글학교 교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셨다면 달랐을까요? 선생님이 돌아오셨다면 그러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더는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 아이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거든요. 그 엄마의 말도요.
교사를 그만둔 후로 교회에 나가는 일도 점점 뜸해졌습니다. 몇 달 후 한국에 먼저 들어가는 선배가 타던 중고 코롤라를 구입하고 난 뒤에는 아예 조금 더 멀리 떨어진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새로 나간 교회에도 한글학교가 있었고 저에게 교사 제안도 주었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맹 선생님 이야기는 연락하는 교사들을 통해 건너 들었습니다. 병원에 계실 때 가보고 싶었지만 절대 안정이 필요한 선생님은 면회조차도 사절했습니다. 퇴원하신 후에는 저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의 방문을 원치 않으셨고요. 교회를 오래 같이 다닌 다른 권사님이 간병인 역할을 하며 집에서 기거한다는 것 말고는 선생님의 정확한 병명이나 상태에 대해서도 소문만 무성했습니다. 스트로크가 가볍지 않았다, 알츠하이머의 전조였다, 공황증이고 패닉 어택이다…… 무시무시한 추측과 속단과 시나리오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갔습니다. 저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어요. 더 이상 선생님을 볼 수 없게 될까 봐.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학교에 다녔고 논문을 썼고 교회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주말에는 주로 한국 TV 프로그램을 보거나 소설책을 뒤적이며 빈둥거렸습니다. 가끔 한글학교에서 같이 일한 선생님들에게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이 오면 선생님 생각이 나서 나가볼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어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논문은 프로포절을 쓰는 과정에서 약간의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조바심낸 것이 무색하게 통과되었습니다. 졸업식 전에 열린 졸업 축하 파티에서 저는 칵테일 잔을 어색하게 들고 구석에 서 있다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먼저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학위를 받고 졸업을 하자 저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느새 제가 한국에 돌아온 지도 삼 년이 지났습니다. 속절없이 흐르는 것은 미국의 시간만이 아니더군요. 뉴욕과 뉴저지보다 열네 시간 빠른 한국의 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사법이 시행되었고, 저는 아무 연고도 없는 대학들에 원서를 넣어 강의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지요. 제 전공인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에 관해서요. 비록 한국에서지만 일 년에 두 번 영어 강의도 합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의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과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섞여 있어요. 수업에서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던 학생이 쉬는 시간에 다가와 ‘근데 선생님, 기말고사 날짜가 언제예요?’ 하고 우리말로 물어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간혹 SNS에 예전 한글학교 교사들이 제가 아는 아이들의 몰라보게 자란 모습을 찍어 올릴 때,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감히 연락할 용기를 내지는 못했지요. 어쩌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엇을 두려워한 걸까요? 선생님의 안부일까요, 노아의 소식일까요, 아니면 저 자신의 상처일까요? 그중 무엇도 아니거나, 그것들 모두일 수도 있겠지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딱 한 번 선생님 댁에 찾아간 적이 있어요. 출국을 며칠 앞둔 어느 저녁이었지요. 맞아요, 그날은 학교에서 졸업 파티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어색한 미국식 파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세 밖으로 나왔는데, 그냥 집에 가자니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크래커 위에 치즈를 올린 카나페 같은 핑거푸드만 집어 먹은 터라 도무지 뭘 먹은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저는 바비스 버거 팰리스 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익숙한 햄버거와 감자튀김, 어니언링까지 남김없이 다 먹고 나서야 비로소 포만감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께 햄버거를 사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어요.
역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연성이라는 걸 만들어볼까요. 우리가 늘 같이 가던 식당에 갔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저에게 햄버거를 사주셨기 때문에 적어도 한 번은 제가 햄버거를 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충분한, 사후적인 설명에 불과할 겁니다. 저는 그냥 그런 생각을 했고, 순간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어떤 확신이나 명령처럼 느껴졌거든요.
저는 선생님이 늘 드시던 아메리칸 치즈버거와 어니언링 세트를 포장했습니다. 음료가 다이어트 코크로 맞게 들어갔는지도 확인해서요. 차에 돌아와 핸드폰으로 이메일 속 받은편지함을 뒤져 교사 주소록을 찾아냈습니다. 선생님 댁은 차로 10분, 햄버거가 식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어요.
고즈넉한 주거 지역에 있는 선생님 댁에 도착했을 때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기도 했고, 무례하거나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죠. 햄버거를 드실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찾아왔습니다. 저는 선생님 댁 길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일단 먼저 인사를 드려보기로 했습니다. 햄버거는 조수석에 놔두었습니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2층 주택으로 다가가 저는 문을 두드렸어요. 처음에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노크를 몇 번 반복하니 누가 문을 빼꼼히 열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햄버거를 두고 온 게 다행이라는 거였습니다.
“맹 선생님을 뵈러 왔는데요.”
그제야 저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저 중년 여성이 아마 간병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사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뭘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습니다.
“어떤 관계세요?”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요. 동료? 사제? 친구? 지인? 세상에는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별 관계는 아닙니다만.”
저는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빠르게 답했습니다.
“특별한 사이 아니면 지금은 만나기 어려워요.”
저는 그 말을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요. 맹 선생님은 저에게 나름대로 특별한 분이었지만, 선생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 거니까요. 저는 다시 한번, 햄버거를 들고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습니다.
“쾌유를 빈다고 전해 주세요.”
권사님은 저를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다음 문을 닫았습니다. 유리문을 닫고 안쪽 문을 열었을 때 거실이 살짝 보였는데, 거기 발이 나와 있었습니다. 수면 양말처럼 폭신해 보이는 분홍색 발끝이었습니다. 늘 딱 떨어지는 정장을 입던 평소의 선생님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선생님의 발이라는 것을 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문을 밀치고 들어가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경찰을 부르지는 않을까? 그렇게까지 들어가서 선생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방금 들은 간병인의 목소리가 제 어지러운 내면을 잠재웠습니다.
어떤 관계세요?
그날 저는 선생님 댁 건너편 도로에 차를 대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차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 몫으로 사온 햄버거를 포장한 봉투에서 흘러나온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낡은 코롤라 내부를 가득 채웠어요. 저는 거실 불이 꺼지고 커튼이 닫히고 마침내 집 안 모든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거기 앉아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유가 없는 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관계가 아닌 관계가 있는 것처럼요.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며칠 전 페이스북을 통해 오래전 저를 라이드 해주던 집사님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들으셨나요?
-뭐를요?
-돌아가셨어요. 맹 선생님이요.
저는 몰랐어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지금 제 노트북 화면에는 선생님과 제가 함께 찍은 사진이 출력되고 있습니다. 장소는 당연히 바비스 버거 팰리스입니다. 화면 밖에는 햄버거가 놓여 있어요.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종이컵에 믹스 커피도 두 잔 타 두었습니다. 한국에는 바비스 버거가 없어서 대신 버거킹 와퍼와 제로콜라를 올려두었어요. 어젯밤 검색해 보니 이제는 미국에도 바비스 버거 팰리스가 없더라고요. 영원할 것 같던 그 햄버거의 궁전이 사라지다니. 코로나 때문이었을까요? 코로나가 데려간 것은 선생님만이 아니었나 봐요.
몇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선생님은 한국을 그리워하셨습니까? 오고 싶었지만 오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애초에 이곳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선생님의 태어날 뻔했던 아이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스트로크의 이유는? 간병인과의 관계는요? 간병인은 제 추측처럼 노아의 할머니가 맞습니까? 아니, 아니, 그것보다…… .
선생님에게 저는 무엇이었습니까?
얇고 바스락거리는 햄버거의 포장지를 벗깁니다. 잘 익힌 패티와 양파, 토마토 냄새가 올라오네요.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저는 이것을 아주 천천히 먹을 것입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선생님이 저에게 주신 것들과 제가 드리지 못한 것들을 헤아리면서, 번 사이의 채소와 패티처럼 어울리지 않지만 함께 들어 있는 우리의 추억들을 곱씹으면서. 급하지는 않아요. 아직 온기가 남아 있거든요.
맹 선생님, 아니 심 선생님.
저와 바비 하실까요?
2010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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